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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최근 한국을 방문해 여러 곳에서 강연과 질의응답, 토론을 했던 존 미어샤이머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회의주의자의 입장을 반영한다. 미어샤이머는 국제 정치는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으며 그런 상황에서 국제관계는 힘을 바탕으로 형성된다는 현실주의자 중 한 명이다.
현실주의자는 케네스 월츠(1924~2003) 같은 방어적 현실주의자와 미어샤이머 같은 공격적 현실주의자로 나뉜다. 월츠 같은 방어적 현실주의는 큰 힘을 가진 나라는 세력균형을 중시하기 때문에 복수의 나라가 강대국 자리를 차지하고 서로 세력균형을 이루면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월츠는 이상적인 것이 두 나라 정도의 강대국이 존재하면서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패권을 두고 다투는 대신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협력해서 상호 이익을 취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미어샤이머를 대표로 하는 공격적 현실주의자들은 강대국들이 세력균형 대신 패권을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패권 국가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패권국가의 지위를 다른 나라와 공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미국과 갈등을 빚게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3월 22일 한반도 평화만들기 재단 강연에서 “북한의 김정은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은 북한을 믿지 않으며 중국도 북한에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 핵무기를 폭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실제로 만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며, 만난다고 해도 협상은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모두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외교에는 문외한이라 주고받기를 본질로 하는 외교와 협상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주장했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해 “낙관주의에는 이유가 거의 없으며, 비관주의에는 더욱 많은 이유가 있다”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번 남북과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진다고 해서 당장 돌파구가 생길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반도 평화로 가는 시작의 시작일 뿐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만큼 갈 길이 멀다. 비핵화의 길도 험난할 수밖에 없으며, 한반도 평화협정도 마찬가지다. 없던 신뢰가 갑자기 생기기도 쉽지 않다.
잇단 정상회담 실패로 끝나면 무력 충돌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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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만일 미국이 북한에 무력을 동원한다면 추가 예산 없이 현재의 전력과 비용으로 치를 수 있는 ‘외과수술적인 폭격’이나 ‘코피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북한의 보복, 중국과 러시아의 개입을 유발하고, 확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확전은 태평양 건너의 미국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대신 인구 밀집 지역과 산업 시설이 밀집한 한국과 일본에 결정적인 피해를 줄 가능성이 크다.
지난 20세기의 역사는 북한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같은 도발이 이어지는 위기 상황에서 강대국 지도자들이 두 가지 시도를 했음을 보여준다. 둘 다 극단적인 시도로 비극적인 결과를 유발했다. 1차 세계대전은 외교 대신 성급하게 무력을 택한 실수의 결과로 보는 견해가 적지 않다. 2차 세계대전은 평화를 구걸하다시피하며 단호함 대신 지나친 유화정책을 편 업보였다고 볼 수 있겠다.
잘 알려지다시피 1차 대전은 ‘사라예보 사건’으로 촉발됐다. 1914년 6월 28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권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처가 제국의 새로운 영토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주도 사라예보를 찾았다가 암살을 당한 사건이다. 범인 일당은 범슬라브주의의 영향을 받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오랫동안 오스만 튀르크 영토였던 발칸반도 서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손에 넘어가자 이 지역이 세르비아와 통합되기를 바랐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황위 계승 예정자 암살로 보복한 것이다.
문제는 사라예보 사건 자체보다 사건 이후 유럽 국가들의 대응에 있었다. 6월 28일 사라예보 암살 사건이 터지고 7월 28일 개전이 되기까지 딱 한 달이 걸렸다. 전쟁을 막을 한 달의 시간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유럽은 외교적 협상과 최후통첩, 국내 동원령 발동 등으로 분주했다. 역사적으로 이 시기를 ‘7월 위기’라고 부른다. 유럽 열강은 사라예보 사건 후 개전까지 1개월 간의 시간 동안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는데도 결국 대화와 합의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지도자들이 지루한 외교 대신 무력이라는 한 방의 유혹에 넘어간 셈이다. ‘내가 전력상 우위에 있으니 한두 방이면 화끈하게 끝난다’는 착각이다. 하지만 한두 방으로 끝난 무력 개입은 20세기 이후 역사에서 드물다. 전쟁은 전쟁을 낳기 때문이다. 불씨 한 점이 온 벌판을 붉게 태우는 불바다 천리로 이어지기 일쑤다.
결국 7월 26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고, 그러자 7월 28일 세르비아와 슬라브 동맹국이었던 러시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 뒤 서로 사촌 사이인 러시아 차르와 독일 황제 사이에 긴급 전보가 오갔으나 결국 전쟁을 막지 못했다. 독일은 8월 1일 러시아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으며, 8월 3일에는 일본에, 8월 4일에는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발동했다. 그러자 영국이 호주·캐나다·뉴질랜드와 함께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렇게 연속으로 선전포고가 계속 이어지면서 거대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으로 인류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비극을 당해야 했다.
1차 대전 개전 전 1개월의 외교전 불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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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 이후 국제사회는 전쟁을 회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런 미약한 자세가 오히려 전쟁을 유발했다. ‘뮌헨의 비극’이다. 2차 대전은 1차 대전과는 반대로 단호함 대신 유화정책을 편 결과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1938년 9월 30일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와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는 뮌헨에서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총리와 함께 뮌헨협정에 서명했다. 히틀러는 ‘최후의 영토적 요구’라며 영국과 프랑스를 압박해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계 거주지인 주데텐란트를 합병했다. 당일로 독일 뮌헨에서 비행기를 타고 런던 서부 헤스턴 공항에 도착한 체임벌린 총리는 몰려온 환영인파 앞에서 환이 웃으며 협정문을 흔들어 보였다. 이날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로 돌아온 체임벌린은 이렇게 말했다.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믿습니다.”
이 장면은 BBC방송을 통해 영국 전역에 중계됐다. 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체임벌린은 다시는 영국과 유럽을 전쟁으로 몰고 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굴욕적인 양보와 신생국의 희생을 포함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평화를 지키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최후의 영토적 요구”라는 히틀러의 말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을 것이다. 역사는 이를 ‘유화정책(appeasement)’이라고 부른다. 이 정책에 따라 앞서 1938년 3월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에서 금지한 오스트리아 병합을 강행했을 때도 외교적인 항의만 했을 뿐 행동은 전혀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말만 할 뿐 행동이 따르지 않는 정책(only talk, no action)은 영국의 개입을 두려워하며 조마조마하던 히틀러의 간만 키운 셈이 됐다.
심지어 당시 영국에서 뮌헨협정과 체임벌린 총리는 인기가 높았다. 영국 국민의 대다수는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켰다”고 생각해 체임벌린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했다. 미국 CBS방송의 에드워드 머로는 당시 이렇게 보도했다. “수천 인파가 총리관저로 이어지는 화이트홀 대로에서 뮌헨에서 귀환하는 총리를 맞이하기 위해 도열했다. 몇몇 석간신문은 그가 이번 공로로 총리 재임 중 기사 작위를 받는 영국 역사상 두 번째 인물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어떤 신문은 그가 다음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차 대전의 참혹한 기억이 생생했을 당시, 체임벌린은 약소국을 희생시켜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보려고 유화정책을 폈고 국민은 이를 지지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히틀러의 야욕만 키워 더 큰 전쟁만 초래했을 뿐이다.
윈스턴 처칠과 앤서니 이든을 비롯한 몇몇 의원만 하원에서 영국이 불명예스럽게 행동했다고 협정 체결을 비난했을 뿐이다. 이든은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했을 때 체임벌린이 유화정책을 앞세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이에 반발해 외무장관을 사임했던 인물이다. 처칠은 초지일관 독일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했다. 당시 처칠은 “전체주의 정권에 대한 굴복과 물질 제공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 총리가 지향하는 새로운 국제질서인가”라고 항의했다.
당시 체임벌린은 개인비서에게 “히틀러가 서명한 내용을 지킨다면 좋은 일이다. 만일 그가 협정을 위반한다면 전 세계에 자신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는 아마 세계 여론이 등을 돌릴까봐 차마 약속을 어기지는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여론의 지지와 체임벌린의 믿음에도 ‘우리 시대의 평화’는 얼마 가지 못했다. 히틀러는 잽싸게 주데텐란트를 차지한 데 이어 193이듬해 3월 남은 체코슬로바키아 전역까지 점령해 협정문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세계 여론이 무서워 협정을 깨지 못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냉혹한 침략자였다. 힘을 비축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상대방의 약점을 찾으며 평화를 원하는 척 연기했던 그는 군사력을 충분히 축적하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침략에 나섰다. 힘을 가졌던 체임벌린이 초기에 무력 압박을 포기하는 바람에 오히려 히틀러의 오판과 자만을 부르고 침략 야욕에 불을 지른 셈이 됐다.
체임벌린이 이런 식으로까지 지키려 했던 유화정책은 짧은 유효기간에 비해 대가가 엄청났다. 독일이 1939년 9월엔 폴란드를 침공해 2차 세계대전의 불을 댕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치 독일은 서방세계가 절대 손잡을 수 없다고 믿었던 공산국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동시에 침공해 영토를 나눴다. 체임벌린은 오판의 대가로 그토록 하기 싫어하던 전쟁을 자기 손으로 선포해야만 했다. 평화는 군사력과 함께 전쟁도 불사한다는 의지가 바탕이 돼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의지 없이 협상으로만 평화를 얻으려다 오히려 더 큰 불행을 자초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 희생은 고스란히 영국 국민이 짊어져야 했다. 체임벌린의 리더십은 유화정책과 뮌헨협정이라는 두 단어로 기억된다. 이 두 단어는 국제정치에서 실패한 리더십의 상징으로 남았으며 체임벌린을 역사의 반면교사로 만들었다.
결국 체임벌린은 시간을 기다리며 발톱을 숨기고 말로만 평화를 떠들던 히틀러의 기만평화전술에 속아 처절하게 당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적과의 협상에선 힘을 보여줘야지 평화에 대한 의지만 보여줘선 나약한 것으로 얕잡아 보일 수 있을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는 양보를 통해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환상인지 몰랐던 것이다. 심지어 영국민조차 실상을 제대로 몰랐다. 히틀러가 뮌헨협정을 깨고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점령하자 국왕 조지 6세는 체임벌린에게 편지를 보내 “평화를 위한 용기있는 행동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위로하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지도자의 리더십 실패는 국민과 군주의 판단력까지 어둡게 한 것이다.
영국민과 국제사회는 2차 대전의 엄청난 비극을 겪은 뒤에야 실상을 깨달았다. 체임벌린의 리더십 실패로 인해 얻어진 ‘뮌헨의 교훈(lesson of Munich)’은 전후 국제정치 용어가 됐다. 국제정치학자 스티브 챈은 “유화정책은 방어자의 싸우고자 하는 의지를 떨어뜨리며 공격자의 야욕을 더욱 키우게 된다”고 정리했다. 적의 도발을 반드시 분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도발이 오히려 더욱 거세진다는 교훈이다.
냉전시대 서방세계는 이 교훈을 금과옥조로 삼았다. 194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자 서방진영이 신속하게 공동방어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결성해 대응한 것도 이 교훈을 의식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후 소련은 약소국을 한나라씩 야금야금 먹어가는 살라미 전술(salami technique)을 더 이상 써먹을 수 없게 됐다. 소련에 양보하거나 도발을 방관해 ‘제2의 체임벌린’으로 비난받고 싶어하는 서방 정치인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적대국가에 둘러싸인 이스라엘도 이를 적극 활용한다. 적에게 유약하게 보이는 순간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며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적에게 유약하게 보이는 순간 안보 위태로워져
체임벌린의 리더십 실패는 국제사회에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동맹도, 우방국을 존중하는 책임 있는 강대국도 없다’는 생생한 교훈도 함께 남겼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프랑스의 동맹국이었으나 독일에 유린당하면서 군사적으로는 물론 외교적으로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영국은 이 나라를 탄생시킨 베르사유 조약을 이끈 강대국으로서 도덕적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이를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한 나라와 그 국민의 운명을 협정문 한 장과 맞바꿨다. 그래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선 뮌헨회담을 ‘뮌헨배신(Munich betrayal)’이라고 부른다. 체임벌린은 뮌헨회담 직후 이 나라 지도자 에두아르트 베네스가 항의하자 싸늘하게 대답했다. “영국은 주 데텐란트 건으로 전쟁을 하고 싶지는 않소.”
결국 한반도의 평화체제는 사라예보와 뮌헨의 교훈을 동시에 살펴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순진한 평화주의로도, 한 방의 유혹으로도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 현명한 자만이 평화와 번영을 지킬 수 있다. 전쟁은 물론 기만술에 당하는 것도 문제다. 둘 다 한국민이 지금까지 이룬 경제적 성과도, 민주화에도 심각한 상처를 안길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