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사람 2018년 창간호_Zoom in / 김왕노_신작시
다육식물 외 2편
김왕노
수많은 균열이 가고 모래로 무너져 내리는 갈증의 땅
갈수기의 나날이라도 삶은 어떤 식으로든 빛나며 싱싱해야 한다.
물을 잘 주지 않아도 키우기 쉽다는 선입견 가득한 세상
물주는 것조차 잊어버린 세상에서
아차, 죽였을 거라고 생각하는 끝
풀풀 일어나는 먼지 속에 기적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첫사랑처럼 단 한 번 뿌려준 물을 애지중지하며
생명은 불길처럼 고개를 쳐들고 갈증보다 더 활활 타올라야 한다.
단 한번 나를 사랑한다는 말 메마른 내 가슴에 뿌려주고 당신은 떠났지만
그 한마디 말 한 방울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나는 생존본능이 강한 다육식물
현실이 사막이어도 몇 달간 비 내리지 않는 가뭄이어도
세상 모서리에서 아직도 내가 살아있음을 잊지 말아다오
당신의 사랑이라 사람이라 내 스스로 선포해버린 것이
내 생의 실수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사막보다 더한 내 갈증 위로 발자국 남기며
언젠가 내게 올 당신을 기다려 오늘도 견딜 수 없는 갈증 속에서
갈증보다 더 무성한 그리움을 키우며 산다.
한 방울 물도 없이 대책도 없이
사막여우 울음처럼 외롭게 들리는 음악 속에서
극한의 상황을 이겨내고 있는 내 사랑의 끝없는 인내
시들지 않고 기다리는 안간힘의 극치 끝에
당신이 오면 꽃은 본능처럼 붉게 피어나기도 하리라.
세상의 모든 다육식물, 세상의 모든 다육식물 같은 사랑
잊어지지 않으려 죽지 않으려 사랑을 얻으려고
갈증이 깊을수록 그리움의 분열을 끝없이 거듭해간다.
자고나면 한 겹 두 겹 먼지처럼 갈증만 더 쌓여가는 사막도시
나는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는 푸른 다육식물
이념서적에 대한 역학조사
이념서적을 잃던 불온한 밤을 추억하게 함
뜻하지 않는 병이 나돌거나
뜻하지 않는 사회현상이 나타났을 때 역학조사를 한다.
난 나름대로 사라진 이념에 대한 역학조사를 하련다.
이념서적을 읽으면 생이 바뀔 거라는 말이 한 때는 역병처럼 돌았다.
조금만 불온한 생각만 하면 쉽게 손에 닿던 이념서적
불순분자가 읽는다 해서 방문을 담요로 가리고 읽던 책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들려도 황급히 방안의 불을 끄고
개 짖는 소리와 인기척이 사라지면 다시 일어나 읽던 책
읽을 때마다 마음의 눈을 뜨게 하던 서적
민중연극론, 노동현실과 노동운동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一광주 5월 민중항쟁 의 기록
왜 80 이 20 에게 지배당하는가. 지상에 숟가락 하나, 소금꽃나무
대한민국,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오리역사이야기,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나쁜 사마리아인들, 김남주 평전
우리들의 덫, 꽃 속에 피가 흐른다.
정복은 계속된다.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21세기 철학이야기, 북한의 우리식 문화
통일 우리민족의 마지막 블루오션
위 책은 북한찬양도서, 반정부 반미도서, 반자본주의 도서, 혹 이념서적
지금도 책방 어느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원한다면 서가 깊은 곳에서 꺼내어 빌려주기도 할 것이다.
나는 먼저 읽어야 한다. 라벨이 낡았어도 곰팡이 냄새가 나더라도
어떤 사심도 없이, 피가 도는 꽃잎 같은 얼굴로, 때로는 수정 같은 얼굴로
어떤 편향도 없이, 오독도 없이
한 권의 서적이 만들어지기 위해 작가가 천권의 책을 읽기도 하므로
단 한 줄의 글을 위해 목숨을 내놓거나 사선을 넘기도 하므로
단 한 줄의 글에 목이 메어 울기도 하므로
책 한 폐이지가 대지 같고 초원 같아 그 곳에서 짐승처럼 울거나
방목된 가축처럼 한가로이 거닐 수도 있으므로
몇 가닥 가능성을 열어놓고 나 다시 시대적 역순이나
목차의 역순으로 읽어보든지 불온이라 이름 불리어지게 된 내력을 찾아
검은 까마귀 떼 황망히 날고
효수된 민중의 꿈이 썩어 처져서 내리는 참혹까지 가보아야 한다.
자본의 수레바퀴가 무참히 지나간 곳에
흔적으로 남은 피딱지를 가난을 살붙이인 듯 오래 살펴보아야 한다.
아직도 인문사회과학의 숨결을 이어가는 풀무질로 가거나 녹두서적으로 가
손에 잡히는 대로 몇 권 뽑아와
독서삼매경으로 또는 정독으로 다독으로
가볍게 스쳐가는 는개 내리는 아침 같더라도
책 페이지마다 철심 같이 박힌 철자를 스쳐가야 한다.
전태일 전 죽을 먹더라도
껍데기를 벗고서 는 국가보안법이든 아니든 제도권 교육이든 아니든
바른 가치관을 가지는 잣대 같은 것, 회초리 같은 것
빨갱이 사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더 깊숙한 곳의 실상을 보는 것
나라를 위할 때는 나라의 행복도 알아야 하고 나라의 불행도 알아야 한다.
생각이 다르다고 하여 다른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닌 것이 아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다른 생각이라 해서 나쁜 생각이 아니다.
나쁠 수도 있고 전혀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생각의 문장이 생명의 피가 도는 문장일 수 있다.
역학조사는 읽는 첫 페이지에서 시작해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또 다른 책의 첫 페이지를 열고 닫는 연결고리로 계속된다.
읽는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고 안다는 것은 힘이 된다는 것
이념서적을 역학 조사해 간다는 것은 강철 같은 이념의 날을 세우고
어떤 비바람에도 굽히지 않는 이념의 만장을 높이 휘날린다는 것
이념에 물들어 장마 때 폐가의 벽지처럼 축축 처져 내린다는 것
난 이념에 취하고 새로운 이념위에 세워진 나라를 꿈꾼다.
한 때 이념이 우리의 일용할 양식 같은 날이 있었다.
내가 세상에 던져진 한 알 밀알을 꿈꾸게 했다.
이 대목쯤에 이르면 어느 정도 이념서적에 대한 역학조사가 마무리된다.
이념 없이 세워진 나라나 깃발은 사랑마저 사상누각일 수밖에 없다.
하여 이념은 때로는 죽음으로 지켜진다.
여기서 짧았지만 이념서적에 대한 역학조사는 끝
격렬비열도에 사랑이 비로 내리고
사랑이 식어버린 사람과 함께 늦더라도 격렬비열도에 가자
격렬과 비열 사이에는 사랑이 있다며 누가 노래하고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음악 같은 눈이 내린다고도 노래했으므로
나는 격렬과 열도 사이엔 사랑의 비가 내린다고 노래한다.
격렬비열도에 가면 사랑의 비가 내리고
내 사랑이 격렬해지므로 격렬비열도에 가자는 것이다.
격렬비열도에 오늘도 사랑의 비가 내리고
산다고 바빠 장미 한 송이 내민 적 없는 손으로
식어버린 사랑의 손을 잡고 사랑이 비로내리는 격렬비열도에 가자.
격렬비열도의 군함새와 가마우지가 뜨거운 울음으로
바람을 가르며 잊어버린 사랑의 말과 사랑의 몸짓을 가르쳐준다.
무엇에도 오염되지 않는 격렬비열도의 순수한 사랑을 배우러
사랑이 식어버린 사람아 격렬비열도에 가자
비가 내릴수록 우리 사랑 더 격렬해지는 그곳으로
격렬비열도에 오늘도 사랑의 비가 내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