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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섶을 헤치고 가던 걸음을 멈춘다.
토끼녀석이 발앞에 앉아 있다.
나 잠시 생각할 게 있었노라고, 그런 표정이다.
머리 위론 작은 새들이 날고 이따끔 메뚜기가 후두두 튀어오른다.
잠자리화가 장영일 씨의 전시장이다.
작품을 빛내는 조명도 화려한 꽃바구니도 없다.
무성한 잡풀을 어디 한포기 잘라내지 않고 그대로 대형 천막을 둘렀을 뿐인 그의 전시장은 곡성군 석곡면 대황강변에 있다.
지금 잠자리축제가 열리고 있는 바로 그곳이다.
정말! 잠자리가 많기도 하다.
잠자리는 강둑 위에도 있고 강물 위에도 있고 아직 파란잎으로 출렁이는 코스모스 위에도 있다.
그리고 그의 그림 속에 날아다닌다.
전시장 한켠에서 줄지어 내민 팔에 예방주사 대신 색색의 잠자리를 그려받은 아이들이 그의 그림 앞을 깡총 뛰어지나간다.
이 강변 풍경에 내걸기에 이보다 잘 어울릴 만한 그림은 없을 것이다.
강물 속으로 흰구름 흐르는 여름강가에서 열리는 이 전시회는 그것 자체로 또 하나의 커다란 그림이다.
그 강변의 '열린 갤러리'에서 잠자리화가 장영일씨를 만났다.
"아침에 소나기가 지나가는 바람에 빙둘러 의자에 앉혀둔 그림들을 거둬들이느라 한바탕 소동을 벌였어요."
아무래도 그림이 젖은 듯 싶다 한다.
지나가는 이에겐 그저 낭만 가득한 전시회지만 이 열린 공간은 화가에게는 이런저런 예기치 않은 어려움의 계속일 터이다.
그럴 줄 알면서도 소중한 그림들을 들고 나온 건?
답은 간단하다. 잠자리축제니까.
"잠자리를 그리노라면 어릴 적 티없던 시절의 꿈을 다시 만나는 것 같습니다. "
그것이 그가 30년을 내리 잠자리를 그려 온 이유다.
鄕(1972년 作)
세월 따라 그가 그린 잠자리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어둡고 고요한 하늘 아래 조금은 무거워 뵈는 날개들에서 화사한 세상 위 가벼운 날갯짓으로 밝아지고 있다.
"그때는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웠으니까요."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그 얇고 투명한 잠자리 날개에 생의 무게가 다 얹혀 있는 셈이다.
그의 그림 속에 잠자리와 함께 등장하는 달과 꽃과 무지개, 그리고 아이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그림 속 비스듬한 아이들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화면 위에 떠오른 잠자리에게서 그만 잊고 살았던 그리운 추억들과 조우하게 된다.
<장영일 화백의 `新실크로드기행'>문명 발자취 서린 실크로드
그 미지의 땅을 향해
동서양 문물·문화·종교 실어나른 통로 드라마 촬영지 고비사막,
타클라마칸 등 황량한 모래언덕 인생길 보는 듯…
<1>시안(西岸)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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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조그마한 길을 따라 나서기 시작했다. 그 작은 길은 숱하게 오간 사람들에 의해 차츰 먼 곳으로의 여행도 가능해지게 되었다. 많은 무리의 대상으로 구성된 그들은 신비롭고 귀한 물건들을 부지런히 팔거나 물물교환을 이뤄내기도 했다. 바로 그들이 개척한 이 여행길을 이른바 `실크로드', 즉 비단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대상들이 비단을 실어나르며 장사를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길을 따라 교역이나 상거래같은 이질문화간 교류가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도시가 있는가 하면 새롭게 받아들여지는 종교와 문화는 그들의 끊임없는 길에 대한 도전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시안(西安)에서부터 시작되어 험준한 죽음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야 당도하는 서역길. 이 길을 향한 고행이 선지자들에 의해 이뤄졌으니 마치 험한 인생길에 다름아니다.
사실 먼길이지만 오늘날에는 철도나 항공편 등 급속히 발달된 문명의 이기가 여행자들을 쉽게 이곳으로 안내해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선지 나그네들은 오늘도 끊임없이 한발짝 한발짝 걸음을 옮겨 도달하는 그 먼길을 택하고 있다. 자신과 싸워 이겨내려는 여행자들의 의지와 인내가 험한 길을 선택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회사를 정년퇴직하고 이 길을 따라 나서 4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무작정 걸어 종주한 작가도 있으며, 당나라의 현장법사가 지나간 길을 답사한 서역기행기가 오늘날 현대를 살고있는 우리들에게 아직도 기록되고 있으니 예전부터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라는 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인가 보다.
막연히 지도를 꺼내놓고 그 넓은 중국땅에 시선을 던져본다. 노랗게 채색된 그 안의 고비사막을 상상해 보면서 최근 국내 드라마로선 최초로 그곳에서 촬영됐다는 `해신'을 떠올린다.
소설가 최인호의 동명 작품을 원작삼은 이 드라마는 백제계 신라인인 `바다의 왕' 장보고의 이야기다. 전남 완도 청해진을 통치했으며 그에 의해 신라의 많은 귀중 물품들이 멀리 서역까지 닿았다는 이야기는 전라도에 살고있는 우리들에게 좋은 홍보가 되어 요즘 촬영지인 완도의 야외세트장을 찾는 관광객의 숫자가 늘고 있으며 드라마 역시 시청률에서 수위를 달리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또 고비사막을 배경삼은 웅장한 전투신들을 예고편에서 보여주는데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쓰여진 한편의 드라마가 갖는 홍보효과를 우리로서는 충분히 누리게 된 셈이다.
돈황, 실크로드, 모래언덕과 황량한 사막에서 큰 눈을 치켜뜨고 울부짖는 낙타, 간간이 박혀있는 가시투성이의 풀●. 배가 고픈 낙타는 먼길을 가기 위해 피를 토하며 그것을 먹었다고 한다.
짙은 코발트빛 밤하늘에 촘촘히 박혀있는 별과 길을 안내해주는 북두칠성●.
나의 떠남은 언제나 첫차를 타면서 이뤄진다. 새벽의 여명을 보기위한 단순한 이유인데 예술가는 자신을 알기위해 때로는 수만리의 여행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한때 몸이 불편했던 상태에서 나는 우리나라 제주도에 표류한 네달란드 선원 하멜 일행이 전라도에 억류되었다 여수에서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했던 옛 바닷길을 범선으로 그대로 답사하며 글과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먼 길을 떠날 때마다 나는 정들었던 것들과 간단한 이별을 나눈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안녕∼'
빈방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썰렁한 냉기를 지닌 채 그렇게 닫혀있겠지.
대합실의 투명한 유리창 안으로 밝은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다. 한편에 앉아있던 칠십대쯤 돼 보이는 노부부가 부지런히 여행용 가방을 챙겨들고 자신들의 행선지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나와 같은 노선이다. 은연중 그들의 건강함에 반가움을 표하고 싶었다.
“실례지만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시안(西安)이에요, 중국 진시황 기념관도 보러 갈거예요.”
비행기가 인천공항의 새벽 안개를 뚫고 실크로드의 첫 출발지를 향해 힘차게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참, 계절의 나침반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이따금씩 오락가락 빗줄기 속에서도 그렇게 무더위가 쥐어짜더니만 어느새 새벽녘엔 선득하니 말이다. 하긴 입추에다 말복을 지나 처서(處暑)니 그럴 법도 하다. 그러고 보니 잠자리 철이다. 문득 고향집이 떠오른다. 박 넝쿨이 밤이슬에 꽃을 벙글기 위해 열심히 지붕으로 타오르는 사이 소담스러운 댑싸리 마당가 바지랑대 끝에선 쪽빛 하늘이 열리고, 그 중천에 군무(群舞)하는 고추잠자리 떼, 그 붉음을 시새워 온통 약이 오르는 고추밭….
고향은 누구에게나 순정한 그리움이다. 현대인, 특히 잿빛 속 악다구니에 갇혀 하늘 한번 제대로 우러르지 못하는 도시인들에겐 더욱 그렇다. 그래서 화가 장영일(張榮一·54)은 우리들에게 있어 구원투수다. 30년 넘게 '鄕'이란 이름만의 그림을 그리면서 고향 얘기를 들려주니까 말이다. 무지개인지 모를 원색의 세계에 달·나무·초가·잠자리·아이 등을 고즈넉이 등장시켜 우리네 가슴을 휘저어 놓는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때묻지 않은 영성이 있어요. 그게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그걸 달리 말하면 고향이죠. 그런데 삶에 찌들고, 문명에 묻혀 그만 탁하게 되고 끝내 자신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고향을 일깨워주기 위한 작업이라고나 할까요."
그가 한결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이유이자 추구하는 작품세계다. 그가 지금까지 그린 그림은 줄잡아 2천5백여점. 한데 이들 작품엔 모두 잠자리가 등장한다. 보는 이들을 고향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작가의 분신이자 메신저이기 때문이다. 고추잠자리·된장잠자리·깃동잠자리·밀잠자리·나비잠자리·진주잠자리·대모잠자리·꼬마잠자리·장수잠자리·왕잠자리·별박이잠자리·어리잠자리·산잠자리·언저리잠자리·물잠자리·실잠자리…. 그래서 그는 '잠자리 화가'로 통한다. 1990년대 말부터 친구가 붙여줘 즐겨 쓰는 아호도 바로 '일령(一:한 마리 잠자리)'이다. 어떤 시인은 그를 일러 아예 '꿈속을 날아다니는 잠자리'라고 부를 정도다.
"고향을 띄우는 이미지 메이커로서 잠자리만한 게 어디 있습니까. 마을은 물론 산이건 물가건 흔하디 흔하죠. 게다가 물 속에서 수채(잠자리 유충)로 인고의 세월을 보낸 뒤 우화등천(羽化登天)하는 생활모습 또한 교훈적이면서도 일품이 아닙니까."
그가 잠자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1970년 광주 조선대 미대에 입학, 본격적인 그림공부를 하면서다. 교수 부부의 3대 독자로 남부러울 것 없이 생활해오던 그가 고교 졸업 직후 공예미술을 가르치던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산과 들을 헤매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잠자리에 빠져든 것.
"아무데나 주저앉아 어머니를 부르면 어디선가 잠자리가 날아와 마치 어머니의 대답을 전하기라도 하듯이 날갯짓을 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잠자리는 그리움을 의탁하는 친구가 됐죠."
그의 그림이 그리움의 표현이라면, 그림에서 고향은 어머니를 기다릴 수 있는 꿈의 안식처다. 그래서 그는 자신(소년)과 친구(잠자리)를 수도 없이 그렸다. 자신은 뺄지라도 친구는 늘 모셔왔다. 그리고 77년 첫 개인전을 통해 이들을 선보였다. 대학 졸업 후 목포에서 미술교사를 시작한 해 일이다. 80년 결혼과 더불어 광주로 근무지를 옮긴 뒤에도 작품활동과 더불어 잠자리에 대한 연구까지 곁들였다. 제자들과 함께 잠자리의 종류와 생태 등을 연구하느라 집안이 온통 잠자리 표본으로 넘쳐날 정도였다. 로트렉(Lautrec)에 관한 연구로 석사가 된 것도 이 무렵. 그러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지인들이 그의 유럽 방랑을 안 것은 86년 호남대 미술과에 출강하면서였다. 공부를 위해 프랑스·독일 등을 전전하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터를 잡고 두 차례나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가 국내외 화단으로부터 크게 주목받은 건 90년 국내 화가론 처음으로 유화의 본고장인 네덜란드에 초대돼 1천호짜리 대작(화제는 물론 '鄕'이고 어김없이 잠자리가 그려졌다)을 완성하면서였다. 제작 도중 쓰러져 폐암선고(나중에 오진으로 판명)를 받는 등 우여곡절 끝에 꼬박 2년이 걸려 완성한 이 작품의 제막식엔 세계적인 음악그룹 '코리아나'가 찾아와 축하공연을 해주기도 했다.
그는 요즘도 틈만 나면 잠자리 채집여행을 한다. 스케치를 통해서다. 얼마 전엔 단돈 3만원을 들고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스케치북에 담아온 잠자리는 주로 밤을 도와 '鄕'에 날려진다.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려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폐암선고 당시 몰래 병원 옥상에 올라가 스케치를 하다 의사에게 들켜 혼이 났을 정도로 욕심쟁이다. 이러다 보니 술은 한 방울도 못하는 그이지만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을 터. 급기야 지난 6월 중순 서울 공평아트홀 전시회 도중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초기 응급치료가 잘 됐지만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열린 '하멜표류 3백50주년 기념 초대전'(6월 21∼27일)은 주인 없이 치러질 수밖에 없었다. 현재 통원 치료하며 몸을 추스르고 있지만 내년 미국 초대전을 앞두고 근심이 이만저만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건강 문제에 앞서 공해로 인해 잠자리 수가 점점 줄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가슴 아파한다.
"잠자리가 못사는 세상에 인간이라고 해서 살 수도 없겠지만 설사 살아 있다 해도 지옥이나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일본과 비교해도 너무 한 것 같아요. 그네들은 진작부터 잠자리 생태계 보전에 나서 곳곳에 박물관을 세우고 축제를 벌이고 있어요. 그들이 후지산만큼이나 잠자리를 좋아하게 된 것도 다 그만한 노력의 결과 아니겠어요."
'잠자리와 환경을 생각하는 모임'의 회원이기도 한 그는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평생 소원 중의 하나인 잠자리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겠다며 주먹을 쥐어 보인다. 지천명(知天命)의 소년, 그는 앉으나 서나 '잠자리 동동, 파리 동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