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언(序言)
제주에 온지 3년이 다 돼간다. 내가 제주에 와서 들은 재미있는 용어 중 ‘괸당’이라는 것이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검색해보니 “서로 사랑하는 관계 즉 혈족, 친족을 의미하는 단어임”(오픈사전)이라고 되어 있다. 제주도 방언이 아니라 표준어라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제주 와서 처음 들어본 단어이다.
제주에는 ‘괸당문화’라는 것이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이 단어에 대하여는 아직 명쾌한 정의가 없는 듯하다. 제주에 온지 비록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듣고 경험한 것을 종합하여 감히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자면 이렇다. '친인척, 그리고 오랜 이웃 간에 서로 믿고 의지하는 문화'
그런데 괸당문화는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나는 제주에 온 후 괸당문화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육지에는 없는 이러한 문화가 제주에 있을까. 제주 사람들이 친인척이나 오랜 이웃 간에 특별히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처음에는, 아무래도 육지보다는 험한 자연과 싸우면서 살아가려면 서로 돕고 의지하는 것이 절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단순한 추측을 했었다. 그런데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다가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하여 관심이 좀 많은 편이다. 제주도의 역사를 가만히 되짚어보면 괸당문화의 생성 경위에 대하여 좀 이해가 되는 듯하다. 내가 괸당문화와 관련하여 주목한 제주도의 역사는 고려말기 ‘삼별초의 항쟁’과 우리나라 근대사의 ‘4.3사건’이다.
2. 삼별초의 제주항쟁
삼별초는 원래 고려말기 무신 정권이었던 최씨 정권의 사병이었다. 그러나 무신 정권이 무너진 후 원나라(몽골)에 굴복하여 강화를 맺은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고려가 기울어가던 원종 11년(1270년) 때의 일이다.
강화도에서 싸우던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이 공격해오자 전남 진도로 거점을 옮겨서 계속 싸웠으나 지도자인 배중손이 전사하고 진도가 함락되자 새로운 지도자 김통정이 나서서 잔여세력을 규합하여 제주도로 거점을 옮겼다.
그런데 제주에는 이전부터 이미 삼별초군이 들어와 있었다. 삼별초가 진도에 거점을 정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문경을 제주로 보냈던 것인데, 전부터 삼별초는 제주를 항쟁의 근거지로 이미 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문경이 제주에 오기 전에 이러한 정보를 미리 입수한 것은 고려 조정이었다.
고려 조정은 삼별초의 제주 진입을 방비하고자 1천여 병력을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는데, 제주 명월포에 상륙한 이문경은 관군과의 ‘송담천 전투’에서 격전 끝에 승리하였다. 이로서 제주도는 삼별초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고 삼별초의 제주에서의 대몽항전이 시작된 것이다.
제주 사람들은 혼란스러웠다. 반란군인 삼별초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정부군의 편에 설 것인가. 처음에는 일단 경계의 자세로 삼별초와 정부군의 사이에서 관망하거나 중립의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삼별초 군에 협조하거나 호의적 행동을 취하는 사람들이 불어갔다.
제주에서 삼별초가 근거를 마련하고 결사항전의 태세를 갖추자 고려 조정과 원나라는 사신이나 삼별초 지휘부의 친척 등을 보내어 회유를 시도하였지만 삼별초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에 김방경이 지휘하는 여몽연합군 약 1만 2천명을 제주도로 보내어 삼별초를 공격하게 했다.
삼별초는 제주 애월을 거점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최후의 요새이던 항파두리 성이 함락되고 진압당하고 만다. 김통정은 스스로 자기의 아내와 자식들을 처결한 후 부하 70여명과 함께 한라산으로 들어가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해진다. 이로서 삼별초 항쟁은 4년 만에 끝을 맺는다.
삼별초가 비록 최씨 정권의 사병 출신으로 조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사건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는 국가를 상대로 일으킨 여느 반란사건과는 달리 대륙의 거대한 외세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죽어간 고려인의 호연지기와 자주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한편, 삼별초가 진압된 후 몽골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운영하는 등 이후 약 100여년간 제주도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실상의 자주 통치권을 외세에 빼앗긴 제주 사람들이 받은 고통과 자존감의 상실은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3. 제주 4.3사건
제주 4.3사건은 광복 직후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적으로 혼란했던 시기에 일어난 불행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시각은 아직도 차이가 없지 않아 보인다.
먼저 4.3사건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두산백과’는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각 정의하고 있다.
4.3사건은 애초 남로당이 일으켰고 이후에도 남로당 무장대가 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 치더라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부와 서북청년단 등의 횡포는 민심을 자극하였을 뿐 아니라 특히 1948년 11월 계엄령 선포 이후에는 이른바 정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대부분을 불사르고 주민을 집단 학살하는가 하면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재판도 없이 처단하기도 했다.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으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또다시 집단으로 학살되었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9월, 한라산 금족지역(禁足地域)이 전면 개방되면서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린다.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이 사건의 인명피해는 2만 5천 내지 3만 명으로 추정되고 중산간 마을 95%이상이 불타 없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2000년 8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여 발족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는 진상조사 결과 제주4·3사건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4. 결어(結語)
삼별초의 제주항쟁과 제주 4.3사건은 공통점이 있다. 제주도는 한국의 섬이다. 한국의 섬 제주도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이다. 삼국시대에 탐라국이 생성한 이후 지금까지 제주는 한 번도 남을 침략해 본 적이 없다.
제주도 사람들은 육지에서 온 사람들을 낮추어 부를 때 ‘육지 것’이라고 부른다. 삼별초군도 육지에서 왔고 삼별초군을 진압한 정부군(여몽연합군)도 육지에서 왔다. 그 과정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고 죽어간 것은 제주 사람들이었다. 의분하는 삼별초를 도와서 함께 싸웠지만 남는 것은 반란군의 협조자라는 오명 뿐이었다.
제주 4.3사건 역시 육지에서 온 ‘남로당 무장대’가 일으킨 소요사태였고 이를 진압한 ‘토벌대’도 육지에서 온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 희생당한 것은 제주도민들이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삼촌이 희생당한 마당에 사상과 이념을 따져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제주 사람들이 육지인들을 ‘육지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람을 단순히 비하하는 호칭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제주 사람들은 사귄지 얼마 되지 않은(검증되지 않은) 육지 사람들에게 마음을 잘 열지도, 얼른 정을 주지도 않는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들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을 것도 없다.
제주 사람들은 정말 무뚝뚝하다. 나는 ‘육지’에서 가장 무뚝뚝하다고 정평 난 경상도(대구) 출신이다. 그런데 제주 사람들은 이보다 한 술 더 뜬다. 그런데 제주 사람들이 계속 무뚝뚝한 것은 아니다. 일정한 ‘검증기간’을 거치고 나면 정을 주기 시작한다. 있는 것 다 내준다. 순박하고 단순하다.
그래서 나는 ‘괸당문화’를 “친인척, 그리고 오랜 이웃 간에 서로 믿고 의지하는 문화”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오랜 이웃’이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검증된 이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괸당문화를 달리 표현하면, “검증되지 않는 사람에게 정을 주지 않는 문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