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역사바로세우기—제4탄]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만들기
백의사 염응택의 시나리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월간 민족21”은 정병준의 논문을 2001년 10월호에 게재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인용한다.
《염동진은 누구인가?
본명은 염응택(廉應澤, 閻應澤). 염동진은 이명이다. 본적은 평남 중화군 중화면 초현리 82번지. 주소는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문산리 54번지(선린상업학교 졸업 후 임시 주소)로 돼 있다. 1909년 2월14일생. 염도열(廉道悅)의 3남이다.
학력은 중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연도 미상)하고 1926년 4월1일 선린상업학교 본과 1학년에 입학하여 1931년 3월에 졸업한 후 파주에 머물다 상해로 건너갔다. 1932년 2월 이청천 계열의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해 같은 해 4월9일 졸업했다.
낙양군관학교 졸업 후 남경에 체류했는데 일제 자료에 따르면 군관학교 졸업 후 “불령단체”에 가담한 혐의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수배를 받았다. 1936년 11월 시점에서도 수배 중인 것으로 확인된다. 백의사 출신자들의 증언(백관옥, 백근옥, 최의호, 조재국, 선우길영)에 따르면, 염동진은 “요춘택이란 중국식 이름으로 변성명하고 중국군 남경 헌병사령부 우편물 검사처에서 일했다. 그 후 남의사(藍衣社)에 들어갔고, 1937년 중일전쟁 후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에서 일하다가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해방 직전 평양에서 박고봉 등과 함께 대동단 조직. 1945년 9월3일 백관옥을 통한 현준혁 암살에 관여한 후 월남했다. 1945년 11~12월경에 백의사를 조직. 사령이 되었다. 1947년 7월 여운형을 암살하는데 사용한 45구경 권총을 암살범들에게 제공하기도 했으며 마침내 1949년 6월 김구 암살에도 개입한다. 6•25 전쟁 시 인민군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북로군정서가 그 명칭 사용 시기는 1919년 2월 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된 이후 서일 장군은 김좌진이 서명하였음을 알고 김좌진을 《대한정의단》으로 초빙하여 무장독립운동에 뜻을 같이하기로 한 그 이후인 1919년 12월입니다.
서일은 무오독립선언을 통하여 대종교 활동을 본격적인 무장혁명 투쟁으로 전환시키기 시작하였으며, 또 선언서 발표 의식을 통하여 김좌진은 서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일을 찾아 덕원리로 온 김좌진은 너무도 감격하여 인사를 올렸습니다.
《대한정의단》은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각지에서 무장력량을 모았는데 결사대원 1037명이 명부에 등록하였다. 대한정의단은 5개 분단 70개 지단으로서 온 동북에 널려 있게 되었다.
1919년 8월 《대한정의단》은 그 산하에 《대한군정회》란 독립군무장단체를 조직하였다.
[북간도에서 서일(徐一) 등의 대종교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광단(重光團)이 3·1운동 이후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군정회(大韓軍政署, 약칭 군정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약칭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임시정부로부터 대한군정서로 인준받았다.
창립 당시의 주요 인물은 서일·현천묵(玄天默)·계화(桂和)·이장녕(李章寧) 등으로, 이들은 무장독립운동을 위해 신민회(新民會)·광복회(光復會) 계열의 김좌진(金佐鎭)을 초빙하여 독립군의 조직과 훈련을 담당하게 하였다.
1919년 10월 대종교와 신민회 주도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과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가 통합되어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편되었다. 그해 12월 상해 임시정부는 명칭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변경할 것을 조건으로 승낙하였다. 이때부터 ‘대한군정서’가 공식 명칭이 되었다. 한편, 상해 임시정부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구분해 대한군정서에 대해서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는 명칭을 애용하였다.
북로군정서 개편 당시의 임원은 총재부 총재 서일, 군사부 사령관 김좌진, 참모장 이장녕, 사단장 김규식(金奎植), 여단장 최해(崔海), 연대장 정훈(鄭勳), 연성대장(硏成隊長) OOO, 경리 계화, 길림분서 고문 윤복영(尹復榮), 군기감독 양현(梁玄) 등이었다.
군정서는 근거지를 왕청현(汪淸縣)의 서대파십리평(西大坡十里坪) 일대의 약 30리에 걸친 삼림 지대에 두고 8동의 병영을 지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립하였다. 신흥무관학교에 도움을 요청하여 소장에 김좌진 이하 교관 이범석,이장녕·김규식· 김홍국(金洪國)·최상운(崔尙雲)·오상세(吳祥世) 등 다수의 장교와 각종 교재를 공급받고, 관할 지역내 주민들과 국내로부터 오는 청년들을 뽑아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가져옴)]
따라서 북로군정서라는 명칭은 1919년 12월부터 사용되었다.
1919년이면 백의사 염응택은 10살이다. 1909년생인 10살짜리 염응택이가 북로군정서 중대장이었다는 것은 삼척동자에게 물어도 거짓말이라는 것을 금방 안다. 여기서 이영신의 현대사 발굴 “비밀결사 백의사” 208쪽부터 210쪽까지 인용한다.
김두한으로부터 공산주의 옹호론을 들은 염응택은 너무나 기가 막혀 당장은 할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김두한을 노려보고 있다가 다시 호통을 쳤다.
“이놈! 세상에 네놈처럼 불효막심하고 우둔한 놈은 처음보겠다.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자가 공산주의자 놈이었거늘, 네 이놈! 아무리 막돼먹었기로서니 공산주의자들의 본색이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원수놈들의 편에 서서 앞잡이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뭐라구요?”
김두한은 혼비백산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누구한테 암살을 당했다는 얘기는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지만 그 암살자가 공산주의자였다니! 그게 사실일까?’
김두한은 염응택의 표정에서 진실을 가려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날카롭게 쏘아 보며 물었다.
“여보슈. 우리 아버지를 공산주의자가 암살했다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안단 말이오?”
염응택이 대답하기 전에 오동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김 군. 자네 이 어른이 뉘신 줄 아나? 이 분은 바로 김좌진 장군이 이끌던 북로군정서 독립군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하시던 염동진 선생이시네.”
“아버지 밑에서 중대장을?”
김두한은 거듭 놀랐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제가 하는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은 무조건 옳은 것으로 믿어 오던 아집이 일시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조급하게 물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염응택이 다소 누그러진 표정이 되어 차분하게 대답했다.
“내가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하지 않았다면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김좌진 장군의 묘소까지도 알고 있어!”
김두한은 갑자기 염응택을 향해 방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더니 오열하기 시작했다. 지금 막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처럼 섧게 섧게 울었다. 일행은 김두한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뒷골목을 주름잡던 한 사나이의 회한이 모두의 가슴에 공명되었다.
실컷 울고난 김두한은 벌떡 일어나 염응택에게 큰절을 했다.
“선생님, 용서하십시오. 저는 제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놈한테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무것도 모르고 공산당의 앞잡이 노릇까지 했으니, 지하에 계신 아버지를 무슨 낯으로 대하겠습니까?”
그는 진정으로 뉘우치고 염응택에게 사과했다.
염응택은 한결 너그러운 음성으로 김두한을 달랬다.
“자네가 모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자네가 어렸을 때의 일이니까.
(중략)
자네 어른이 암살당하고 나자 나는 복수를 결심하고 북로군정서 대원들을 이끌고 놈의 뒤를 쫓았어. 그러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지.
독자 여러분! 홍성군민, 보령시민 그리고 국민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속아 살아왔습니다. 누가 속였을까요? 염응택일까요? 오동진일까요? 김두한일까요? 아니면 이영신일까요? 모두 다 똑같은 역사 사기꾼들입니다. 우리 민족사 7천 년 사상 초유의 엄청난 역사 사기극입니다. 지나가는 소와 이웃 나라에서도 웃고 있습니다.
백야 김좌진 장군이 순국하신 1930년 1월 당시 염응택은 선린상업학교 재학생이었습니다. 만주에 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김좌진 암살범의 뒤를 쫓았단 말입니까! 더구나 이때는 북로군정서가 해체된 지 8년 이상 뒤입니다. 북로군정서라는 명칭을 도입한 이영신 작가도 염응택도 오동진도 무식이 탄로 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때부터 더더욱 소설가, 극작가, 영화계가 흥행을 목적으로 국민을 기만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화 ”장군의 아들, 야인시대, 왕초 등입니다. 이때부터 국민들의 뇌리에는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로 세뇌되어 박혀버렸습니다. 그야말로 수많은 만주 반일무장독립군의 인격모독은 물론이요, 중국 애국애족 동포사회의 위상에 먹칠한 어리석은 짓거리였습니다. 총체적으로 만주 반일무장독립운동사가 제대로 밝혀지면 자신들의 친일행각이 드러나게 되는 이승만, 박정희 정권과 그 예하인 조선총독부 학파인 친일강단사학계와 친일언론들의 소행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늘과 땅이 뒤바뀔 거짓 시나리오로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 행세로 해방정국에서 활개를 치게 됩니다. 이렇게 김두한을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변신시킨 것은 염응택(=염동진)이었고, 기고만장한 김두한은 10년이 지난 뒤에 장군의 정실부인 오숙근 여사 유령 장례식, 유택조작, 족보조작, 보훈처 등재 등의 작업을 서슴없이 진행했을 것입니다.
이 처절하고도 암울한 역사를 누가 바로잡을 것인가!
바로 국민 여러분입니다.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주) 사무총장 배상
첫댓글 따라서 북로군정서라는 명칭은 1919년 12월부터 사용되었다.
1909년생인 10살짜리 염응택이가 북로군정서 중대장이었다는 것은
1930년 1월 당시 염응택은 선린상업학교 재학생이었습니다
조사된 증명자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