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의 치명적인 오류들!
최근 「삼체」라는 미드가 개봉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영화는 중국의 류츠신(劉慈欣)의 3부작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네플릭스 드라마이다.
참고로 소설 '삼체'는 SF소설의 노벨상이라고 할 수 있는 '휴고상'을 받은 작품이다.
여기에 제2권의 제목이 ‘어둠의 숲’이다. 그리고 이 제목을 통해 작가의 우주관, 정확히는 외계인관이 잘 드러나 있다. ‘어둠의 숲’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하다.
우주에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장소가 어마어마할 것인데.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한 번도 외계인과 만날 수 없었고 발견조차 할 수 없었던가?
소위 '페르미의 역설'이라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어둠의 숲’ 가설이다.
이 가설은 한 마디로 우주를 ‘정글’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캄캄한 정글 속에는 무수한 생명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약육강식의 세계여서 서로 숨죽여 자신의 정체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보다 고차적인 문명이 하위 문명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위협을 느껴 그 문명을 파괴할 것이라는 이론이다.
그리고 우주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니, 다른 문명이 존재한다는 것은 한정된 자원을
소비하는 것이기에 자신들의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파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아무리 고차원적인 문명이라도 우주의 무한함을 가정한다면
여전히 자신들보다 더 고차적인 문명이 있을 것이기에 아주 발전한 문명이라도
여전히 위협을 느끼면서 가급적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 외계인을 발견하지도 만나지도 못하고 있다는 가설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설에는 몇 가지 치명적인 오류가 있고
이러한 오류는 인류의 현대 과학기술문명이 가지는 일반적인 오류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과학자들의 오류는 인류의 문명을 매우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를 알아보자!
우선 다섯 가지 오류를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우주를 인간이 사는 세계의 ‘정글’에 비유하는 것 자체가 오류이다. 왜냐하면 지구상에서 정글의 법칙이 통하는 곳은 오직 야생 동물들의 세계뿐이며, 문명이 발전한 인간사회를 정글의 법칙으로 돌아가는 곳으로 이해하거나 그렇게 규정할 수가 없다. 인류는 윤리, 도덕적인 존재이며 존중, 이해, 공존, 화합, 협상, 사랑, 자비, 평화 등을 추구하며, 정글의 법칙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유물론자나, 독제자들이나 몇 몇 공산 국가에서나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물론 유물론적인 경향이 강한 현대 사회에서는 다분히 인생을 적자생존으로 고려하는 경향성이 강하긴하지만 경험적 증거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따라서 우주에도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지 않은 세계가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 될 것이다.
둘째, 그런데 정글의 법칙을 ‘약육강식’이라고 하는 것도, 편견이고 유물론적, 생물학적 관점에서만 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것이다. 정글에는 놀라운 생태계가 있고, 이 생태계에서 식물들끼리는 서로 협력하여 정보와 영양소를 나누며, 곤충은 식물의 생존을 돕고, 식물은 곤충에게 양식을 제공한다. 동물들끼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엄청난 ‘희생과 사랑’이 있으며 이를 통해 놀랍게 개체를 조절하며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정글을 왜 하필 ‘양육강식’으로 묘사하는 것일까? 정글을 보는 과학자의 마음이 오직 약육강식에 휘어 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외계인이 비록 하급 문명에서 무엇인가를 필요로 해서 훔쳐가더라도 그들은 또한 놀라운 기술 문명과 진보한 정신적인 가치를 남겨주면서 지구문명의 위기를 해결해 줄 수도 있다고는 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따라서 이는 한쪽만 보고 전체를 규정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지구보다 훨씬 더 발전한 문명들이 지구 문명을 발견하면 위협을 느껴 우선 멸망시키고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설정 자체가 비-논리적이다. 문명이 발전한다는 것은 다만 기술발전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와 비교하면 현대 문명은 엄청난 기술발전을 이루었다. 그런데 발전은 다만 기술만이 아니다. 그때는 존재하지 않았던 평등의 개념이 존재하고, 인간 존엄성의 개념이 존재하고, 생태계를 염려하고, 인권의 개념이 존재하며, 여성 존중의 문화도 있고 무엇보다 ‘인류애’의 개념도 존재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기술의 발전은 도덕적인 진보에 비하면 오히려 하찮은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두 번째 오류는 진보를 오직 기술의 진보만을 생각하고, 도덕적 진보를 생각하지 못한 유물론자의 오류이다. 아주 진보한 문명이 우주 저편에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들은 지구인들이 지닌 것보다 훨씬 더 진보된 도덕적 문화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스스로의 오류로 멸망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단 몇초 만에 지구를 파괴해 버릴 어마 무시한 기술은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가진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은 야만적이라고 한다면 그런 문명이 얼마나 오래갈 것인가? 따라서 앞의 질문은 흑백논리의 오류이자 무지에 의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적대적일까? 우호적일까? 라는 질문 자체가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상호성의 법칙에 무지한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오지의 알려지지 않는 부족을 발견하였을 때, 그 부족은 여러분에게 적대적일까? 혹은 호의적일까? 일반적으로 답변은 그것을 발견하고 조우한 사람들의 행위에 따라 적대적일 수도 있고, 또 우호적인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대다수 공상과학 영화에서는 외계인을 매우 위험하고 적대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그 이유는 현재 우리 지구문명이 가지는 비-정상적인 문화 현상 때문일 것이다. 민족과 민족이 대립하고 국가와 국가 간에 경쟁하고 마치 신-냉전체재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투영한 것이 Sf영화들의 마인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외계인은 상황에 따라 우호적일 수도 적대적일 수도 있을 것이며, 이는 전적으로 조유하는 양자 간의 태도에 달린 문제이다. 따라서 이러한 질문은 실체화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우주의 자원이 한정되어 있어서...라는 가정은 가장 비-논리적인 가정이고 우스꽝스러운 가정이다. 수 천만 광년이나 되는 천문학적 거리를 넘어 다른 문명을 파괴할 수 있는 기술이라면 가히 상상 불가능한 기술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구를 예를 들면 만일 지구의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백조자리의 어떤 항성으로 갈 수 있다면, 아마도 태양 에너지를 쉽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고, 그 태양에너지는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무한대로 쓰고 남을 것이다. 우리 은하에만도 태양 같은 항성이 1천억개~4천억개나 된다는데 어느 세월에 그 많은 에너지를 다 쓰고 다른 은하의 에너지를 가지러 갈 수 있을까? 우주에 자원이 한정되어 다른 외계문명을 파괴할 것이라는 가정은 지나가는 소가 웃을 가정이다. 이는 전건긍정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기술문명과 과학자들이 인류문명을 이끌어 갈 때, 파국은 불가피하다!
이상의 오류들로 미루어 볼 때, 그리고 이러한 작품이 큰 상을 받은 것을 감안한다면,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을 소유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유물론적인 경향이 강하여, 인간이 가진 밝은 측면이나 긍정적인 측면을 잘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인간을 영혼을 가진 인격체로보지 않고 동물과 다름 없는 존재로 고려한 것이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의 밝은 면만 보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인간의 어두운 면만을 보는 것은 더 위험하다. 우리는 이 둘을 모두 볼 수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영화나 미디어 등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과학적 정신을 가진 이들이 인류의 정신문화를 지배하게 될 때, 그 사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매우 비관적이다. 도덕적인 진보를 무시한 채 무조건 기술문명만을 발전시키면서 ‘적자생존’을 당연시 하는 이들의 태도를 대다수의 사람들이 취하게 될 때 어떤 사회가 될까? 신석기 시대나 청동기 시대야 적자생존의 원리로 살아가도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마 무시한 핵무기들, 놀라운 AI로봇들이 상용화되고 있는 시대에서 오직 적자생존을 삶의 법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경악스러운 일이다. 이는 인류의 멸망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너무나 비극적인 ‘디스토피아’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인문학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하고 평화와 복지를 추구하는 도덕적인 사람들 그리고 종교인들이 분발하여 나서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지금처럼 과학자들의 질주가 폭주하게 되면, 지구의 미래 문명은 암울한 어둠만이 있을 것 같다.
음식도 적당히 먹지 않고 너무 많이 먹는 것을 폭식이라고 한다. 폭식은 탐욕에 속하며 중세의 문호 단테는 <신곡>에서 폭식하는 탐욕자는 자신의 영혼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기에 종교적 죄로 규정하고 지옥의 2단계에 위치시켰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경계선이 없는 앎의 폭식을 하고 있다. 인류에게 전혀 도움도 안되는 우주 저편의 원리들을 알고자 천문학적인 예산을 사용하고,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이상한 세균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고, 인류를 파명시킬지도 모르는 생각하는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고자 너도 나도 막대한 투자를 하고, 인류 역사에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저편 우주의 외계 생명체를 아는 것이 마치 인류최대의 관심사처럼 부추기고 있다. 전부 과도한 폭식에 해당한다. '과유불급'이다. 무엇이든 과도한 것은 부족한 것만 못한 것이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미래 사회가 어떻게 될 것인지, 외계 생명체와는 어떤 관계가 될 것인지는 모두 '자유의지'를 가진 '인류의 선택'에 달려 있을 뿐이다. 예언이란 오직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지, 실재가 아니다. 미래란 어떤 의미에서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것이어서 '고정된 사태'처럼 고려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은 열려 있고, 모든 것은 '인류'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