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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2권 /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삼종질(三從姪) 종악(宗岳) 이 정승에 제수됨을 축하하고 이어 시노(寺奴) 문제를 논한 편지
지원(趾源)이 젊었을 때 심병(心病)을 앓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불현듯, 온 세상 부인들이 첫아이를 낳으면서 너무도 지쳐 정신이 가물가물한 상태에서 만일 잠결에라도 젖이 아이의 입을 눌러 대면 어찌할 것인가 걱정이 되어 밤중에 일어나 방황하며 몸 둘 곳을 몰라 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늘그막에 한 고을 원이 되어 5000호의 중남중녀(衆男衆女)를 맡아 기르게 되니, 이들은 맹자(孟子)의 이른바 ‘적자(赤子)’요, 노자(老子)의 일컬은 바 ‘영아(嬰兒)’인 셈입니다. 영아란 한번 떼가 나면 손으로 제 머리칼을 쥐어뜯고, 한번 울음을 터뜨리면 누워서 발을 버둥거리는데, 남들이 아무리 온갖 방법으로 달래 보아도 그 옹알대는 소리가 무슨 말이며 제 의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하지만, 자상한 제 어미만은 능히 이를 잘 살펴서 알아듣고 미리 짐작해서 그 뜻을 알아맞힙니다. 이에, 처음 해산한 어미는 자나 깨나 하는 생각이 오로지 안절부절 젖을 물리는 데에 있기 때문에 소리도 냄새도 없는 속에서도 묵묵히 듣고 꿈속에서도 거기에 마음을 쓰고 있는 줄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이야말로 지성(至誠)이 아니고야 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원이 된 첫솜씨치고는 그다지 심한 허물은 없었다 여겼는데, 시노(寺奴) 300구(口)에 이르러서는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배가 끓고 등이 후끈거려서 30년 전의 심병이 되살아난 듯합니다.
일찍이 들으니 노비를 추가로 찾아내어 정해진 액수(額數)를 채울 적에 단지 두목(頭目)이 밀봉해서 바치는 공초(供招)에만 의거하고 있는데, 그가 추가로 찾아내어 채운 자는 모두 외손의 외손들이며 그 노비에게 보증을 서 준 자 또한 모두 외가의 외가 쪽 사람들이라 합니다. 대대로 벼슬하는 가문들도 팔세보(八世譜)를 만들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 대개 씨족이 자주 바뀌고 고거(攷壉)가 자상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시골구석의 무지한 백성들이야 허다히 제 아비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리저리 외가 쪽으로 뻗어 나간 소생의 근원을 알겠습니까. 이런 정도의 친인척은 비록 사대부의 경우일지라도 마상(馬上)에서 서로 한 번 읍(揖)이나 하는 정도로 충분한 관계인데, 종신토록 그에 얽매여 가산을 탕진하고야 말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로 이자들을 이 고을에 정착하게 했다면 사실인지 아닌지 명단을 조사해서 검열한다는 것이 그래도 말이 되겠지만, 다른 고장으로 종적을 감추어 몰래 공포(貢布)를 바치고, 일찍이 본명을 숨겨 생사 여부도 정확하지 않으니, 아무리 장부를 점검하여 끝까지 조사하려 해도 그럴 수 없는 형편입니다. 혹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계집이 사내로 탈바꿈하기도 하고, 시집도 안 갔는데 그 소생을 따지고, 가짜로 이름을 만들었는데 진짜로 현신(現身)하라 독촉하기도 하니, 두목이 당도하는 곳마다 사람들을 꼬이고 협박해서 그로 인연하여 농간을 부리게 됨은 형세상 필연적인 일입니다.
이 폐단이 백골징포(白骨徵布), 황구첨정(黃口簽丁)보다 더 심하건만 그래도 억울함을 드러내 호소하지 못하고, 고통이 뼛속에 사무쳐도 오히려 남이 알까 두려워 아무도 모르게 뇌물을 바치고 이웃에게도 스스로 숨기는 터입니다. 속담에 이른바 ‘동무 몰래 양식 낸다’, ‘병 숨기고 약 구한다’, ‘가려운 데는 안 가리키고 남더러 긁어 달란다’는 격입니다. 이 어찌 절박하여 부득이하고 지극히 난처한 사정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조금이라도 노비안(奴婢案)에 관련되기만 하면 딸 다섯을 두었더라도 사위로 들겠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머리가 하얗도록 생과부로 한을 품은 채 일생을 마치니 천지 음양의 화기(和氣)를 손상함이 또한 어떻다 하겠습니까. 수령이 이 문제로 죄를 얻는 경우가 전후로 종종 있었지만 이는 덮어 두고라도, 다만 국가를 위하여 천지의 화기를 맞아들이고 임금의 은택을 펴자면 빨리 이 폐단을 바로잡는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저는 단지 안의(安義) 한 고을만 특히 심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고을이 이와 같을진댄 다른 고을도 알 만하며, 한 도(道)가 이와 같을진댄 팔도에 대해서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명공(明公)께서 감사(監司) 자리로부터 들어와 새로 정승의 자리에 올랐으니 응당 이 일을 반드시 눈으로 겪어 본 바라, 그것이 폐단의 근원이 됨을 반드시 익히 살핀 바 있으리니 곧 임금을 연석(筵席)에서 뵈올 때의 첫 진언(陳言)은 이보다 중요한 문제가 없을 줄로 압니다.
구구한 마음에 오로지 천하의 근심을 남보다 먼저 근심해 주기를 깊이 바라는 바입니다. 아무개는 두 번 절하고 올립니다.
[주-D001] 삼종질(三從姪)이 …… 편지 : 박종악(朴宗岳 : 1735~1795)은 자가 여오(汝五), 호는 창암(蒼巖)이다. 항렬로는 연암의 9촌 조카뻘이나 나이는 2세 연상이다. 영조(英祖)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주로 청현직(淸顯職)을 지냈으며, 정조(正祖) 즉위 초에는 홍국영(洪國榮)을 비판하다 파직되어 오랫동안 관직에서 떠나 있었다. 179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경기 관찰사,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1792년 음력 1월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이 글은 이때 보낸 편지이다. 시노(寺奴)는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를 이른다. 이 글의 제목이 《하풍죽로당집(荷風竹露堂集)》에는 ‘하족질종악입상인론시노비서(賀族姪宗岳入相因論寺奴婢書)’, 《백척오동각집(百尺梧桐閣集)》, 《운산만첩당집(雲山萬疊堂集)》, 《동문집성(東文集成)》에는 ‘하족질배상인론시노서(賀族姪拜相因論寺奴書)’ 등으로 조금 다르게 되어 있다.
[주-D002] 심병(心病) : 마음속의 근심 걱정으로 인해 생긴 병을 말한다.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감괘(坎卦)는 …… 사람에 대해서는 근심을 더함이 되고, 심병이 된다.〔坎 …… 其於人也 爲加憂 爲心病〕”고 하였다.
[주-D003] 5000호 : 《백척오동각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4000호로 되어 있다.
[주-D004] 맹자(孟子)의 …… 셈입니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대인은 적자의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大人者不失其赤子之心者也〕”라고 했는데 그 주에 “대인은 임금을 말한다. 임금이 백성을 응당 적자처럼 대한다면 민심을 잃지 않게 됨을 말한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노자(老子)》 제 49 장에 “성인(聖人)은 항상 사심이 없다, 백성의 마음으로 제 마음을 삼는다.…… 성인은 모든 백성을 갓난아이처럼 여긴다.〔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聖人皆孩之〕”고 하였다.
[주-D005] 꿈속에서도 : 원문은 ‘夢魂之中’인데, 《백척오동각집》에는 ‘慌愡之中’으로, 《하풍죽로당집》에는 ‘蒙寐之中’으로, 《운산만첩당집》에는 ‘夢囈之中’으로 되어 있다.
[주-D006] 두목(頭目) : 관청의 노비를 통솔하는 두목 노비를 이른다. 노비 10구(口)마다 1구를 택하여 두목으로 정했다.
[주-D007] 팔세보(八世譜) : 8대의 조상까지 기록한 족보를 이른다.
[주-D008] 공포(貢布) : 지방에 거주하는 공노비가 신역(身役) 대신 나라에 바치던 베를 말한다. 영조 때 노(奴)는 베 1필, 비(婢)는 반 필로 공포를 삭감하였으며, 나아가 비의 공포를 폐지하였다. 1801년(순조 1) 공노비가 해방되면서 공포의 징수도 완전 폐지되었다.
[주-D009] 일찍이 본명을 숨겨 : 원문은 ‘嘗隱本名’인데, 여러 이본들에는 ‘嘗’이 ‘常’으로 되어 있다.
[주-D010] 백골징포(白骨徵布) : 조선 시대에 이미 죽은 사람을 생존해 있는 것처럼 명부에 등록해 놓고 강제로 군포(軍布)를 징수하던 일을 이른다.
[주-D011] 황구첨정(黃口簽丁) : 조선 시대에 다섯 살 미만의 젖내 나는 사내아이를 군적(軍籍)에 올려 군포를 징수하던 일을 이른다.
[주-D012] 동무 몰래 양식 낸다〔隱旅添粮〕 : 여행 비용으로 양식을 추렴하는데 길동무 모르게 내어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는 뜻으로, 힘만 들고 생색이 나지 않는 경우를 비유한 것이다. 《송남잡지(松南雜識)》에도 ‘諱伴出糧’이라 하여 같은 속담이 소개되어 있다. 정약용(丁若鏞)의 《이담속찬(耳談續纂)》에도 ‘동무 몰래 양식 내면서 제 양식은 계산 않는다.〔諱伴出粻 不算其糧〕’는 속담이 소개되어 있다.
[주-D013] 노비안(奴婢案) : 노비의 호적으로, 20년마다 대추쇄(大推刷)하여 정안(正案)을 작성하고, 3년마다 소추쇄(小推刷)하여 속안(續案)을 만들었다.
[주-D014] 명공(明公) : 명성과 지위를 갖춘 사람에 대한 존칭이다.
[주-D015] 그것이 폐단의 근원이 됨 : 원문은 ‘其爲弊源’인데, 《백척오동각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諸般弊源’으로 되어 있다.
[주-D016] 연석(筵席) : 임금이 학문을 닦는 경연(經筵)을 말한다. 정승은 경연의 영사(領事)를 겸하였으며, 경연이 끝난 뒤 그 자리에서 임금과 정치 문제를 협의하였다.
[주-D017] 천하의 …… 근심해 주기 : 원문은 ‘先天下之憂而憂’인데, 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주-D018] 아무개 : 원문은 ‘某’인데, 자신을 가리키는 겸칭이다.
김 우상(金右相) 이소(履素) 에게 축하하는 편지
백성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 분이라 임금께서도 실로 그에 부응하시니 정승에 제수되던 날 저녁에 온 조정이 모두 감동하였거니와, 유독 이 백열(柏悅)의 소회로서는 더욱더 이마에 두 손을 얹고 축하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합하(閤下 정승에 대한 존칭 )의 집안에 4대(代)에 걸쳐 정승이 다섯 분 나오셨습니다. 정승의 지위와 중임은 일찍이 예전이라서 더 높고 오늘이라서 손색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멀리 역사책에서 찾을 것 없이 가까이 가정의 모범을 본받는다면 이야말로 백성들의 복이 될 것입니다.
화폐의 가치에 대해서 제 나름의 견해가 있기에 별지(別紙)에 기록하오니, 직위를 벗어난 참람되고 망녕된 말이라 책하지 말아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별지(別紙)
오늘날 백성의 근심과 국가의 계책은 오로지 재부(財賦 재화와 부세 )에 달려 있다. 우리나라는 배가 외국과 통하지 않고 수레가 국내에 다니지 않기 때문에 생산된 재부는 항상 일정한 수량이 있어, 관에 있지 않으면 민간에 있게 된다. 그런데 공사간(公私間)에 다 고갈이 되고 상하가 모두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재(理財)하는 방법이 제 길을 얻지 못한 까닭이다.
대저 화폐의 가치가 높아지면 물건의 가치는 떨어지고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면 물건의 가치는 높아진다. 물가가 오르면 백성과 나라가 함께 병들고 물가가 떨어지면 농민과 상인이 함께 해를 입는 것이다.
역대 조정에서 화폐의 가치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이전에 엽전을 주조했으나 그나마 잠시 시행하다 이내 중지되었다. 진실로 포화(布貨 베 )와 저화(楮貨 지폐 )는 비록 싸지만 다시 비싼 은화(銀貨)가 있어서 비싸고 싼 것 사이에 절충할 수 있었다.
무릇 위의 세 가지 화폐는 모두 백성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빨리만 만들어 내면 넉넉히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엽전은 사사로이 만드는 화폐가 아니고 관의 공급에 의존하고 있다. 당시 만든 양이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민간에 보급된 것도 미처 두루 퍼지지 못했으므로, 백성들이 엽전의 사용을 불편하게 여긴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재부를 잘 다스리는 데에는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화폐의 가치를 헤아려 물가를 조절하며, 막힌 것은 소통시키고 넘치는 것은 막아서, 화폐의 가치가 너무 오르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함으로써 물건이 지나치게 비싸지거나 지나치게 싸지는 경우를 막는 것이다.
엽전이 세상에 통행된 지 113년이 지났다. 중앙에서는 호조(戶曹), 진휼청(賑恤廳), 오군영(五軍營)과 지방에서는 팔도(八道), 양도(兩都), 통영(統營)에서 대체로 각기 재차 혹은 3, 4차 주전(鑄錢)하였다. 그 만든 연도 및 수효는 해당 관청에 비치되어 있으므로 한번 조사하면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엽전이 관에 비축된 것이 얼마인지 파악하면 민간에 있는 것을 그에 따라 추정해 낼 수 있다. 백 년 사이에 마멸되거나 파손된 것, 물과 불에 손실된 것 등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대강 따져서 이를 제해도 관과 민간에 있는 현재 엽전의 총계는 적어도 수백만 냥이 될 것이다. 이를 엽전이 처음 사용되었을 때와 비교하면 아마 10배도 더 되는 양이다. 그럼에도 대소간에 황급해하면서 모두 돈 걱정을 않는 자 없으며, 심지어는 나라 안에 돈이 없다고도 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아! 엽전의 이름을 ‘상평통보(常平通寶)’라 부른 것은 항상 물건과 균형을 유지하고자 함이다. 백성이 엽전을 사용한 지 오래되매 늘 보고 늘 써 왔기 때문에 다른 화폐는 무시하고 아울러 은화까지도 쓰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엽전만 날마다 늘어나 물가는 날마다 오르게 되었고 모든 거래에 있어 엽전이 아니면 안 되게 되었다. 화폐의 흐름이란 기울어진 데로 쏟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물가가 오르면 돈이 어찌 거기에 쏠리지 않겠는가! 예전에 한푼 두푼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 혹은 서푼 너푼으로도 부족한 실정이다. 지금 엽전으로 물건과 균형을 유지하려면 몇 배가 들게 되었으니 이 어찌 엽전이 천해지고 화폐가 값싸진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국내의 재부에 대해 논하는 자들은 모두 ‘돈이 귀하기 때문에 물가도 따라서 오른다’ 하니 어찌 생각을 못 함이 이다지도 심한가!
또한 은은 재부로서 으뜸가는 화폐이며 세상에서 모두 보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에 민간 습속이 엽전에만 익숙하고 은화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은이 드디어 한낱 물건으로만 취급되고 화폐에는 들지 않게 되었다. 북경(北京)의 시장에서 팔지 않으면 곧 무용지물과 같은 것이다. 하정(賀正), 동지(冬至), 재력(䝴曆), 재자(䝴咨) 등의 사신 행차에 휴대하는 포은(包銀)이 매년 적어도 10만 냥은 될 것이니, 10년을 합계하면 100만 냥이나 되는 것이다. 이로써 조달하여 실어서 돌아오는 것이란 한갓 털모자일 뿐이다. 털모자는 한 해 겨울만 지나도 해져 못 쓰는 것이다. 천 년이 가도 부서지지 않는 보물을 들고 가서 한 해 겨울에 해져 못 쓰는 것을 바꿔 오고, 산천에서 캐내는 한정이 있는 재화를 실어서 한번 가면 다시 못 올 땅으로 보내 버리니 천하의 졸렬한 계책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하겠다.
간접적으로 듣건대 국내에 당전(唐錢 청 나라 동전 )을 통용시켜 전황(錢荒 화폐 부족 현상 )을 구제하기로 하고 이번 동지사 편에 들여오도록 허락하였다 하는데, 이는 결코 옳은 계책이 아니다. 엽전은 바람, 서리, 홍수, 가뭄 등의 재해를 받는 것도 아닌데, 어찌 곡식이 큰 흉년을 만난 것처럼 ‘황(荒)’이라 일컫는가. ‘황’이라 일컫는 까닭은 돈길이 너무도 혼잡해져서 마치 벼논에 우거진 잡초를 제거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뜻이다.
중국의 산해관(山海關) 바깥 지역에서 문은(紋銀) 1냥으로 동전 7초(鈔)를 교환해 준다고 한다. 1초는 163푼으로 한 꿰미가 되니, 우리나라 엽전으로 기준을 삼아 보면 1냥의 은이면 대개 엽전 11냥 4돈 1푼을 얻을 수 있으니 거의 10배의 이익을 보는 것이다. 모든 운반비를 제하더라도 5, 6배의 이익은 된다. 저 역관들은 한갓 자기들의 목전의 이익만 탐하고 국가의 장구한 계책은 알지 못하여, 수십 년 이래 밤낮 오직 당전의 통용을 소원하고 있다. 이는 그야말로 ‘화살 가는 데 따라 과녁 세우기’나 ‘언 발에 오줌 누기’와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의 화폐가치가 하락함에 따라 온갖 물가가 뛰어오르고 있는데, 어찌 외국의 조악한 화폐를 들여다가 통화의 유통을 스스로 흐리게 한단 말인가. 털모자는 오히려 서민들의 방한의 용구인데도 은으로 바꾸어 오는 것이 불가하거늘, 하물며 역관배들의 일시적인 조그만 이익을 위해서 팔도에서 산출되는 귀중한 은을 쓸어다가 북경의 시장에다 밑 빠진 독을 만들어 쏟아 붓는단 말인가. 그 이해득실은 환히 알기 쉬워 굳이 지혜 있는 자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명백한 것이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먼저 돈길을 맑게 하고 우선 은화가 북쪽으로 들어가는 문을 막는 것밖에 없다.
어떻게 돈길을 맑힐 것인가?
우리나라에서 엽전을 사용한 이래로 구전(舊錢)보다 좋은 것이 없다. 구전은 모두 견고하고 중후하며 글자체도 분명하였는데, 임신ㆍ계유 연간에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동시에 엽전을 주조하면서 느닷없이 옛 방식을 바꾸어 납과 철을 많이 섞은 데다 두께가 너무 얄팍해서 손만 대면 쉬이 부서질 정도였다. 그리하여 엽전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으로 간주되어 맨 먼저 돈의 재앙을 만들었으니, 물가가 치솟은 것은 실로 그때부터였던 것이다. 그 후 계속 만들 때마다 그 크기가 갈수록 줄어들어, 지금의 신전(新錢)과 함께 섞어서 꿰미를 만들면 신전은 구전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서 돈을 세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돈의 난잡함이 이 때문에 더욱 심해졌다.
지금 옛날의 오수전(五銖錢)과 삼수전(三銖錢)의 제도를 모방해서 어디서든 현재 있는 구전 한 닢을 신전 두 닢에 해당하도록 하고, 일제히 돈꿰미를 바꾸면 대소가 즉시 구분될 것이니 새로 돈을 주조하는 번거로움을 겪지 않고도 앉아서 백만 냥을 얻을 수 있다. 비록 크고 작은 돈을 함께 통행시키더라도 가치의 경중에 따라 달리 쓰면 민심을 거스르지 않고 화폐가 잘 유통될 것이다. 임신ㆍ계유 연간에 세 영문(營門)에서 주조한 엽전은 큰 것도 구전만 못하고 작은 것은 신전과 맞지 않아 이미 격식에 어긋나고 형체마저 너무 얇고 졸렬하니 모두 통용을 정지시켜 저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돈길이 맑아질 것이다.
은화가 빠져나가는 것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
관과 민간에 소장되어 있는 토산의 은괴를 그냥 부숴서 화폐로 삼지 말고, 모두 호조로 바치게 해서 일률로 닷 냥, 열 냥으로 크고 작은 덩어리를 만들어 천마(天馬)나 주안(朱雁)의 모양을 박아서 원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동시에 10분의 1의 세를 받는다. 그리고 교역한 당전은 국내에 들이지 못하게 하고 의주(義州)에 유치시켜 두었다가, 뒤에 나가는 사행의 노자에 충당시킬 것이다.
무릇 사행의 수행원도 마땅히 긴요치 않은 인원은 감해야 할 것이다. 서장관(書狀官)의 경우에 그 소임이 외교의 임무를 맡은 것도 아니요 직분이 종사(從事)와도 다른데, 그 식량이며 마부와 말 등 일체 번다한 비용은 따로 사신 한 사람의 몫이 들며 잡심부름하는 하인들을 많이 대동하고 양방(兩房)에 의존하여 취사를 해결한다. 그가 가고 오는 것은 본래 중국 측에서 알 바 아닌데도 무릇 잔치를 베풀고 상을 하사하는 자리에서 전례에 따라 염치없이 대접을 받고 있으니, 매우 부당한 일이요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구차스럽기 짝이 없다. 세 명의 대통관(大通官 벼슬이 높은 역관 ) 이외에 무릇 압물종사(押物從事)는 모두 감원함이 옳고, 사자(寫字), 도화(圖畵), 의관(醫官)의 직임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의 수행 비장(裨將)들에 분배시키며, 기타 무상종인(無賞從人)과 의주 상인은 일체 엄금하고, 무역하는 데 있어서는 약재 이외에는 일체 함부로 내가지 못하게 한다면 변경의 관문이 엄중해지고 국내에 은화가 저절로 풍족하게 될 것이다.
시국에 절실한 말로서 한(漢) 나라 가산(賈山)과 당(唐) 나라 육지(陸贄)와 같은데, 문장을 지은 것은 도리어 더욱 고아(古雅)하고 간결하다.
[주-D001] 김 우상(金右相)에게 축하하는 편지 : 김이소(金履素 : 1735~1798)는 자가 백안(伯安), 호는 용암(庸庵),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인 김창집(金昌集)의 증손이다. 연암과는 약관 시절부터 친구였다. 영조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이조 판서를 거쳐 정조 대에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랐다. 이 글은 그가 1792년 음력 10월 우의정에 제수되었을 때 보낸 편지인데, 《하풍죽로당집》에는 ‘하김우상인론전폐경중서(賀金右相因論錢幣輕重書)’로, 《동문집성》에는 ‘하김우상이소인론천폐서(賀金右相履素因論泉幣書)’로 되어 있다.
[주-D002] 백열(柏悅) : 가까운 친구의 좋은 일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육기(陸機)의 탄서부(歎逝賦)에 “참으로 소나무가 무성하니 잣나무가 기뻐하고, 아! 지초가 불에 타니 혜초가 탄식하네.〔信松茂而柏悅 嗟芝焚而蕙歎〕”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文選 卷16》
[주-D003] 별지(別紙) :
김택영(金澤榮)의 《연암집》과 《중편연암집》에는 ‘천폐의(泉幣議)’ 또는 ‘상김우상이소천폐의(上金右相履素泉幣議)’라는 제목으로 별도로 수록되어 있다.
[주-D004] 엽전이 …… 지났다 :
숙종 4년(1678)에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한 일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05] 오군영(五軍營) : 훈련도감(訓鍊都監),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을 말한다.
[주-D006] 양도(兩都) : 강도(江都)와 송도(松都), 즉 강화부(江華府)와 개성부(開城府)를 가리킨다.
[주-D007] 대소간에 : 원문은 ‘大小’인데, ‘小大’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08] 하정(賀正), 동지(冬至), 재력(䝴曆), 재자(䝴咨) : 하정은 정월 초하룻날 새해를 축하하러 중국으로 가는 사행이고, 동지는 동짓날을 축하하러 가는 사행이며, 재력은 중국으로부터 역서를 받아 오는 것이고, 재자는 중국과의 외교문서인 자문(咨文)을 가지고 왕래하는 것을 이른다.
[주-D009] 포은(包銀) : 사행(使行)의 여비 조달을 위해 인삼 열 근씩 담은 꾸러미 여덟 개 즉 팔포(八包)를 가져가도록 하다가 인삼 대신 그 값에 상당하는 은(銀)을 가져가도록 했는데, 이를 포은이라 한다.
[주-D010] 이로써 …… 뿐이다 : 《열하일기》 일신수필(馹汛隨筆) 7월 22일 조를 보면, 영원위(寧遠衛) 지나 산해관(山海關) 조금 못 미쳐 중후소(中後所)란 곳에 대규모 털모자 공장이 셋이나 있으며 사신 행차에 동행한 우리나라 의주(義州) 상인들이 그곳의 생산품을 대량 수입해 간다고 하면서, 그로 인한 은화 유출을 비판하였다. 중후소의 털모자 공장에 관해서는 김창업(金昌業)과 홍대용(洪大容) 등의 연행록에도 소개되어 있다.
[주-D011] 산천에서 …… 실어서 : 원문은 ‘載採山有盡之貨’인데, 국립중앙도서관 필사본에는 ‘載採山川有盡之貨’로 되어 있다. 이어지는 대구(對句) ‘輸之一往不返之地’를 감안하면 후자처럼 1구가 8자로 되어야 옳다. 또한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은조(銀條)에도 이와 유사한 “以山川有限之材 輸一往不返之地”라는 구절이 있어 이를 참조하여 번역하였다. 단 《열하일기》 일신수필 7월 22일 조에는 “以採山有限之物 輸一往不返之地”라 하여 ‘山川’이 아니라 ‘山’으로 되어 있다.
[주-D012] 국내에 …… 허락하였다 :
정조 16년(1792) 10월 은(銀) 부족에 따라 포은을 채우지 못하게 된 역관들의 생계 대책과 전황(錢荒) 해소를 위해 청 나라 동전을 수입하기로 하자 평안 감사 홍양호(洪良浩)가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가 우려한 대로 청 나라가 《대청회전(大靑會典)》에 동철(銅鐵)의 외국 유출을 금한다는 규정을 들어 불허함에 따라 동전 수입이 실현되지는 못했다. 《正祖實錄 16년 10월 6일ㆍ19일, 17년 2월 22일》
[주-D013] 문은(紋銀) : 청 나라에서 화폐로 쓰이던 은을 이른다. 말굽 모양이라 하여 마제은(馬蹄銀)이라고도 부른다.
[주-D014] 임신ㆍ계유 연간 : 각 군영의 경비 조달을 이유로 중앙의 세 영문(營門)으로 하여금 전년부터 주조하게 한 상평통보 44만 4000냥의 주조가 임신년(1752, 영조 28) 7월 1일 완료되었다. 당시 주조된 동전은 원료 부족 때문에 크기가 약간 축소된 중형(中型) 상평통보였다.
[주-D015] 지금의 신전(新錢) : 정조 9년(1785) 7월 정언 이민채(李敏采)가 상소하여 전황(錢荒) 대책을 건의한 것을 계기로 호조에서 주관하여 상평통보 67만 냥을 새로 주조하게 하였다.
[주-D016] 오수전(五銖錢)과 삼수전(三銖錢)의 제도 : 오수전이 처음 통행될 때 이전에 있던 삼수전과 차등을 두고 교환되었던 사실을 말한다. 오수전은 무게가 5수(銖)로서 한(漢) 나라 무제(武帝) 원수(元狩) 5년(기원전 118)에 처음으로 주조되어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수(隋) 나라 때까지 통용되다 당(唐) 나라 건국 초에 폐지되었다. 삼수전은 오수전에 앞서 한 나라 무제 건원(建元) 1년(기원전 140)에 처음으로 주조되었으나 무게가 너무 가벼워 위조하기 쉬웠으므로 4년 뒤에 주조가 정지되었다.
[주-D017] 너무 얇고 졸렬하니 : 원문은 ‘薄劣’인데, ‘劣薄’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18] 주안(朱雁) : 붉은색의 기러기로 서조(瑞鳥)의 하나이다.
[주-D019] 종사(從事) : 원래 여러 가지 직책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사행의 실무를 맡은 관원을 말한다. 예컨대 방물 호송을 맡은 관원을 압물종사(押物從事)라 한다.
[주-D020] 양방(兩房) :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가리킨다. 부사를 부방(副房), 서장관을 삼방(三房)이라 한다.
[주-D021] 무상종인(無賞從人) : 응상종인(應賞從人)과 달리, 청 나라 황제로부터 상을 하사받는 명단에 들지 못하는 비공식 수행원을 가리킨다.
[주-D022] 가산(賈山) : 전한(前漢) 때의 인물로, 문제(文帝)가 백성들이 사사로이 돈을 주조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인 도주전령(盜鑄錢令)을 폐지하자 가산이 글을 올려 강력히 반대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격절(激切)하여 문제가 끝내 처벌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주-D023] 육지(陸贄) : 754~805. 당(唐) 나라 때의 인물로, 덕종(德宗) 초에 한림학사가 되어 주자(朱泚)의 반란이 일어나자 황제의 조서를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이 간절하여 무인들조차 조서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고 한다. 그 후 재상이 되어 폐정(弊政)을 논하고 가혹한 조세제도를 혁파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그가 황제에게 올린 글들이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라는 책으로 남아 있는데 그 글이 대부분 시국에 절실한 내용들로 되어 있다.
현풍현(玄風縣) 살옥(殺獄)의 원범을 잘못 기록한 데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사람이 급소를 맞으면 주먹 한 방, 발길질 한 번으로도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법률 조문에서 논한 바 있거니와, 이번에 김복련(金福連)이 유복재(兪福才)를 치사(致死)한 사건은, 그 뇌후(腦後), 인후(咽喉), 양과(兩胯) 등 여러 곳에 다친 흔적이 극히 낭자하여, 상처의 치수를 재어서 합쳐 보면 거의 두어 자에 이르니 시장(屍帳 검시 기록 )을 살펴보건대 다시 의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그 정범(正犯)의 확정에 있어, 초검(初檢)에서는 삭손(朔孫)에게 무게를 두었으나, 복검(覆檢)에서는 복련으로 논단하였으니, 간증(看證)이 앞뒤로 진술을 달리한 점을 보면 임기응변으로 잘못을 감싸려는 의도가 없지 않습니다.
복련은 곧 삭손의 아비요, 삭손은 바로 복련의 자식입니다. 아무리 살인죄수라 할지라도 윤리는 있는 법인데 부자간에 그 죄를 서로 떠넘기다니 과연 어떤 인간들입니까? 판정 자체의 경중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바야흐로 죽기 살기로 싸우면서 주먹과 발길이 마구 오가면 비록 이웃 사람이라도 당연히 머리를 풀어뜨린 채로 달려와서 싸움을 말릴 터인데, 그 자식된 자가 아무리 ‘배가 아파 아랫목에 드러누워 있었다.’고 말하지만 어찌 방문을 굳게 닫고 있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일의 곡직(曲直)과 싸우게 된 연유를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분김에 몸을 돌보지 않고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 나가서 제 힘껏 협공하여 아비를 위험에서 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성난 주먹 아래 비록 당장 상대가 죽어 넘어지더라도 제 몸을 스스로 묶고 관청에 자수하여 살인범이 되기를 청하기에도 겨를이 없겠거늘, 어찌 부자가 죽음을 다투는 마당에 이같이 느긋하게 있었겠습니까?
시골구석의 어리석은 백성이 망녕되이 부자가 함께 살아날 꾀를 내어 이같이 이랬다저랬다 하고 진술한 것이니, 정상을 참작하여 죄를 판정할진대 우발적인 살인의 죄는 작고, 꾸며서 둘러댄 죄는 크다 하겠습니다. 과연 가까운 이웃이 증언한 바와 같다면, 싸움터에 나아가 용기가 없는 것도 오히려 효도가 아니라고 일컬었거늘 하물며 불반병(不反兵)의 원수와 만나 싸움에 있어서겠습니까.
복검에서 원범(元犯 주범 )이 뒤바뀐 것은 풍속과 교화에 크게 관계되는 일이니 삭손이 사실을 자백하기 전에는 이 옥사가 바로될 수 없습니다. 각별히 조사해서 다시 주범과 종범을 가려내야만 실로 옥사를 신중히 다루는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가히 편언절옥(片言折獄)이라 하겠다.
[주-D001] 현풍현(玄風縣) …… 답함 : 1792년(정조 16) 연암은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는 길에 감영에 들렀다가 당시 경상 감사 정대용(鄭大容)의 부탁으로 도내의 의심스러운 옥사들을 심리하는 일을 맡아 이를 공정하게 처리했다고 한다. 이 편지를 비롯하여 《연암집》 권2에 수록된 옥사에 관한 편지 4통은 모두 이 일로 경상 감사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글들이다. 《過庭錄 卷2》
[주-D002] 뇌후(腦後) : 정수리의 숨구멍 자리인 백회(百會)의 뒤쪽을 말한다.
[주-D003] 양과(兩胯) : 두 넓적다리 사이 부분, 즉 샅을 말한다.
[주-D004] 상처의 …… 합쳐 보면 : 원문은 “分寸之地”인데, 검시할 때 영조척(營造尺)이나 관척(官尺)으로 상처의 길이와 깊이가 몇 푼(分) 몇 촌(寸)인지 재는 것을 말한다. 10푼이 1촌이고, 10촌이 1자(尺)이다.
[주-D005] 간증(看證) : 간증(干證), 즉 범죄에 관련된 증인을 말한다.
[주-D006] 싸움터에 …… 일컬었거늘 : 《예기(禮記)》 제의(祭義)에서 증자(曾子)가 효(孝)에 대하여 제자인 공명의(公明儀)에게 말하기를, “몸이라는 것은 부모가 남겨주신 유체(遺體)이니, 부모의 유체를 움직임에 어찌 감히 신중하지 않겠는가. 행동거지를 장중하게 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임금을 섬기면서 충성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관직에 나아가 신중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붕우 사이에 신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싸움터에 나아가 용맹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다. 이 다섯 가지를 실천하지 못하면 그 비난이 부모에게 미칠 것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겠는가.〔身也者 父母之遺體也 行父母之遺體 敢不敬乎 居處不莊 非孝也 事君不忠 非孝也 莅官不敬 非孝也 朋友不信 非孝也 戰陳無勇 非孝也 五者不遂 灾及其親 敢不敬乎〕” 하였다. 원문에서 ‘전진무용(戰陣無勇)’의 ‘陣’ 자가 《예기》에는 ‘陳’으로 되어 있으나, 뜻은 같다.
[주-D007] 불반병(不反兵)의 원수 : 불반병은 집으로 돌아가서 병기를 찾지 않는다는 말로서, 언제나 병기를 몸에 지니고 있다가 상대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죽이려 든다는 뜻이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아버지의 원수는 한 하늘을 함께 이지 않고 반드시 죽이며, 형제의 원수는 집으로 돌아가서 병기를 찾지 않으며, 벗의 원수와는 같은 나라 안에서 살지 않는다.〔父之讐 弗與共戴天 兄弟之讐 不反兵 交遊之讐 不同國〕” 하였다.
[주-D008] 편언절옥(片言折獄) : 한마디 말로 판정을 내림을 말한다.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가 자로(子路)에 대하여 “한마디 말로 옥사를 판정할 수 있는 자는 아마도 자로일 것이다.〔片言可以折獄者 其由也與〕”라고 하였다.
밀양(密陽) 김귀삼(金貴三)의 의옥(疑獄)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예로부터 의옥이 한이 있겠습니까마는, 밀양 사람 김귀삼이 그 사위 황장손(黃長孫)을 치사케 했다는 사건은 의혹이 극심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초검에서는 실인(實因 사망 원인 )을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것’이라 하였고, 복검에서의 실인도 역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것’이라 했는데, 이번의 삼검(三檢)에서는 갑자기 강요당했다는 뜻의 ‘피핍(被逼)’ 두 글자를 덧붙여 실인을 삼았으니,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별다른 본 것이 있어서 이 같은 단안을 내린 것입니까?
대저 이 옥사는 이미 세 차례 검험(檢驗 검시 )을 거쳤으나 내내 어림짐작이어서, 상처난 자국의 치수에 가감된 것이 많았을 뿐 아니라 활투두(活套頭)인지 사투두(死套頭)인지조차도 분명치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논단하면서 검안(檢案)에 자상하고 소략함이 심하게 차이 난다 하여 초검과 복검을 모조리 의심하고 삼검에만 무게를 두어서는 물론 안 될 것입니다.
대개 장손이 목을 맨 것은 딴 여자를 얻어 들인 데서 발단하였고, 소를 두고 다툰 데서 결과한 것이니 저 길 가는 사람이 사연을 듣더라도 당연히 그 장인에게 의심을 많이 둘 것입니다. 하물며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검관(檢官 검시관 )의 도리로서 혹시 숨은 무엇이 있을까 끝까지 캐 보려고 한 것은 필연적인 형세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때에 목매달아 죽은 나무에 대해 가까운 곳을 피하고 먼 곳을 대는 등 진술이 여러 번 뒤바뀌니, 묵은 의심 새 의심이 무진무진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삼검의 실인에 있어 갑자기 ‘피핍’이란 단안이 덧붙여진 까닭입니다.
이른바 ‘피핍’이란 말은 겉으로 얼핏 보기에는 긴요하고 무게 있는 말인 듯 보이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따져 보면 이렇다 할 형적이 없는 것입니다. 혹 뜻밖에 의심을 받거나 일이 당초 마음먹은 것과 어긋날 경우에, 빈정대는 것도 아니요 나무라는 것도 아니나 오는 말이 가시가 돋쳐, 낯이 뜨거워지고 속이 타서 더더욱 답답하고 원통할 때가 있습니다. 이 쓰라리고 괴로운 심경을 누가 이렇게 만든 것이겠습니까마는, 조급하고 경망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자살하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른바 ‘피핍’이란 것은 왕왕 이와 같은 것으로서, 원인이야 비록 남 때문이지만 죽음은 스스로 자행한 것이니, 지금 비록 ‘피핍’이란 두 글자를 덧붙인다 해도 옥사의 진상에는 별로 가중될 것이 없습니다.
이제 의심 갈 만한 자취를 들어 용서할 만한 정상을 참작해 본다면, 남편과 아내, 장인과 사위 사이에 일찍이 눈 부라리고 말다툼한 적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무슨 소 찾는 일로 인하여 어찌 암암리에 살해할 리가 있겠습니까? 또 그 의복을 망가뜨리고 문기(文記)를 찢어 버린 것을 보면 비록 정을 아예 끊어 버린 듯도 하지만, 상놈들이란 분이 나면 들이받고 치고 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적인 일인지라 조금 지나 술을 받아 함께 취토록 마시고 한이불 속에 자고 나면 묵은 감정은 하마 풀리고 옛 정이 되살아나는 법인데, 졸지에 스스로 목매달았다는 것은 실로 상정이 아닌 것입니다.
대저 장손의 자결은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새로 사들일 논값은 얼마이며, 전에 기르던 소값은 얼마인가, 딴 여자에게 장가가던 첫날밤부터 온갖 계획이 이 소 한 마리에 달려 있었는데, 급기야 소를 찾으러 와서는 비단 당초의 계획을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무한한 비웃음과 꾸지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속담에 이른바 ‘내 칼도 남의 칼집에 들어가면 빼기 어렵다’는 격이라, 분김에 멍청한 꾀를 내어 죽어 버리겠다는 말로 남을 위협하겠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농지거리한 것이 마침내 참말로 되어 버린 것일 수가 있습니다. 둘째, 남의 권고를 받아들여 애써 딴 여자를 보았으나 소까지 몰고 이 집을 아주 떠난다는 것은 제 본심이 아니었으며, 전에 살던 곳을 잊기가 어려워 옛집을 다시 찾아갔으나 두루 질책만 쏟아져 몸 둘 곳이 없었으며, 옛날을 그리는 정은 심중에 간절했지만 성깔 사납고 투정 많은 계집은 돌아보는 척도 않아서 한밤중에 서성대고 기다려도 그림자도 발자국 소리도 영영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속담에 이른바 ‘게도 잃고 구럭도 잃었다’는 격이어서, 떠나기도 어렵고 있기도 어려워 원망과 후회가 한꺼번에 몰려드니 술김에 슬픈 생각이 일어나서 차라리 죽어 버리고 만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정상을 헤아려 보면 반드시 이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또한 정세를 들어 말하더라도 귀삼은 늙고 잔약한 몸이요, 장손은 힘 있는 장정이니, 설사 귀삼이 정말로 몰래 해칠 계획을 지녔더라도 장손이 어찌 남에게 제 목을 매라고 내맡기고 손 하나 까딱 않으며 그대로 얽어매였겠습니까. 설혹 늑살(勒殺 목 졸라 죽임 )이라 한다면 어찌하여 빨리 구렁에 밀어넣어 그 흔적을 없애 버리지 않고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시친(屍親 피살자의 친척 )에게 급급히 통부(通訃 부고 )를 했겠으며, 기필코 검험하고 말 관가에 허둥지둥 알리어 자진해서 원범이 되어 스스로 죽을 땅에 들어갔겠습니까? 통탄할 바는 목매단 장소를 끝내 곧이곧대로 말하지 아니하여 옥사의 진상에 의혹을 자아내게 한 것인데, 오직 저 어리석은 백성이 헛되이 사중구생(死中求生)의 꾀를 내어 이와 같이 어물어물한 것이요, 장손이 제 손으로 목 매어 제가 죽은 것만은 매한가지입니다. 등유목(燈油木)에 목을 매었건 도리목(都里木)에 목을 매었건 간에 그 죄에는 그다지 경중의 차이가 있지 않은 것인데, 즉시 장소를 바른대로 대지 않은 것은 그 행동을 따져 보면 비록 교활하고 흉악한 듯하나 그 정상을 헤아려 보면 그다지 괴이히 여길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건은 오직 가볍게 처벌하는 것이 진실로 옥사를 신중히 하는 도리가 되는 것이니, 재량하여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주-D001] 의옥(疑獄) : 죄상이 뚜렷하지 아니하여 죄의 유무를 판명하기 어려운 사건을 이른다.
[주-D002] 활투두(活套頭)인지 사투두(死套頭)인지 : 투두(套頭)는 자살할 때 쓰는 올가미를 말한다. 활투두는 올가미의 고를 움직여 죄었다 늦추었다 할 수 있어 살아날 수 있는 것이고, 사투두는 고를 단단히 매어 옴짝달싹할 수 없으므로 죽게 되는 것이다.
[주-D003] 문기(文記) : 소유권이나 기타 권리를 증명하는 문서로, 문권(文券)이라고도 한다.
[주-D004] 등유목(燈油木) : 나무로 만든 등잔걸이를 가리키는 듯하다.
[주-D005] 도리목(都里木) : 서까래를 받치는 도리로 쓰이는 재목을 말한다.
[주-D006] 옥사를 …… 도리 : 원문은 ‘審恤之道’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에는 ‘審愼之道’로 되어 있다. 앞의 편지에서도 ‘審愼之道’라 하였을 뿐 아니라 이는 재판과 관련하여 흔히 쓰는 표현이므로, 이에 따라 고쳐서 번역하였다.
함양(咸陽) 장수원(張水元)의 의옥(疑獄)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함양 사람 장수원이 한조롱(韓鳥籠)이란 계집을 치사한 사건에 있어 초검과 복검이 모두 스스로 물에 빠진 것으로 실인을 삼았으나, 조서를 반복하여 살펴보고 그 정실(情實)을 참작해 보면, 조롱이 수원에게 위협과 핍박을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처녀의 몸으로 남의 곁방살이를 하는 처지라, 비록 몹시 부끄럽고 분하지만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고 형편이 너무나 궁하여 어디 갈 곳조차 없는지라 저 맑고 깨끗한 못만이 그녀의 몸을 깨끗이 보존할 만한 곳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비록 수원이 드잡이하여 밀어 넣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순결을 지키는 처녀로 하여금 이렇게 물에 빠져 죽는 원한을 품게 만든 것이 그놈이 아니고 누구란 말입니까! 그 정상을 추궁해 가면 그놈이 어떻게 제 목숨을 내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후 진술에서 그 말이 여러 번 변했으니 이는 교활하고 완악한 습성이 그 강포한 자취를 은폐하려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강간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곁방의 처녀가 무엇 때문에 끌려갔겠으며, 제 놈이 끌어가지 않았으면 조롱의 머리털이 어찌하여 뽑혔겠으며, 지극히 분통한 일이 아니라면 뽑힌 머리털을 무엇 때문에 꼭 간직해 두었겠습니까. 이 한 줌의 머리털을 남겨 어린 남동생에게 울며 부탁한 것은 한편으로는 그날에 몸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증거로 삼자는 것이요, 또 한편으로는 죽은 뒤에라도 원한을 씻을 자료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이른바 ‘이를 잡다가 유혹하고, 길쌈을 하다 말고 유혹했다’거나 ‘호미를 전해 주러 왔다가 싸우고, 버선을 잃어 버려 싸웠다’고 한 진술들은 이 옥사에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들입니다. 수원이 강포한 짓을 한 증거물은 오직 이 머리털이요, 조롱이 죽도록 항거한 자취도 오직 이 머리털이니, 몸은 비록 골백번 으깨지더라도 이 머리털이 남아 있는 이상 보잘것없는 이 머리카락 하나로도 옥사의 전체를 단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심하는 자리에서 형적만을 가지고 따져, 죽게 된 책임을 본인에게 돌리고 상대에게는 그저 위협과 핍박을 한 죄율에 그치고 말았으니, 이로써 판결을 끝낸다면 어찌 죽은 자의 울분을 조금이나마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정상을 참작하고 행동을 헤아려 보면 위협과 핍박을 했다는 죄율은 마침내 너무도 경한 편이니, 중한 편을 따라 논하여 강간미수의 죄율로 처벌하는 것이 아마도 적절할 듯합니다.
두 편의 글 모두 진상을 깊이 파고들었으며 문장을 지은 것이 시원스럽고 유창하다.
밀양(密陽)의 의옥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밀양부(密陽府)의 통인(通引) 윤양준(尹良俊)이 중 돈수(頓守)를 치사한 사건에 대하여 초검 및 복검이 모두 매를 맞은 것으로 실인을 삼았는데, 이 옥사는 시친(屍親)의 고발이 없는 이상, 법리로 따져 보면 관에서 지레 검시한 것은 벌써 옥사의 체통에 어긋난 것입니다. 다만 절의 중이 유리(由吏)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 두서없이 돈수의 일을 언급했는데 거기에,
“지난번 돈수가 통인청(通引廳)에서 형벌로부터 풀려날 때 절곤(折困)을 당하여 그로 인해 병사했으니 이런 견해가 있다는 것을 알아 두시오.”
라고 했다는 말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그 말이 아주 모호하기는 하지만 ‘절곤(折困)’이란 두 글자는 극히 수상합니다. 더구나 그 사단이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관속(官屬)에게서 일어난 일이므로, ‘병사했다’는 대목은 미처 자상히 살펴보지도 않고 먼저 ‘절곤’이란 말에만 마음이 동요했던 것입니다. 뒤이어, 혐의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바로 가서 초검을 시행한 것인데, 급기야 본 사건을 규명해 보니 몇 대의 태형(笞刑)으로 위엄을 보인 데 지나지 않았은즉, ‘절곤’ 두 글자는 저절로 허망한 고발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초에 이 ‘절곤’이란 말로 인해서 검험을 했던 것이나 끝내 그 말뜻을 알 수 없었으며, 매 맞은 자국밖에 다른 상처나 병환의 증거를 찾아보았으나 늘 실상에 들어맞지 않은 듯하였으며, 끝까지 조사하려고 해도 더 이상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우왕좌왕 옥사가 이루어지고 꼭 맺혀 풀리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무릇 타박상을 입어 목숨을 잃은 경우는 반드시 행흉(行凶)한 기장(器仗 도구 )이 있기 마련이니, 행흉한 기장이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내면 이 옥사가 당장에 해결될 것입니다. 하관(下官 연암 자신을 가리킴 )의 얕은 소견으로는 ‘절곤’ 두 글자는 바로 ‘결곤(決棍)’의 오기인 듯합니다. 결곤이건 결태(決笞)건 볼기를 치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그다지 용처(用處)의 경중을 따질 것이 못 됩니다. ‘결(決)’을 ‘절(折)’로 바꾸어 발음하는 것은 상놈들의 통폐요, ‘곤(棍)’을 ‘곤(困)’으로 잘못 기록한 것은 무식한 소치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보는 자의 선입견이 절납(折拉 부러뜨림 )의 ‘절(折)’ 자에 놀라고, 곤박(困迫 곤욕을 보임 )의 ‘곤(困)’ 자에 더욱 현혹된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 통인들이 다 같이 했다고 나서자 주범과 종범을 분별하기 어렵게 되니, 마치 힘을 모아 함께 두들겨 패서 낭자하게 상처를 입힌 일이 있는 것처럼 되었으며, 뭇 중놈들이 일제히 병을 앓았다고 칭하여 증언들이 덩달아 똑같고 보면, 그들이 관속을 두려워하여 숙의한 끝에 입을 맞춘 것이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러기에 전후의 검관들이 감히 그 정상을 경솔히 논하지 못한 것이요, 여러 해를 두고 결말을 못 지은 것도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다만 옥사의 진상을 들어 판단한다면 15대의 태형으로 어찌 목숨을 잃을 리가 있으며, 더욱이 두서너 곳의 상처도 급소가 아니지 않습니까? 대개 각 고을의 통인들이 종이 자르는 판자를 장척(長尺)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그놈들 두목이 항용 쓰는 볼기 치는 막대인즉, 통인들이 이것으로써 벌을 시행하는데 더러는 속여서 ‘태(笞)’라고도 합니다. 중들이 이 장척을 잘못 보고서 혹시 ‘곤(棍)’으로 오인했을 수도 있는 것이니, 상식적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검관이 된 사람들은 마땅히 먼저 그 ‘절곤’이 무슨 말인가를 신문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결곤’의 오기였다면, 또한 마땅히 그것이 과연 곤장(棍杖)이었는지 태장(笞杖)이었는지를 자상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곤’이 아니고 ‘태’라 말한다면, 또한 마땅히 그 크기가 어떤 종류인가를 자상히 분별하여, 매를 맞은 자국과 대조해 본다면 판자에 맞은 흔적인지 태를 맞은 흔적인지를 그 자리에서 저절로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서야 태형의 여부와 병환의 진위(眞僞)도 따라서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진술들을 참조하고 검증해 보면, ‘조갈증이 나서 물을 찾다가 계단에서 떨어져 돌에 부딪쳤다’느니 ‘방을 되게 달구어 땀을 내느라 이렇게 짓무르게 되었다’느니 하였는데, 열병으로 미친 증상이 생기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요, 달군 구들에 살이 데어 부풀어 오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지금 이 실인으로 단지 매 맞은 것만을 장부에 기록한다면 옥사의 체통이 서지 못할 것이며, 원범을 유독 수번(首番)에게만 뒤집어씌운다면 더욱 원통한 죄가 될 것입니다. 재량하소서.
진상을 깊이 파고들었다.
[주-D001] 밀양(密陽)의 …… 답함 :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 이전(吏典) 어중조(馭衆條)에 이 편지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지통통인(紙筒通引)이 절에서 매달 만들어 바치는 지물(紙物)을 퇴짜 놓는 것으로 위세를 부리니 불가불 단속해야 한다면서, 산청현(山淸縣)의 수통인(首通引)이 지장(紙匠) 승려를 곤장 쳐 죽였으나 검안(檢案)에 ‘결곤(決棍)’이 ‘절곤(折困)’으로 잘못 기록되는 바람에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했던 옥사를 연암이 마침내 해결했다고 하였다.
[주-D002] 유리(由吏) : 수령의 해유(解由)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아전, 즉 지방 고을의 이방 아전을 이른다.
[주-D003] 결곤이건 결태(決笞)건 : 조선 시대의 형(刑)에는 죄의 경중과 형구(刑具)에 따라 태형(笞刑), 장형(杖刑), 곤형(棍刑)의 세 종류가 있었다. 결곤은 가장 가혹한 곤형을 가하는 것이고 결태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태형을 가하는 것이다.
[주-D004] 결(決)을 …… 소치입니다 : 원문은 ‘折決易音 常漢之通患 困棍誤書 無識之所致’인데, 《목민심서》 이전 어중조(馭衆條)에 인용된 구절은 ‘決折通音 常漢之依例 棍困誤讀 無識之所致’로 되어 있다.
[주-D005] 수번(首番) : 《목민심서》 이전 어중조의 내용으로 미루어, 통인의 우두머리인 수통인(首通引)을 가리키는 듯하다. 통인의 임무 중의 하나는 당직을 서는 수번(守番)이었다.
진정(賑政)에 대해 단성 현감(丹城縣監) 이후(李侯)에게 답함
보내 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봄날이 쌀쌀한데 정무에 분망하신 몸이 더욱 안중(安重)하시다니 우러르고 그리던 마음이 매우 흐뭇합니다.
그런데 보내 주신 편지에,
“예(禮)라 예라 이르지만, 기민(飢民) 구제를 이른 것이겠는가?”
라는 대문이 있으니, 말이 어긋날 뿐더러 생각지 못함이 어찌 그리도 심합니까! 지난번에 갈 길이 바빠서 긴 이야기는 못 하고, 다만 예(禮)를 진정에도 적용할 만하다고 말했지요. 말이 비록 두서를 갖추지 못했지만 스스로 짐작이 있어서 한 말이었는데, 밑도 끝도 없을 뿐더러 갑자기 한꺼번에 끄집어내었으니 그대는 본래의 사정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갑자기 해괴하게 듣고는 도리어 그 말을 구실로 삼아 나를 오활하고 괴벽스러워 실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비웃었습니다. 오활한 점이 진실로 나에게 있으니 마음에 달게 받겠습니다마는, 만약 “기민 구제가 예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이르신다면 어찌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아! 군자가 정치를 하면 어디에 가도 예 아닌 것이 없는데, 하물며 진정은 국가를 다스리는 큰 정사요 많은 목숨이 매여 있는 것이 아닙니까. 비록 ‘운한(雲漢)’을 상고해도 관련 예의를 상고할 길 없고, 향음주례(鄕飮酒禮)가 화락한 데 비해 비참한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군사를 먹이는 것을 ‘호(犒)’라 하고 노인에게 잔치 베푸는 것을 ‘양(養)’이라 하여 모두가 의식(儀式)이 있으니, 백성이 주리다 못해 달려들면 그 빈궁을 구해 주는 것을 진휼(賑恤)이라 하는데 유독 여기에만 규칙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온 고을 백성들을 모아 놓고서 먹이기로 하면 ‘호’와 같고, ‘양’이라는 점에서는 잔치와도 같은데, 남녀가 섞여 앉고 어른 아이가 자리를 다투니 어찌 이렇게 분별이 없고 질서가 없습니까?
지난번에 이러고저러고 말한 것은 주린 백성에게 읍양(揖讓)을 행하자는 말도 아니요, 진휼하는 마당에서 여수(旅酬)를 본받자는 것도 아닙니다. 쪽박으로 조두(俎豆 제기(祭器) )를 익히자는 말도 아니요, 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사하(肆夏)에 맞추어 걸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누더기 옷을 입은 사람에게 섭자(攝齊)를 힘쓰라는 것도 아니요, 부황 난 사람에게 유철(流歠)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개 예의란 일이 생기기 전에 방지하자는 것이요, 법률이란 일이 생긴 뒤에 금하자는 것인데, 저 기민들이 얼굴빛은 부어터지고 의복은 남루하며 바른손에는 쪽박을 들고 왼손에는 전대를 들고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모양으로 허리 굽혀 관정(官庭)에 나아오고 있으니, 그들이 아무리 불법적인 행동을 한다 해도 누가 능히 금지하겠습니까.
지난번 진주(晉州)를 가는 길에 귀하의 고을을 경유하였습니다. 마침 진휼하는 날이라 수천 수백 명의 주린 백성들이 문 부근에 모여들었는데, 관아의 문은 안으로 닫히고 문지기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말을 세우고 한참 동안 기다렸으나 통과할 길이 없었습니다. 뭇 사내 뭇 계집들은 늙은이를 부축하거나 어린애를 이끌고, 혹은 관문을 두들기며 크게 외치기도 하고 혹은 이러니저러니 떠들어 대며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 외모를 보면 모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숨넘어가는 형상이었으나 그 뜻을 살피면 모두 다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둠을 믿고 당당한 기세가 있었습니다.
얼마 후 하찮은 교졸(校卒)이 와서 뭇 백성에게 타이르기를, “새벽부터 죽을 끓이는데 솥은 크고 쌀은 많고 하여 무르익자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우선 잠깐만 기다려 주면 곧 불러들이겠다.”고 하자, 군중이 성을 내며 일제히 일어나 떼로 덤벼들어 그 교졸을 두드려 대어 옷을 찢고 갓을 부수고 머리칼을 잡아당기고 수염을 뽑는 등 못 하는 짓이 없었으며, 한 사람은 갑자기 제가 제 코를 쳐서 피를 내어 낯에 바르고 큰소리로 “사람 죽인다!” 외치니 뭇 백성들이 모두 함께 외치기를, “아전이 주린 백성을 친다!” 했습니다.
저들이 비록 사정이 급하여 진휼을 받자고 문 열기를 재촉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나, 그 야료 꾸미는 것을 보면 이만저만 놀랍고 두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후에 손님〔客 연암을 가리킴〕을 맞기 위해 문이 드디어 열리자 군중들이 뒤죽박죽으로 한꺼번에 관정에 밀어닥쳤으며, 이어서 음식을 제공하니 그 시끄러움은 저절로 사라졌습니다.
이날 광경은 문밖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대는 듣도 보도 못 했을 것입니다. 피차 인사를 차린 뒤에, 그대가 먼저 아까 문을 닫은 이유에 대해,
“백성들 사는 곳이 각각 멀고 가까움이 있으므로 여기 오는 것도 선후가 있어서, 먼저 온 자는 부엌을 에워싸고 불을 쪼이며 끓이는 죽이 절반도 안 익어서 뭇 쪽박으로 지레 휘저어 대니 온 솥이 무너질 지경이므로, 부득불 문을 잠그고 백성을 못 들어오게 하여 일제히 모이기를 기다린 것이지 감히 손님을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라고 말하여, 마침내 주인과 손님이 서로 한바탕 웃었지요. 그런데 아까 목도한 광경을 거론하지 않았던 것은, 비단 이야기가 장황한 데다 좌중에 진정을 감찰하는 감영(監營)의 비장(裨將)이 있어 처음 보는 그 사람에게까지 번거롭게 알릴 필요가 없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굶주린 백성은 비유컨대 오랜 병에 시달린 아이와 같아서, 떼를 쓰고 어리광을 부리면 그 부모된 자는 아무쪼록 잘 타일러서 그 뜻을 순순히 받아 줄 따름이지, 어찌 그때마다 꾸짖고 나무라기를 평소와 같이 할 수야 있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자(孔子)는 말씀하기를 “정령(政令)으로써 이끌고 형법으로써 단속하면 백성은 죄를 면하기는 하나 염치가 없어지고, 도덕으로써 이끌고 예의로써 단속하면 염치도 가지려니와 바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법률로 백성을 이기기보다 차라리 예의로 굴복시키는 것이 낫다 하겠으니, 왜 그렇겠습니까? 법률로 강요하자면 형벌과 위엄이 뒤를 따르게 되고, 예의를 사용하게 되면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앞을 서게 됩니다. 백성 중에 만약 위엄과 형벌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내가 법률을 무서워하는 자에게는 이길 수가 있지만 무서워하지 않는 자에겐 도리어 지게 되는 것인데, 더더구나 주림을 빙자하고서 마구 대드는 자에게 있어서이겠습니까?
무릇 인지상정으로 부끄러이 여기는 것은 가난과 굶주림보다 더함이 없고 잠시 동안은 한 사발 국물에도 염치를 차리는 법입니다. 이래서 내가 그들의 고유한 본성을 따라서, 그들을 위해 혐의를 사지 않게 남녀를 가르고 어른 아이의 순서에 따라 줄을 만들고 사족(士族)과 서민의 명분을 구별하여, 질서 정연하게 서로 넘어서지 못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있는 힘을 다해 양식을 달라고 부르짖지만 그것이 제 본심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무섭게 하는 것은 부끄럽게 만드는 것만 못하고, 억눌러 이기는 것은 순순히 굴복하게 하는 것만 못하니, 이른바 ‘죄는 면하되 염치가 없어진다’는 것은 이김을 두고 이름이요, ‘염치도 가지려니와 바르게 된다’는 것은 굴복시킴을 두고 이름입니다.
지금 영남은 온 도가 불행히도 대흉년을 만나서 대대적인 진휼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고을 수령된 자는 힘을 다해 곡식을 마련하고 정성을 다하여 기민을 가려 뽑는 마당에, 어느 누가 감히 백성을 어린아이 돌보듯이 하는 조정의 성대한 마음을 본받고 우리 임금의 근심 걱정하시는 마음의 만의 하나나마 보답하려 아니 하오리까! 더더구나 잘잘못을 가려 승진시키고 벌주는 일이 이 한 번의 거행에 달렸으니, 두려워하고 삼가고 경계하고 독려하다 보면, 명예를 구하는 겉치레로 돌아가기도 쉽고, 위로하고 구호하기를 너무 지나치게 하다가 도리어 감사할 줄 모른다는 한탄을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공진(公賑)이든 사진(私賑)이든 뒷날에 계속하기 어려움을 생각지도 아니하고, 공이 되든 죄가 되든 대부분 목전의 미봉책만 힘씁니다. 준비한 곡물도 많고 구제한 민중도 많으며 모든 진정에서 잘못한 고을이 없다 할지라도, 다만 두려운 것은 진정을 철회한 뒤입니다. 겨우 연명해 가던 남은 목숨을 무슨 수로 구제하며, 은혜만 바라고 사는 안이한 풍속을 장차 무슨 법률로 억누른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말한 예의란 것은 통상적인 진휼 방식을 버리고 별도로 다른 법식을 마련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쌍히 여기고 어루만져 주는 속에서도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나눠 주고 먹여 주기 전에 먼저 그 염치부터 길러서, 반드시 남녀는 자리를 구분하고 어른 아이는 자리를 따로 하고 사족은 앞에 앉히고 서민은 그 아래에 자리 잡게 하여 각각 제자리를 찾고 서로 차례를 어지럽히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리 되면 죽을 나눠 줄 때 남자는 왼편으로 여자는 바른편으로 되어 요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질서 정연할 것이며, 늙은이는 앞서고 젊은이는 뒤로 서서 요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양하게 될 것이며, 곡식을 나눠 줄 때에 앞에 있는 자가 먼저 받는다 해서 시새우지 않으며 아래에 있는 자가 차례를 기다려도 다투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말한 저 예의란 것이요 기민 구제를 계속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선생이 평소에 육 선공(陸宣公 육지(陸贄) )의 글을 몹시 즐기셨는데, 지금 이 글을 읽어 보니 특히 자양(紫陽 주자(朱子) )의 글과도 닮았다. 자양 부자(紫陽夫子)도 역시 선공(宣公)의 글을 좋아하셨던가?
[주-D001] 진정(賑政)에 …… 답함 :
진정은 흉년을 만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정사(政事)를 말한다. 단성은 안의현 이웃에 있던 고을로 현재는 산청군에 속한 면이다.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이후(李侯)’ 다음에 ‘영조(榮祚)’라 하여 단성 현감의 이름을 밝혀 놓았다. 《과정록(過庭錄)》에 의하면, 1793년(정조 17) 봄에 연암은 자신의 녹봉을 털어 진정을 베풀 때 예법에 맞추어 질서를 유지했으며, 그 뒤에 이웃 고을 수령과 진정을 논한 장문의 편지가 문집에 실려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 편지를 가리킨다. 또한 이 편지를 읽은 사람들은 진정을 논한 주자(朱子)의 글과 같은 법도가 있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주-D002] 예(禮)라 …… 것이겠는가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가 “예라 예라 이르지만, 옥백(玉帛)을 이른 것이겠는가?〔禮云禮云 玉帛云乎哉〕”라고 한 말을 흉내낸 것이다. 공자의 말은 형식적으로 예물만 갖추고 진정한 예가 결여된 경우를 비판한 것이었는데, 단성 현감은 기민 구제의 경우에는 구태여 예를 갖출 것이 없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주-D003] 비웃었습니다 :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그다음에 ‘그 형세가 실로 그러하고’란 뜻의 ‘其勢固然’ 4자가 더 있다.
[주-D004] 운한(雲漢) :
《시경》 대아(大雅) 운한을 가리킨다. 이 시는 주(周) 나라 때 큰 가뭄을 만나 하늘에 기우제를 올리며 불렀던 노래라 한다.
[주-D005] 향음주례(鄕飮酒禮)가 …… 있습니다 :
원문은 ‘視諸鄕飮 而舒慘有間’인데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舒慘’이 ‘舒疾’로 되어 있다. 그러면 ‘향음주례가 여유 있는 데 비해 서두르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주-D006] 먹이기로 …… 같은데 :
원문은 ‘以饋則似犒 以養則同讌’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以犒則似 以養則同’으로, 《하풍죽로당집》에는 ‘以犒則似師 以養則同燕’으로 되어 있다.
[주-D007] 읍양(揖讓) :
향음주례에서 주인과 손님이 상견례를 할 때, 두 손을 맞잡고 인사하는 읍(揖)을 세 번하고 계단에 먼저 오르기를 세 번 양보하는 예법을 말한다.
[주-D008] 여수(旅酬) : 향음주례에서 헌작(獻爵)의 예식이 끝난 다음에 손님들이 장유(長幼)의 순서에 따라 돌아가며 술잔을 받는 것을 말한다.
[주-D009] 사하(肆夏) : 주(周) 나라 때의 궁중음악인 구하(九夏) 중의 한 곡으로, 사자(死者) 대신 제사를 받는 시(尸)가 묘문(廟門)에 들어설 때와 나갈 때 이를 연주했다고 한다. 《周禮 春官 大司樂》 또한 《예기》 옥조(玉藻)에 옛날의 군자는 “채제(采齊)의 곡에 맞추어 달려가고 사하(肆夏)의 곡에 맞추어 걸었다.〔趨以采齊 行以肆夏〕”고 하였다.
[주-D010] 섭자(攝齊) : 당(堂)에 오를 때 옷자락을 끌어당김으로써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함과 동시에 공경의 뜻을 표하는 예법을 말한다.
[주-D011] 유철(流歠)하지 말라 : 《예기》 곡례(曲禮)에 기록된 식사 예법의 하나로, 염치없어 보이므로 죽이나 국물을 단번에 후루룩 들이켜지 말라는 뜻이다.
[주-D012] 정령(政令)으로써 …… 된다 : 《논어》 위정(爲政)에 나온다.
[주-D013] 잠시 …… 법입니다 : 원문은 ‘斯須之廉 在於豆羹’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평상시는 형을 공경하되 잠시 동안은 향리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다.〔庸敬在兄 斯須之敬 在鄕人〕”라고 하였고, “밥 한 그릇과 국 한 사발을 얻으면 살고 못 얻으면 죽을지라도, 야단치면서 주면 길 가던 사람도 받지 않으며 발로 차서 주면 거지도 더럽다고 여긴다.〔一簞食 一豆羹 得之則生 弗得則死 嘑爾而與之 行道之人弗受 蹴爾而與之 乞人不屑也〕” 하였다.
[주-D014] 그들을 위해 : 원문은 ‘爲之’인데,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與之’로 되어 있다.
[주-D015] 공진(公賑)이든 사진(私賑)이든 : 원문은 ‘公私之間’인데, 공진은 공곡(公穀 : 관곡)으로 기민을 구제하는 것이고 사진은 수령이 자신의 봉급을 털어 기민을 구제하는 것이다.
[주-D016] 대체(大體)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몸에는 귀한 부분과 천한 부분이 있고 중대한 부분과 사소한 부분이 있다. 사소한 부분으로써 중대한 부분을 해치지 말고 천한 부분으로써 귀한 부분을 해치지 말지니, 사소한 부분을 기르는 자는 소인이 되고 중대한 부분을 기르는 자는 대인이 된다.”고 하였고, “대체(大體)를 따르는 자는 대인이 되고 소체(小體)를 따르는 자는 소인이 된다.”고 하였다. 집주(集註)에 몸에서 천하고 사소한 부분은 입과 배요, 귀하고 중대한 부분은 마음과 뜻이라 하였다. 대체는 천부적인 도덕심, 소체는 눈과 귀 등의 감각기관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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