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소개 박광일
31운동과 북촌일대 천도교 대교당
스코필드박사의 31운동사진 태극키가 보이지 않음 급박하게 진행
파리강화회의 열강의 태도 변화 기대 신한청년당과 김규식 파견
여운영 과 월슨의 중국특사 찰스 크레인
28 동경 독립선언 송계백 모자에 숨겨 국내 반입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와 상의 천도교 오세창 권동진과 상의,손병희에 연결
동학혁명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와 연결 숭동교회
전국적 만세운동 동일한 지침 축하의미의 만세구호 서울역에서 각지방으로
역사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조명함으로서 새로운 의미들을 추출해 내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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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mdiwfkYmk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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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역사 작가 박광일입니다 이렇게 온라인으로 남아 여러분들 뵙게 되어서 0:14
반갑습니다 사실은 여러분들하고 강의실에서 또 0:20
역사 현장에서 어떤 역사에 관련된 얘기들을 나누는 것이 0:25
훨씬 더 효과적이긴 하겠지만 또 이렇게 하다보면 시간과 어떻게 보면 노력을 0:31
드릴 수 있는 부분들이 있어서 나름의 효과는 있지 않을까 0:37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제가 0:42
이야기를 나눌 주제는 역사 현장에 대한 내용들을 어떻게 살펴볼 것인가라는 부분이 될 것 0:49
같은데요 사실 3.1운동과 관련해서 천도교 대교당을 중심으로 하는 북촌 0:56
일대는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장소 하나하나가 1:03
모두 의미가 있지만 여기에 어떤 이야기를 넣어서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1:09
따라서 듣는 분들은 조금 더 그 역사 현실에 훨씬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겁니다 1:16
그렇기 때문에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은 유일한 어떤 해설 방식이 아니라 1:23
참고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해설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을 하시면 될 것 같고요 제가 1:31
구성에서 말씀드리는 이야기의 방식을 참고하셔서 다른 역사 현장 또 다른 역사 사건에 1:38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여러분들께 드리는 이야기는 1:45
어쩌면 조금 식상할 수도 있는 3.1운동의 기획자들이라는 주제로 1:50
얘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조금 식상할 수 있다라고 말씀을 드렸던 이유는 1:56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서 많은 행사들이 있었고 또 2:01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3.1운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지식을 알고 있기 때문에 2:07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제가이 주제를 선정한 이유는 그것이 가지고 2:12
있는 역사적 의미를 이렇게도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또 그 전파 과정에서 이런 의미로도 전달해 볼 수 2:19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고요 무엇보다도 기획자 그러니까 3.1운동 전체를 2:25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기획자라는 곳에 포커스를 맞춘다면 2:31
3.1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모습 그리고 그들이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고 2:37
실제로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 나갔는지 그 내용을 살펴본다는 점에서 2:43
삼일운동 전체로 보면은 최초의 그렇지만 아주 일부에 해당하는 내용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2:50
여러분들과 함께이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 합니다 사실 삼일운동과 2:55
관련해서 널리 알려진이 모습들을 보게 되면 여러분들이 아 이제 이전과 달라진 3:04
무언가가 느껴지실 것 같습니다 지금이 장면을 보면은 아무래도 3:10
뭔가 사람들이 나서서 그 다음에 우리의 어떤 새로운 어떤 변화를 꿈꾸고 있는 그런 모습들을 여기서 3:17
짐작해 볼 수가 있는데요 흥미로운 부분들은이 장면을 보면은 3:23
태극기가 보이지 않는다라는 거죠 이게 최초의 3.1운동 장면의 모습 가운데 3:29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가 찍은 사진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3:34
태극기가 없었던 이유는 그만큼 3.1운동 과정이 굉장히 급박하고 그 다음에 빠르게 3:40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준비를 미처 할 틈이 없었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3:47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이렇게 급박하게 빠르게 움직였는지 그 역사적 맥락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3:56
널리 알려진 것처럼 3일 운동이라고 하는 것들이 발생하게 된 배경 가운데 하나는 바로 4:02
당시 세계사적인 분위기 속에서 제국주의 열강이 약소 민족에 대한 4:08
지원을 약속했던 우드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와 4:14
관련이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어떻게 보면 4:19
선진 열강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프랑스와 그 다음에 거기에 끼어서 4:25
새로운 어떤 세력을 펼치려고 하는 미국이 자신의 세력을 펼치기 위해서 4:31
각축을 벌였는데 그때 후발주자였던 미국은 약손 민족은 스스로의 운명을 4:37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이 얘기를 했던 겁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4:43
단순한 강대국 지도자의 언급 정도로 보이지만 1919년 4:50
당시로 시계를 돌려본다면이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4:56
열광하고 또 그것에 기대어서 뭔가 일을 펼칠 수 있겠구나 5:01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짐작해 보시면 1910년 5:07
국권 피탈에 이르기까지 어떤 열강도 우리를 도와준 적이 없습니다 그런 5:15
면에서 비록 후발주자이긴 하지만 막 어떻게 보면 세계적으로 영향을 5:21
끼치고 있는 미국의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5:26
뭔가 해볼만하다라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다만 그 애칭의 5:31
그러니까 한국에서 만약에 어떤 열강들의 모이는 5:36
딸이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또 우리가 민족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인다면 5:43
지원해 줄 것인가라는 부분들에 대한 의문은 충분히 가질 수 있는데요 제일 좋은 방법은 그 내용을 5:50
직접 확인하는 것이 될 겁니다 보통은 3.1운동하면 이런 얘기를 듣고 아 그래 우리도 할 5:57
수 있다라고 하면서 여기저기서 어떻게 보면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을 부분이 6:03
있겠지만 그런 마음이야 자연이 생기겠지만 그것이 운동으로 또 6:09
실질적인 어떤 시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되는데요 그런 면에서 6:14
뭔가 확실한 중심이 필요했던 것 같고 그 중심은이 우드로 윌슨의 내용을 6:20
어떻게 보면은 진심인지를 확인할 필요를 느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이 6:27
분 몽양 여운영입니다 당시 상해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침 6:33
중국의 특사로 왔던 찰스 크레인이라는 임무를 만나려고 6:38
노력을 했습니다 찰스 크레인은 윌슨의 오른팔로 알려진 동지이면서 사실은 6:44
신북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인데요 그와 직접 만나서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미국의 뜻 더 6:50
나아가 한국이 독립에 대한 의지를 표명할 때 미국은 지원할 의사가 있는지를 확인할 6:56
필요를 느꼈던 거고요 어렵사리 미국 목사를 통해서이 주선한 만남의 7:01
이루어지게 됩니다 거기서 영훈이 형은 이렇게 얘기를 하죠 7:07
한국이 독립의 의지를 표명하고 그 다음에 파리 강화에 대표를 파견하면 미국은 지지할 의사가 있느냐 7:13
사실 찰스 스크린은 중국 문제 때문에 즉 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임에도 7:19
불구하고 일본이 교주만 일대를 선동반도 일대를 7:24
차지한 것에 대한 어떤 그 심기적인 것들을 무마계에서 왔던 부분이어서 여러 부분에 좋은 얘기를 많이 하고 7:31
다닐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지만 7:36
한편으로 미국의 특사가 그런 얘기를 직접 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7:42
실마리를 가지고 이제 독립에 대한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한 그리고 일제를 7:47
몰아내기 위한 어떤 실행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제일 먼저 생각했던 것이 7:54
바로 파리 강화 회의에 신한 청년단의 이름으로 대표를 8:01
파견하는 것이었는데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김규식 선생 우사 김규식 선생을 8:07
파견을 합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을 같이 파견을 해서 우리 조선은 대한민국은 8:14
그때까지는 조선이고 대한제국이겠죠 조선은 대한제국은 일제의 8:21
침탈을 거부하고 독립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라는 것들을 8:27
표명하고 그런 것들에 대해서 열강들의 지지를 원한다는 얘기를 8:32
회의해서 하려고 대표단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죠 8:39
김유식 선생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사실은 정식으로 8:44
대표로서 회의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만약에 참여를 한다고 하더라도 8:50
다른 나라의 대표들은 이렇게 물어볼 겁니다 당신의 나라 8:55
국민들이 독립을 원한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9:02
그러면은 아마 굉장히 분노를 하겠죠 무슨 말입니까 우리 국민들은 우리 9:07
백성들은 독립을 원합니다라고 얘기를 하겠죠 9:13
그런데 증거는요 지금처럼 여러가지 통신이라든지 언론이 발달하지 9:20
않으시절 무엇보다도 일제의 선전이 우선이던 시절에 우리의 이와 같은 9:26
뜻을 여러 열강들에게 다른 나라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굉장히 9:31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사실은 영원영 선생은 9:36
하나 더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국내를 포함해서 우리 동포가 있는 9:42
곳이라면 일본의 침략에 일본의 식민지배에 반대한다는 9:48
뜻을 명확히 드러낼 필요가 있다라고 봤던 거죠 그런 면에서 9:53
각 지역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던 독립에 대한 의지를 9:59
실제로 드러내는 것이 필요했다고 보였고요 상해에 있던 여러 사람들을 일본으로 중국으로 영훈형 10:07
자신은 연해주러 그리고 또 본토로 사람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10:13
나서 지금 시기가 되었고 그러니까 우리가 움직일 때입니다라는 것들을 10:20
각 지역의 대표들에게 전달을 하게 됩니다 다른 10:26
지역의 대표들 역시 그 소식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어떤 하나의 움직임은 또 하나 10:34
새롭게 뭔가 일을 꾸밀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가 있는데요 아무래도 여기에 대해서 빠르게 10:41
움직였던 그룹은 아무래도 학생 그룹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10:48
3.1운동 이전에 28독립선언이 도쿄에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펼쳐지게 10:55
되는데요 이러한 움직임은 이미 2월 8일 날 독립선언을 했던 얘기는 1월 11:02
초 중순에 그와 같은 움직임이 있었구나라는 것들을 짐작해 볼 수가 있는 거고요 그런 가운데 우리에게는 11:11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인 송계백이라는 인물이 11:16
등장을 합니다이 손기백이라고 하는 인물이 당시 와세다 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11:24
당시 대학생들 보면은 모자를 쓰고 그 다음에 이제 교복 같은 걸 입고 그 다음에 가운을 거치게 되죠 11:31
그런데 그 모자 위에다가 28독립선언서의 초안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11:37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 이제 북촌이 등장을 하게 되는데요 11:44
송계백은 자신의 선배 교사로 있었던 중앙학교 지금의 11:49
중앙고등학교 숙직식을 찾아갑니다 학생들은 이렇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11:56
지금 선생님들은 어떻게 계획을 하고 계십니까 사실은 여기저기서 뭔가 12:03
해봐야겠다라는 생각들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이렇게 구체적으로 독립선언서의 초안까지 가지고 온 12:11
도쿄 유학생의 모습은이 지역에 있었던 지사들의 마음을 12:17
조금 급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현상윤은이 얘기를 듣고 12:23
당시 중앙학교 교장이었던 송진호 선생에게 찾아가게 되는 거죠 지금 이런 일이 12:29
있으니 저희도 뭔가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자 송진호 선생이 나름 독립에 대한 12:35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조금 더 큰 규모의 사건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12:42
조금 더 정치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보았고요 당시 보성 학교 교장이었던 최린을 12:48
만나러 갑니다 그래서 최린 역시이 얘기를 들었을 때 이것은 몇몇 12:56
교육자 또는 몇몇 명만가가 움직일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큰 규모의 움직임이 13:03
필요하다고 느꼈고요 여기에 대해서 당시 천도교의 중진이었던 오세창 13:09
권동진 두 분에게이 얘기를 전달하게 되고 역시 오세창 권동진 선생은이 이야기를 13:17
당시 의암 손병희 선생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13:23
아마이 이야기를 듣고 한편으로는 기뻤으면서도 13:28
한편으로는 굉장히 고심을 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 13:34
사람들에게 얘기를 합니다 이와 같이 큰 일은 13:41
지도자가 중요합니다 그러니 그 지도자가 될 사람을 찾아서 13:47
큰 일을 벌이는게 좋겠습니다라고 얘기를 하게 되죠 13:52
당시에 명만가라고 하는 김윤식 그 다음에 사실은 이미 친일파로 돌아섰던 박영효 13:59
그 다음에 공식 비공식적으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지만 14:05
그들은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안 하겠습니다 14:10
그들 중에 합리적이라고 했던 윤치호 같은 경우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14:16
만세운동을 벌인다고 그때까지는 사실은 만세운동인지 잘 모릅니다 14:21
시위를 한다고 선언을 한다고 독립이 되겠습니다 14:27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3.1운동 시위를 한다고 14:33
독립이 올까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아 14:40
한국인들이 이렇게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 거부를 하고 반대를 하고 있으니 이제 14:47
물러나야겠다라고 생각을 할까요 사실 14:53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은 인과관계를 찾는 거지만 한편으로는 그 14:58
인과 관계의 배경 속에 있는 사람들의 어떻게 보면 의지를 15:04
끌어내는 작업 그래서 처음에는 굉장히 미약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점차 커지게 되고 그것 15:11
자체로는 실패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조금 더 긴 관점에서 보면은 사람들에게 이전에 볼 수 없었던 15:18
새로운 생각을 심어준다면 그것은 성공이 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15:25
성공과 실패를 사실은 역사에서 쉽게 얘기할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한데요 15:30
결국은 현실적으로 볼 때는 어떤 면에서는 윤초의 말이 15:36
맞았을 수도 있습니다 실망한 상태로 돌아온 이들은 다시 15:43
손병희 선생님과 함께 그 얘기를 합니다 이때 굉장히 어려운 결정을 하죠 15:52
우리가 약속했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15:58
결정이었을 겁니다 지금도 3.1운동과 관련해서 16:04
여러 난관들이 있었다라는 평가 그것이 현실에 옮겨지기까지 16:11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이때 이익 결정은 굉장히 16:17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동학 천도교 1905년 일진해와 16:25
결별하고 그리고 가까스로 어떻게 보면 민족 최대의 종단으로 16:30
성장했던이 천도교가 다시 독립운동 일제의 16:37
낯선다면 그 위험이라고 하는 것들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을 겁니다 16:44
무엇보다도 나중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49
이름을 올렸던 천도교 대표 15명 중에 상당수가 동학 혁명당시 16:55
참여했던 분들이라는 점에서 그분들 기억 속에 참혹함 그리고 안타까움 17:01
이런 것들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을 때였던 거죠 그런데 이때 17:08
손병희 선생은 그러면 우리가 중심에 서겠습니다 대신 이전과 다른 17:17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혼자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17:22
그래서 지금 우리가 종교 교단이니 같이 연합할 수 있는 17:30
다른 교단과 함께함으로써 그 힘을 키워야겠다라고 생각을 하고 이것을 17:39
실천에 옮기기를 요청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따라서 다시 최림 등은 굉장히 17:45
빠르게 움직이게 되면서 이승훈 선생을 포함해서 함태형 이런 분들과 함께 17:51
기독교 측과 접촉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 측 역시 이미 17:57
감리교가 됐던 장로교가 됐든 자신들의 새로 자신들의 계획에 맞춰서 나름의 18:03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상황이었던 거죠 무엇보다도 교단에서 천도교가 압도적이었다는 18:09
면에서 감리교동과 장로교단 같은 경우는 사실은 여기에 뭔가 18:15
끌려 들어갈 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이 중간에서 여러 가지 비용 18:22
문제라든지 그 다음에 행정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을 천도계 측에서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18:28
명분을 만들어 내게 되고 더 나아가서 함께 하는 것에 대한 대의를 같이 18:34
만들어 갔다는 점은 굉장히 중요할 수가 있습니다 자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뭐 장로교 18:40
감리교를 따로 얘기를 했지만 크게 보면 개신교 기독교로 이해를 하고 있는데요 18:46
천도교와 기독교의 움직임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한 부분이 있었을 겁니다 18:52
그런데 북촌에서 중앙고등학교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유심사가 있었던 터가 있습니다 바로 18:58
한용운 선생이 운영하던 출판사이지요 여기에서 다시 19:04
만에 한용운 선생과 함께 불교의 당시 지도자였던 용성스님이 같이 참여를 하게 됨으로써 19:13
천도교 기독교 불교 가 함께하는 모습을 만들게 되었던 거죠 19:22
만약에 생각을 이제 상상을 해보는 겁니다 3일 운동이 천도교회 운동이었거나 19:28
아니면 기독교의 독립운동 또는 불교계의 독립운동이었다면 19:34
우리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굉장히 크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우리 19:41
민족의 운동이라고 얘기를 하는데는 약간의 어려움은 있지 않을까 이런 19:47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그런데 이것이 둘도 아니고 두 개의 교단도 아니고 19:53
세계의 교단이 함께 했다는 점에서 우리는이 19:58
움직임을 민족 전체의 움직임으로 치환을 하더라도 문제가 없다라고 20:05
느낄 수 있었고요 그랬던 덕분에 사실은 1919년을 대한민국 20:11
국민이라면 그리고 당대에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20:16
기념할 수 있는 특별한 날이 될 수 있었던 거죠 자 이렇게 이제 준비가 되었는데 20:23
사실은이 운동이 조금 더 커지려면 하나의 그룹이 20:30
필요합니다 바로 학생들입니다 자 학생들이 20:37
움직이면 사실은 조금 더 뭔가 어려움이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것이 20:43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을 것 같고 조직에 있어서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라고 20:50
봤던 거죠 그래서 기독교 책을 중심으로 해서 학생들과의 움직임에 대해서 계속해서 20:57
얘기를 나누는데 사실 학생들은 어른과 같이 21:02
뭔가 큰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21:08
궁금하시다면 여러분들은 이미 어른이신 거죠 학생들은 어른하고 같이 안 하려고 21:14
하거든요네 뭘 하려고 하더라도 이거는 될까 저거는 안 될까 이렇게 고민하는 21:20
모습들이 어쩐 면에서 어떤 면에서는 학생들이 보기에 좀 답답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21:27
처음에 약간 어려운 조건을 걸었습니다 우리도 같이 참여를 하긴 하겠습니다만 21:34
네 지금 얘기를 들어보니 천도교 기독교 불교 같이 한다는데 그 세 21:40
종단이 힘을 합친다면 절도 참여를 하겠습니다 아마이 조건을 걸었을 때 설마 21:45
되겠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되었고 21:51
결국은 형식적으로나마 학생들이 같이 참여를 하게 됩니다이 공간 역시 지금의 21:57
승동교회 인사동 일대의 자리를 잡고 있으니 이거를 하나로 묶어서 22:02
이야기를 끌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떻게 22:08
보면 3.1운동에 큰 그림들이 이제 밑에서부터 조직이 되었다고 볼 수가 있는데요 사실은 22:15
이런 큰 일을 할 때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뭐냐면 어떤 22:20
날로 할 것이냐라는 부분이 될 겁니다 그런데 그 어떤 날이라고 하는 것들이 22:26
다행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어떤 관심을 두었던 날이 있었는데요 바로 22:33
1919년 3월 3일이 됩니다 바로 22:40
고종 황제의 국장 일이었던 거죠 국장이라고 하면은 비록 나라가 22:48
망했다고는 하지만 고종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22:53
지방에서 올라오고 또 모인다는 점에서 그런 면에서 그날이 굉장히 적절하게 23:00
그래서 한번 서울에서 큰 시위가 일어났지만 그것이 지방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 23:05
계기가 될 수 있다라고 판단을 했습니다 다만 국장 당일은 곤란하다 23:11
그래서 하루를 당겼더니 3월 2일 그랬더니 그날이 기독교 측에서는 23:16
일요일이라서 그래서 하루 더 당겨서 3월 1일 우리가 알고 있는 23:22
삼일절에 바탕이 되는 그 큰 어떤 움직임이 이날로 결정이 되게 됩니다 23:42
[음악] 23:52
[음악] 24:16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이 선언서가 없었다면 24:22
3일 운동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뜻을 모아서 일본에 대해서 독립의 24:29
의지를 표명한다는 대의는 모두가 공감하는 부분이지만 거기에서 각론은 24:34
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가 있는 거죠 예를 들어서 누군가는 무력 투쟁까지를 24:42
동반한 어떤 그런 어떤 투쟁을 생각을 할 거고요 누군가는 24:48
청원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봤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이 문서 여러분들이 24:56
기미독립선언서 또는 독립선언서가 뭐라고 부르는이 문서에 제목을 보면은 25:02
딱 세 글자 선언 섭니다 이 선언서라는 말은 25:09
그러니까 우리가 일제에 대해서 이제 독립을 선언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25:15
처음보다는 훨씬 더 강한 것이요 그리고 아직까지 무력을 동반하지는 않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25:21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3.1운동 전에 전국의 여러 곳에 25:27
7개 또는 8개 도시에 퍼져나가게 되고 나중에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에서이 25:33
선언서를 복사를 해서 계속해서 쓰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요 그런 25:39
면에서 볼 때 적전 일제 앞에서 우리 25:44
국민들이 분열되지 않고 첫 번째 그러니까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던 25:50
배경을이 선언서가 만들어내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이제 선언을 했는데 이제 25:57
공은 누구에게 넘어가냐면 일제에게 넘어가는 거죠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26:02
우리는 그 선언에 대해서 그 이후에 해당하는 26:08
행동망침 예를 들어 보호동 청산리 같은 무력투쟁을 행할 수도 있는 그런 부분이 26:14
만들어지게 되는 거죠 그런 면에서 사실은이 선언서를 작성했던 보성사 26:20
천도교의 연결되어 있었던 인쇄소 겸 출판사이기도 하죠 그 26:27
보성사는 이후에 불에 타서 사라지게 되는데 그 장소 역시 역사 현장으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고 26:35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이렇게 선언서까지 어렵게 인쇄가 되었는데요 26:40
이제 우리가 가야 될 곳은 바로 어디냐면 바로 탑골공원으로 26:46
갈 겁니다 그런데 탑골공원으로 갈 때 그때 사람들은 26:55
구호를 뭐라고 외쳤을까요네 그래서 5등은 자야 조선의 독립국인과 조선이 자주민임을 27:00
선언하노라 선언서가 쭉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끝에 보면은 만세 3천을 하죠 그럴 때 그 만사삼청이 27:07
9호 보면은 예를 들어서 대한독립 만세 그런데 27:13
당시 많은 사람들은 선언서에도 아니고 5등은 자의 아 조성 조선 사람으로 27:19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조선독립 만세 이런 얘기도 했을 겁니다 27:24
그런데 대한민국 조선인지 고민스럽다 이럴 때는 독립만세만 얘기를 했을 거고요 그 27:32
다음에 만약에 어떤 하나만 줄여서 얘기를 한다 그러면 만세라고 얘기를 했을 겁니다 27:39
그런데 만세라는 것이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27:45
어떤 나라의 시위에 구호가 만세일 수 있을까요 27:52
만세는 어떤 좋은 일이 있을 때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27:58
축하할 일을 외칠 때 부르는 말입니다 28:04
그런데 뜻밖에도이 만세가 서울에서도 평양에서도 대구에서도 부산에서도 모두 28:13
만세라고 불렀다는 거죠 그래서 3.1운동을 우리가 다른 말로 28:19
만세운동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거는 28:25
각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시위가 준비는 되었겠지만 28:30
적어도 지침은 모두 동일하게 내려갔다라는 증거이기도 하고요 더 나아가서 28:36
만세라고 하는 것들은 우리가 독립을 축하한다라는 의미 또 28:41
포함을 하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는 특별한 계기를 만들었다고 볼 수가 28:46
있습니다이 역시 누군가가 기획을 했고 사람들을 통해서 28:52
천도교가 되었던 기독교가 되었던 불교가 되었던 각 지역의 지도자들에게 전파가 2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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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 모임이 나타납니다 하나는네 29:10
탑골공원 그래서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있고요 민족대표 33인 그날 오지 못했던 29:15
내분을 빼고는 29분이 퇴화간에 모입니다 29:20
원래 전날까지는 같이 가기로 했지만 이제 같이 29:26
함께 있을 경우 이른바 일제가 그것을 빌미로 이거를 폭동이라든지 29:32
내란이라든지 이렇게 꾸밀 가능성이 있다고 봐서 위험성이 있다라고 판단을 29:38
해서 분리를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태화관에서는 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에 대한 축배를 29:46
들게 되고요 그 다음에 학생과 시민들은 탑골공원에 모여서 만세를 하게 29:52
되는데요 여기에서 이제 그 중요한 모습들이 보여집니다 바로 뭐냐면 29:59
양쪽에서 모두 주체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가 있고 더 흥미로운 건 탑골공원 그래서 누가 30:07
독립선언서를 읽었고 더 나가서 어떻게 탁골공원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일제히 30:13
경찰과 헌병들이 움직이지 않았을까 이런 부분을 생각해 볼 수가 있는데요 사실은 30:19
어떤 면에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태화관에 민족대표가 모여 있었던 덕분에 30:24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쏠리고 그러다 보니까 탑골공원에 있던 사람들은 비교적 30:31
편안하게 독립선언서를 읽고 만세운동을 하게 됨으로써 30:37
본격적으로 가두 시위를 할 수 있는 바탕이 만들어졌던 겁니다 30:43
사실 공원 전근대 역사에서 우리가 볼 수 없었던 30:49
영역입니다 저 탑골공원은 원래 대한제국의 정책 가운데 하나로서 30:55
서울 안에 만들어준 어떻게 보면 황제의 하사품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31:01
그런데 그 황제의 화산품이었던이 공원 안에서 시민들은 31:07
스스로 자신의 권리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거고요 31:12
그렇기 때문에이 같은 곳에 있었던 역사가 서로 다른 어떤 뉘앙스를 보여주는 것도 31:19
굉장히 흥미로운 관점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자 보통은 여기까지 우리가 3.1운동 31:25
서울에 있었던 만선동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요 그렇다면 시위대는 31:31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일본 헌병 경찰의 제지가 없었으니 31:37
움직였을 겁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여러 자료를 통해서 보면은 몇 개의 31:44
통로로 움직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지만 공통적으로 방문했던 곳이 31:49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덕수궁이었습니다 덕수궁 3월 3일 국장 31:56
앞에 두고 고종에게 예를 표하기 위해서 갔던 거였습니다 32:01
근데 문을 안 열어져요 비집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다시 나왔습니다 32:07
몇몇 사람들이 그랬겠죠 실망했습니다 32:14
고정해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그 고정이 어떻게 보면 우리의 중심이 32:20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굉장히 화려했던 32:26
덕수궁 안에 모습을 보고 우리의 생각은 어쩌면 잘못되었을 수 32:31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고요 이미 여러 독립운동가들은 32:38
왕실 황실이 우리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을 32:45
하고 있었던 참이었는데 이것이 합쳐지게 되는 계기가 32:50
뜻밖에도 3일 운동이었다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그런 면에서 덕수궁 역시 32:55
중요한 답사 장소가 될 수 있는데요 그리고 나서 덕수궁 주변에 있었던 곳 33:02
예를 들어서 미국 그 다음에 프랑스 영국 이때는 공사관이 아니라 33:07
영상 업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외교권을 빼앗겼고 나라도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33:13
그렇지만 이들에게 외교관에게 편지를 쓰고 또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합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지금이 반세 운동은 33:22
파리에가 있는 파리 강화에가 있는 우리 대표들에게 우리가 독립에 대한 열정이 있음을 33:28
각국 대표들에게 표현하는 하나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거죠 그래서 33:35
특히 프랑스에 영사관에 가서 얘기를 하죠 우리 대표가 프랑스에 있으니 그 뜻을 잘 전달해 33:42
달라 프랑스 본국의 잘 전달해 달라는 얘기를 하게 됩니다 33:48
운동 을 일으켰던 참여했던 사람들의 33:54
시선 굉장히 넓습니다 우리는 이게 누가 만세운동을 버리자고 34:03
하니까 그냥 뜻이 없이 같이 하는구나라고 해서 34:08
동참했을 거라고 생각을 하지만 물론 그런 분들도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만세운동을 하니까 나라가 독립이 된 34:15
줄 알고 나온 분들도 계시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34:22
뜻이 세계의 중심에 전달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34:27
뜻으로 시위를 하고 만세운동을 펼쳤다는 점은 당대 사람들의 인식에 34:33
포기 어떠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가 있을 것 같고요 그 인식의 폭은 34:39
짐작하시겠지만 민족대표 그리고 그 이전에 영훈영 그리고 세계의 어떤 상황들이 34:45
시시각각 누군가를 통해서 전달되었음을 알 수가 있는 거죠 34:51
자 이렇게 해서 시위대가 각국의 외교관들을 방문했다면 최종 목표는 34:57
어디가 될까요 네 총독부입니다 35:03
1919년 당시 총독부는 짐작하시는 것처럼 남산에 있었습니다 35:11
1926년 지금의 경복궁에 있는 총독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남산이 35:16
통치에 중심이었던 거죠이 즈음 이제 비로소 35:22
만세를 부르던 한국인들이 제지를 그리고 35:27
체포를 그 다음에 폭행을 당하기 시작합니다네 이제 그런 면에서 볼 때 35:33
이제 삼일 운동의 어떤 최종 목표 우리는 너희들에게 일제에게 우리의 독립을 선언하러 35:41
왔다라는 것들을 명확하게 표명하는 과정들이 3일 운동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그 기획자들을 35:49
통해서 전달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가 있는 거고요 자 이렇게 해서 3.1운동은 35:55
어떤 면에서는 3월 1일에 저녁은 이제 저물고 있었습니다 36:03
윤치호의 말처럼 3일 운동은 어쩌면 36:08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독립에 대한 워크 어떤 대답도 그리고 열강들에게서 36:14
독립을 지원하겠다는 어떤 목소리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죠 36:20
그런데 사람들이 인식하고 자각하기를 이제이 나라가 36:26
누구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의 나라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은 36:35
굉장히 큰 의미가 있을 것 같고요 실제로 학생들은 3월 1일 이후에 3월 5일에서 대규모에 집회를 열게 36:44
됩니다 훨씬 더 많은 민중들이 참여했던 집회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그리고이 36:50
서울역 일대에서 즉 당시는 남대문 정거장이라고 불렀던 이곳에서 만세 운동을 펼쳤던 많은 사람들은 다시 36:58
기차를 타고 지방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37:04
서울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소식은 37:09
금방 퍼졌을 거고 또 앞에서 말씀드렸던 천도교와 기독교와 불교의 네트워크를 37:15
통해서 이미 상당 부분에 소식들이 또 전달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37:20
제2의 제3의 만세운동을 펼치는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가 있고요 그런 37:27
면에서이 기차 교통 이런 부분들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사실 3.1운동 37:33
당시에 3월 1일 만세운동을 펼쳤던 도시들은 경위성과 경원선에 있었던 원산 의주 뭐 개성 이런 어떤 37:40
공간들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또 3.1운동 독립운동에 대해서 새로운 방식의 접근이 가능한 부분들이 37:46
있는데요 이런 부분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엇보다 흥미로운 부분들은 어쩌면 37:55
이제이 만세운동이 선언을 했는데 받아들여지지를 않았다면 우리는 그럼 38:02
그 다음에 우리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결정을 해야 됩니다 몇 38:07
가지 고민이 있었겠죠 일단 일제가 호락호락하게 받아들이진 않을거다 38:13
그러면 모든 방법 무장 투쟁을 포함하는 모든 방법을 38:19
강구해야 할거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독립운동의 중추 그 다음에 만주 38:24
연해주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들을 하나로 끌어모으는 작업을 해야 될 겁니다 두 번째 38:31
의병이 될 거냐 독립군이 될 거냐를 결정을 해야겠죠 의병은 왕이나 황제를 위해서 싸우는 그래서 38:38
설사 외적을 몰아낸다고 하더라도 그 권력을 왕이나 황제에게 돌려주는 38:44
존재입니다 그런데 독립군은 이 나라를 되찾으면 우리가 38:50
통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볼 겁니다 그런 점에서 38:56
우리는 전혀 다른 방식 단군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적이 없었던 39:04
왕을 버립니다 39:10
이제 대세는 더 이상 왕의 의지하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 우리나라를 만들고 39:17
이끌어 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하게 3일 운동은 하나의 민족 39:24
운동을 넘어서서 시대의 변화를 그리고 이제까지 있었던 역사의 패러다임을 39:30
새롭게 바꾸는 작업이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그런 모습들을 39:36
앞에서 말씀드렸던 북촌 덕수궁 서울역 이런 공간에서 39:41
찾아본다면 그 내용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조금 더 새롭게 그 시대의 역사를 39:48
조금 더 실감나게 인식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런 부분들을 여러분들이 같이 39:55
다른 분들과 함께 공유하고 또 살펴보신다면 또 다음에 40:00
다른 분들에게 조금 더 흥미롭고 재미있는 우리 역사에 관한 그리고 동학에 관련된 40:07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 운동에 관련된 얘기들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40:14
사실 저는 우리 근대사 독립운동 그 다음에 동학 천도교 이런 40:20
얘기를 볼 때 뿌듯한 부분들은 누구를 해코지에서 우리가 이익을 보려고 했던 부분들이 40:26
없었다는 점 그 부분이 굉장히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40:33
단지 우리는 그냥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보편적인 가치를 염두에 두고 40:39
그것을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들을이 운동의 중심에 40:44
넣었다라고 볼 수가 있고요 운동은 굉장히 흥미로운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40:52
처음에는 1%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각 속에 그리고 많은 지도자가 그 운동에 40:59
영향을 받았다면 사실은 이제는 그로부터 새로운 41:04
역사가 시작될 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때는 3.1운동이 41:10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후 많은 사람들을 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지침이 되었다는 점에서 41:16
1945년에 결과는 어떤 면에서는 1919년부터 41:22
시작되었다라고 볼 수 있는 점 그런 부분들을 참고해서 여러분들이 41:27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41:33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 이상으로 3일운동이 기획자들이라는 중심으로 41:40
여러분들과 함께 역사 현장에 재구성에 대한 얘기를 나눠 보았는데요 여러분들은 41:47
훨씬 더 많은 자세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더 재미있게 이야기를 만드실 41:53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어떤 모습들을 기대하면서 저는 여기서 오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42:00
감사합니다
한국어 (자동 생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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