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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은 언제 오는가
이 홍사
왜 이렇게, 아귀가 맞지 않을까?
거짓말은 댓바람에 손자에 증손자까지 생긴다고 했다. 첫 번째로 한 거짓말을 논리에 의해서 조리 있게 합리화시키고 앞뒤 아귀를 맞추려면, 또 다른 거짓말이 동원되고 또 그 거짓말을 합리화시키려면 또 다른 거짓말이...... 그렇게 새끼를 친다는 말인데, 그의 핑계라는 퍼즐은 아무리 맞추어도 아귀가 맞지 않는다.
첫 문장은 신이 내린다고 했다.
신이 내린 첫 문장은 이렇다.
‘나는 그녀, 김끅자여사를 혐오한다.’
경악할 문장이지만, 김끅자여사는 참지 못하는 데서 내가 혐오하는 짓거리가 비롯되었다. 죄는 참지 못하는 데서 생긴다고 했다. 그렇다. 죄? 참아야 한다. 그래야만 죄를 짓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로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신이 내린 이 첫 문장을 꿀꺽 삼켜야 하나?
말머리를 돌려서, 사람들은 돈이 많은 집에서 태어난 이를 두고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단언하는데, 틀린 말이다. 돈이 많은 것과 유복한 것은 엄격하고 엄정하게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유복한 가정이란 돈이 많은 가정도 있겠지만, 돈이 많은 가정에서도 유복하지 않은 집이 분명히 있을 거다.
그런데 그녀, 김끅자여사를 소개하면 반드시 붙는 수식어가 어릴 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당시에 식모도 있고 자가용으로 고급 승용차도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꼭 하는 것이다. 김끅자여사 나이 오십이 넘어 육십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그 김끅자여사가 어렸을 당시에 식모는 그렇더라도 자가용을 굴렸다면 돈이 많았다는 건 인정한다.
그렇게 차별화된 이력으로 그녀, 김끅자여사를 소개하곤 했다. 한군데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물어도 다 그 수식어부터 썼다. 급기야 그 소리가 지겨웠다.
‘야 인마! 유복한 것이랑, 돈이 많은 거는 분명히 달라!’
내가 생각하기에는 유복한 가정이 아니었다. 김끅자여사는 돈이 많은 집에서 태어나서 철이 들지 않고 현실과 이론의 괴리감을 모르는 여자라는 생각이 압도적이다. 없는 집 아이가 일찍 철이 든다는 말을 원칙으로 대입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세 번 결혼한 것과 이혼을 네 번 한 것은 원천적으로 다르다. 하늘과 땅의 차이다. 그 차이는 수치상으로 따지면 1의 차이이지만 속살을 들여다보면 곱빼기의 차이다. 내 주위의 여자 중에서 결혼을 세 번 한 여자는 더러 있다. 더러 보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혼을 네 번 한 여자는 김끅자여사뿐이다. 나는 김끅자여사를 알지만 김끅자여사는 나를 모를 것이다. 김끅자여사는 글을 쓰는 작가이기 때문에 그녀의 책을 읽어서 나는 안다고 하지만 실제는 일면식도 없다.
인생이란 게 뭐 별거 있나? 대충 붙어서 살지?
그녀가 내 눈앞에 나타날 때마다 하는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누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가?
아무도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받게 되는 건 부정적인 일이 발생할 때다. 내가 쫄딱 망하거나 죽으면 주위에서 관심을 받을 거다.
거 참 안됐네,
동정이 가는군.
오로지 주위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겠지만, 그녀가 나의 관심의 대상이 된 건 그녀의 이혼 이력이나 부정적인 영향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지독히도 싫어하는 말만 골라서 하기 때문이었다.
잊을만하면 어디서 그녀의 소식이 들려온다. 기분이 유쾌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를 슬슬 알아 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그녀는 참지 못한다. 참지 못하고 진정한 페미니스트답게 이혼을 해버린다. 그래서 나는 그녀, 김끅자여사를 혐오한다. 김끅자여사? 아니 정정하자. 작가니까 작가의 칭호를 붙여주자. 김끅자작가는 페미니스트다. 그녀가 작가라서 더 혐오한다. 아니다. 인식의 전환이란 이럴 때 필요한 것이다.
대인은 살고 소인배는 쓴다고 했다.
풀이하자면, 대인은 삶으로 타의 모범이 되어 보여주고 표창장을 받고 소인배는 자기가 행하지 못하는 걸 써서 보여주고 상장을 받는다. 그래서 작가는 소인배에 지나지 않는다.
소인배를 김끅자작가에게 붙이면 앞뒤가 또 맞지 않는다. 김끅자작가는 자신의 페미니즘 사상을 자신의 가정에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이혼을 네 번 했다. 그래서 결혼한 남편마다 하나씩 낳아서, 성이 다른 아이들 셋이나 부양하고 산다. 얼마나 철저하고, 처절하며, 치열한 작가 정신인가? 표창장을 열 번 받아 마땅하다.
정정하자. 오늘 신이 내린 문장을 대대적으로 정정하자.
‘나는 그녀, 김끅자작가를 혐오를 넘어 경멸한다.’
이렇게 수정할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나는 그녀, 김끅자작가를 존경한다.’
이렇게 바뀌는 것이다.
존경하는 김끅자작가는 요즘 바쁘다.
SNS에 글을 올리고 페이스북에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주장을 피력하느라 바쁘다. 그래서 가끔 어떤 페미니즘 성향이 짙은 언론에 보도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 김끅자작가의 얘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거나 지면을 엎어버린다. 솔직히 정서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내 취향에 안 맞아서 정서가 훼손되는 걸 어쩌라고?
자유민주국가에서 그런 자유도 없나?
채널을 돌릴 자유! 지면을 뒤집을 자유!
아하! 이제는 자유민주국가에서 자유라는 말을 삭제한다고 했지?
그럼 인민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건가?
그것도 아닌가?
누구는 말했다. 자유는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고 민주는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이동수단에 불과한 거라고, 가치와 수단을 명백히 직시하라고 했다.
적확한 말이지만, 김끅자작가를 이야기하다가 말이 잠시 엉뚱한 방향으로 샜다.
나는 무식해서, SNS도 할 줄 모르고 페이스북? 그런 것도 모른다. 그런 건, 장관 같은 고위직이나 김끅자작가처럼 유명작가들의 전유물로 생각한다. 내가 SNS에 글을 올린다고 어느 정신이 나가고 미쳐도, 한가하게 미친 작자가 들여다보겠는가? 오직 카톡이다. 친구들과 회춘용이라며 희한하고 야한 동영상을 돌려보는 게 고작이다. 무식한 건 결코 자랑이 아니다. 그만하자.
내가 생각하기로는 김끅자작가는 성장 과정에서 부족함이나 불편함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게 약이 아니라 독이 되었던 일이다. 그녀는 서울 깍쟁이로 태어났다. 어떤 작가처럼 여공 출신이나, 돈이 없어 학업을 중단한 어느 시인 같은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배고픔이나 아쉬움은 모르고 자랐다는 것이다. 시대는 변해서 지금은 누구도 배고픔을 모른다.
배고픔? 허기?
그게 뭐야?
배고픔을 모르는 이들에게 설명하자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뭐가 먹고 싶고, 배가 쏙 들어간 게, 기운이 없고, 진땀이 난다? 배고픔을 도대체 말로 어떻게 형용을 해야 하나? 이거 정말 되게 어렵네!
에이! 간단하다. 배고파 봐라.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이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건 수치상으로 따질 수가 없는 까닭으로 설명하기가 참으로 힘이 든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툇마루 시렁에 얹어둔 보리쌀, 밥이 아니라 삶아서 밥을 할 때 섞을 보리쌀을 허겁지겁 마구 손으로 집어 먹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집어 먹다가 동생을 위해서 좀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나는 김끅자작가의 어린 시절 부유함을 상상하기란 힘들다. 상상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그런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몰랐기 때문일 거다. 지금에 와서야 배가 고프지 않으니 상상이란 게 가능하다. 김끅자작가가 어떻게 자랐는지.
내가 보리쌀 삶은 걸 손으로 허겁지겁 먹고 있던 시절에 김끅자작가는 운전사가 있는 자가용을 타고 간 유명 제과점에서 케이크 위에 얹힌 생크림을 포크로 걷어내고 있었겠지?
얘야! 그건 몸에 안 좋단다.
맞은 편에 앉은 중후한 어른이 그 말을 했을 테고.
이 말을 하니 생각나는 게 있다.
어린 시절 학교 도서실, 도서관이 아니라 분명 도서실이었는데, 오후반이 없는 2학년 1반 교실이었다. 그 교실은 오후에 전교생이 이용하는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책이 적어서 그런지 이용하는 학생이 별로 없었다. 거기서 읽은 동화가 생각난다. 어느 나라 공주가 병원에 입원했는데 파인애플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 병이 생긴 거라고 했는데, 파인애플이라는 글자는 외래어라 고딕으로 표기를 해놓았다. 파인애플이 어떻게 생긴 거지? 먹는 건 맞는 모양인데 과일인지 과자인지 오후 내내 생각했었다. 결과는 과자인지 과일인지 알아내지 못하고 동화 속의 공주처럼 병에 걸려서, 먹고 죽더라도 한번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그런 시골 소년에게 김끅자작가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지 못한다고 상상력이 빈약하다고 나무라는 건 무자비한 일이다.
그런 시골 소년이 자라서 배고픔을 벗어나고자 열심히 일을, 오로지 일을 하고 있을 적에 김끅자작가는 페미니즘에 관한 글을 썼다. 히트를 치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시대정신에 걸맞은 글이라고 논객들은 극찬에 찬사를 보냈고 책은 엄청 많이 팔렸다. 우리나라 국민이 그 정도로 독서광이라는 사실은 미처 몰랐던 일이다. 논객들의 찬사에 힘입어 책은 더 잘 팔렸고 김끅자작가는, 김! 끅! 자! 이름 세 글자만 대면 누구도 알아보는 유명작가 반열에 올랐고 새까만 시골 소년이었던 나는 열심히 일만 했다. 왜 둘을 자꾸 비교하는가? 짜증이 나겠지만 이유는 비슷한 세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굳이 나이를 따지자면 내가 김끅자작가보다 한두 살 많으니 동시대라 할 수 있겠다.
죽으라고 일을 하던 시골 소년은, 분배는 둘째치고 좀 수월하게 할 수 없나? 노동의 효율성에 대해 고민할 적에 김끅자작가는 성적 평등에 관심이 있었다. 생각하고 지향하는 정신적 수준, 격에 차이가 난다고 누가 삿대질을 하겠는가? 성장 과정이 다른데.
시골 소년은 억울했다.
그래서 일을 하는 짬짬이 공부를 했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페미니즘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자면, 여성의 사회적, 정치적, 법률적으로 권리의 확장을 주장하는 주의. 이런 정도다.
공부를 해보니 페미니즘이란 똥구멍으로 하는 말인지, 입으로 뀌는 방귀인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순전히 여성 이기적인 사상이었다. 이론은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하지만 실제로 요구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항상 이론과 현실의 괴리감이 존재하는 게 당연하다. 성장한 시골 소년이 남자라서 그런 게 아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A와 B가 있다.
서로 다른 이 두 종류는 A라서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게 마련이고, B라서 손해 보는 점과 득을 보는 점이 있는 건 당연한 이치다. 세상은 똑같을 수가 없으니까. 똑같다면 당연히 페미니즘 사상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겠지.
페미니즘 사상에서 여성을 A라고 치자.
분명 B라고 한다면 왜 하필 B냐고 따질 것 같아 A라고 친다. 그런 것까지 따지는 부류가 페미니스트들이다. 그걸 생각하니 참 쪼잔하다는 생각이 든다.
A라서 좋은 점은 그대로 차지하고, B라서 손해가 되는 점은 제외하고 득이 되는 점만을 차지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시위를 하는 것이다. 이론은 분명히 그렇지 않은데 현실은 그걸 원하는 것이다.
누나! 배고파! 라면 하나 끓여 줘!
내가 왜 네 라면을 끓여주는데? 여자라서?
그렇게 따지는 부류가 페미니스트이고, 누나가 지닌 논리다.
그다음에 페미니스트인 누나가 말한다. 허겁지겁 라면을 먹고 있는 동생에게.
여기 벽에 수건 걸게 못 하나만 박아줄래!
라면도 안 끓여 주면서 그걸 왜 내가 박아주는데?
남자라서 망치질을 잘하니까, 박아달라는 거지?
극단적인 예에 불과하지만, 이론적인 괴리와 현실적인 상황의 표본이 되는 대화다. 김끅자작가의 첫 번째 이혼 이유는 가사노동을 남편이 분담하지 않아서 과감하게 도장을 찍었단다. 그 소리를 들은 시골 소년은 기가 막혔다. 또 상상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김끅자작가도 가사노동에는 젬병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가사노동이란 걸 해본 적이 없을 거다. 식모가 있었다니 설거지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자신의 팬티조차도 빨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잠깐! 내가 지금 김끅자작가를 공격하고 있나?
아니다. 분명히 아니다. 공격이 아니라, 남자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고, 이론과 현실이 엄정하게 다르다. 그걸 모르는, 직시하지 못 하는 여자라고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남자로서 성토하는 것이다.
절대로 씹거나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처절한 성토임을 주장하며 밝혀둔다.
밖에 나가서 돈 버는 일은 남자라는 이유로 당연히 남편이 해야 하고, 집안에 들어와서 가사노동은 반드시 분담해야 한다면 이제 페미니즘 논리에는 맞는지 몰라도 양성평등 논리의 잣대로 측정을 하면 분명히 어긋나게 되어 있다. 그런 일로 싸우게 되면 당연히 없던 일로 해야지. 없던 일이란 이혼밖에 더 있어?
내가 아이들을 넷이나 키우면서 관찰한 바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는 엄격히 다르다. 그렇게 교육을 받은 게 아니라 본성부터 다르다. 아주 어릴 적에 딸들은 장난감으로 차나 공을 주면 가지고 놀지 않는다. 어디서 찾아내는지 예쁜 인형이나 꽃을 가지고 논다. 반면 아들 녀석은 어땠는가? 인형을 던져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자동차 장난감이나 공을 찾는다. 교육이란 사상이 개입되기 전부터 이렇게 다르다. 그게 본성이고 본질이다.
남녀는 본질부터 다른 게 아니라 객관적인 시각도 다르다.
아들은 앉아있으면 듬직하게 보이며 주변 공간이 무게가 잡히고, 딸은 앉아있으면 예쁘게 보이면서 주위가 따스하게 여겨진다. 그렇게 보기부터 다른 것을 같은 잣대로 봐야 한다고 우기면, 잘못된 눈알을 빼내고 색다른 눈알을 집어넣으라는 말일 것이다.
집에서 개수대에 돌아서서 설거지하고 있을 시골 소년의 사랑하는 아내도 대학물을 먹어서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좀 안다. 좀 아는 게 아니고 그런 이론이 있다는 건 안다. 가끔 그런 책도 읽는다. 김끅자작가의 책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런 부류의 책을 읽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성인이 된 시골 소년은 세탁기도 돌릴 줄 모르는 인간이다. 촌놈이라서 그런 게 분명 아니다.
전혀 해보지 않았다.
해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가사노동에 있어서 분담하지 않는다고 이혼은커녕, 그런 일로 부부싸움조차도 해본 적이 없다. 김끅자작가에 비교하면 아내는 아마도 바보인 모양이다.
세탁기뿐만이 아니라 텔레비전 채널도 내가 돌리지 않는다. 몇 번을 보자! 그렇게 말하면 텔레비전 가까이 앉은 아내가 보던 드라마를 그만두고 채널을 돌려준다. 바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있다.
좋은 학교를 나와서 제대로 배우고 교양있는 사람은 폭력성이 없을 줄 알았어요.
김끅자작가의 두 번째 이혼 사유다.
모스크바 여행을 가서 호텔에서 맞고 퍼렇게 멍이 든 눈에 색조 화장을 하고 모스크바 박물관 구경을 혼자서 했어요. 맞은 것도 억울한데 여행조차도 망치면 더 억울하잖아요?
맞는 말이다.
비싼 경비를 들여서 여행을 가서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억울한 일이지. 그것보다 억울한 일이 어디 있어?
그 말에는 분명히 동의한다. 한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화해를 하고 같이 밥 먹고 팔짱을 끼고 갔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세상에 완벽한 남자란 없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우리 집의 아내는 내 허락 없이 내가 벌어다 놓은 재정을, 생활비라는 명목으로 축내는 완벽하지 않은 여자다. 완벽한 사람을 찾는 게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이혼을 하지 않고 참고 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조금 게으른 모양이다. 이혼이라는 게 왜 그렇게 번거로운 거 같고 하기가 귀찮을까? 내 사정을 아는지 진실은 게으르다고 김끅자작가는 말했다.
게으르지 않은 김끅자작가는 완벽한 남자를 찾으려고 두 번째 이혼을 강행했다. 이혼이란, ‘나 좋은 사람 생겼어. 결혼하고 싶어. 이혼해줘!’ 이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절차여야 한다고 당당히 말했던가? 김끅자작가는 이혼소송을 하면서, 이혼절차를 밟으며 글을 쓰고 발표도 꾸준히 했다. 참 부지런하고 역량이 있는 작가다. 그뿐인가. 정치판이나 정책에 대해서도 어떤 매체를 통해 자신이 지닌 생각과 입장을 강력히 피력했다. 작가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부정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김끅자작가는 자신이 완벽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란 없다. 완벽한 사람을 찾는 것보다, 착한 도둑놈, 불교를 믿는 예수, 논리적인 비논리를 찾는 게 빠르겠다.
완벽한 남편감을 찾지 말고 부부간에 좀 모자라면 설명을 해주고 그래도 안 되면 모자라는 부분을 조금 보완해주고 그래도 안 되면 포기하고 좀 참고 살면 되지.
그건 순전히 무식한 나의 생각이고, 김끅자작가는 절대로 그러지 않았다.
세 번째 결혼하고는 사사건건 남편의 간섭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출도 스스로 자제했다고 했다. 어쩌다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누구를 만났는지 미주알고주알 얘기해야만 했다고 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앞에서 두 번의 이혼 이력이 있으니까, 세 번째 남편은 이 여자가 또 이혼당할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거 아닌가 의심을 했겠지. 나는 그 마음이 이해가 가는데 같은 이불을 덮고 자면서 그 속마음을 왜 몰랐을까?
그게 굉장히 이상하다는 듯이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듯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또 이혼했다. 역시 완벽한 사람이 아니야. 완벽한 사람을 찾아야 해. 이혼은 이제 식은 죽 먹기다. 이혼절차 같은 건 김끅자작가의 머릿속에 소상히 숙지시켜 두었던 모양이다. 마치 이사하면서 주민등록의 주소지 옮기듯이 간단한 일로 여겨진 모양이다.
자라면서 한 번도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때리고 맞는다? 그게 무척이나 낯설고 이상하다고 했다. 그렇게 폭력을 당하는 주인공이 되었으니 너무도 이상하고 당혹스러운 건 당연하겠지. 그런데 혹시 맞을 짓을 한 건 없겠지? 김끅자작가가 얼마나 교양있는 작가인데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을 거야.
김끅자여사는 맞거나 때리는 걸 평생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없이 배가 고프게 사는 시골에서는 사흘이 멀다 하고 싸움판이었다. 마른 논에 물을 먼저 대려고 어른끼리 주먹다짐을 하다가 삽으로 내리찍고, 삶은 보리쌀을 더 먹으려고 마주 앉은 형의 보리쌀이 든 턱을 주먹으로 올려치고, 그렇게 치고, 박고, 싸움은 일상이었다. 싸움이라는 용어 썼지 폭력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가정폭력이라는 말은 어쩐지 생소하다. 우리 부부도 가끔 싸움은 하지만 아내는 폭력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내도 시골에서 자란 촌년이라서 그런가?
김끅자작가가 정말 싸우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그게 더 이상했다. 일상에서 흔한 일인데.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더라도 달동네 같은 데 가면 허다한 일일 터인데?
이 김끅자작가가 정말 이혼을 네 번이나 했나?
아니야, 잘못된 질문이야. 정정하자.
정말 이혼을 네 번밖에 안 했나?
그녀의 SNS나 페이스북,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찾아보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그녀의 글을 나도 읽었다. SNS뿐만이 아니라 작품도 읽었다. 읽은 감상은 너무 건조하다는 것이다. 물기가 없었다. 촉촉이 젖은 수분이라곤 글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여류작가가 지닌 모성애나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정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김끅자작가가 요즘 가끔 언론에 등장한다. 논객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또 끅자라는 이름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극좌의 편향적인 발언을 하느라 오르내린다.
이 정부는 이상하다.
왜? 남녀 간의 갈등을 부추기며 선동할까?
나도 지금 선동당하고 있어서 김끅자작가를 이렇게 성토하는 것일까?
한일간의 갈등도 마찬가지다.
한일갈등, 남녀갈등, 노사갈등, 희한하게 국민을 극명하게 양분화시키는 정책을 펼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바탕에 무엇이 깔려있을까? 그래서 구하고자 하는 이득이 무엇일까?
페미니즘 영향과 진보 좌파, 그리고 노조는 어디론가 상통하는 구멍이 있다. 어디에 구멍이 있는지는 몰라도 물의 색깔은 비슷하다. 핍박받는 여성의 인권을 살리는 차원에서 정부의 주요 고관에 삼 할을 여성으로 채우겠다고 발표했다. 김끅자작가가 거기에 한자리, 다리를 걸치려고 자꾸 고개를 쳐드는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김끅자작가가 무슨 장관의 후보로 인사청문회 자리에 나앉는다? 어쩌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 정부는 워낙에 국민이 예측하지 못한 짓거리만 골라서 하는 정부니까.
김끅자작가는 정말 귀하게 자랐다는 건 인정한다.
옛말에 딸이 정말 귀하면 첩으로 주라고 했다.
거친 일은 본처가 하고 첩은 사랑만 받는다는 말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김끅자작가는 애당초 첩으로 갔어야 했다. 사랑을 받으며 가사노동을 하지 않고 혀가 빠지도록 일을 하는 본처를 보며 상대적 승리감에 도취 되거나, 본처 상대편 입장에 서서 대리 박탈감의 비애도 은근히 맛을 보며 더욱더 통쾌해하는 귀하디귀한 몸이어야 하는데, 정식으로 결혼을 해서 본처가 되어 그 귀하고 연약한 몸으로 폭력을 당하다니 말도 안 된다. 만약 첩으로 갔더라면 이혼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첩이라면, 결혼하지 않았는데 이혼을 어떻게 하느냐? 내가 지금 말이 되는 소리를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김끅자작가 얘기가 나와서 이성과 논리를 잃고 너무 흥분하는 건 아닌가? 나도 모르겠다.
김끅자작가는 요즘 비애를 맛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첩으로 가지 못해서 안타까워 그러는 것이나, 아니면 이혼을 할 대상을 다시 만나지 못해 맛보는 비애가 아니라 그토록 응원하고 존경하던 좌파의 유명인사가 드디어 검찰 소환을 받고 수사를 받기 때문일 거다. SNS를 통해 참 많은 응원과 격려의 말을 보냈던 김끅자작가가 아니었던가?
닷새만 참아라!
말문을 닫아라!
일부 몰지각한 보수 우파들은 진실이 드러난다고, 정의는 죽지 않았다고 함성을 보내지만 김끅자작가는 아니었다. 이런 굵직한 사건에 끼어들기를 엄청 좋아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작가로서의 책무나 사명, 개인의 이득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도 끼어들어 이름을 올린다. 작가로서 작품을 써서 김! 끅! 자! 이름 세자를 세상에 알리기는 어렵고 이렇게 은근슬쩍 거대한 사건에 편승해 이름을 알리자는 심보는, 혹시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편승은 이번, 한 번만이 아니었다.
지난번 어느 선출직으로 당선된 고위공직자가 유명 여배우와 스캔들에 휘말렸을 때도 그랬다. 워낙에 고위공직자고 유명 여배우의 치열한 공방이라 세간을 뜨겁게 달군 사건이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스캔들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선출직이라 이게 사건이 되어 실형을 받으면 당선이 무효가 되는 치명적이고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그래서 세간의 관심이 쏠렸었다.
그 여배우는 무엇을 얻겠다고 그 난리를 부렸는지 지금은 세간의 관심이 줄어들자 나조차도 잊어버린 사건인데 김끅자작가의 얘기가 나오니 문득 생각이 난 거다.
지금 생각하니 아마도 돈을 요구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욕을 했었다. 재미는 같이 봐놓고 돈을 요구하다니? 상대가 거지가 되고 노숙자가 되었어도 세상에 그렇게 알리겠는가?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쩌면 인간의 망각은 찬 편리한 것일 수도 있다. 늘 잊지 않고 그 생각을 하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 사건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관심도 없다.
왜 관심이 없을까?
남의 일이니까.
아무튼, 그 스캔들 공방전에서 김끅자작가가 등장했다. 평소에 그 여배우와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지 그 사건이 터지고 알았는지 나는 모르지만, 그녀는 등장했다.
이 사건에 이 김끅자작가가 왜 나와?
의아했는데, 그 여배우에게 은밀한 조언을 했다는 게 보도가 되었다.
그때 그 김끅자작가의 이력을 살펴보았다. 예전에는 이혼을 몇 번 해서 성이 다른 아이를 셋이나 데리고 산다고 대수롭잖게 알고 별 관심이 없었는데 확실히 이력을 파악한 것이었다. 그 조언이라는 내용을 듣고 나는 경악했다. 육성 파일이 유튜브를 통해 돌아다녔는데 은밀한 조언이란, 그 고위공직자의 신체 특정 부위에 특징을 판사에게 말하라는 내용이었다. 그게 확실한 증거가 된다고 했다. 그런 아름답지 못하고 거룩하지도 못한 송사에 여류작가가 왜 조신하게 있질 못하고 나설까?
나는 의구심이 일었다.
무슨 이득을 취하려고? 특정 부위에 점이 있다거나, 포경이라거나, 그 신체적 특성을 말하라는 휴대전화의 통화내용이 누구에게 도청이 되었는지, 그게 유튜브 등 언론에 퍼졌다. 육성 파일이었다.
그 육성 파일은 친구의 카톡을 통해 내 귀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그 육성 파일을 들려준 친구는 말했다.
“이 년, 이거 미친년 아니야? 이 미친년은 첫째 남편과 네 번째 남편의 좆이 어떻게 다르다고 말로 설명할 수가 있어? 좆도, 모르는 년이, 미친년 아니야!”
쌍소리로 광분하는 친구의 말을 듣고 나는 김끅자작가가 미친년은 아니고 남자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겠냐고 차분하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사건에서 김끅자작가는 스캔들의 목격자라면서 언론에 이름이 거론되었다.
이 여류작가가 왜 이런 사건에 휘말릴까? 빠져도 좋을 것을!
그때까지 나는 김끅자작가의 의도가 그냥 궁금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론에 밀려서 자리를 내놓은 고위공직자 가족 비리와 부정 축재의 재판에 김끅자작가가 자꾸 등장하는 것이다. 그 고위공직자는 극좌파의 성향을 지닌 인물로 보수 우파의 손가락질을 거칠게 받고 있던 인물이었는데 위선으로 점철된 인물이었다. 그 공직자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양립은 모순되지 않는다.
희한한 이론을 주장한 공직자를 끌어내리기 위해 한국의 역사이래. 가장 많은 대중, 국민이 한자리에 모인 사건이기도 했다. 시사평론가들은 그 사건을 두고 무언을 기초로 한 보수의 결집이라고 말했다. 내가 김끅자작가가 극좌인 줄은 그때 또 실감했다. 끅자라서 극좌인가?
잊을만하면 김끅자작가는 SNS에 글을 올리고 얼굴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소득이 없는 일에 작가가 왜 자꾸 나설까?
작가는 정치인이 아닌데?
김끅자작가의 이야기는 잠시 미루어 두더라도, 내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인생을 쉽게 생각하고 빈둥거리며 산 사람들은 대부분 좌파이고 뼈 빠지게 열심히 일해서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우파이다. 좌파는 목소리가 높고 우파는 말이 없다. 정확하게 그 기준점은 말할 수가 없어도 대충 그렇다. 김끅자작가는 극좌 중에서 극좌라는 걸 그때 알았다. 그걸 알고 나서 김끅자작가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이 적대감으로 바뀌었다.
이 여자야! 입에 밥이 안 들어가 봐라! 그런 소리가 나오는가?
내가 알기로는 김끅자작가는 오로지 밥을 위해서 돈을 벌어본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글을 써서 책을 팔아서 여유를 부린 적은 있겠지만, 처절하게 주린 배를 쥐고 밥벌이를 해본 적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철딱서니 없는 좌파인가?
아무리 좌파라도 그렇지 가족형 범죄라고 백일하에 드러난 그 사건을 두둔하려고 들다니?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그 김끅자작가를 향한 비난의 글들이 무수히 올라와 있었다. 심지어 감옥을 코앞에 두고 있는 그 훈남과 부적절한 관계가 아니냐는 의혹까지 불거지고 있었다. 대중은 인정이 없다. 어떤 상처가 될 말이라도 뒷생각 없이 함부로 하는 무자비한 집단이 익명의 대중이다. 대중은 또 책임이 없다. 그 말이 씨가 되어 한 개인이 철저히, 처절하게 부서지더라도 책임을 질 위인이 없는 것이다. 개인적인 불행으로 간주가 되어 묻히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왜 겁도 없이 이 바닥에 나서?
무엇을 얻으려고?
내가 보기에는 도저히 작가로서의 사명감이나 정의감 때문이 아니다. 그런 작가적 정의감이라면 반대편 입장에 서야 마땅하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라면 그런 일에는 오히려 나서지 말아야 한다.
오로지 다섯 번째로 이혼할 대상을 찾아서, 이혼을 위해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이 김끅자작가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오늘 신이 내린 첫 문장은 아무래도 ‘나는 그녀, 김끅자여사를 혐오한다,’가 아닌 것 같다. ‘이혼할 대상을 찾아서’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아니다. 어쩌면 이 문장은 신이 내린 마지막 문장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저러나
첫눈은 언제 오려나?
들판의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싹 덮어버리는 눈!
색다른 이념과 위선, 모순으로 점철된 들판!
그 첫눈은 언제나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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