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집안의 허물을 드러내다.
가추(家醜)란 것은 제 집안의 허물 되는 일이니 제 집안의 허물 되는 일을 드러낸다면 누구나 다 불가하다고 생각하리라. 그러나 가추에는 두 가지 차별이 있으니 하나는 사소하고 비열한 일이요 하나는 광대하고도 특수한 일이다.
어떤 것이 사소하고 비열한 일인가. 개인이 지은 일이 타인에게 파급되면 크게 수치스런 일과 대중이 공동으로 지은 일이라도 다른 대중에게 파급되면 크게 풍화(風化)에 손상되는 일이니 이러한 등의 일에 대하여는 차라리 혀를 끊을지언정 드러내지 아니하여야 불자의 바른 행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보조국사가 이르시되 「손님을 대하여 이야기 할 때에 집안의 허물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정반대로 집안의 허물을 드러낸다 함은 위에 말한 광대하고 특수한 일이 있다.
어떤 것이 광대특수한 일인가. 일을 짓는 자기로부터 기탄없이 회중(會衆)에 있어서 쾌활하게 선양함이니 다시 말하면 즉 불조(佛祖)의 여실어(如實語)와 심심어(甚深語)이다. 겉으로 들으면 경포심이 생겨서 비방이 있으나 자세히 이회(理會)하여 체달하면 무한한 이익을 얻기 때문에 드러내려 함이요 잠깐 훼방이 있기 때문에 집안의 허물이라 함이니 이러한 의미로서 집안의 허물을 드러낸다라고 제목을 내린다.
그러나 청허노사가 이르시되 「부처와 조사가 세상에 나온 일이 바람 없는 바다에 파도가 일어남이라, 문자도 마구니의 업이며 명상도 마구니의 업이며 내지 부처님 말씀이라도 마구니의 업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을 보면 어느 것이 집안의 허물이 아니리오. 가추도 가추요 가추를 드러냄도 가추요 가추를 드러내지 않음도 역시 가추이니 그런즉 양어가추라는 제목으로서 불조의 언구를 피로함이 크게 허물 됨이니 이는 곧 필자의 제 허물을 드러냄이다. 그런 줄 알고도 짐짓 범하는 것은 「선원」 청구에 의하여 부득이한 경우에 소위 울면서 땡감 먹는 격이다. 여기서부터는 가추를 바로 말하려 한다.
삼계의 대사요 사생의 자부이신 석가세존께서 처음 탄생 하실 때에 두루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눈으로 사방을 돌아보시고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고 이르시되 「하늘위와 하늘 아래에 오로지 내가 홀로 높다.」 하셨다.
이 말씀을 설하신 세존은 설주가 되시고 이 말씀을 듣는 일체중생은 청중이 되는 것이다. 청중 가운데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구별이 있고 믿는 가운데도 조문의 믿음과 교문의 믿음이 다르고 일승의 믿음과 삼승의 믿음이 다르다 하니 믿는 자는 이르되 이일이 이와 같다 하고 믿지 않는 자는 이르되 이 일이 이와 같지 않다고 하나니 이와 같다라고 하기에 수희찬탄하며 신수 봉행하여 한량없는 이익을 얻게 되고 이와같지 않다라고 하기에 비방하고 욕하며 경만하여 성내고 시기하여 한량없는 업장을 짓게 된다.
훼방자의 말은 세존인 대 성인이 웬 아만이 그렇게 큰가 한다. 심심산곡에 있는 나로서도 이렇게 훼방하는 말을 종종 들었다. 또한 조문의 믿음은 모든 하염있는 인과를 믿지 않고 다만 자기가 본래 부처라 천진자성이 사람마다 갖추어 있고 열반의 묘체가 낱낱이 원만히 이루어져 있어 다른 데서 구할 필요가 없이 원래 스스로 갖춘 줄 믿음이요, 교문의 믿음은 복과 즐거움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십선으로 인한 인천으로, 낙과공적을 즐기는 이에게는 생멸인연으로 인한 고집멸도로 성과불과를 즐기는 이에게는 삼겁육도로 인한 보리열반으로 정과를 삼게 함을 믿게 함이다.
또한 일승의 믿음이란 무량겁이 곧 일념이요 일념이 곧 무념이니 근본보광명지를 의지하여 십신ㆍ십주ㆍ십행ㆍ십회향ㆍ십지ㆍ십일지를 닦아 나아가 덕행이 원만하여 불과를 증득하되 시종이 일찰나제삼매를 여의지 않은 줄 믿음이요, 삼승의 믿음이란 혹은 미혹을 끊고 과를 증득하며 혹은 미혹을 그대로 두고 중생을 제도하며 혹은 불과가 삼아승지겁을 닦은 뒤에 있다하며 혹은 예토 외에 따로 정토를 구함을 믿음이니 교문과 삼승에 대한 대행상은 자세히 말하자면 한량이 없고 또 필자가 일찍이 잘 배우지 못하여서 고인의 말씀에 의하여 대강 말해 주거니와 이 선문에 대한 당기는 곧 신자와 신자중에 조문신과 일승신이 그것이니 이 기에 있어서는 곧 초불월조의 견해와 사자교인의 역량이 있느니라.
본래 평등한 성품가운데 누가 당기(當機)가 아니리오마는 믿고 믿지 않음의 관계와 또 여러 가지의 차별신의 관계로 당기와 당기 아님이 있으니 세존께서 멸도 하신 뒤에 무수한 조사와 선지식이 출현하사 그 깊은 뜻을 간파하여 모두 당기가 되셨지만은 그 중에도 제일 특수하고 가장 불신자에게 훼방을 초래한 공안을 들어 말하려 한다.
운문문언선사 가 그 사람이다. 사는 일찍이 목주진존숙을 참알(參謁) 하셨는데 존숙이 오는 것을 보시고 문을 닫거늘 사가 문을 두드리니 숙이 묻기를 「누구냐」 사가 답하기를 「문언입니다」 숙이 묻기를 「무엇하러 왔느냐」 사가 답하기를 「자기의 일을 밝히지 못하였으니 스님께서 지시해 주십시오」 숙이 문을 열어서 한번 보고는 문을 도로 닫거늘 사가 연달아 삼일간이나 문을 두드렸는데 제 삼일째 되던 날은 숙이 문을 열거늘 사가 들어가려하자 숙이 멱살을 움켜잡고 「말해봐라 말해봐」 하자 사가 머뭇거리거늘 숙이 문득 밀어내고 문을 닫는 데서 사가 깨달았으나 사의 한쪽 발을 다쳐서 별호를 파각옥사 라 하였다.
사가 유아독존화를 염하여 이르시되 「내가 그 당시에 만일 있었던들 한 방망이로 타살하여 개에게 먹여서 천하가 태평함을 도모하였느니라.」
이 말씀에 대하여 신자로 말하자면 설사 그 의지를 엿보지 못하였더라도 이미 신자이니까 다른 말이 없겠지마는 믿지 않는 이는 훼방이 적지 않으리라. 그러나 비방하는 것도 인연이 되어서 필경에는 들어오기 때문에 비방하는 사람이라고 미워하거나 혐의하지 않는다.
당시에 법안문익선사 같으신 어른도 이 말씀을 들으시고 크게 놀라 온몸에 땀을 흘리며 「부처님을 비방함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하셨다가 이십년뒤에 비로소 철저히 깨닫고 신심이 즐거워 법좌에 올라 대중에게 이르기를 「운문의 기세가 왕과 같으나 또한 불법의 도리가 없도다」 하시고 또 이르시되 「운문이야말로 참으로 부처님의 은혜를 갚은 이다」 하시니 운문선사가 듣고 이르기를 「나의 평생공부가 이 절자에게 간파되었구나!」 하셨으니 이 깊고 오묘한 도리는 법안 선사와 같이 자기가 간파한 뒤에야 비로소 의심이 없는 것이요 먼저 깨달아 사무친 사람이 설파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전 사람이 깨달은 뒤에 선사를 찬탄하여 이르기를 「내가 선사의 도덕을 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다만 선사가 나를 위하여 설파하지 아니함을 중히 여기었으니 만일 나를 위하여 설파하셨던들 어찌 오늘 같은 깨달아 사무침이 있으리오」 하셨으니 이런 말씀을 보면 선문의 비밀한 언구는 지해상량(知解商量)으로 체득하지 못하는 줄 확신할 것이다.
그런즉 이 의지를 진정하게 체득한 선지식이 혹염(或拈) 혹송(或頌) 혹상당(或上堂)하여 제시하신 것이 예로부터 한이 없지마는 그 가운데 조계하직전정맥 십칠대본분종사이신 대혜종고선사의 상당법어를 들어 해석하여 대중에게 보이고저 한다.
사가 상당하여 이르시되 「마지막 한 귀절이 음성 이전에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비로 쓴듯하여 하늘 땅을 뒤덮고 소리와 빛을 뒤덮었다.」
황면노자가 그 하나를 얻고는 말하기를 「도솔천을 여의기 전에 벌써 왕궁에 탄강하셨고 어머니의 태에서 나오기 전에 벌써 사람들을 다 제도하였다」 하셨고 탄생하실 때엔 일체세계를 뒤흔들게 하시고 한 손으로 하늘을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사자후를 하여 「하늘 위나 하늘 아래서 나만이 홀로 높다.」 하시니 하나의 큰일을 위해서이다. 부처의 지견을 열고 부처의 지견을 보이고 부처의 지견을 깨닫게 하고 부처의 지견에 들어가게 했으나 수천년 뒤에 그 절름발이 중에게 「한 방망이로 때려죽여 개나 배불리 먹여주어 천하가 태평하기 바란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구나.
말해보라. 「석가노자는 허물이 어디에 있는가? 하늘과 땅을 가리키면서 큰 소리를 한 탓일까, 남의 집 남녀들을 들뜨게 한 탓일까? 부처의 지견을 열고 보이고 깨닫고 들게 한 탓일까? 이런 식으로 따진다면 석가노자만을 비방할 뿐아니라 운문대사의 법은을 저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만일 운문의 본뜻을 알면 자기의 본뜻도 알리니 말해보라. 본뜻이 어디에 있는가?」하고 한참 있다가 말하되 「만고의 푸른 못에 비친 달은 두세번씩이나 건져봐야 겨우 알겠는가」 하였다.
필자가 이에 대하여 낯가죽이 세치나 두꺼움을 잊고 잠깐 몇마디 붙이려 하노니 대혜선사의 이 법어를 보면 「불조의 언구를 심의식(心意識)으로 체득하지 못할 줄 스스로 깨달으려니와 또한 한결같이 심의식으로 체득하지 못할 줄로 알고 말아도 또한 옳지 못하니 그러면 불조의 의지가 과연 어느 곳에 떨어져 있는고. 만일 대혜의 낙처를 알면 곧 자기의 낙처를 알 것이요 자기의 낙처를 알면 곧 운문의 낙처를 알 것이요 운문의 낙처를 알면 곧 세존의 낙처를 알 것이니, 또한 일러라. 필경에 낙처가 어디인가? 마혜수라천왕이 오도다. 알겠는가? 불로도 능히 태울 수 없으며 물로도 능히 적실 수 없으며 바람으로도 능히 날릴 수 없으며 칼로도 능히 쪼갤 수 없도다. 부드럽기는 솜과 같으며 견고하기는 철과 같으니 고금천하에 아는 이가 없도다. 어찌하여 아는 사람이 없는가?」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늙은 오랑캐의 아는 것만 허락하고 늙은 오랑캐의 분별함은 허락하지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