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따라 향기 따라 정처 없이 어디론가 혼자 훌쩍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목석을 닮은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5월은 계절의 여왕답다. 나무 밑에 앉아 바람에 팔랑거리는 잎을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설렌다. 돋아나는 새싹, 그 잎을 갉아 먹는 애벌레, 그 애벌레를 물고 가는 새와 생명으로 가득한 숲이 살아 움직인다, 햇볕을 통해 보이는 연녹색 잎은 참으로 곱디곱다. 수필가 피천득 작가는 5월의 모습을 “방금 찬물로 세수한 스물한 살의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라고 했다.
사랑과 정열의 시인 하이네도 계절의 여왕 5월에 사랑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아름다운 계절 5월/나무마다 새싹이 돋아나고 꽃망울이 맺힐 때/나의 마음 그곳에 머물러/사랑이 꽃송이처럼 맺히기 시작하였네”라고 노래했다.
누구에게는 절절한 사랑을, 누구에게는 감사한 마음을, 누구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누구에게는 휘리릭 떠날 수 있는 도전을 안겨주는 5월은 만인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아까시나무 꽃향기가 코를 찌르고, 새들은 짝을 찾아 굶어가며 울어댄다. 아래를 보아도, 위를 보아도 옆을 보아도 온통 신록이다. 연한 녹색은 볼수록 생동감이 넘친다. 신록이 짙어가는 숲속에서 머문 듯, 가는 세월과 함께 있으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즐겁고 행복하다.
게으른산행 회원들은 5월 중순에 선자령을 다녀왔다, 코스는 대관령휴게소에서 목장길을 지나 선자령 정상을 찍고 KT 송신소를 지나서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백두대간 선자령 정상이 1,157m라서 부담스럽게 느낄 수 있지만 출발점의 높이가 850m쯤 되기 때문에 선자령 코스는 험하지 않고 평이해서 초심자도 충분히 걸을 수 있다. 이번 코스는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밟으며 걷는 코스이고 거리는 약 12㎞이며 6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이번에 다녀온 길은 강릉바우길로도 불린다. 강릉바우길은 백두대간에서 경포와 정동진까지 산맥과 바다를 함께 걷는 약 350km의 길이다. 바우는 강원도 말로 바위를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선자령 코스가 바우길 1구간에 포함된다. 코스의 시작은 평창군에 있는 대관령 마을 휴게소다. 이곳에서 보는 하얀색 풍차 모양의 풍력발전기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산행하기 전에 몸풀기는 필수다. 산 들머리에 왔음을 몸에게 알려주고 준비할 시간을 주는 절차다. 날씨는 쾌청하고 바람은 약간 차갑다. 등산하기 더없이 좋은 날씨다. 초록 싹들이 서로 앞다투어 고개를 내밀고 구경하고 있다.
강릉바우길 1구간은 '선자령 풍차길'이라고도 한다. 보통 산객들은 우리가 내려오는 길로 올라가서 그 길로 다시 내려온다. 그래서 우리가 걷는 길은 한산했다. 들머리에서 숲으로 조금 들어가면 물소리가 들리고 이끼 길을 지나 나지막한 오르막을 오르면 바로 양떼목장이 나온다. 울타리 경계 목으로 둘러싸인 목장은 이국적 풍경이다. 이곳에 서면 자연이 그렇듯 언제 보아도 새롭고 아름답다. 탁 트인 경치를 보며 숨을 고르고 바로 목장 울타리를 따라 걸었다.
양떼목장 길
사진에서 보는 양떼목장은 영화 ‘연애소설 나무’, ‘MBC 드라마 ‘연인’, JTBC 드라마 ‘닥터슬럼프’ 등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알프스를 생각나게 한다.
대관령 영웅의 숲과 강릉바우길
선자령은 한국관광공사가 추천한 5월에 걷기 좋은 길이다. 대관령 영웅의 숲을 지나고 전나무 숲을 지나면 잣나무 숲이 나오면서 공기가 달라졌다. 때 묻은 도시 공기를 내주고 청정 공기를 마신다. 나무와 내가 함께 들숨과 날숨을 주고받는다. 새벽에 일어나서 약간 피곤했는데 숲에 오니 머리가 말똥말똥하게 맑아졌다. 모든 세포조직이 살아 움직인다. 정신 줄 놓고 숲속을 걸을 때 종종 느낀다.
선자령 길에서 큰앵초, 노랑무늬붓꽃, 회리바람꽃, 참꽃마리, 당개지치, 송이풀, 두루미꽃, 붉은참반디, 요강나물, 큰꿩의비름, 금강애기나리 등 야생화도 많이 만났다. 올해 이곳 식생들의 활동이 전년보다 2주 이상 늦어 보였다. 이제 잎을 열심히 뿜뿜 내밀고 있는 나무도 관찰하고, 선생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재미를 더한다.
겨울에 보던 나무들이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산행하면서 볼 수 있는 나무는 쉬땅나무, 마가목, 왕느릅나무, 귀룽나무, 산돌배나무, 개회나무, 피나무, 자작나무, 붉은병꽃나무, 시닥나무, 청시닥나무, 난티나무, 딱총나무, 황벽나무, 갯버들, 키버들, 호랑버들, 가막살나무, 야광나무, 백당나무, 괴불나무, 산개벚지나무, 나래회나무, 갈매나무 등이다.
큰앵초, 노랑무늬붓꽃, 회리바람꽃, 개별꽃(시계방향)
선자령 목장 코스는 4계절 각각 다른 자연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끝없이 펼쳐지는 초지와 일몰과 일출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곳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는 4계절 야영 장소이기도 하다. “계절의 첫 변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 “바람의 언덕”, “풍차길” 등은 선자령으로 향하는 코스를 표현하는 다양한 수식어다. 이번 산행에서 겨울에 보지 못했던 파란 하늘과 녹색 풀밭을 본 것이 인상적이었다.
대관령휴게소에서 선자령 정상으로 향하는 길을 4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보았다. 처음 올라서는 능선길은“대간 마루금 목장길”, 계곡을 따라 걷는 숲길은 “물소리 동행 길”, 정상으로 향하는 “바람의 언덕 풍차길”,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마음 두고 가는 길”이다. 백두대간 선자령 정상에 서면 늘 만감이 교차하면서 코가 찡하다. 내 발로 내 의지로 선자령 정상에 다시 설 수 있어 참으로 기뻐서다. 속마음을 표현할 때는 늘 어색하고 서툴다.
정상으로 가는 길
정상에서 하산하는 길은 선자령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곳이다. 끝없는 풀밭에 서서 멀리 산그리메도 볼 수 있다. 풀밭 어디든 앉아있으면 빙빙 도는 풍차를 타고 몸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기분을 느낀다. 오늘도 이곳에 모든 걸 내려놓고 아니온 듯 왔다 가노라.
봄에 새싹이 움트는 모습을 보면 각각 자기만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의 모습, 겨울눈에서 새싹이 나오는 모습은 자연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고 생명이 잉태하는 모습이다. 새싹이 세상과 첫인사 하는 모습은 각자 자기만의 모습이 있다. 숲에서 나무들은 그리움의 간격을 두고 각자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그리움의 간격은 여백과 채움이다. 겨울에 숲이 비움이면 봄에 숲은 채움이다.
우리 삶도 여백과 채움에 조화가 필요하다. 오늘 선자령 산행에서 물소리와 동행하는 길에서 그리움의 간격을 보았고 선자령 정상에서는 비움과 채움을 보았다. 초지는 여백이며 산이 품은 마음의 공간 같았다. 서예를 할 때 “흑은 채우고 백은 들어내는 것”이라고 배웠다. 즉 서예는 채우려는 먹과 비우려는 여백 간 긴장과 균형을 지키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 모든 풍경이 또한 그렇지 않던가. 우리의 인생도 여백이 지나치면 무기력하고 여백 없이 빡빡하면 숨 막히고 답답하다. 오늘은 내 인생에 크나큰 여백을 찾은 하루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산하는데 평생을 함께한 바람 친구가 오늘은 나타나지 않아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며 풍차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마음 내려놓고 멍하니 앉아 쉬었다 가란다, 쉬다가 저물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훌쩍 떠나란다.
백두대간 선자령 정상에서
첫댓글 같이 간 산행인데 선자령의 오월을 회장님 혼자서 다녀온 듯해 보입니다^^
비움과 채움으로 오고가는 길이 참 아름다워요
영임샘 댓글에 공감합니다.
제가 걸은 선자령보다 회장님 글 속의 그 길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마음의 길 풍경인가봅니다.
삶의 철학이 섬세하게 느껴져 감동..감동입니다!
그리움의 간격은 여백 & 채움! 그리움에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산그림자.
그리움이 쌓여 그림이 된 산그리메. 지금은 갈순 없지만 ㅜ, 7월부턴 열렬 참석유 ~~ㅎ
와우! 작가님이 따로 계셨네요. 우리 회장님은 목본의 대가일 뿐만아니라 다방면에 재능을 보여주시는군요. 훌쩍 떠나고 싶은 5월에 선자령은 행복 그 자체였네요.
회장님께서 올려주신 글보며 선자령에 함께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봅니다.
잔잔히 그려주신 선자령의 모습을 상상하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