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등암화상에게 주다
10 가지 무거운 큰 계와 48가지 가벼운 계를 사계(事戒)라 이름하니 곧 「범망경」이다.
탐욕이 곧 대도이며 성냄도 또한 그러하니 이와 같은 세 가지 법 가운데 일체의 불법이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법을 널리 설하며 지니고 범함이 둘이 아닌 것을 이름하여 이계(理戒)라 하나니 곧 모든 법에 행함이 없는 경이다.
저 보살계 서문에 이르기를 “대승은 세상을 구제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회포를 삼나니 형식에 구애받는 소승과 다르다. 저 말리부인는 오로지 술로써 계를 삼았으며 선예대왕은 오로지 재물과 자선으로 남에게 베품을 계로 삼았으니 어찌 저 법계를 구태여 지역의 한계를 정하겠는가?” 하였다.
「단무참보살계본」에 이르기를 “대략 두 가지의 일로 보살계를 망각하게 되나니 하나는 보살이 원력을 버림이요 둘은 증상의 나쁜 마음이라 증상의 나쁜 마음이란 망령되이 나와 법이 공했다 하며도를 얻지 못했으면서도 얻었다 함이니 이 두 가지의 허물을 제하고 이 몸을 버리더라도 계는 마침내 잃지 않겠다 하는 것 등이 대승계이다.”라고 하였다.
어디엔가 이르기를 “비구가 나무와 돌에 깔렸는데 만약 나무를 꺾고 흙을 뚫고 나와서 죽음을 면한다면 이것은 죄를 얻는다.” 하였으니 이러한 것들이 모두 소승계이다. 지금 사람들이 소승계의 조건을 모르니 대승계의 열고 막는 법을 어떻게 하겠는가. 또 어떻게 지음이 있는 계와 사계를 설치할 줄 알며 또 지음이 없는 이계를 모르고 한갓 빈 쭉정이만 숭상하는 주제에 나는 부처님의 계를 지닌다 하니 말할 것도 없다.
달마대사가 이르기를 “마음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위를 포섭한다.” 하였으며, 고덕이 이르기를 “마음이 텅 비어서 걸릴 것이 없으면 이것이 보시이며 마음이 깨끗하여 더러움이 없으면 이것이 계를 지킴이며 마음이 편안하여 시비가 없으면 이것이 인욕이며 미묘하고 고요한 이치를 비추어 간격이 없으면 이것이 정진이며 탁 트여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없으면 선정이며 밝게 사무쳐 슬기롭거나 어리석음도 없음이 지혜니라” 하였으며,
또 옛사람이 이르기를 “한 법도 옳다고 결정하지 말며 한 법도 그르다고 결정 짓지 말라.” 하였으니 망령됨을 물리치고 참됨을 도모하며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함이 모두 밧줄로 스스로 묶이는 것이다. 만약 대도를 깨달은 사람은 한 법도 옳은 것을 보지 않나니 어찌 한 법이 그름이 있으리요.
달마대사가 이르기를 “인의예지신을 이름하여 규역이라 했고 대소승의 기본되는 뜻을 이름하여 규역이라 했고 생사열반을 이름하여 규역이라 했고, 법부의 마음도 내지 않고 성문의 마음도 내지 않고 보살의 마음도 내지 않고 부처의 마음도 내지 않아야 비로소 이름하여 규역밖을 벗어났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만약 누가 죄를 짓고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스스로 자기의 법왕을 보면 곧 해탈한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깨달음은 잠깐동안이거니 어찌 머리가 희도록 번거롭게 하랴.” 하였으며, 육조대사가 이르기를 “앞생각이 미혹하면 중생이요 뒷 생각을 깨달으면 부처라.” 하였으며, 또 옛사람이 이르기를 “용이 뼈를 바꾸어도 그 비늘은 바꾸지 못하고 범부가 마음을 돌이켜 부처가 되어도 그 얼굴은 고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법문은 제일 높고 제일 귀해서 백천 삼매와 한량없는 묘한 뜻이 당인의 한 생각을 떠나지 않고 있다.
옛사람이 이르되 “일승법을 듣고 믿지 않더라도 오히려 부처가 될 인연을 맺고 배워서 이루지 못하더라도 인간과 천상의 복보다 낫다.” 하였으니 하물며 듣고 믿어 배워서 성취한 사람이랴.
어찌 수행에 뜻을 둔 자가 이것을 버리고 구하리오. 만일 참구하는 수행문을 논하자면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묻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이르기를 “무.”라고 하였으니 고물거리는 미물에게도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였거늘 조주는 무엇 때문에 없다고 하였는가.
옷 입고 밥 먹고 대소변을 보거나 시봉하고 남을 가르치거나 경을 읽고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거나 내지 머물고 앉고 누울 때나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빛을 돌이켜 비추어 보고 이 화두를 들어오고 들고 가며 의심해 오고 의심해 가며 살펴서 다시 관하고 갈고 다시 닦아서 세간의 온갖 번뇌와 사량분별의 마음을 다만 무자 위에 돌이켜 놓는다.
이와같이 공부하기를 날이 오래고 달이 깊으면 자연히 깨닫게 되나니 마치 굶주린 이가 한술 밥으로 능이 단번에 배부르지 못하며 글씨를 배우는 이가 한 권의 종이를 가지고 연습하여 능히 글씨를 이루지 못함과 같으니라. 굳건한 마음을 판단하여 시종 다른 변통이 없으면 그 도를 이루기 쉬우리라.
옛사람이 이르기를 “고양이가 쥐 잡듯이 하라.” 함은 심안을 움직이지 않음을 이름이요, “암탉이 알을 품듯이 한다.” 함은 더운 기운을 상속시킴을 말함이다.
화두를 들 때 물을 거슬려 돛을 달듯이 하되 혹은 냉정하고 담담히 하여서 아무런 재미가 없기도 하며 혹은 마음이 갑갑하고 열도 나나니 이것이 남의 집 일이 아니니라.
다만 화두를 드는 데 가장 묘한 것은 정신을 집중시키는데 너무 조급히도 하지 말며 너무 늦추지도 말고 깨어 살피고 고요히 하고 면밀히 하고 면밀히 하여 호흡을 평범히 하며 주리고 배부름을 평균하게 하며 눈에다 정기를 두고 척추는 꼿꼿이 세운다.
인생의 한 세상이 마치 문틈으로 천리마가 달리는 것을 내다보는 것처럼 덧없어서 풀 끝에 맺힌 이슬 같으며 위태롭기가 바람 앞에 등불이라 백 가지 온갖 계교를 다 부려봤자 마지막 이르는 곳은 마른 뼈 한 줌뿐이로다. 생각해 보니 이와 같이 덧없이 빠르고 생사의 일이 크고 급한 것이라 급하기는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해야 한다.
태어나서도 온 것을 모르며 죽어도 가는 것도 모르며 업식이 아득하여 몸뚱어리가 무너지며 불길이 치솟아 사생과 육취가 가슴속으로부터 잉태되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랴. 만약 참되고 바른 참선 수련이 아니면 어떻게 생사에 업력을 대적하겠는가. 이렇게 분명하게 생각하여 공부를 헛되이 하지 말지어다. 이와 같이 연결 지어 이끌어 주심은 모두가 부처님과 조사의 성실한 가르침이라 감히 한마디 한 귀절도 서로 속이지 않음이라. 전날의 가르침을 감히 저버리지 못할새 이어 어리석은 마음으로 한마디 하노라.
그러나 게으르기에 다만 하고 싶은 말을 끌어 말할 뿐 문자를 연마하는데 힘쓰지 아니하였고 말이 또한 다함이 없기에 대략 위와 같이 하노라.
등암장로에게 강의한 법어를 여기에 쓰노라.
답화(答話)
「선요」에 이르기를 “어떤 것이 착실하게 참구하고 착실하게 깨닫는 소식입니까?”하고 물으니 “남산이 구름이 일자 북산에 비가 내린다.”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답하기를 “자벌레가 한자를 갈적에 한번 구르는 것과 같느니라.” 하였다.
묻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어떻게 해야 견성을 합니까?” 하고 물으니 “허공이 능이 말할 때까지 기다려라.” 하였으니 “이 이치가 무엇입니까?” 하자 “내가 귀먹은 줄 아는가 알겠는가?” 하니 “모르겠습니다.” 하자 “다시 소리를 낮추어라.” 하니 또 이르기를 “모르겠습니다” 하자 부탁하기를 “지금부터 날마다 사람 없는 곳을 향하여 다시 큰 소리로 한번 묻고 나직한 소리로 한 번 묻고 난 뒤에 조용히 서서 들어라. 그러면 스스로 한 곳에서 설파하여 주는 이가 있으리라.”
묻기를 “자기의 안심입명처와 불조의 안심입명처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답하대 “세 번 말해봐라.” 세 번 말하고 나니
답하기를 “이미 답이 되었다.”
“알겠는가.” 하니 “모르겠습니다.” 하자
“이렇게 묻기 전에는 어떠한가?” 하자
또 이르기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세 번 말해 봐라.” 하자 세 번 말하고 난 뒤 말하기를
“묻기 이전하고 안심입명처를 갖추어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니
“비록 그러하나 다시 30년을 기다려라.” 하다.
거(擧)
옛사람이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인가?” 하고 물으니
“저 허공 속에 별들이 다 잠들고 유정과 무정을 몽땅 집어삼켜 다시 집어삼킬 물건이 없어 굶주려서 사방으로 헤매이니 이 무슨 도리입니까?” 하자
“급히 마구니 항복받는 진언을 한번 읽어라.” 한 편 읽으니 이르기를
“만일 잠깐이라도 어정거리면 재앙이 생기리라.” 하니 머뭇거리자
양화자루로 후려치며 이르기를 “무슨 소견을 일으키려 하는고?”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