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소임=10월15일
삼동결제에 임하는 대중이 36명이다. 조공(朝供)이 끝나자 공사가 열렸고 결제방이 짜여졌다. 결제방이란 결제 기간에 각자가 맡은 소임이다. 36명의 대중을 소임별로 적어보면
조실 1명 - 산문의 총사격으로 선리(禪理) 강화 및 참선지도
유나 1명 – 포살 담당
병법 1명 - 제반시식 담당
입승 1명 - 대중 통솔
주지 1명 – 사무총괄
원주 1명 – 사중 살림살이 담당
지전 3명 – 전각의 불공 담당
지객 1명 – 손님 안내
시자 2명 – 조실 및 주지 시봉
다각 2명 - 차 담당
명등 1명 – 등화 담당
종두 1명 – 타종 담당
헌식 1명 – 귀객식물(鬼客食物) 담당
원두 2명 – 채소밭 담당
화대 2명 – 화력 관리(군불 때기)
수두 2명 – 식수 관리
육두 2명 – 목욕탕 관리
간병 1명 – 환자 간호
별좌 1명 – 후원 관리
서기 1명 – 사무서류 담당
공사 2명 – 불공 담당
채두 2명 – 부식 담당
부목 4명 – 신탄(땔감) 담당
소지(掃地) 모두 – 청소
나의 소임은 부목이다. 소임에 대한 불만도 없지만 그렇다고 만족도 없다. 단체생활이 강요하는 질서와 규율 때문이다. 결제 불공이 끝나고 조실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영원하다. 물질의 형태에서 보면 영원성은 부정되고 물질의 본성에서 보면 영원성이 긍정된다. 영원성을 부인함은 인간의 한계상황 때문이요, 영원성을 시인함은 인간의 가능 상황 때문이다. 영원성을 불신함은 중생의 고집 때문이요, 영원성을 확신함은 불타(佛陀)의 열반 때문이다.
인간의 한계성을 배제하고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개발하여 저 눈 속에서 탄생의 기쁨을 위해 조용히 배자를 어루만지는 동물처럼, 얼어붙은 땅속에서 배아를 키우는 식물처럼 우리도 이 삼동에 불성을 계발(啓發)하여 초춘엔 기필고 견성하도록 하자. 끝내 불성은 나의 안에 있으면서 영원할 뿐이다.” 법문의 요지였다.
법문을 하는 스님이나 듣는 스님들이나 견성을 위해 이번 삼동에는 백척간두에 서서 진일보하겠다는 결단과 의지가 충만해 있다. 다혈질인 몇몇 스님들은 이를 악물면서 주먹을 굳게 쥐기도 했다. 법문이 끝나고 차담이 주어지면서 입승스님에 의해 시간표가 게시되었다.
2시30분 기침
3시~ 6시 참선
6시~ 8시 청소, 조공, 휴계
8시~11시 참선
11시~1시 오공, 휴계
1시~ 4시 참선
4시~ 6시 약석(藥石), 휴계
6시~ 9시 참선
9시 취침
*단 망회일(妄晦日)에는 오전에 포살이 있음.
오후 1시가 되자, 시간표에 의해 동안거의 첫 입선을 알리는 죽비 소리가 큰방을 울렸다. 각기 벽을 향해 결가부좌를 취했다. 고요했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이 삼동에 견성하겠다는 소이에서일까. 외양은 문자 그대로 면벽불처럼 미동도 없다. 그러나 그 내양(內洋)은 어떠할까. 무장하고 출진하는 무사(武士)와 같다.
우열은 전쟁터에서 용장과 패장으로 구분되듯이 시간이 지나야 각자의 자량(資糧)과 분수가 노출되면서 공부가 익어가는 모습이 비쳐지리라.
6 선방의 생태=10월20일
이번 선방의 구성원은 극히 복합적이다. 이질성과 다양성이 매우 뚜렷하다. 먼저 연령을 살펴보면 16세의 홍안으로부터 고희의 노안에까지 이른다. 세대적으로 격이 3대에 이른다. 물론 세수와 법랍과는 동일하지 않지만, 다음에 출신 고장을 살펴보면 팔도 출신들이 제각기 제고장의 독특한 방언을 잊지 않고 수구초심에 가끔 젖는다.
북방 출신들은 대부분 노장년층이다. 학력별로 살펴보면 사회적인 학력에서는 교문을 밟아보지 못했는가 하면, 대학원 출신까지 있다. 불교적인 학력에서는 『초발심자경문』도 이수치 않았는가 하면 대교를 마치고 경장에 통달한 대가도 있다.
다음으로 출신 문벌로 보면 재상가의 자제가 있는가 하면 비복의 자제도 있다. 물론 선방에서는 이러한 조건들이 하나도 문제 될 바 아니지만 그래도 견성하지 못한 중생들인지라 유유상종은 어쩔 수 없어 휴게시간에는 끼리끼리 자리를 같이함을 볼 수 있다.
내분이나 갈등이 우려되지만 출가인들이어서 그 점은 오히려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출신 성분이 다른 모임이긴 하지만 전체가 무시되고 개인이 위주가 된다는 점이다. 견성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는 처음도 자아요,
마지막도 자아다. 수단도 자아요, 목적도 자아다.
견성하지 못하고서 대아를 말함은 미망이요, 위선일 뿐이다. 철저한 자기 본위의 생활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극히 비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비정한 자기 본위의 생활에 틈이 생기거나 흠결이 생기면 수도란 끝장을 알리면서 선객은 태타에 사로잡힌 무위도식배가 되고 만다.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게 비정할수록 견성의 길은 열려지는 것이다. 전후좌우 상고하찰 해보아도 견성은 끝내 혼돈된 자아로부터 출발하여, 조화된 자아에서 멈춰질 수밖에 없다. 견성은 끝내 자아의 분방한 연역에서 적료(寂廖)한 자아로 귀납(歸納)되어야 한다.
비정 속에서, 비정을 씹으면서도, 끝내 비정을 낳지 않으려는 몸부림, 생명을 걸고 생명을 찾으려는 비정한 영혼의 편력이 바로 선객들의 상태다. 진실로 이타적이기 위해서는 진실로 이기적이어야 할 뿐이다. 모순의 극한에는 조화가 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