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식 선생의 자유 공화국 생각
2024년 3월 1일
신규식 선생,「집안 조카들이 학생 군단에 입단하도록 보내면서」︰
무엇 때문에 우리 집안 조카들은 모두 학생 군단에 입단하길 원하는가?
너희들의 뜻은 새로운 국민(新民)을 아끼려는 충정(血)이니,
공화 국가를 만들어 우리나라(大東)를 일으켜 세우길 바란다!
申圭植先生,「送家侄赴學生軍團」︰
如何吾家侄,俱願在軍中?
是愛新民血,共和扶大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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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1789-1922) 선생은 조선이 1910년(경술년)에 멸망하였더라도 조선의 국권은 조선 국왕에서 국민(民)으로 옮겼다고 결론짓고 널리 알리셨습니다. 조선 국권은 일본에게 빼앗겨 없어진 것이 아니고 조선 국민(民)에게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국권이 국민에 있고 국민의 자유에 근거한 공화정(共和政)을 주장하셨습니다.
신규식 선생은 대종교(大倧敎) 교인으로서 공화정을 주창하셨습니다. 1911년(신해년) 10월 중국에서는 손문 선생이 혁명을 일으켜 공화국을 주창하자, 신규식 선생도 손문의 공화국을 적극 지지하셨기에 중국으로 망명하셨습니다. 신규식 선생께서는 1911년 초겨울부터 1922년 9월 25일 돌아가실 때까지 중국 강남지역에서 손문 혁명을 지지하고 혁명 인사들과 평등하게 우호적으로 사귀고 후원하셨습니다. 동시에 한국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대하여 자유 공화국을 목적으로 임시정부를 세울 수 있는 터를 닦으시고 1919년 3.1운동을 일으키려고 준비하셨습니다. 또 한국에서 많은 젊은이가 상해에 찾아오자 이들을 지도하고 앞길을 열어주셔서 젊은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규식 선생이 대한민국 독립과 공화국 건설을 위하여 군대 양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신규식 선생은 1900년 육군무관학교 입학, 1902년 보병 참위 임관, 1907년에는 시위대 제3대대 부위(副尉)로서 군대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봉기에 참여하셨습니다. 1911년 초겨울에 중국으로 망명가는 길에 조카들이 학생 군단에 입단하는 소식을 듣고 시를 지어주고 격려하셨습니다.
신규식 선생께서는 1922년 9월 25일에 44살 젊은 나이에 상해에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신규식 선생은 군대뿐만 아니라 국제외교에도 뜻을 두시고 1921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외교총장으로서 광동성 광주에 있던 손문을 만나 임시정부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1922년 워싱턴 회의에서 임시정부 대표단이 초대받지 못하여 외교 사업이 실패하였습니다. 따라서 1922년 6월 신규식 선생이 불참한 가운데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이승만(1875-1965) 불신임안을 통과시켜서 임시정부가 분열되었습니다. 신규식 선생은 임시정부 건립에 얼마나 애쓰셨는데 끝내 분열되자 “임시정부를 지켜야 한다.”고 유언을 남기시고 25일 동안 곡기를 끊으시다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요즘 일부 정치권과 사회 한쪽에서는 대한민국 공화국 건설과 이승만 또는 홍범도 장군까지 재평가하려고 시도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화국을 목적으로 상해에 세워진 바탕에는 신규식 선생의 독립운동 활약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관이었던 신규식 선생은 국가의 삼 요소 곧 국민, 국권, 영토 셋을 지키려면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외교 역량이 중요하다는 것도 강조하셨습니다.
인물을 평가하려면 크고 작은 사실(fact) 확인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공통된 평가와 격렬하였던 감정도 중요합니다. 공화국 건설이 목적이었던 당시 사람들은 독재자를 가장 싫어하였고 탄핵하여 끌어내렸습니다. 요즘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평가하면서 공과(功過)를 따지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인물 평가는 공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 정치적 이상과 행실이 더욱 중요한 평가 기준입니다. 물론 도덕적 정치적 이상과 행실은 시대마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나 국가 공동체의 통합과 유지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실행하였는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었는지도 따져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경제발전과 민주정치 두 가치의 순서를 비교하면 민주정치가 경제발전에 앞섭니다. 어떤 탁월한 독재자가 중진국 수준의 경제발전을 일으켰으나 독재정치를 지속한다면 누구도 중진국 수준의 독재국가에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소위 중진국 함정은 경제성장이 멈추는 것뿐만 아니라 독재 때문에 벌어지는 부정부패이며 자원분배의 왜곡과 행정 효율의 후퇴입니다. 따라서 인물 평가가 사실 확인에 그친다면 도덕적 정치적 후퇴를 불러올 것입니다.
인물 평가에서는 공과(功過)만을 따지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당나라 말기와 오대십국 시기의 오랜 혼란을 겪은 경험에서 나타난 송대 성리학(또는 義理學)에서는 인물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확인된 실제 행실(行實)이었고 더욱 중요한 것이 의리(義理)라고 확정하였습니다. 북송시기 의리학(義理學)은 『춘추』의 의리 연구에서 시작되고 다시 『주역』의 의리에도 적용하여 형성되었습니다. 성리학의 의리(義理)는 도덕적 정치적 평가 기준이며 이해득실을 따지는 의리(義利)가 아닙니다. 또 왕도(王道, 義)와 패도(霸道, 功, 利) 기준에 따라 역대 황제의 행실을 평가하려는 왕패(王霸) 논쟁도 뒤따랐습니다. 얼만큼의 좋은 일을 하고 또 얼만큼의 개인 이익을 추구하였다면 둘이 뒤섞여서 평가를 흐리게 만드는데 이것이 소위 잡패(雜覇)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래서 신하 가운데 풍도(馮道, 882-954)가 신하 도리를 지키지 못하였다고 매섭게 비난하였습니다. 따라서 성리학에서 인물 평가는 의리(義利)가 아니고 의리(義理)를 중시하였습니다. 결국에 송대 성리학의 의리학(義理學) 덕분에 중국은 한족과 이민족을 엄격하게 구분(夷夏之防)하여 지금까지 한족 중심의 국가를 지켜왔답니다.
중국 명나라 말기에는 개인의 도덕 행위를 반성하고 평가하려고 선악 점수를 매기는 공과 점수표(功過格)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와 도교 및 유가의 여러 도덕 기준에 따라 목록 점수표를 만들고 개미 몇 마리를 죽이지 않았으면 착한 점수 몇 점이고, 부모님께 불효하면 나쁜 점수 몇 점이라고 점수를 매기고 두 점수를 더하고 빼서 남은 점수를 보고 평가하였습니다. 심지어 나쁜 짓을 많이 한 뒤에는 고의로 쓸데없는 착한 짓을 하여 서로 상쇄시키기도 하였답니다. 이것이야말로 공과 점수표의 가장 큰 허점이 되었습니다. 공과 점수표는 당시에 무지한 일반인들에게 착한 행위를 격려할지언정 더 큰 나쁜 도덕적 후퇴를 초래하였답니다. 그래서 사실을 확인하여 공과(功過)만을 따지는 것은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신규식 선생은 공과에 따라 평가할 수 없습니다. 선생은 대종교인으로서 조선이 스스로 멸망하였다고 독립을 자포자기하는 자망(自亡)을 극복하고, 국가의 독립과 자유민주 공화국 건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고 목숨을 내놓으신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