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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 강 - 疑問品- 5
師言,
善知識아 若欲修行인댄 在家亦得이라
不由在寺니 在家能行하면 如東方人心善이요
在寺不修하면 如西方人心惡이니
但心淸淨하면 卽是自性西方이니라
韋公이 又問,
在家하야 如何修行하올지 願爲敎授하소서
師言,
吾與大衆으로 說無相頌하리니
但依此修하면 常與吾로 同處無別이어니와
若不依此修하면 剃髮出家한들 於道에 何益이리요
頌曰
心平 何勞持戒며 行直何用修禪가
恩則親養父母하고 義則上下相憐하며
讓則尊卑和睦하고 忍則衆惡無喧이니
若能鑽木出火하면 淤泥定生紅蓮하리라
苦口的是良藥이요 逆耳必是忠言이니
改過必生智慧하고 護短心內非賢이니라
日用常行饒益하라 成道非由施錢이니라
菩提只向心覓이어늘 何勞向外求玄이리요
聽說依此修行하면 天堂只在目前이니라
師- 復曰,
善知識아 總須依偈修行하야 見取自性하면
直成佛道하리라 法不相侍니 衆人은 且散하라
吾歸曹溪하리니 衆若有疑어든 却來相問하라
時에 刺史官僚와 在會善男善女가 各得開悟하야
信受奉行하니라
***
서방 정토에 대한 설명을 이쯤에서 끝내고요.
師言(사언)→ 육조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善知識(선지식)아
若欲修行(약욕수행)인댄
在家亦得(재가역득)이니라 →
만약에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재가. 집에 있으면서 재가 생활을 해도
또한 가능하다. 될 수 있다. 역득이니라.
꼭 출가 해야만 수행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 수행이라고 하는 말이 나왔는데,
제가 자주 이야기 하지만, 불교의 특색은
수행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하고 다른
뚜렷한 면이 수행하는 면 이예요.
물론 교리 뛰어납니다.
불교의 교리는 정말 뛰어나요.
그 가르침이 호환하고,
그 속에 아주 복잡다단한 교리들!
그래서
불교 철학이라고 까지 표현할 정도로
불교교리는 뛰어나고, 불교 교리도 역시
깨달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교리가 우수하고 그런 교리를 말씀하실
정도의 그 깨달음은 결국 수행에서 나왔다
해서, 불교의 가장 다른 종교와 다른 특색을,
그리고 장점이고요.
그건 수행에 있다 하는 것을 꼭 알아야 되고요.
육조 스님 말씀도
“여기에 의지해서 수행할 것 같으면”
이런 말씀을 했고,
그러면 위에 수행이라고 하는 말은,
마음에 이러한 내용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觀(관)하는 거예요.
굳이 어떤 명명을 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觀法(관법)입니다. 그리고 재가수행은
뒤에 자세히 나오는데,
경전 수행을 경전 안에서 자주 말해도,
우리가 짚어지질 않는데, 경전의 수행을
네 가지 수행으로 정리를 합니다.
물론 참선은 화두를 들고 하는 것이고요.
염불은 자기가 하는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 등을 반복해서 외우는 것이고,
경전 가지고할 때는 금강경이나 법화경
같은 데서 누누이 지적한 것인데,
書寫(서사) ·
受持(수지) ·
讀誦(독송) ·
解說(해설)
이것은 전통적인 것인데요.
어느 경전에서든지 자주 인용하는 경전을
통한 수행법을 말하고 있고,
경전에서 또 한 가지 엿볼 수 있는
廳受(청수)가 있어요. 청수는 부처님이
설법 하시는 것을 듣는 것인데, 그건
아주 희귀한 일이지요. 옛날 같으면
아주 희귀한 일인데, 요즘은 흔하니까
또 녹음기나 라디오를 통해서 듣는 것.
그것도 좋은 수행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서사는 요즘은 출판. 손으로 직접 사경하는 것.
寫佛(사불)도 있더라고요.
부처님을 그리는 것.
사불이라고 하는 것을 경전에서
그 용어를 아직 못 봤어요. 뒷사람들이
아마 만들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고, 경전의 그 원형대로
소개 하자면,
寫經(사경). 또는
書寫(서사).
受持(수지)는
책을 지니고 다니는 겁니다.
옛날에 삼거 법사라고,
그 스님이 가는 데는
수레가 세 개가 항상 따라 다니는데,
한 수레는 부처님.
한 수레는 경전.
한 수레는 술과 여자.
워낙 뛰어난 스님이라서 나라에서
그 스님은 특별히 봐 줬어요.
三車法師(삼거법사)라고 찾아보면
사전에 나옵니다.
불자는 경전을 지니고 다니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어요.
그것이 큰 의지가 되고, 또 그러다 보면
읽게 되고요. 어디 가다가 잠깐 몇 십분.
10분~20분이라도 경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되니까요. 요즘은 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경전이 얼마나 많습니까?
[불자 수지 독송집]
아예 수지 독송집이라고 책 제목이
그렇게 나오거든요. 가지고 다니시길 바라고요.
讀誦(독송). 읽다 보면 외우게 되고
읽는 거나 외우는 거나 뭐 반야심경
정도는 다 외우니까요.
解說(해설). 경전을 이야기 해줄 줄 알아야 돼요.
남에게 소개 하고 자꾸 이야기 해주는 그것.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廳受(청수)는 그냥 일방적으로 듣는 것.
원칙은 4종 수행을 주로 많이 이야기 하지요.
이런 것은 경전 수행법이고,
참선하는 사람은 물론 화두 들면 되는 것이고요.
眞言(진언)하는 사람은 자기가 외우는 진언을
열심히 외우는 것이고, 신묘장구대다라니나
옴 마니 반메 훔 이나 이런 진언만 가지고
수행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 재가 수행을 소개하고 있어요.
善知識아
若欲修行인댄
在家도
亦得이다→
집에 있으면서 수행해도 가능하다.
不由在寺(불유재사)니→
굳이 사찰에 있을 까닭이 없다.
在家能行(재가능행)하면→
집에 있으면서도 능히 행할 것 같으면,
如東方人心善(여동방인심선)이요→
마치 동방 사람이 마음이 선한 것과 같은 것이고,
어디서든지 마음만 선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在寺不修(재사불수)하면→
사찰에 있더라도 수행하지 않으면,
如西方人心惡(여서방인심악)이니→
서방 사람이 마음이 악한 것과 같은 것이고,
서방 사람이 마음이 악하면
백날 지가 서방에 있어봐야
극락은 꿈에도 못 보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와 같다는 것이지요.
사찰에 있으면서 수행하지 않으면,
如西方人心惡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但心淸淨(단심청정)하면
卽是自性西方((즉시자성서방)이니라→
단, 마음이 청정 하면
그것이 그대로 자성 서방인 이라.
자꾸 서방. 서방 하니까
육조 스님도 서방이라는 말을 쓰긴 쓰지만,
사실은 쓰고 싶지 않은 말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自性淨土(자성정토)라고 해도 좋습니다.
마음이 청정하면 즉시 자성정토다.
이겁니다. 집에 있어도 수행하면
서방극락이고 절에 있어도
수행하지 않으면 그 뿐이지 않느냐?
韋公(위공)이
又問(우문)→
위자사는 좀 더 구체적인 것을 물었어요.
在家(재가)하야
如何修行(여하수행)하올지→
집에 있어서 어떻게 수행해야 하올지
願爲敎授(원위교수)하소서→
원컨대 교수해 주십시오.
師言(사언)→
육조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吾與大衆(오여대중)으로→ 내가 대중과 더불어
說無相頌(설무상송)하리니→
모양 없는 게송을 이야기 하겠다.
이 무상을 육조 스님이 참 좋아 하셔요.
육조 스님이
금강경을 주해하신 분이기도 하고,
금강경에 달통하시기도 하고,
금강경을 통해서 마음이 밝아졌고,
깨달았고요.
금강경하고 육조스님하고는
정말 깊은 인연이 있지요. 그래서
무상으로 으뜸을 삼는 금강경을
또 언급하고 있습니다.
무상송을 설하겠다.
게송
이름이 무상송 라는 겁니다.
但依此修(단의차수)하면→
다만 이것을 의지해서 수행하면,
常與吾(상여오)로
同處無別(동처무별)이어니와→
나와 있는 것과 똑 같다. 이겁니다.
마음이 이렇게 되면 천리만리
떨어져 있어도 나하고 함께 있는 것이고,
한 솥에 밥 먹고 한 집에 잠자고
같이 앉아 있어도, 마음이 다르면
그것은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若不依此修(약불의차수)하면→
만약에 이것을 의지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剃髮出家(체발출가)한들→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한들,
於道(어도)에
何益(하익)이리요→
도에 있어서 무엇이 이익 하겠는가?
당연한 말씀이지요.
頌曰(송왈)→ 게송에 가로되
心平 何勞持戒(심평하로지계)며→
마음이 평등 하다면 무엇 때문에
수고롭게 계를 가지겠는가?
行直何用修禪(행직하용수선)가→
행동이 정직 하다면
어찌 선을 닦을 필요가 있겠는가?
마음이 정직 한데 뭐하려고 참선 하겠는가
이거지요. 계다 선이다 하는
[戒(계). 定(정). 慧(혜).]
이것이 다 결국은 마음이 평등 하자고
하는 것이고, 행동이 바르자고 하는 것입니다.
恩則親養父母하고(은즉친양부모)→
은혜의 입장으로는
親養父母하고, 부모에게 친히 봉양하고,
義則上下相憐(의즉상하상린)하며→
의리의 입장으로는 상하상련.
상하가 서로 생각 해준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전부 생각 해주는 그런 삶을 권하고 싶고,
讓則尊卑和睦(양즉존비화목)하고→
사양하는 입장에는 존비화목이라.
서로가 겸양하고, 높고 낮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옛날에는 존 비 관계가 너무 심각 했었지요.
그런 사회라 하더라도
존과 비가 서로 화목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지요.
忍則衆惡無喧(인즉중악무선)이니→
인욕의 입장으로는 중악무선.
이 선자는 다툴 선. 시끄러울선자인데,
온갖 악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악에 있어서도 다툼이 없다.
無喧이라. 다툼이 없다. 그것이 인욕이지요.
좋은데 굳이 참으라는 말은 않으니까요.
나에게 해로움을 끼치고, 나에게 악한 짓을 하고,
나에게 손해를 보이는데도 그때 참는 것이
필요 하지요. 거기에 다툼이 없는 것들이 인욕이다.
若能鑽木出火(약능찬목출화)하면→
만약에 능히 나무를 비벼서 불을 낸다면,
불을 만들 것 같으면,
淤泥定生紅蓮(어니정생홍연)하리라→
어니라고 하는 것은 진흙이지요.
늪지대. 진흙에 결정코
홍련. 붉은 연꽃이 피리라.
붉은 연꽃이 진흙 속에서 핀다.
진흙은 뭐겠어요? 세상!
이 몸뚱이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그 삶을 진흙 이라고 하고,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인간이 이 몸뚱이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거기에서 바람직한
어떤 삶이 구현되어야 된다는 것을,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으로 표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연꽃은 진흙에서만 피지,
다른 높은 언덕이나 화단에나 저 산에서는
연꽃 핀 예가 없거든요. 그래서 연꽃이
불교의 꽃입니다. 불교의 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세속에 산다.
어디에 산다. 그거 따질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鑽木出火(찬목출화).
이것은 뭐지요?
나무를 계속 비비다가 쉬면 안돼요.
열기가 식어 버리면 안돼요. 그 열기를
계속 불어 넣어 가지고, 열이 지극하면
거기에 연기가 나고, 연기가 나더라도
좀 더 비비면 불이 나지요.
그것은 수행불퇴. 수행에서 게으르지 않는 것.
쉬지 않고 수행하는 것을
찬목출화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육조 스님 표현이 아주 좋아요.
찬목출화라고...
그리고
淤泥定生紅蓮(어니정생홍연)→
진흙에서 결정코 연꽃이 피리라.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이래야 가치가 있는 겁니다.
苦口的是良藥(고구적시양약)이요→
입에 쓴 것은 분명히 좋은 약이다.
(이런 때 的자는 분명히. 확실히 입니다).
그럼 온갖 악이 오더라도 다투지 말라
하는 것이 인욕인데, 이것 참 어려운 주문이지요.
이 어려운 주문을 하는 것이
逆耳(역이)지요. 귀에 거슬리는 얘기지요.
“아, 그거 스님이나 할 일이지
누가 그걸 하겠느냐고...
입에 쓴 것은 분명히 좋은 약이고
귀에 거슬리는 말은 좋은 말이지요.
逆耳必是忠言(역이필시충언)이니→
귀에 거슬린 것은 틀림없이 좋은 말이다.
필시충언이다. 고구는 먹기가 어렵지만
반드시 좋은 약이고,
忠言은
귀에 거슬리지만 틀림없이 행동에는 이롭다.
改過必生智慧(개과필생지혜)하고→
허물을 고치면 반드시 지혜가 나고,
護短心內非賢(호단심내비현)이니라→
호단.
단점을 자꾸 보호하면 현명하지 못 하다.
자기 단점은 반드시 고쳐야지요.
개과 해야지요. 자기가 잘못한줄 알면
반드시 고치고, 고치면 그 다음부터는
좋은 삶이 보장 되거든요. 필생지혜!
日用常行饒益(일용상행요익)하라→
일상에 항상 요익을 행하라.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을 행하라. 그 말이지요.
成道非由施錢(성도비유시전)이니라→
도를 이루는데 돈 베푸는 것을 말미암지 않는다.
꼭 시주해야 도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이거예요.
시주해야 도 닦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시를 이야기할 때, 흔히 꼭 사주를 흔히
생각 하는데, 제일 좋은 보시!
돈 들지 않고 하는 보시!
無錢布施(무전보시)라는 말도 있어요.=
돈 없이 보시 하는 것.
無財施(무재시)중에 제일 바람직한 것이
和顔施(화안시)=
웃는 얼굴. 이 보다 더 좋은 보시는 없답니다.
和顔愛語(화안애어)=
미소를 담뿍 머금은 그런 얼굴. 무엇인가
반기는 얼굴. 늘 기쁨으로 충만 되어 있는
그런 표정을 지으면, 그 웃음은 금방 번지지요.
한 사람이 그렇게 기쁜 마음. 기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온 가족이 금방 기쁘게 되고,
또 기쁜 분위기가 감돌게 되지요.
愛語=
사랑과 정이 듬뿍 담겨있는 말!
한 번 보고 말사람 이라 하더라도,
그런 화안애어로 對(대) 한다면,
큰 보시예요. 한 번 그런 표정이
1억 보시하고 맞먹을 거예요. 그럼
1억 버는 겁니다. 한 번 화안애어를
활용하면, 1억 번다니까요. 오히려
훨씬 더 가치 있을 겁니다.
日用常行利益(일용상행이익)→
우리가 중생들에게 무엇으로 이익을 주지요?
행복과 이익을 주지요?
저는 화안애어를 저는 권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成道無由施錢(성도무유시전)이니라→
도 이루는데 돈 베풀 필요가 없다 이겁니다.
그 아까운 돈. 왜 베풀어요? 화안애어 하면 되지.
성도무유시전이니라. 도를 이루는데
돈으로 말미암을 필요가 없다.
菩提只向心覓(보리지향심멱)이어늘→
보리는 다만 마음을 향해서 찾는다.
마음속에 있는 것이 깨달음이지,
도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달리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거지요.
何勞向外求玄(하로향외구현)이리요→
어찌 왜 수고롭게 밖을 향해서 현묘한
도리를 구하겠는가? 밖에 아무리 찾아봐야 없어요.
만약에 밖에 있다면 돈 들여서 구해다가 가지면
되는 거지요. 결국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렵다면 지극히 어려운 것이고,
쉽다면 또 지극히 쉬운 것이고,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뭐는 뭐 아무나 하나?
하지만 도는 아무나 다 닦아요.
도는 아무나 닦는 것이 도예요.
정말 제일 쉽고 편안하고,
돈 안 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도 닦는 일입니다. 금방 화안애어가 되누만...
웃으니 좋찮아요? 우리는 그새 1억 벌었어요.
聽說依此修行(청설의차수행)하면→
설하는 것을 듣고,
제가 이렇게 설명 하는 것을 듣고,
의차수행. 이대로 수행한다면,
天堂只在目前(천당지재목전)이니라→
천당이 바로 눈앞에 있다.
누가 들고 천당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에요.
바로 눈앞에 있어요.
불교는 정말 제대로 깨달았기 때문에,
깨닫느라고 밑천도 많이 들었지요.
부처님의 선례를 보면 그것참 피나는
그 수행! 그 뛰어난! 종교적 천재라고
저는 실달태자를 그렇게 부르는데,
선천적으로 아주 천재성을 타고난 그런
양반이, 6년간을 아주 남다른 특별한 수행을
그렇게 하고 개발 해 놓은 것이 불교라고요.
대단한 것이지요.
누구의 계시를 꿈결에 들었다는 것은 환청이지요.
똑같이 있는데 왜 자기만 듣고, 옆의 사람은 못 들어요.
그것은 환청 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것에 의해서 발생한 종교라든지, 아니면
유교 같이 오랜 세월동안 학문의 축적에 의해서
발전시킨 것 하고는 불교는 전혀 달라요.
그 점을 우리는 분명히 해야 돼요.
인간의 피나는 노력에 의해서 깨달았다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이 한 생에 그것도 어떤 사람은
한 순간에, 어떤 사람은 몇 년! 아니면 몇 달!
석가모니 같은 이들은 6년 걸렸고요.
그렇게 해서 깨달아지는 그 세계가 불교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이고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師(사)
復曰(부왈)→ 육조 스님이 또 말하기를,
善知識(선지식)아
總須依偈修行(총수의게수행)하야→
선지식아, 모두들 모름지기
이 게송에 의지해서 수행하라.
이 게송에서 가르쳐준 대로 이대로 살아라.
見取自性(견취자성)하면→
결국 자기 자성자리를 견취한다. 보아서 취한다. 이것이
見性(견성)이예요. 여기서 가르쳐준 대로 수행하면
그대로 견성 이예요. 뭐 화두 들라는 말 한 마디도 없지요?
또 관세음보살 부르라는 말도 없어요.
여기는 서사 수지 독송하라고 하는 그런 말도 없습니다.
차원이 아주 높지요.
이렇게 수행하면 자성자리를 견취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할 것 같으면...
直成佛道(직성불도)하리라→
바로 불도를 이룬다.
見性成佛(견성성불)!
法不相待(법불상대)니→
법은 서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이 법이라고 하는 것. 이 도리라고 하는 것은
서로 마주보고 오래 있다고 해서
꼭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衆人(중인)은
且散(차산)하라→
여러 사람은 이제 흩어지시오.
위 자사가요.
조계산에 있는 육조스님을 모셔다가
시내 큰 강당으로 청했지요.
두 번인가 세 번인가에 걸쳐서 법문을 했어요.
그리고는 내가 여기 내려와서 해야 할 중요한
법문은 다 했다. 이렇게 서로 계속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모두들 흩어지시오.
吾歸曹溪(오귀조계)하리니→
나는 조계산으로 돌아가겠다.
衆若有疑(중약유의)어든→
만약에 대중들이 의심나는 것이 있거든,
却來相問(각래상문)하라→ 다시 와서 물으라.
일차적으로 우리가 이러한 중요한 법문하는
것은 이걸로 끝이다 이런 뜻이지요.
時(시)에
刺史官僚(자사관료)와
在會善男善女(재회선남선녀)가→
그 법회에 모였던 선남선녀가
各得開悟(각득개오)하야→
그 나름대로 다 마음이 열리고 깨달았지요.
그 깨달음의 경지가 꼭 궁극적인 경지에
이르렀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그 나름대로 다 느낌이 있었고, 또 아마
깨달음의 눈을 떴을 거예요.
各得開悟 해서→ 각각 개오함을 얻어 가지고서
信受奉行(신수봉행)했다→
믿고 받아 지니고 받들어 행했다.
경전 제일 끝에 보면 ‘신수봉행이니라’ 라는
그런 내용이 있는데,
이 육조스님의 행적은 지금 광주에서부터 소주로,
소주에서 조계산으로 너무 분명하게 있습니다.
불교여행. 테마여행을 그런 식으로, 예를 들어서
육조스님만 집중적으로 가서 참배한다.
이렇게 생가하면, 광주만 가면 돼요.
광주에서 소주로 소주에서 육조스님 계시던
조계산 보림사.
지금은 보림사라 하지 않지만,
그래도 보림 이라고 하는 현액이 걸려 있고,
육조스님의 몸도 등신불로 그대로 있고요.
선방도 있고 육조스님의 어떤 행적이 아주
여여히 그대로남아 있습니다.
소주에서 단하산 이라고 하는 데가 멀지 않아요.
소주라고 하는 데서 조계산보다 조금 먼 거리에
단하산 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그 단하산까지 보고 오면 아주 좋은 여행이 될 겁니다.
한 3~4일 정도면 아주 좋은 여행을 할 수 있을텐데...
단하산에 가면 시가 있는데요.
‘너희는 천하에 계림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여기에 단하산이 있다는 것은
너희는 모르지 않느냐?’
이런 시를 써 놨어요.
뜻이 뭐냐 하면,
丹霞山(단하산)이 계림 못지않다는 것이지요.
계림보다 훨씬 나은 일면이 있습니다.
거기도 국립공원인가한데, 꼭 권하고 싶은 경치예요.
丹霞天然 禪師(단화천연 선사)가 살았던 곳이고,
바위를 뚫어서 절을 많이 지어서, 절도 많이 있는 곳인데
정말 권하고 싶은 아름다운 산 이예요.
그런데 대개는 조계산에만 갔다가 돌아와 버린다고요.
그 옆에 좋은 단하산을 두고 못보고 돌아오는 사람이
있으니...
3시간만 할애하면 그 산을 보고 올 수가 있는데...
그 밑에 소주에 내려와서
큰 강당에서 소주 자사가 請(청)해서
법문을 했던 법문은 이 의문품까지로 마치고,
그다음 정혜품부터는 조계산 보림사에서
행해진 법문들을 모아서 편집한 것입니다.
우리 정통 불교의 종단 이름인 조계종이라는 말은
바로 육조스님의 법맥을 우리는 이어 받고,
또 육조스님의 선사상을 계승합니다하는
그런 뜻에서 조계종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조계종이라는 말의 근원은 여기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