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泰時先生事績記(안태시선생사적기)
선생은 1895년 보성읍 우산리에서 태어나서 자는 旺哉(왕재) 호는 安往哉(안왕재)라 하였으며 이는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에서 어디로 가야하는 한탄에서였다. 본성이 총명하고 성실하여 불의를 미워하였으며 오로지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여 후세의 교육에 진력하시고 1921년 전남도립교원양성소를 수료하고 보성공립보통학교 교사로서 교육계에 투신한 후 광주사범학교와 전남여고의 전신인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등에서 조선어 과목을 강의하면서 태극기를 그리게 하고 宮體(궁체)의 글씨를 가르쳐 민족혼을 일깨우다가 왜경의 혹독한 탄압으로 야인이 되었다. 1946년 보성중학교가 설립되자 이듬해 교장으로서 그 뜻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니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을 근본으로 仁義禮智(인의예지)의 본성을 개발하고 孝悌忠順(효제충순)의 덕성을 밝혀 평화인의 자질을 갖추도록 하였으며 청순한 마음과 영민한 슬기로서 절의를 숭상하고 勤儉恭恕(근검공서)의 정신으로 자활의 능력을 지닌 인간을 길러내고자 하였다. 교훈을 愛衆親仁(애중친인)이라 하였으니 어질고 착한 사람을 따라서 배우고 모든 사람을 널리 사랑하여 민족과 국가에 봉사하는 훌륭한 인품을 갖춘 전인적인 인간을 양성하고자 함이었다. 그리하여 호남의 명문학교로서 수많은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학문을 닦고 인품을 익혀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고 선생을 일월처럼 추앙하게 되었으니 우리 민족의 앞날에 커다란 횃불을 밝힌 큰 스승으로서 오늘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그 가르침을 우러르는 제자들이 생전의 모습을 여기에 모시니 새벽부터 밤늦도록 제자들이 부모를 공양하고 윗사람을 섬겨 학문에 연마와 함께 도와 덕을 겸비함에 힘써라하시며 열심히 가르치신 그 음정이 이 아름다운 교정에 울리는 듯하다.
2002년 11월 2일 보성중학교 졸업생 일동
보성중학교 교정에 위치한 안태시교장선생님 흉상과 사적기
수필 <안태시 교장선생님을 기리며, 임병식>
내 고향 보성지명을 한자로 쓰면 보배 보'寶'에 재'城'을 쓴다. 무엇이 보배로우냐 하면 흔히 다음 세가지를 일컫는다. 의향(義鄕), 예향(藝鄕), 다향(茶鄕)이 그것이다. 의향은 향일 투쟁사와 맥을 같이한다. 구한말 무너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활발한 구국활동을 펼친 서재필 박사를 위시하여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선생이 태어난 땅이며, 백범 선생께서 일인 장교 쓰치다를 처단한 후 피신했던 땅이며, 안규홍 .임창모 선생이 마지막까지 의병활동을 했던 고장이다.
그리고 예향의 맥으로 국창 박유전 선생이 판소리 계면조를 창제한 땅이며 훗날 정응민선생이 보성소리를 완성한 땅이기도 하다. 한편, 다향으로 말하면 우리나라 녹차공급기지로서 전국소비량의 60%를 차지하는 대단위 차밭이 장관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한데, 이러한 고을이 한때는 폄하되어 회자된 적이 있었다. 그때가 언제냐 하면 일제시대인데, '보성사람 앉은 데는 풀도 나지 않는다'는 악의적인 말이 퍼진 것이다. 이것은 좀 해명이 필요하다. 왜 그런 말이 생겨났느냐 하면 보성은 일제시대 세금징수실적이 가장 저조한 고장이었다. 그만큼 반골기질이 강하여 저항을 많이 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담당 세리(稅吏)들은 번번이 좌천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영광스러운 악평(?)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고향을 생각할 적마다 나는 잊을 수 없는 분이 있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내 말에 공감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분이 누구냐 하면 초창기 보성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신 안태시(安泰時)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십 수년간에 걸쳐 교장선생님으로 봉직하면서 면학분위기 조성과 충효정신을 널리 진작시켰다. 그 바람에 인접 군에서까지 학생들이 몰려들고 해마다 많은 숫자가 대도시 명문학교에 합격하여 진학 하였다.
당시 보면, 선생님의 교육방침은 독특한 데가 있었다. 우열반을 운영했는데, 반 명칭도 다른 학교와는 달리 조(組)라고 하고 숫자대신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효(孝)하고 붙였다. 이는 소위 맹자(孟子)가 말한 사덕(四德)에다 효제충신(孝悌忠信)에서 두 자를 따온 것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학력신장뿐 아니라 인성교육에서도 얼마나 공맹(孔孟)사상에 입각한 철저한 교육을 시켰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 교장선생님이 조회 때 훈화하시는 걸 보면 독특한 자세를 취하셨다. 오른손을 아랫배에 대고 말씀을 하셨는데, 들리는 말로는 맹장염을 앓고 계셔서 그런 거라 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비교적 간단한 수술로 고칠 수 있을 텐 데도 굳이 그러하지 않는 건 부모님이 물러주신 육신에 칼을 댈 수가 없다하여 견디고 계신 것이었다. 그야말로 공자 님이 말씀하신 대로'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하니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하신 것이었다.
선생님은 수업을 감독하시다가 교사가 없는 교실이 보이면 들어오셔서 특강하시기를 즐겨하셨다. 한번은 자습시간에 우리 반 교실에 들어오셨다. 들어와 충효이야기를 하시며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셨다.
"아비가 다른 사람에게 봉변을 당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되겠느냐"
학생들은 느닷없는 질문에 선뜻 대답을 못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아비가 곤경에 처하도록 만든 것은 자식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마땅히 상대하여 분을 풀어 드려야 하느니라"
그 말을 듣던 우리는 모두 의아해질 뿐이었다. 그런데 훗날에 우연히 논어의 말씀을 접하니 그런 실례가 있지 않는가.
논어 자로 편의 이야기다. 섭공이라는 귀족이 공자 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고장에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그 아비가 양을 훔친 것을 아들이 그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그러자 공자님은 "우리고장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기며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기나니, 정직은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니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나는 수개월 전, 읍내에 볼일이 있어 들은 김에 교정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학교는 산전벽해라는 할 만큼 변해있었다. 그런 가운데 눈에 띄는 한 조형물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안태시 교장선생님의 흉상과 공적비였다. 나는 40여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온화한 모습을 대하니 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났다. 그 런 중에서도 뇌리를 스치는 것은 늘 강조하신 "효도하라, 그리고 면학에 힘써라"는 말씀이 쟁쟁하게 귓전을 때리는 것이었다.
작성자 : 임병식(16회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