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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6·26 전쟁 중 미군이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신천대학살 사건’의 진실을 추적한 책이 나왔다.
한화룡 백석대 기독교학부 교수가 펴낸 「전쟁의 그늘- 1950, 황해도 신천학살 사건의 진실」(포앤북스)은 남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천학살 사건에 대한 전모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북한은 신천사건을 “미군이 저지른 학살”이라고 주장하며 반미교육과 계급교양의 구심체로 삼고 있다. 북한 김정은은 작년 11월 말 신천박물관을 찾아 “조성된 정세와 혁명발전의 요구에 맞게 우리 군대와 인민들 속에서 반제반미교양, 계급교양을 더욱 강화해 천만 군민을 반미대결전으로 힘 있게 불러일으키기 위해 찾아왔다”고 말했다.
신천학살 사건은 1950년 10월~12월 사이 북한 황해도 신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을 말한다. 북한은 이를 두고 미군이 저지른 학살이라고 주장하며, 1958년 3월 김일성 지시에 의해 이곳에 신천박물관을 지어놓고 반미교육의 중심지로 활용하고 있다.
북한이 신천에서 미군에 의해 학살되었다고 주장하는 민간인 숫자는 3만5383명이다. 그 밖에도 안악군에서 1만9000여 명, 은율군에서 1만3천명을 비롯, 황해도 일대에서만 12만여 명의 주민들이 미군에 의해 학살되었다고 주장한다.
「전쟁의 그늘」 저자인 한화룡 교수는 “북한 김정은 체제도 반미노선을 걷고 있기 때문에 북한에서 이 사건은 계속 강조될 수밖에 없다”며 “남북 간의 진정한 평화와 화해를 위해 우리도 사건의 진상을 정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천학살 사건은 미군과는 관계없는 일"
한 교수가 이 책을 펴내는 데는 3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는 “신천학살 사건은 남한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북한 사람들은 모두가 아는 사건”이라며 “국내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자료가 워낙 부족한데다가 그나마 있는 자료들도 부정확한 부분이 많아 사건의 정확한 사실 관계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말했다. 다음은 한 교수와 일문일답이다.
-이 책을 쓴 배경은 무엇인지요.
“1990년 미국 유학 시절 당시 월간조선(1990년 12월호)을 사서 보았는데, 그곳에 조선족 행상 이연화의 <목탄차로 다니는 공화국>이란 기사를 읽은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북한에 대한 관심 생겨 독학으로 북한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그 결과 2000년 「4대 신화를 알면 북한이 보인다」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천학살 사건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본격적인 연구를 하지 못하다가 2010년부터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이후 3년간의 연구 시간을 할애해 올해 5월 드디어 책을 출간하게 된 겁니다.”
-책에서 신천학살 사건은 미군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하셨는데요.
“북한은 1950년 10월17일 미군이 신천에 들어왔고, 다음날인 18일부터 여러 장소에서 학살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같은 북한의 주장은 당시 미군의 행보와 각종 전사자료, 현지 월남자, 탈북자 등의 증언 등을 통해 완전히 허구임이 밝혀졌습니다. 1950년 10월 유엔에 의해 38선 돌파가 결정된 후 미군 각 부대는 오직 평양을 향해 서로 경쟁하면서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갔습니다. 당시 미군은 신천을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미군이 신천 쪽으로 전혀 진입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당시 전사와 월남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18일 밤 10시경에 미군을 태운 트럭 한 대가 신천에 처음 나타났고, 다음날 오전(19일)에 1개 정찰 소대가 트럭을 타고 들어왔습니다. 그 직후 미군 탱크 3~4대와 보병들이 신천을 통과해서 지나갔습니다. 따라서 북한이 미군이 학살을 시작했다는 17일~18일에는 미군이 신천에 있지 않았습니다.”
본문이미지 북한의 대표적인 반미(反美) 계급 교양 학습장인 신천박물관(황남 신천)에서 강사가 참관객들에게 전시 자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조선DB 인민군의 학살과 황해도 지역의 우익 세력 봉기
-그렇다면 신천사건의 본질은 무엇이고 왜 일어난 겁니까.
“신천학살은 전쟁이라는 비정상적인 시기에 좌·우익이 갈라서 서로 죽이고, 보복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물론 그 시발은 인민군에 의해 시작됐습니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바뀌자 인민군과 공산당원들이 후퇴하면서 우익 인사들을 체포하고 학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참극은 북한의 점령 지역이었던 남한(예: 대전형무소 학살)은 말할 것도 없고, 평양, 함흥 등 북한 전역으로 이어졌습니다.”
한 교수는 “북한군의 학살은 황해도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황해도 도당은 10월11일 철수 명령과 함께 청치보위부와 내무서에 ‘반동들을 색출해서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하라’는 명령을 내려보냈다”며 “이 지시를 받은 신천, 안악, 은율 등지의 내무서에서 수많은 우익 인사들과 가족들을 체포해 처형했다”고 말했다.
이후 벌어진 상황을 한 교수의 「전쟁의 그늘」에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민군과 공산당원의 우익 인사 검거와 처형으로 우익 인사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으로 내몰렸다. 유엔군 입성을 앉아서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우익 세력들은 10월13일 재령을 시작으로 황해도 일대에서 반공 봉기를 일으켰다.
갑자기 재령에서 우익 봉기가 일어나자 후퇴하던 인민군 수백명이 봉기군을 진압하기 위해 재령으로 되돌아와 이들과 전투를 벌였다. 숫자와 화력에서 열세인 봉기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후퇴했다. 이후 재령읍을 다시 장악한 공산당원들과 인민군들은 숨어 있는 봉기군을 색출하기 위해 집집마다 뒤지면서 불을 지르고, 찾아낸 사람을 그 자리에서 잔인하게 죽였다.
신천에서도 13일 저녁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군에 쫓겨 간 공산당원들은 밤에 야음을 틈타 신천읍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좌익 세력이 신천 온천을 장악했고, 수많은 기독교인이 학살당했다. 10월16일~18일 사이 우익 치안대와 인민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쌍방에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18일~19일 사이 미군이 신천을 통과하던 때에는 봉기군과 인민군들 사이의 전투로 이미 길거리에 시체가 즐비하게 널린 상황이었다.
10월19일 신천 일대를 장악한 우익은 마을마다 치안대를 조직해 질서를 유지하는 한편, 부역자 숙청과 잔비(殘匪) 소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매일 같이 피의 복수가 시작됐고, 어쩌다 노동당이나 직업동맹에 들어간 사람들까지 처형되는 등 수많은 억울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두달 넘게 이어진 보복의 악순환
당시 9·28 서울 수복 후 황해도 일대에서 북진 퇴로가 차단된 인민군 패잔병들과 공산당원들은 구월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했는데, 그 수가 3000명에 달했다. 우익 치안대는 이들과 거의 매일 전투를 치루었다. 빠치산들은 구월산을 거점으로 그 주변의 은율군, 안악군, 신천군 등지의 부락을 습격하여 약탈, 살인, 방화를 자행했다.
1950년 12월7일 유엔군이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하자 철수하는 과정에서 우익 세력들은 그동안 사안이 경미하다고 판단해서 지켜보고 있던 좌익분자들과 가족을 다시 잡아들여 처형했다. 그들이 작당해서 또 다시 보복을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1950년 12월22일 이후부터 그해 월말까지는 좌익들의 대대적인 보복이 시작됐다. 이웃과 친척이 서로 죽고 죽이는 과정에서 전 가족이 몰살 당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이렇게 10월부터 12월까지 좌우익 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피의 보복이 계속 반복된 것이 신천학살 사건의 본질인 것이다. 한 교수는 “유독 신천 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반공 봉기가 일어난 이유에 해대 신천의 유별난 지역적 특수성과 역사적 상황이 맞물린 결과”라고 분석했다.
“신천과 재령을 중심으로 한 황해도 일대는 종교적, 경제적, 역사적 차원에서 다른 지역과 적지 않은 차이를 보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가 부흥했고,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됐으며, 역사적으로는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했던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해방 후 공산당에 의해 토지개혁이 실시되자, 이에 대한 불만과 신분 역전에 대한 울분, 개인적인 모욕에 대한 원한, 기독교에 대한 탄압 등으로 중산층, 상인, 중소지주, 자작농, 기독교인, 각종 반공지하단체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많은 사람을 학살했고, 이후 부모·형제나 친척들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복수심이 폭발하면서 학살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전쟁의 와중에 혈육이 참혹하게 살해당한 현장을 보고 모두 제정신을 잃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이미지 1950년 10월, 함흥에서 퇴각하는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우익 인사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 당시 함흥 지역에서 발굴된 시신만 1만27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북한 당국이 미군에게 덮어 씌우는 이유
한화룡 교수는 “신천학살은 6·25 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서 좌우익 간에 벌어진 수많은 학살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비극적인 사건이었다”며 “하지만 북한 측에서 주장하는 신천학살의 희생자 숫자 3만5천명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말했다.
당시 목격자의 증언을 종합하면, 학살 규모가 그 정도에 이르지 않았고, 특히 북한 측이 주장하는 자료가 오락가락하는 등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현재 신천에서 이루어진 학살의 규모를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북한이 신천학살의 책임을 미군에게 전가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북한이 미군에 의해 3만5천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먼저 10월13일 우익에 의해 봉기가 일어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반공 무장 봉기는 북한 체제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북한은 좌익이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사건도 숨겨야 했고, 수많은 사람이 북한 체제를 떠나 월남한 사실을 감추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책임을 미군에게 돌려서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은 감추고, 미제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악한 독재자나 체제는 거짓말을 일삼고 또 그 거짓말을 근거로 폭력 행사를 정당화 하고 있다”며 “북한 당국이 주장하는 거짓말 중 핵심이 6·25를 미국이 일으켰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다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신천학살 사건에 대한 책을 쓴 이유는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힘으로써 북한 당국이 더 이상 거짓말을 근거로 주민들에게 폭압적인 통치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북한의 민주화에 일조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군이 무고한 양민을 죽인 것이 아니라, 좌우익 간에 살육이 일어난 것이며, 그 살육이 북쪽으로 후퇴하면서 먼저 반공인사와 종교인들을 잡아다가 죽인 북한 당국의 행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림으로써 북한 주민들의 잘못된 증오심을 풀어주는 데 제 책이 기여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세 필요"
한 교수는 “책에서 비록 북한 당국이 학살의 비극을 가져왔지만, 그 와중에 과도한 폭력으로 반응한 반공 우익과 종교인들의 잘못도 드러냈다”며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할 때 남북 간의 진정한 화해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당국은 신천에서 미군에 의한 대규모 학살이 이루어졌다는 선전을 중지해합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후퇴하면서 우익 인사들과 종교인들을 학살한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신천에서 우익 봉기군 출신들이 포로로 잡은 공산당원들을 적법절차 없이 죽인 사실을 인정하고, 단지 노동당에 가입하거나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을 죽인 잘못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는 특히 “전쟁 시기 일부 기독교인들이 보복에 가담해 수많은 사람을 살상했다”며 “기독교인들이 사랑과 정의와 관련해 신자다운 모습을 온전히 나타내지 못한 것을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신천사건 자체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신천학살에 일부 기독교인들이 연루된 사실을 인지하고, 그들이 신천일대에서 과도하게 폭력을 행사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죄책을 회개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저는 한국 기독교계에 이 사실을 알려서 연대 책임의식 아래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남북 간에 참된 화해를 도모하고자 이 책을 내 놓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교수는 “당시 신천에서 일어난 폭력사태를 통제할 수 있는 공권력이 부족해서 이런 비극이 발생한 측면이 크다” 며 “우리 정부와 국민들은 신천학살 사건을 통해 역사적 교훈을 얻고, 앞으로 예상되는 북한 정권 혹은 체제 급변사태에 철저히 대비해 다시는 이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nNewsNumb=20150617696&nidx=185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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