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대신 닭
시골살이의 즐거움 중 하나라고 여겼던 애완용 개 기르기를 포기하고 난 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선택한 차선책이 ‘개 대신 닭’이었다. 김포 양곡에 나가 중병아리 몇 마리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뒤꼍 양지바른 풀밭에 제법 넓은 운동장이 있는 집을 지어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삶의 주요 요소가 의식주라 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마지막 미해결 과제로 남은 식(食)이었다. 공장에서 생산한 축협 사료 같은 것은 일단 거부하기로 했다. 혹시라도 그 원료가 유전자 변형 지엠오(GMO) 수입 옥수수는 아닐까, 그 속에 항생제가 다량 함유되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선은 아쉬운 대로 주변의 고들빼기, 칡, 뽕나무 등의 잎들을 따다가 먹였다. 간간이 음식 찌꺼기를 모아 특식을 차려주기도 했으며, 메뚜기나 지렁이, 작은 개구리 같은 것들을 잡아다가 성찬을 베풀어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옆집 아저씨가 좋은 모이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청치. 파르스름한 빛을 띠는 쭉정이 쌀을 여기서는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인근 몇 군데의 정미소를 돌아다니며 발품을 판 끝에 그것을 몇 자루 구할 수 있었다. 닭들은 보답이라도 하듯 무럭무럭 팔팔하게 자라 따끈따근하고 빛깔 고운 알을 낳아 주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출근 전과 퇴근 후 으레 닭장 앞에 서 있는 일이 잦아졌다. 앞으로 다가가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활력 넘치게 푸드덕 뛰어오르며 주인을 반기는 그 충만한 애정과 윤기 나는 총명함은 볼수록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애초 예상과는 달리, ‘개보다 닭’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더러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모습을 연출하곤 했다. 어느 순간 암탉이 다급하게 연발하고 있는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면, 덩치 큰 수탉이 그의 등 위에 올라타 일방적으로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는 그 폭압에 처참하게 깃털이 뽑힌 암탉들의 몰골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안쓰러웠다. 이런 참사를 불러온 유정란에 대한 집착을 참회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닭의 지능이 아주 낮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라 한다. 그들은 원하지 않는 수탉의 공격(?)을 당할 경우 그 정액을 몸 밖으로 배출해 버릴 정도로 영리하다고 한다. 또한 나름대로의 위계질서가 엄격하다는 말도 사실이었다. 병아리를 추가로 입양했을 때, 집요하리만치 신참을 쫓아다니며 쪼아대던 고참들의 혹독한 신고식을 보다 못해 아예 따로 칸막이까지 해준 일도 있을 정도였다.
이러고저러고 시간이 가면 사라지는 것이 있는 반면, 쌓이는 것도 있는 법. “정이란 무엇일까” 라는 대중가요 구절은 허튼 말이 아니었다. 무릇 모든 생명체는 그 생존 기반이 정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을 준 닭들. 그들은 내게 알보다도 더 많은 정을 낳아 주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회자정리(會者定離)라 설파하지 않았던가. 가족이 꽤 오랜 동안 집을 비우게 되는 일을 앞두게 되었을 때, 서너 해나 이어졌던 우리의 인연도 종착점이 가까웠음을 직감했다. 고민 끝에 옆집에 양도하기로 결정했으나, 막상 이별은 쉽지 않았다. 닭장 안에 들어가 한 마리씩 생포하여 이삿짐 상자에 넣을 때, 끝까지 떠나기를 거부하겠다는 듯 이리저리 도망다니며 저항하던 마지막 한 마리의 절규 같은 몸부림에 마치 마음을 마구 쪼인 듯 아팠다. 그렇게 그들을 떠나보낸 뒤, 다시는 절대로 그런 정을 기르지 않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결론은 ‘개도 닭도’였다.
- 『청소년 평화』 (20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