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산을 오르다보면 정상부에 쌍괴대(雙槐臺)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바위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군수 이기석 수식 임인중춘(郡守 李基奭手植 壬寅仲春)’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자료를 찾다보니 이기석 군수는 1857년 태안읍 환동에서 태어나 1945년까지 88세를 사신 태안분이시네요.
이 분의 생존기간 중에 임인년(壬寅年)은 1902년 뿐이고, 중춘은 음력 2월을 이르는 말이니, 이기석군수가 46세가 되던 1902년 음력 2월에 이곳에 느티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되네요.
원래 괴(槐)자는 훼나무 즉 회화나무를 말하지만, 가끔 느티나무도 이 글자로 표현함으로 느티나무가 맞을 것으로 추측을 해봅니다.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아마도 시목초 다음카페로 추측됨) ‘어느 마차꾼이 이곳에서 마차바퀴를 만들기 위해 느티나무를 베어갔다는 설이 전해진다.’는 것으로 보아 느티나무가 확실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비록 어린 나무이기는 하지만 이곳에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심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기석 군수는 어떤 분일까? 현재 태안읍사무소내의 목애당과 근민당에서도 이분의 성함을 발견할 수 있으니 더욱 궁금해지네요. 자료를 찾다보니, 그의 직계선친은 아니지만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이괄(1587~1624)이라는 인물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네요. 이 사람 역시 비록 6개월간(1607년 3월~9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태안군수를 지내기도 했으며, 후에 인조반정을 주도하여 성공시킵니다.
그러나 1등공신이 아닌 2등공신의 대우를 받은데 대해 약간의 불만이 있었고, 포도대장, 한성부 판윤을 거쳐,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는 등, 당시 서인들의 세력에 밀려 외관으로 나돌게 되자 불만이 폭발하여 난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난은 실패로 끝나고 이괄도 암살을 당하게 되지요. 이것이 곧 ‘이괄의 난’입니다.
이 여파로 이괄의 모든 일가는 숙청당하고, 다만, 이괄형제의 손자인 이복령만이 숙모인 진주강씨의 강보에 싸여 대피를 하게 되었고, 해미를 거쳐 태안으로 들어와 숨어살게 됩니다. 이때부터 고성이씨가 아닌 진주이씨로 살게 되었다죠. 이제 조선이 쇄하고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면서, 후손들이 이름을 떨치자, 다시 고성이씨로 환본을 하게 되었다네요.
이기석군수의 부친은 1830년생인 이희열씨로 자수성가로 제염업을 일으켜 부호가 되었고, 많은 사회사업도 펼쳤다고 전해집니다. 장남인 이기석은 군수, 차남인 이기훈은 중추원의관, 삼남인 이기상도 군수, 4남인 이기승은 참봉을 지냈으며, 화림농장을 조성하는 등 농법개량과 조림사업으로 부호가 된 분으로, 교육에도 뜻이 있어 1905년에 화양의숙을 세우고, 후에 군으로 이관하여 1911년 태안초등학교의 전신인 태안공립보통학교가 되었다네요.
이기석군수의 장남인 이영진(李寧鎭)은 큐슈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여러 회사 사장을 거쳐 해방 후 초대 충남 도지사(1948.10.18~1951.12.17)와 국회의원(아산,6대)을 지내기도 했답니다.<사진은 이영진 초대 충남지사 >
이희열(李希烈)
공은 일찍 조선조(朝鮮朝)의 순조(純祖) 30년(1830)에 태안읍 남문리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정직하고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주민들의 이목(耳目)을 끌었다.
공은 30세 때 3마지기의 논을 받아 분가하였는데, 1년 경작 후에 다시 아버지께 돌려드리고 적수 공권(赤手空拳)으로 부지런히 가업에 종사하는 한 편, 부업에 힘써 마침내 논 5마지기를 사는데 성공했다. 이것이 공의 가세확장의 기반이 된 것이다. 이를 토대로 본격적인 영농과 함께 제염업(製鹽業)에 착수하여 불과 몇 년 뒤엔 연산(年産) 2,500석의 소금을 생산하였다.
공은 이렇게 생산된 소금과 추곡(秋穀)을 주로 해로(海路)를 통해 반출(搬出)하였는데, 이 반출 과정에서 불량한 선원(船員)을 만나 막대한 손실을 입게되었다. 이로 인해 공은 도산(倒産) 직전에 이르게 되었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더욱 근검 절약하여 마침내 도내(道內)에서 으뜸가는 재산가(財産家)가 되었다.
이는 모두 비범한 공의 지혜와 또한 부인의 내조의 공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어려움을 겪으며 모은 재산을 보람있게 활용하기 위해 공은 우선 논 100마지기를 종문(宗門)의 공동 재산으로 희사하고 유사(有司)를 정하여 이를 관리토록 했다. 그리고 4남인 기승(基昇)으로 하여금 소작인 저축농계(貯蓄農契)를 설립토록 하여, 농사법의 공동 개량과 도열병(稻熱病) 재해시의 공동 구조자금을 만들게 하여, 보다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영농을 하도록 했다.
또한 1713년에는 벼 90석을 출연(出捐)하여 춘궁민(春窮民)을 도왔으며, 다시 3년 뒤인 1916년에는 벼 400석을 태안 지역의 7개면 206개 부락에 희사하여 각 면별(各面別)로 산업 저축계를 조직케 하였는데, 이는 산업 장려와 근면 저축의 미풍을 권장하는 동시에, 흉년과 기타 천재 지변이 발생했을 때의 구조 기금을 조성하여 두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준친척(準親戚) 11가구에 벼 20석을 희사하여 공동의 기본 재산을 조성토록 하였고, 또 서산 지역에 벼 80석을 희사하고, 다시 해미 지역에는, 3남인 기상(基祥)의 명의로 벼 30석을 출연하여 공동 저축계를 만들도록 하였다.
공께서는 일찍 장남인 기석(基奭:군수 역임)·2남 기훈(基訓:의관(議官) 역임)·3남 기상(基祥:군수 역임)·4남 기승(基昇:참봉(參奉))등 4남을 두었는데, 4형제 모두 효심(孝心)과 우애심을 가진 지혜로운 형제들이었으며, 또한 제가 처세(齊家處世)와 자선 등으로 일향 사표(一鄕師表)가 되었다. 공은 이 4형제들을 가사(家事)와 사업 경영의 적재 적소에 알맞게 배치시켜 일을 맡겼다. 즉 장남은 회계·차남은 가헌(家憲)·3남은 외교(外交)·4남은 농무(農務)였는데, 모두 질서 정연하고 숙연하게 처리해 나갔다.
그리고 어떤 일을 계획하고 추진시킬 때는 반드시 4형제가 서로 합의한 뒤에 그 계획서를 만들어 아버지의 결재를 받은 다음 이를 집행하였다. 또한 공은 일찍 가헌(家憲)을 만들어 이를 실천해 왔는데, 그것은 을사협의안(乙巳協議案)·신해신념잠(辛亥新年箴)·갑인유신서(甲寅維新書) 등의 3편과 윤상(倫常)·가규(家規)·교육(敎育)·재정(財政)·경리(經理)·식산(殖産)·흥업(興業)·위생(衛生)·구휼(救恤)·저축(貯蓄)의 9개 항목, 그리고 실행 세칙 수 백조로 되어 있었다.
공이 이처럼 많은 자선과 공익 사업을 하다 일본 강점기(日本强占期)인 1918년에 향년 88세로 별세하니 조석으로 조객(弔客)이 무려 5,000여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공의 타계를 몹시 슬퍼하였다. 태안읍 평천리에 그의 뜻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가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