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티 카우만
정 상 운
레티(Lettie Burd)는 1870년 3월 3일 미국 아이오아의 애프톤에서 은행가로 성공한 아이작 버드(Isaac M. Burd)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란 그녀는 문학을 즐겨 했고, 피아노를 잘 쳤다. 맑고 깨끗한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음악적 재질이 있어서, 주위로부터 음악가가 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이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은 동네 정거장에서 전신기사로 일하고 있었던 청년 카우만(Charles E. Cowman)을 만나고 일어났다. 레티 어머니의 주선으로 둘의 만남은 열매를 맺게 되어 1889년 6월 18일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록키 산맥 한가운데서 시작된 신혼생활은 산의 고도가 너무 높아 레티에게 심장병이 생기자, 시카고 전신국으로 전근하면서 그 기회에 집도 옮겨 버렸다. 시카고로 옮겨온 레티는 남편 카우만이 승승장구하여 전신국 부하직원 50명을 거느리는 등 안정된 생활을 갖게 되었다. 1893년 레티는 성탄절을 앞둔 어느 날 밤, 이웃 교회 집회에 초대받았다. 음악에 관심이 많은 레티는 초청에 응했다. 은혜감리교회(Grace Methodist Episcopal Church)였다. 그날 밤 간증과 함께 복음성가를 부른 가수는 무디(D.L. Moody)와 함께 전도운동을 벌인 생키(Ira Sankey)였고, 노래의 내용은 “아흔 아홉 마리 양”이었다. 레티는 그 자리에서 깊은 은혜의 체험을 맛보게 되었고, 그 자리에 엎드려 하나님을 잊고 살았던 과거의 삶을 회개하며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기도를 드렸다. 찰스 카우만은 이후에 이 날을 회상하며, “이는 한밤중에 울린 바울과 실라의 노래였고, 세상의 즐거움에 빠져 살았던 레티의 마음에 영적 지진을 동반했다”고 말했다. 레티가 회심한 후, 그녀는 카우만을 권면하여 은혜감리교회에 나가게 하였는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카우만 역시 주님께 돌아오는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다. 카우만은 회심 체험 후, 전도자로 변했다.
카우만은 반년 사이에 75명을 주님께로 인도하였는데, 전도의 첫 열매로 이후에 동양선교회의 설립뿐 아니라 평생 믿음과 사역의 동역자가 된 길보른(E.A. Kilbourne)을 주님께 인도하였다. 1894년 레티는 자기 남편과 함께 심프슨 박사의 선교대회에 참여하였고, 이 자리에서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확신을 갖고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받게 되었다. 이들 부부는 처음에는 인도로 가서 선교를 하려고 하였으나, 레티의 건강이 인도 기후에 견딜 수 없다는 진찰 결과를 듣고 일단 보류했다. 2년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던 이들에게 마침내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일본이었다. 카우만 부부는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한 채 1901년 2월, 21일의 항해 끝에 일본에 도착하였다. 이 때부터 레티 카우만은 카우만을 도와 나까다 목사와 함께 동경에서 중앙복음전도관과 동경성서학원을 설립하였고, 이후 1905년 11월에 동양선교회를 창설하였다. 카우만 여사는 선교사로서 주로 미국에서 오는 후원자들의 편지에 회답하고, 후원금을 관리하는 재정분야의 회계 업무를 맡아보았다. 또한 동양선교회의 기관지인 ‘Electric Messages’(후에 ‘Oriental Missionary Standard’로 이름을 변경)라는 정기간행물이 발간되자 많은 글을 기고하였고, 주필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레티는 카우만의 건강이 악화되자, 1918년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가서 병중의 남편을 간병하였다. 그녀는 동양선교회 일로 영국을 자주 왕래하고, 선교보고회에서 설교를 하며 큰 감동을 끼쳤다. 그리고 틈틈히 사역과 간병기간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영적인 감사와 사색의 글들을 쓰기도 하였다. 1920년 카우만이 소천되자, 길보른을 도와 동양선교회의 확장과 선교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그도 4년 뒤에 로스앤젤레스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자, 길보른에 이어 동양선교회 4대총리가 되어 동양선교회를 이끌어 가며, 1933년부터는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동양 지역을 순회하며 천막 전도집회를 통한 십자군 전도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1949년 팔순의 나이에 기력이 쇠하자 동양선교회의 총리직을 유진·어니 박사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십자군 전도운동과 문서선교운동을 배후에서 돕는 일을 하는 중에 1960년 4월 17일 부활주일 아침에 하늘의 부르심을 입었다. 다음은 레티 카우만이 남긴 저서. 1924년에 『사막의 생수』(The Streams in the Desert),『위로』(Consolation), 『골짜기의 샘물』(The Springs in the Valley), 1928년의 『선교의 전사, 찰스 카우만』(Missionary Warrior, Charles E. Cowman), 『산꼭대기를 바라보고』, 『돋는 해를 바라보며 떠난다』.
목련꽃이 한바탕 흐드러지게 피어 봄을 알리고, 떨어지는 4월에 평범한 전신국 기사의 아내에서 동양선교회 총재에 이르기까지 젊어서 받은 선교적 사명을 위해 90평생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동양 선교의 큰 꿈을 만개한 꽃처럼 현실로 바꾼 레티 카우만 여사의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사랑이 가슴에 와닿는다 |
|
첫댓글
부부의 선교 열정
힘이 느껴지니 멋집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역사하심이 또한 멋지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