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빛학당 시대와 인물] 160406 김육의 대동법
“김육의 대동법”
과전법 개혁과 함께한 조선의 건국은 다수 농민들의 지지를 통해 가능했습니다. 토지겸병으로 인한 전세의 과중함이 매우 컷 던 시기가 바로 고려 말이었기에 과전법의 개혁만으로도 민중의 숨통이 트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전법은 이후 직전법으로 바뀌고 후에 영정법으로 귀결됨으로써 조선의 전체 재정에서 전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줄게 되었습니다. 한쪽의 세금이 줄어드니 정부의 예산이 축소되지 않는 한 다른 한쪽에서 세금을 충당하여야 했는데요. 그 대표적인 세금이 바로 공납이었습니다.
전세와 역 그리고 공납으로 이루어진 조선의 조세제도는 조선 중후기로 갈수록 공납의 비중이 점점 커지게 됩니다. 공납은 조선 중기 이후 전체 조세의 60%나 차지했다고 합니다. 공납의 부과 단위는 마을입니다. 공납을 통해 조선조정은 각 지역의 특산물인 현물을 받아 조선의 재정을 운용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과단위가 마을이다 보니 마을의 지주나 양반 그리고 소작농을 가리지 않고 동일한 조세부담이 있었습니다. 또한 각 지역의 특산물이 매년 변동이 있었고 부과기준이 모호하여 백성들의 공납의 부담은 가중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조선 조정에서 요구하는 최고 품질의 공납을 납부해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서 바로 ‘방납인’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방납인은 지방 관료와 밀실에서 협의하여 공납품을 독점적으로 납부하며 막대한 이득을 취하게 됩니다. 공납의 의무를 가진 대부분의 농민들은 방납인을 통해 공납을 납부할 수밖에 없었고 방납인은 이 과정에서 폭리를 취하고 나중에는 고리대까지 활용, 농민들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공납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김육입니다. 오늘 시간에는 공납의 문제와 대동법의 대안 그리고 김육의 생애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김육은 고조할아버지가 조광조와 함께 기묘사화로 축출되어 김육의 아버지 대에서야 비로소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김육이 12살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관직의 길이 막혀 있었기에 김육은 양반이었지만 빈궁한 삶을 살았습니다. 김육은 과거에 응시 합격하여 광해군 때 잠시 관직에 머무르지만 정치에 회의를 가지고 경기도 가평의 잠곡으로 내려갑니다. 아무런 기반 없이 내려간 김육은 2년간 토굴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잠곡에서 10년의 세월동안 숯장사, 농사, 산약초 캐기 등으로 가족의 생계를 직접 책임지며 백성의 삶에 깊숙이 들어갑니다. 김육에게 백성들의 고통은 바로 자신의 고통이었고 그들과의 사귐과 삶에서 개혁의 분명한 의지와 방향을 발견합니다.
인조반정 후 김육은 다시 복권되어 공납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대동법을 강력하게 건의합니다. 대동법은 현물로 내는 공납대신 토지를 부과기준으로 새롭게 선정하여 특산물이 아닌 쌀로 세금을 내게 하는 제도입니다. 기존의 공납은 마을단위로 부과되고 현지 특산물을 납부하다보니 지주나 소작농이 동일한 납부부담이 있었으며 방납의 문제점까지 발생했던 것에 반하여 대동법은 토지단위로 부과한 누진세였습니다. 당연히 당시의 지주층인 핵심 양반층에서 거센 반발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김육은 줄기차게 주장하고 설득하여 충청도 대동법에 이어 효종시절 호서대동법 통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겁니다. 특히 김육은 서거 1달 전 대동법의 후퇴를 염려하여 효종에게 간곡한 호소의 편지를 씁니다. 임금뿐 아니라 주요 요직의 모든 관료에게 편지를 써 대동법을 지켜달라고 설득했다고 합니다. 서거 하루 전에는 당시 영의정에게 편지를 썼다고 하니 김육의 집요함과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동법의 역사는 뿌리가 깊습니다. 김육의 역할이 지대했지만 가히 200년간의 모색 끝에 100년 만에 완성된 개혁입니다. 대동법 완전시행 200년 전 조광조가 공납의 문제를 제기했고 ‘공물변통’주장을 합니다. 공납을 쌀로 대신 내자는 대동법의 기본 개념이 그때부터 주장된 것입니다. 이후 율곡 이이, 유성룡, 조익, 이원익 등에 의해 대동법은 끊임없이 주장되었습니다. 이후 광혜군 시절 경기선혜법을 통해 경기도에 시행되어 숙종 대에 이르러 전국에 거쳐 시행된 것이지요. 다음 주 부터는 대동법의 뿌리부터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대동법과 김육의 생애를 개괄한 후에는 헨리조지연설문 ‘모세’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동양에는 ‘정전제’에서 토지의 공적 사상을 볼 수 있다면 고대근동의 성서에서는 ‘희년’을 통해 토지의 공적 사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모세가 꿈꾼 나라는 토지의 권리를 균등하게 배분하여 지배와 착취의 나라가 아닌 공정과 책임의 나라였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히브리 민족에게 모세가 공유한 비전은 조선의 개혁가들이 꿈꾸던 비전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김육의 집요함과 백성과의 만남에 친구들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선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끊임없이 설득하고 함께 할 동지를 만나고 처음의 마음을 잊지 않는 집요함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것을 머리로 알게 되는 것뿐 아니라 수련을 통해 몸과 마음의 변화를 도모하고 친구들과 새로운 관계로 끊임없이 나아가고자 하는 친구들에게도 김육의 집요함이 보입니다. 친구들이 한 걸음, 한 걸음 겸허하게 준비되어 우리 시대의 과제를 감당해내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