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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 行狀[姓名逸] 次希卨。正郞。娶金坵(彦陽人)之女。無子女。取從姪彥男爲後。 彦男同知娶彥陽金氏。諱重泓之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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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몽유록에는 황석 제공(諸公)으로 태수 곽(郭)부자(이름은 䞭이고, 아들은 履常·履厚), 사군(使君) 조종도(趙宗道), 금천(金川) 유세홍(柳世泓, 1536~1597) 부자(아들 橿·榎), 첨지 정언남(鄭彦男) 등을 언급하였는데 정언남은 일두선생의 손자이다. 문헌공 정여창의 손자로, 언양김씨 김중홍의 사위인 정언남이 황석산성에서 대소헌 조종도, 존재 곽준과 함께 순국하였다.
※彦陽金氏族譜: 고려명장 문하시중 김취려 就礪-佺-良鑑-光衍-之甲-憲-承達-
餘善-守謙-坵-사위鄭希契 河東人 正郞 父文獻公汝昌 子彦男嘉善
고려명장 문하시중 김취려 就礪-佺-良鑑-光衍-之甲-憲-承達-
餘善-守謙-垍-重泓-사위鄭彦男 河東人 父正郞希契 子大民縣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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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義邑誌 / 生進 鄭齊安 草溪人提學悛子 鄭懷雅 生員齊安子(見文科) 金埏 貫未詳 嶠南誌卷之六十 安義郡 人物 人物(文科)(高麗)河千 高宗時人性質直長文章一時表箋皆出其手 朴德祥 官尙書 李芮 性忠孝學行純備官判書謚文質 李仁達 芮子官判書 李忠達 芮子官左尹 朴習 德祥子麗季進文判書 (李朝) 林整 恩津人太祖朝文科官西京都巡問察理使 朴義卿 習子 太宗朝文正言 鄭以雅 提學悛孫端廟文校理 李秤 忠達子成廟文持平至大諫 曺淑 號竹軒中廟進文府使遊林得蕃門講質道義與蘇齋廬守愼林塘鄭惟吉相追隨 金埏 中廟文佐郞 劉德蓋 宣廟 進文正字 吳勣 宣廟文府使 朴明榑 密陽人號知足堂宣廟文禮參歷都承旨參宣武勳按湖西蒙褒諭 仁廟丙子巵駕南漢斥和議歸遯花林洞構弄月亭於鍾潭上贈吏判有文集 禹汝楙 悙子號涑川仁廟進文縣監親沒不復仕作洪範羽翼二十八篇及衍義八篇 鄭東望 顯廟文察訪 愼認明 守彝子文持平 愼性眞 認明子文承旨 愼必復 守彝曾孫文執義 李相龍 文正言 李敏實 文判校 ....................... 김여선(金餘善)의 인적관계 상세정보 ......................... 김연(金埏) [문과] 중종(中宗) 14년(1519) 기묘(己卯) 별시(別試) 병과(丙科) 13위(18/19) 자(字) 계용(季鎔) 본인본관 언양(彦陽) 거주지 상주(尙州)【補】(주1) [진사] 중종(中宗) 11년(151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53위(83/100) 선발인원 19명 [甲2‧乙3‧丙14] 전력 진사(進士) 관직 공조좌랑(工曹佐郞) 문과시험답안 책문(策問) 타과 중종(中宗) 11년(151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53위 [부(父)] 성명 : 김수겸(金守謙) [조부(祖父)] 성명 : 김여선(金餘善) [증조부(曾祖父)] 성명 : 김승달(金承達) [주 1] 거주지 : 『정덕11년병자식생원진사방(正德十一年丙子式生員進士榜)』(개인)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출전]『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김연(金埏) [진사] 중종(中宗) 11년(151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53위(83/100) 자(字) 계용(季鎔) 본인본관 언양(彦陽) 거주지 상주(尙州) [문과] 중종(中宗) 14년(1519) 기묘(己卯) 별시(別試) 병과(丙科) 13위(18/19)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타과 중종(中宗) 14년(1519) 기묘(己卯) 별시(別試) 문과(文科) 병과(丙科) 13위 [부(父)] 성명 : 김○○(金○○) [출전]『정덕11년병자식생원진사방(正德十一年丙子式生員進士榜)』(개인) ...................... 자암집(自菴集) 김구(金絿)생년1488년(성종 19)몰년1534년(중종 29)자대유(大柔)호자암(自菴), 율곡병수(栗谷病叟)본관광주(光州)시호문의(文懿) 自菴金先生文集卷之一 / [七言絶句 卅四] / 昆陽太守金守謙。請書扇面。醉中走筆。乙酉六月 高樓氷雪壓朱炎。邂逅心親慶讌兼。百歲歡娛今日少。寧辭竟夕酒杯添。時僉使徐壽千登科。卽陞堂上。設慶宴故云。 곤양태수 김수겸이 부채에 글을 부탁하기에 취한 김에 주필로 쓰다 을유년(1525) 6월에 昆陽太守金守謙 請書扇面 醉中走筆 乙酉六月-49 자암집 : 自菴集 임종욱 (林鍾旭 , 1962 ~ ) 남해문화원 2010 |
自菴金先生文集卷之一 / [七言絶句 卅四] / 昆陽太守金守謙。請書扇面。醉中走筆。乙酉六月
중종 | 20 | 1525 | 을유 | 嘉靖 | 4 | 38 | 〈李密陽宅讌席觀優戲作〉, 〈昆陽太守金守謙請書扇面醉中走筆〉 詩를 짓다. |
高樓氷雪壓朱炎。邂逅心親慶讌兼。百歲歡娛今日少。寧辭竟夕酒杯添。時僉使徐壽千登科。卽陞堂上。設慶宴故云。
중종 | 14 | 1519 | 기묘 | 正德 | 14 | 32 | ○ 11월, 趙光祖ㆍ金淨ㆍ金湜 등과 함께 의금부에 拏捕, 推考당하다. 開寧에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뒤에 加罪되어 南海의 絶島에 이배되다. |
중종 | 26 | 1531 | 신묘 | 嘉靖 | 10 | 44 | 臨陂縣으로 量移되다. 〈移配時在晉州失路作四首〉, 〈送別敎授朴緩〉 詩를 짓다. |
중종 | 28 | 1533 | 계사 | 嘉靖 | 12 | 46 | 4월, 사면되어 禮山 宗敬里에 돌아와 부모상에 追服하다. |
김수겸(金守謙)
조선 전기의 유학. 본관은 언양(彦陽).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지낸 김연(金埏)의 아버지.
김연(金埏)
조선 중종(中宗) 때의 문신. 본관은 언양(彦陽). 김수겸(金守謙)의 아들로,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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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 行狀[姓名逸] 次希卨。正郞。娶金坵(彦陽人)之女。無子女。取從姪彥男爲後。 彦男同知娶彥陽金氏。諱重泓之女
鄭汝昌 1450 1504 河東 伯勖 一蠧 文獻
一蠹先生遺集卷之三 / 附錄 / 行狀[姓名逸]
先生姓鄭。諱汝昌。字伯勖。河東人。曾祖之義。判宗簿寺事。祖復周。判典農寺事。考六乙。折衝將軍,咸吉道兵馬虞侯。贈嘉靖大夫。漢城府左尹。妣贈貞夫人。牧使崔孝孫之女。以景泰元年庚午。生先生。天順四年。左尹公爲義州通判。天使張公寧到州。先生年甫八歲。張公見而異之。有所問。善應對。不忍捨去。左尹公因請名。張公名之曰汝昌。著說而與之。蓋以能昌其家也。成化三年。左尹公立慬於施愛之亂。先生皇皇恤恤。若無所歸。哭泣之聲。哀戚之容。見者皆稱其至孝。喪畢。朝廷以衛國亡身之子。例署軍職。先生泣而辭之。謹奉偏母。誠意懇切。未嘗遠違。一日。母夫人責之曰。無父之子。不學何爲。於是先生慷慨篤志。至於忘食。聞利川有李進士寬義訓後進。負笈往從。所學日就。厥後詣佔畢齋門下請學。先生以古人爲學次第敎之。先讀小學,大學。遂及語,孟。日承指敎。尋知綱領旨趣。硏窮道義。屢年磨礱。尤精於庸學。然不以爲有得。入頭流山。發憤勵志。依朱子學規。以涵養本源。爲進德之基。以窮探性理。爲修業之本。俯讀仰思。所見高明。猶不自滿。夜以繼晷。勤修不倦。至於三年。歲庚子。成廟論成均館。求經明行修。館中擧先生爲第一。知館事徐居正。將進先生講經。先生不就。癸卯。中進士入泮宮。同列以理學推尊之。與友寢。齋房鼾睡。而獨不寐。人無知者。惟生員崔鎭國知之。播告諸友。皆曰思道也。嘗居家。以早失怙爲恨。在母側如嬰兒。以悅母心。然母之所爲有失則輒諫焉。母之志亦不欲以非義。傷先生之心。故母無過擧。子無苟順之失。人謂一家行義。丙午夏。母夫人患痢。先生嘗矢。焚香號天。請以身代。不見效。先生乃曰。吾誠不至。未蒙神佑。有身何爲。以頭觸柱血出。及其終也。擗踊哭泣。晝夜不絶聲。幾至滅性。斂殯葬祭。皆用禮儀。時監司與棺槨。郡守曺偉給墓軍。皆辭還不受。以家資家隷備辦之。旣襄。朝夕上塚。歠粥三年。哭奠至期。氣力頓乏。然終日危坐。不脫絰帶。長伏凡筵之下。不出塋域之外。服闋。率二弟入頭流山。皇皇乎如求見其慈顏而不得。哀慕之切。有似喪中。旣還家。鄕老勸肉。垂涕而不答。曺偉以先王中制不敢過之之意。來慰焉。因與兄弟約同居曰。古之人亦有至九世者。汝知之乎。竟以事勢未成。至於分財之日。自占羸薄。有窮妹。許使自擇。妹夫寧仁君楯。猶爲未滿。先生以己物加與之。又以家儲稍豐。四隣多糶。斂散之際。慮有怨恨。於是出文券焚之。終制經年。見母氏平日執用之器。所恤之人。則必咨嗟悲感不自已。每於鄕中執詩來問者。語及蓼莪篇。則輒泫然出涕。不能自禁。一鄕感化。孝於親者。亦多有之。凡治家有法。內政使夫人治之。外事使長子希稷幹之。先生則淡如也。平生素有煙霞之癖。酷愛晉山岳陽洞。一日。携妻子築室于蟾津之口。寄情丘壑。吟弄風月。或棹舟于江。或垂釣于溪。時或騎牛往來雙溪靑鶴洞間。臨湖又搆小亭。扁曰岳陽。以爲藏修之所。讀書於斯。講道於斯。吟詠性情而樂之。庚戌。寺正趙孝仝,參議尹兢。薦孝行學識士林無比。成廟特召爲昭格署參奉。先生謂人子分內事。實無卓異之行。上書固辭。成廟親題疏尾曰。聞汝之行。予不覺出涕。行不可掩。而今猶如此。是汝之善。不允。是年冬。擢別試文科。卽選補藝文館檢閱。成廟於筵上賜酒。先生伏地曰。臣母在時。嘗責飮。臣以不飮許母。茲不敢奉命。上許以眞儒。遷侍講院說書。補導以正。東宮忌之。甲寅。除安陰縣監。人謂理邑非其能。及先生到縣。首訪民隱曰。字牧之道。要在省徭薄賦。遂作便宜數十條。行之期年。而公私無事。農桑安業。田里大悅。境內相戒。莫以欺詐負先生。方伯重之。凡事之盤錯未易解者。必巡面質。然後乃行。由是。道之決疑者。遠近咸歸。辨而不得意者。皆不恨其敗。稱其神明。莅事之暇。選邑之聰明子弟。親加敎誘。日課講讀。學者聞之。自遠方來。多有成立者。春秋行養老禮。設內外廳。內則夫人待之。外則先生冠帶接之。有貧未婚嫁喪葬者。尤厚賙之。使不失時。一境大賴。然不樂居官。將有歸田之志。戊午。先生以佔畢齋門人。坐史禍。與寒暄堂諸賢。一時被謫。先生曰。患難。雖聖人亦不免。小無所動。配鍾城七年。甲子夏四月一日。易簀于謫所。享年五十五。返葬于咸陽郡東昇安洞,先公墓左。嗚呼。先生性端愨沈靜。言語有時。不喜紛華。不評人過失。與人接。未嘗崖異。常好論語。讀之不倦。若以言行言之。則事親極其孝。居喪盡其哀。好學如嗜欲。樂善如不及。至於忠君憂國之念。莅官愛民之心。無不出於至誠。少時飮酒過度。而貽母氏之憂。則終身不飮。鄕會殺牛起訟。而驚母氏之心。則平生不食牛肉。俗學以記誦爲務。以組繪爲工。而先生則以推求道義爲本。以敍述事情爲主。至於鄭衛之音。不屬于耳。華靡之色。不接於目。衣而不以精粗爲去就。食而不以美惡爲揀擇。此先生之素性。而學力之所致也。其爲政也簡易。見館宇凋弊。不用民力。功役易就。創立光風樓,霽月堂於溪上。以延使命。民不知經始於何日也。雖上供之役。不過一日而罷。其愛惜民力如此。所行科條十餘事。至今八十餘年。官吏世守爲範。雖不義無識者。不敢擅改。有欲改之。則三老群吏庭爭。必頷乃已。每歲。縣之吏胥。必進拜于夫人。夫人之沒。趨役者如喪其父母。其被謫鍾城七年之間。處之怡然。悟靜自守。初以庭燎夫差之。每使臣入公館。輒執燃火之役甚恭。府官以他人代之。先生曰。吾役也。不聽。六鎭僻陋。舊無學業者。先生至數年。文化大行。先生之平生著述日記雜說韻語若干篇。戊午之禍。夫人盡投之火中。聞者多歎之。嘗與寒暄言曰。學而不知心。何以學爲。寒暄曰。心在何處。先生曰。無乎不在。亦無有處。此兩先生論心學處。而未聞其間許多議論。惜哉。朱溪君深源,南秋江孝溫。亦嘗友而敬之。秋江則嘗立傳而無傳云爾。中廟十二年。命贈議政府右議政。令本邑守。春秋仲月。致祭家廟。賜夫人爵貞敬。歲廩終其身。竝錄試其子孫。至今上 宣祖大王 八年。奉常。上先生行義。賜諡文獻。按諡法。道德博聞曰文。聰明睿哲曰獻。先生娶宗室桃平君末生之女。恭靖大王之孫也。有葛覃之賢德。生二男四女。
男長希稷。直長。娶縣令房貴和之女。嫡無嗣。只有庶子如山。
次希卨。正郞。娶金坵之女。無子女。取從姪彥男爲後。
女長適副司直崔浩文。
次適生員趙孝溫。
次適李賢孫。
次適薛公諄。
彥男生子大民。縣監。庶子秀民。參奉。
大民生一男一女。男弘緖。參奉。女適房元震。生員。
弘緖生三男。長光漢。次光旭。年十八而夭。季光淵。
先生行狀載儒先錄者二。一謂出於李公勣之手。而太略。不能擧其一二。一出於先生姪希參。而猶未能備焉。近又求得此本於鄭氏之門。未知出於誰手。雖似稍詳。而亦裒集斷爛。又自今上以下。爲蟲蠹所損。問諸秀民則曾見此文於平時。其下。只敍子孫譜系而已云。故輒敢續錄。俾成全文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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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온(鄭蘊) 1569년(선조 2)~1641년(인조 19)
桐溪先先文集卷之四 / 墓碣 / 長水縣監鄭公墓碣銘 幷序
河東之鄭。爲世著姓。有諱國龍。仕麗朝。贈匡靖大夫,密直副使。寔公之鼻祖也。其後徙居咸陽。年代不可詳也。而自版圖判書諱之義以下。墓在咸陽。咸吉道兵馬虞侯諱六乙。死於李施愛之亂。贈嘉靖大夫,漢城府左尹。於公爲高祖。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諡文獻諱汝昌。世稱一蠹先生。乃東國五賢之一也。從祀孔子廟庭。於公爲曾祖。
祖諱希卨。贈戶曹正郞。
考諱彥男。以武功爵階同知。正郞無子。取以爲後。生父曰希參。縣監。祖曰汝寬。生員。乃文獻公季弟也。
同知娶彥陽金氏。諱重泓之女。以嘉靖辛亥八月十三日生公。
公諱大民。字中立。年二十五。初授東部參奉。蓋用象賢之典也。移永崇,文昭,集慶三殿參奉。俄陞軍資監參奉直長主簿。轉司憲府監察,掌隷院司評。丙戌冬。除雲峯縣監。辛卯春。除谷城縣監。甲午夏。爲長水縣監。此公之歷官序次也。公常自言曰。我之通籍。實荷賢祖先餘蔭。若欲因以肥己。我則非人。將何以有辭於地下乎。是以在所多以淸謹名。其在雲峯。廢鍮銅器朔捧之規。秋毫不敢有所近。在谷城。尤得吏民心。災傷御史謂公無援于朝。欲勒置劾啓中。士民聞之。來集者幾千餘。爭訟公德政。不從則盈庭溢街。痛哭呼訴。御史不得已寢其劾。在長水。遭歲大凶。有鄕里故舊。質白金。求糶倉穀。及秋當糴。其人欲以其銀當其債。公曰。我活故人。故人欲以汚我耶。卽以銀錠還之。封誌宛然。其人赧而退。歲丁酉。公方家食。値倭鋒再動。三邑以都體察分付。當入黃石山城。公扶老幼入城。及城陷。公二親俱罹凶刃。公卽奉體魄。權厝于先塋之側。仍留不去。人皆謂旣已權安。當小避賊路。以爲後日營葬地。公泣且言曰。不肖旣不死親尸傍。死有餘罪。況敢私便其身。圖就乾淨地求活。於是看守益勤。經冬不小離。戊戌二月十日。沿海縱掠之賊。果不意衝襲。公乃死之。以其年十二月某日。葬于郡北邛山辛坐乙向之原。嗚呼。公承大賢之後。宜有餘慶之及。而連世俱不得其死。天之報施一何忍。此可哀也已。公娶郡守林希茂之女。生一男一女。男曰弘緖。登文科。纔試成均館學正。初娶贈都承旨楊士衡之女。生三男一女。再娶士人林眞㦂之女。生一女。女曰房元震。察訪。生二男二女。學正長男光漢。生員。次光睍。早夭。次光淵。進士。光漢娶鄕人朴葳之女。有三女一男。女長適李商英。餘皆幼。光淵娶參判朴明榑之女。有二男三女。皆幼。女適李皦。有二男。坰,埰。季女適郭文浣。察訪之子。曰明煜。進士。娶梁士悌女。有三男二女。皆幼。曰明熽。生員。娶沈沂源女。時無子女。長女適李悵。有男女若干。次女適金茳。無後。內外孫曾孫男女三十餘人。噫多矣哉。已定之天其在斯乎。是爲銘。銘曰。文獻之祀。惟公是承。廉平之政。惟公是能。位卑無年。何命之屯。惟公之死。死於其親。死而無愧。其死猶生。有或不信。請考斯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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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1 1469 기축 성화 5 20 7월 탈상
성종 1 1470 경인 성화 6 21 장남 鄭希稷 출생
성종 2 1471 신묘 성화 7 22
성종 3 1472 임진 성화 8 23
成化八年壬辰。成宗大王三年 先生四十二歲。春秋。設行鄕飮酒儀,養老禮。八月初五日。作頭流遊山錄。撰觀海樓記。一蠹鄭汝昌與寒暄金宏弼相友。詣先生門下。請學。以古人爲學次第敎之。先讀小學,大學。遂及語,孟。日承指敎。尋知綱領旨趣。硏窮道義。<佔畢齋先生年譜>
성종 3 1472 임진 成化 8 42 봄ㆍ가을로 鄕飮酒儀와 養老禮를 시행하다. ○ 8월, 〈遊頭流錄〉과 〈觀海樓記〉를 짓다. ○ 鄭汝昌ㆍ金宏弼이 와서 수학하다. <점필재행력>
성종 4 1473 계사 성화 9 24 일로당 양관 37세 모친상<龍城世稿附錄 逸老堂行狀 桐溪鄭蘊撰>
성종 6 1475 을미 성화 11 26 양관 39세, 삼괴정 건립, 일로당 현판, 일로당에서 매월 초하루 일두와 제자들과 향사례 거행, 효경, 상례, 소학 강론<龍城世稿附錄 逸老堂行狀 桐溪鄭蘊撰>
성종 9 1478 무술 成化 14 29 4월, 李深源ㆍ南孝溫 등과 함께 昭陵에 대한 일로 任士洪 등의 탄핵을 받다.
성종 10 1479 기해 成化 15 35 뇌계 유호인, 홍문관 수찬이 되다. ○ 乞養하여 居昌縣監이 되다.
성종 11 1480 경자 成化 16 31 성종이 성균관에 유지를 내려 ‘經學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선비’를 추천토록 하여, 이에 제일로 천거되다.
鄭永綏 姓庚子生員, 慶州人, 天嶺誌世居治北池內與鄭文獻公同庚云進<咸陽郡誌 姓氏>
與我文獻公同交庚而義特厚, 文獻公有時相聚于其家之岸西溪亭, 亭至今宛在, 眞古迹也夫<天嶺誌 人物> 鄭汝昌 1450 ~ 1504
성종 12 1481 신축 성화 17 32 차남 鄭希卨 출생
성종 13 1482 임인 成化 18 33 花開洞으로부터 南原 中方里로 尹孝孫을 방문하여 함께 「朱書」를 강론하다.
宣平襄公行狀 찬술
吾爲宣氏外派。而恨未見公之威儀。亦未攀公之杖屨。然而非但聞諸人誦公之言。乃吾家庭闈訓戒中聽敎者也。成化壬寅正月上瀚。外裔河東鄭汝昌。謹撰。
성종 14 1483 계묘 成化 19 34 진사시에 합격하여 成均館에 입학하다.
성종 17 1486 병오 成化 22 37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廬墓하다.
성종 18 1487 정미 成化 23 43 뇌계 유호인, 1월,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다. ○ 〈孫君墓誌銘〉을 짓다. ○ 義城縣令이 되다.
성종 19 1488 무신 弘治 1 39 蟾津江 어귀에 岳陽亭을 짓고 讀書, 講道하고 吟詠하며 생활하다.
성종 20 1489 기유 弘治 2 40 4월, 金馹孫과 함께 頭流山을 유람하다. ○ 晉州의 姜渾을 방문하여 詩文을 논하고, 함께 密陽의 金宗直을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다.
弘治二年己酉。成宗大王二十年 先生五十九歲。正月二十一日。除工曹參判兼同知經筵,弘文館提學,成均館事。辭疏。不允。三月初一日。特除資憲大夫刑曹判書兼知經筵,弘文館提學,成均館事。辭䟽。不允。先生剖決訟獄。一出至誠。咸服公正。秋。以病辭。移授知中樞府事。時恩顧彌渥。妬媢者衆。先生欲謝病歸。一日。請浴東萊溫井。上許之。因臥密陽田庄。上特許勿遆前職。遣史官敦諭。或勸之受祿。不應。三辭。不允。至親製批答凡兩度。有端愨無僞。學問淵源等語。<佔畢齋先生年譜>
성종 20 1489 기유 弘治 2 59 1월, 공조참판이 되다. ○ 3월, 형조판서가 되다. ○ 8월, 병으로 사직하여 지중추부사가 되다. 東萊溫井에 沐浴갈 것을 청하여 密陽 田里로 돌아가다.<점필재행력>
성종 21 1490 경술 弘治 3 41 趙孝仝, 尹兢의 천거로 昭格署參奉에 제수되다.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12월, 文科 別試에 합격하다. 김일손의 천거로 예문관 검열이 되다. ○ 侍講院 說書가 되다.
성종실록 244권, 성종 21년 9월 6일 을묘 4번째기사 1490년 명 홍치(弘治) 3년
자신이 효자 포상을 받을 만한 일이 없음을 논한 소격서 참봉 정여창의 상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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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신탁/愼𧨳/용문서원/용문몽유록 龍門夢遊錄
김지남(金止男) 1559년(명종 14)~1631년(인조 9)
龍溪遺稿卷之三 / [詩]
安陰愁送臺。贈居人愼𧨳。士人也。以壺酒來餽。
泉上奇巖巖上松。倩人要問昔賢蹤。古臺何事名愁送。老子今來却喜逢。兒道石蹊多勝地。奴言山日易高舂。惟君有語頗堪取。境凈天寒進一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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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溪先生續集卷之二 / 祭文 / 誠信契祭文[契員,愼𧨳,劉弘甲。]
嗚呼哀哉。精金美璞。不見其瑕者。先生之器也。霜鶻獨擊。貞松拂雪。壁立屹屹。植脚不動於頹波萬仞之壑者。先生之節也。軟鐵石腸。排折檻手。貫日月撼海嶽。而柏臺千秋。秋霜烈烈者。先生之筆也。則此莫非先生之學有所本而有所養也。蓋百世不再出兮。伊一生難再得。則其亡也。不憖之慟。云亡之歎。上自宸極。下及臺胥。矧惟同鄕黨簿金蘭。而荷顧眄奉下風於衣塵几席之側者。安得不哭之慟而懷之緬也。雖然。先生之扶植綱常。使之國有今日者。炳若日星之在乎天也。久而愈明。其氣節有不與死生而存亡者則其又何悲。然則生等之所以噭噭然聲發而涕隨者。特出於私也。敬爇一瓣。蕉荔矢前。心香徹幽。想紆歆止。
동계집 속집 제2권 / 제문(祭文)
성신계(誠信契) 제문 [신탁(愼𧨳)ㆍ유홍갑(劉弘甲)]
계원(契員) 신탁(愼𧨳)ㆍ유홍갑(劉弘甲)
아, 슬프도다. 정련된 금과 아름다운 박옥(璞玉)에 한 점의 흠도 보이지 않는 것은 선생의 기국(器局)이었고, 매서운 송골매가 홀로 날아오르듯이 곧은 소나무가 눈을 떨쳐 내듯이 벽처럼 우뚝 서서 만 길의 골짜기로 쏟아지는 물살에도 굳건히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선생의 지절(志節)이었습니다. 철석(鐵石)의 간장(肝腸)도 부드럽게 여기고, 난간을 부러뜨린 손도 밀쳐 내며, 일월(日月)을 꿰뚫고 해악(海嶽)을 흔들면서 백대(柏臺 사헌부(司憲府)) 천추(千秋)에 추상(秋霜)처럼 열렬했던 것은 선생의 필설(筆舌)이었으니, 이는 모두 선생의 학문이 근본한 바가 있고 양성한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백세 뒤에도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고, 일생을 통해서도 다시 얻기 어려울 것이므로, 선생이 세상을 떠나가시자 원로(元老)를 잃은 애통함과 선인(善人)을 잃은 탄식이 위로 성상으로부터 아래로 하례(下隷)와 서리(胥吏)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같은 고향의 같은 계원(契員)으로서 바로 선생의 곁에서 보살핌을 입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야 어찌 통곡하며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선생이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여 나라로 하여금 오늘이 있게 한 공로는 해와 별이 하늘에 있는 것처럼 빛나서 오랠수록 더욱 밝을 것이고, 그 기절(氣節)은 죽고 삶으로 인해 보존되거나 없어지지 않는 것이니, 또 무엇을 슬퍼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저희들이 슬프게 소리 내어 눈물 흘림은 다만 사사로운 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삼가 향을 사르며 변변찮은 제물을 영전에 올리나니, 지극한 정성이 지하에 통하여 아마 넉넉히 흠향하실 것입니다.
[주-D001] 난간을 부러뜨린 손 : 한(漢)나라 주운(朱雲)의 고사이다. 주운이 성제(成帝) 때 괴리 영(槐里令)으로 있으면서 성제를 만나 ‘상방참마검(尙方斬馬劍)을 빌려 주면 간신(奸臣) 장우(張禹)를 베겠다’고 하였다. 성제가 크게 노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주운은 굽히지 않고 직간하며 어전(御殿)의 난간을 잡아당겨 부러뜨렸다. 성제가 뒤에 주운의 말이 옳음을 깨닫고 난간을 그대로 두어 직간하는 신하의 본보기로 삼게 하였다. 《漢書 卷67 朱雲傳》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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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義邑誌 / 人物
柳世泓 文化人讀書林下早廢擧業專以養親爲事丁酉亂父子幷死黃石城號金川享鶴林祠
安義邑誌 / 壇廟
鶴林鄕祠 在縣北四十里黃山正廟庚子建幷享三槐堂權時敏竹軒曺淑博約齋姜渭龍金川柳世泓猿岩郭訒蘭谷禹錫一
安義邑誌 / 學校
明信齋 在縣南泥田九柳齋鄭輳陽坡禹治淮守愚堂朴德馨三五亭朴德聰金川柳世泓修契講磨之所僉知三思堂鄭槮深泉禹師欽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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勉菴先生文集卷之二十七 / 墓碣 / 澗菴柳公墓碣銘 幷序
嶺之陜川魯泰山西。有坐卯而封四尺者。故澗菴處士柳公諱希春。字和伯氏之墓也。公世簪纓。有才學。懲毖己卯之𥚁。一隱終其身而不悔。其淸德高標。爲世思詠者久矣。後孫淇錫。具狀與幣。北走八百里。謁公記隧之文於不佞。不佞辭不獲。謹按公晉州人。以高麗上將軍晉康君挺。爲鼻祖。名公巨卿。舃赫相望。至密直司使僻隱先生藩。當我朝龍興之日。爲勝國立節。是公之五世祖也。曾祖升滴。祖潓。俱副司正。考秀汀。平海郡守。妣安東權氏。參奉荇女。正德丙寅。公生于晉州元塘里。穎悟好學。不屑擧業。嘗曰君子之學。不過入孝出恭四字而已。事親。愛敬備至。病致憂。喪致哀。無一毫勉強意。北門𥚁作。公無意於世。築精舍於魯泰山下。題曰澗菴。植松菊以寓趣。冶川朴文康公紹。時寓南土。聞公名行而造焉。贈之以詩。深致其欽慕歎惜之意。公和詩。有功名場裏頓無心。論道論文樂不禁之語。因與之講磨從遊。多在山寺。朴公嘗曰。到義理精微處。難及柳君之高明。又曰。和伯。吾黨中最紀實人也。嗚呼。此可以見公學問德義之實也。以萬曆乙亥九月二十九日終。享年七十。配南平文氏。考禦侮,世傑。墓祔左。擧二男四女。男長枰。嘉善。次桉。女長適朴士敦。次
柳世泓,鄭仁著,李希臯。側出男。泰晩,季晩。枰系男厚生。女適執義申忠任。桉男。景斗通政。有學行。女適徐馹迅,參議孫處恪,鄭耆。曾玄以下。不盡錄。公爲學。以庸學近思。爲致知基本。以論語孝經。爲脩行謨訓。早夜孜孜。操守不貳。性又純謹。無疾言遽色。一動一靜。皆中䂓矩。惜乎。其嘉言善行。不盡見於世也。今欲收拾斷爛模象於數百載之後。吁亦難矣。按譜。公後贈獻納云。遂爲之銘曰。
晉陽華閥。肇自勝國。代有卿相。克修厥德。公繩其武。早審發軔。求古爲學。知行兩進。懲世斬伐。肥遯無悔。松風蘿月。壽且樂豈。知己有誰。允矣冶川。一言之賞。百世可傳。曷不受報。餘慶在後。我勒斯銘。用示悠久。
용문몽유록(龍門夢遊錄)
용문몽유록(龍門夢遊錄)
황계자가 물었다.
“이른바 황석 제공은 대체 누구란 말이오?”
“태수 곽(郭)부자(이름은 䞭이고, 아들은 履常·履厚), 사군(使君) 조종도(趙宗道), 금천(錦川) 유세홍(柳世弘) 부자(아들 櫝·榎), 첨지 정언남(鄭彦南) 등인데, 일시에 함께 죽은 사람들입니다.”
황계자가 다시 물었다.
“원컨대, 제공이 무슨 말을 했는지 듣고 싶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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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사(哀詞) / 정언남(鄭彦男)
我罪何以 伊至於斯 우리의 죄 어찌하여 여기에 이르렀을꼬,
駈而納城 命耶時耶 몰아서 성으로 들인 것은 운명인가 시세였던가.
孤城半夜 砲火雷馳 고립된 성 한밤중 포화는 우레와 같이 날리고,
白刃一揮 驚魂忽飛 왜적의 칼날 한 번 휘날리자 혼비백산하였네.
身塡陰壑 無斂我尸 육신이 골짜기에 뒹굴어도 시신 거둘 자 없거늘,
空山日暮 魂兮何依 빈산에 해조차 지니 혼백은 누구를 의지할꼬.
<龍門夢遊錄>
*위 용문몽유록에는 황석 제공(黃石諸公)으로 태수 곽(郭)부자(이름은 䞭이고, 아들은 履常·履厚), 사군(使君) 조종도(趙宗道), 금천(金川) 유세홍(柳世泓, 1536~1597) 부자(아들 橿·榎), 첨지(僉知) 정언남(鄭彦男) 등을 언급하였는데 정언남은 일두선생의 손자이다. 문헌공 정여창의 손자로, 언양김씨 김중홍의 사위인 정언남이 황석산성에서 대소헌 조종도, 존재 곽준과 함께 순국하다.
※彦陽金氏族譜: 고려명장 문하시중 김취려 就礪-佺-良鑑-光衍-之甲-憲-承達-餘善-守謙-坵-사위鄭希契 河東人 正郞 父文獻公汝昌 子彦男嘉善
고려명장 문하시중 김취려 就礪-佺-良鑑-光衍-之甲-憲-承達-餘善-守謙-垍-重泓-사위鄭彦男 河東人 父正郞希契 子大民縣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