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식(湜)이고, 자는 숙정(叔正)이며, 호는 졸재이고,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시조 성용(成用)이 고려조 때 문과(文科)에 뽑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냈고, 본조에 들어와서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휘 숙주(叔舟)가 광묘조(光廟朝)에 재상이 되었으니, 이분이 공의 5대조이다. 증조는 휘가 광윤(光潤)인데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가 서(漵)인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고는 휘가 중엄(仲淹)인데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승지공 때부터 청주(淸州)에 살기 시작하여 자손들이 그곳에 터를 잡았다. 의정공이 문화 유씨(文化柳氏)에게 장가들어 가정 신해년(1551, 명종6)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후중하여 보통 아이와 달랐고, 겨우 성동(成童)이 되자 이미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두었다. 일찍이 백씨(伯氏)를 따라 절에 가서 독서하였는데, 스스로 각고의 노력을 하여 입으로 외고 마음으로 생각하며 밤낮으로 지칠 줄을 몰랐고, 경(經)과 사(史)를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일찍이 퇴도(退陶) 이 문순공(李文純公)에게 나아가 학문을 하는 방도에 대해 물으니, 문순공이 매우 칭찬하였다. 문순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또 대곡(大谷) 성공 혼(成公渾)에게 배우고서 마침내 부귀영화에 대한 생각을 끊어 버렸다. 그 뒤에 어버이가 늙었기 때문에 부득이 과거를 보아서 선묘(宣廟) 병자년(1576, 선조9)에 비로소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보임되었다. 이때 신료들이 서로 다툴 조짐이 있자 공이 두문불출하고 나서지 않았고, 사국(史局)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는데 규례에 따라 승문원 박사로 승진하였다. 임오년(1582)에 질정관(質正官)으로서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고, 예조 좌랑으로 고쳐졌다. 계미년(1583)에 호조ㆍ병조ㆍ형조의 좌랑을 거쳐서 사헌부 지평으로 전보(轉補)되었다. 을유년(1585) 여름에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연경에 갔다. 병술년(1586)에 전적을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정해년(1587)에 사예(司藝)를 거쳐 헌납(獻納)으로 옮겨졌다. 기축년(1589)에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했다가 체차(遞差)되어 의빈부 경력(儀賓府經歷)에 부직(付職)되었다. 가을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체차되어 승문원 검교(承文院檢校)가 되었다. 겨울에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는데, 당시 재상 중에 공에게 유감을 품어 모함한 자가 있어서, 공이 체포되어 형(刑)을 받기까지 하였고, 곤양군(昆陽郡)으로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면되어 돌아왔다. 공이 처음 벼슬을 시작할 때 정상 철(鄭相澈)을 길에서 만났는데, 그가 이끌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뜻이 매우 은근하였다. 그 뒤에 또 술자리에서 만났는데 더욱 다정하게 굴면서 팔을 잡고 말하다가 헤어질 때 사모(紗帽)를 바꾸어 쓰고 갔으니, 공에게 자기를 찾아와 보게 하려는 의도였다. 공이 그 인품을 싫어하여 끝내 가지 않으니 정철이 심히 유감을 품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정철이 위관(委官)이 되어 얽어매서 사형시키려 하였으나 공의 공사(供辭)가 명백하여 털끝만큼도 잘못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사형을 감하는 것으로 논감(論勘)될 수 있었다. 옥사가 처음 일어났을 때 일이 날로 급해지자 어떤 사람이 청탁해서 화를 면하라는 뜻으로 부인 노씨(盧氏)에게 말하자 부인이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부자(夫子)의 평소 뜻이 이와 같지 않으니 내가 차마 할 수 없다.” 하였다. 공이 귀양 가 있는 3년 동안 조금의 기미도 말이나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고, 사장(詞章)으로 드러낸 것은 모두가 임금을 연모하고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뜻이었다. 공이 죄적(罪籍)에서 벗어나자마자 왜적의 압박이 날로 심해져서 대가(大駕)가 이미 서쪽으로 파천(播遷)한 뒤였다. 공이 미처 호가(扈駕)하지 못하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막하(幕下)에 가서 의탁하였다. 계사년(1593) 봄에 비로소 서용(敍用)되어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에 제수되었는데, 먼저 경성(京城)에 들어가 천장(天將)을 접대하라고 명하였다. 가을에 외직으로 나가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고, 이해 겨울에 거가(車駕)가 환궁하였다. 이때는 도적이 가득하여 공사 간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마을이 황량하여 굶주린 자가 길에 가득하였다. 공이 창고를 열고 녹봉을 출연하여 마음을 다해서 구제하니, 온 경내에 굶어 죽는 근심이 없었다. 일찍이 영릉(英陵)의 제관(祭官)에 차임되어 가다가 밤에 도적 떼를 만났는데, 도적들이 서로 말하기를, “광주 목사의 행차라면 범해서는 안 된다. 이분은 일찍이 우리를 살려 준 은혜가 있다.” 하고는 각자 흩어져 갔다. 갑오년(1594)에 사간(司諫)으로 부름을 받았고, 교리(校理)로 고쳐졌다가 집의 겸 지제교(執義兼知製敎)로 옮기고, 이어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겨울에 사간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되었다. 병신년(1596)에 좌승지(左承旨)로 전보되었다가 얼마 뒤에 체차되어 부호군(副護軍)에 부직되고, 곧이어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정유년(1597)에 대사간(大司諫)으로 옮겼다가 부제학(副提學)으로 고쳐졌고, 또 은대(銀臺)와 옥서(玉署)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겸하였는데, 성묘(聖廟)에 사용하는 악장(樂章)에 탈오(脫誤)가 많아 악절마다 정정하여 빠진 것을 보충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데 지극히 정밀하고 해박하였다. 이해에 황조(皇朝)에서 급사중(給事中) 서관란(徐觀瀾)에게 우리나라에 파견된 장사(將士)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서관란이 왕세자를 만나려고 하였다. 상이 종관(從官) 중에서 재주 있고 민첩한 자를 가려서 고문(顧問)에 대비하라고 명하자 정신(廷臣)이 공을 추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모(申某)는 졸(拙)하니 다시 고르라.” 하니, 공이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 한 사람이 없다고 하여 ‘졸’ 자로 자호(自號)를 삼았다. 무술년(1598) 봄에 왕명을 받고 호남에 선유(宣諭)하였고, 조정에 들어가서 도승지가 되었다. 이때 일본이 재차 난을 일으켜서 명나라 군대가 다시 출병하니, 나라에 일이 많아서 수응(酬應)할 일이 매우 많았다. 공이 3년을 연이어 은대에서 떠나지 않자 상이 밤낮으로 수고한 것을 생각하여 품계를 올려서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기해년(1599) 봄에 공조 참판에 제수되고, 여름에 사은사(謝恩使)에 차정(差定)되었는데 얼마 뒤에 해서 관찰사(海西觀察使)에 제수되자 공이 사행을 떠날 날이 가깝다고 하여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이상 항복(李相恒福)이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정응태(丁應泰)가 본국(本國)을 무고한 일을 변론하자 천자가 칙서(勅書)를 내려 선유(宣諭)하기는 했지만 조정의 의론이 아직 시원하게 풀리지 않았다. 이에 공이 사은사로서 진주사를 겸하여 황제의 뜰에 가서 자세하고 분명하게 진달하니, 천자가 가상히 여기고 은동자(銀童子) 한 쌍을 하사하였다. 공이 그 하사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녹여서 술잔을 만들고 명(銘)을 새겨서 감축(感祝)하는 뜻을 담기를, “황제께서 나에게 주제은(朱提銀)을 주시니, 술잔을 들어 날마다 요 임금처럼 되시기를 축원하노라.〔帝賚予朱提鐐 勺焉壽日祝堯〕” 하였다. 겨울에 복명(復命)하고 나서 외직으로 나가 강릉 부사(江陵府使)가 되었는데, 정사를 맑고 삼가며 자애롭고 은혜롭게 하여 백성들이 크게 편안하였다. 이때 동지중추부사공이 호서(湖西)에서 우거(寓居)하고 있었는데, 공이 상소하여 정리(情理)를 진달해서 맞아 와서 봉양하기 편하게 하였고, 피란하여 찾아온 족인(族人)과 옛 벗들에게 모두 녹봉을 쪼개서 구휼해 줌으로써 동지중추부사공의 뜻을 맞추어 드렸다. 임인년(1602)에 호조 참판에 제수되어 교정청 당상(校正廳堂上)을 겸하였는데, 교정하는 일을 마치자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품계가 올라서 예조 참판으로 옮겨졌다. 가을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어 불법을 저지른 훈신(勳臣)과 무장(武將) 몇 사람을 탄핵하니, 여론이 통쾌해하였다. 이때 호성(扈聖)과 선무훈(宣武勳)을 마감하고 있었는데 원종(原從)이 되려고 도모하는 자들이 연줄을 대고 청탁하여 그 분잡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공이 백부(柏府)의 장(長)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모두들 두려워하여 도리어 이름을 삭제하려고 도모하였다. 갑진년(1604) 봄에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관학 유생(館學儒生)들이 오현신(五賢臣)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차자(箚子)를 올려 이 문원공(李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을 비난하고 선묘(宣廟)도 일찍이 의혹을 가졌었는데, 공이 동료들을 이끌고 차자를 올린 말이 매우 강개하니 상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뒷날 종사하는 의론이 이루어진 것에 대해 모두들 실로 공의 이 차자에 힘입었다고 하였다. 여름에 도승지가 되었다가 체차되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부직되었고, 이어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는데, 겨울에 동지중추부사공의 상을 당하였다. 정미년(1607)에 상을 마치자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무신년(1608) 2월에 선묘가 승하하자 공이 본직(本職)으로 빈전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를 겸하였다. 이때 공은 이미 60세에 가까웠는데 아침저녁으로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외침(外寢)에 기거하며 졸곡(卒哭)을 지냈다. 여름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는데, 광해가 처음 정사하던 시기로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억울함이 없게 해야 한다는 의론을 힘써 주장하였다. 또 광해가 반드시 자기를 낳은 생모에게 융숭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일찍이 인대(引對)할 때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는 뜻을 극력 진달하자 광해의 심기가 매우 편치 않았다. 산릉(山陵)의 일을 마쳤는데 품계를 올리는 의례적인 은전을 행하지 않았다. 가을에 외직으로 나가 호서 관찰사(湖西觀察使)가 되어서는 교화를 밝혀서 풍속을 바로잡고, 저축을 늘려서 재해를 대비하려고 하였다. 또 《여씨향약(呂氏鄕約)》과 주자(朱子)의 사창법(社倉法)을 강명(講明)해서 참작하고 가감하여 과조(科條)를 만들고 나서 또 서문을 지어 도내에 포고(布告)하여 장차 차례로 시행하려고 하였다. 법이 이미 갖추어졌으나 신중히 하느라 감히 드러내지 못하였는데, 이때 공이 벼슬을 그만두어 작파되자 식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공이 호서의 풍속이 향교를 싫어하고 서원을 중하게 여겨 교생(校生)과 원유(院儒)를 구별하는 폐단이 있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향교에 어른과 동자(童子)를 수용하는 4개의 재(齋)를 세우고, 10일마다 공부한 것을 과시(課試)하여 부지런한지 태만한지를 살피고 법령을 엄히 하여 순력(巡歷)해서 당도한 날에 친히 강학(講學)하여 성취한 바가 있게 하였다. 관내(管內)에 있는 명현(名賢)의 분묘(墳墓)에 반드시 직접 제문을 지어 속리(屬吏)를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기유년(1609, 광해군1) 8월에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사국 당상(史局堂上)을 겸하여 선왕의 실록을 수찬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가을에 외직으로 나가 관동(關東)을 안찰(按察)하였는데, 교화를 우선으로 하여 다스리니 사민(士民)들이 다투어 권면하였다. 신해년(1611) 봄에 체차되어 동지중추부사에 부직되었고, 여름에 외직으로 나가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고, 일찍이 익사훈(翼社勳)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자(陞資)되었다. 춘천에 있는 3년 동안 백성들의 폐막을 일소(一掃)하고 사풍(士風)을 진작시키니, 온 경내가 크게 다스려졌다. 고을 사람들이 문암서원(文巖書院)을 세워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을 제향하자고 청하였는데, 이는 춘천이 문순공 외가의 관향(貫鄕)이기 때문이다. 공이 문순공에게 일찍이 직접 배워서 경앙(景仰)하고 존모(尊慕)하여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분이었기 때문에 기꺼이 그 청을 따라서 마음을 다해 안배하고 힘을 다해 주선해서 당(堂), 행랑, 섬돌, 문, 담장, 재실(齋室), 부엌이 모두 법도에 맞았다. 그러고 나서 스스로 전말을 써서 벽에 걸었으니, 현인을 존모하고 옛 도를 좋아하는 독실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광해 계축년(1613) 이후에 상황이 크게 변하여 포학함이 하늘에까지 넘치자 공이 항상 산계(散階)를 띠고 있으면서 병을 핑계 대고 나가지 않았다. 병진년(1616)에 모후(母后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서궁에 유폐(幽閉)되는 화를 당하였고, 정사년(1617)에 패륜(悖倫)의 논의가 일어나 흉도(兇徒)들이 조신(朝紳)을 협박하여 방자하게 정청(廷請)을 하였고, 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죄주기를 청하여 찬척(竄斥)이 서로 이어졌는데, 공은 견고히 거부하며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서강(西江)의 우사(寓舍)에 나가 대죄(待罪)하였다. 이듬해 무오년(1618)에 사은(謝恩)하기 위해 중국에 사신 갈 일이 있자 특별히 공을 상개(上价)에 차정하였다. 이공 호민(李公好閔)이 시를 지어 전송하기를, “더위와 장마를 무릅쓰고 가는 행역의 괴로움을 말하지 말라, 영해로 쫓겨난 신하의 슬픔에 비하면 어떠한가.〔休說炎潢行役苦 何如嶺海逐臣傷〕” 하였으니, 이는 공이 당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미년(1619)에 사행을 마치고 돌아와 규례에 따라 한질(閒秩)에 부직되었다. 신유년(1621)에 예법(禮法)으로 볼 때 치사(致仕)해야 한다고 하여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공이 이때부터 더욱 세상에 뜻이 없어 한 방 안에서 스스로 즐거워하며 종일토록 바르게 앉아 경적(經籍)을 완미(玩味)하였고, 중국의 학사(學士) 조우(趙佑)가 쓴 자오와(自娛窩) 3자를 벽에 걸어서 그 뜻을 나타냈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가 반정(反正)하여 즉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제수하였고, 삭훈(削勳)의 일이 일어나자 공이 상소하여 자헌대부의 품계를 반납하였는데, 곧이어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다. 이때 폐위된 세자를 안율(按律)하자는 의론이 한창 일어났는데, 공은 이미 신하의 일을 겪었는데 지금 형(刑)을 가하라고 청하는 것은 의리에 온당치 못하다고 하여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8월 모일에 병으로 한양(漢陽)의 옛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춘추가 73세였다. 부음이 보고되자 상이 조회를 열지 않고 슬퍼하고 탄식하였으며 예관(禮官)을 보내 조문하고 제를 올리기를 의례대로 하였다. 그 뒤에 오공 윤겸(吳公允謙), 정공 경세(鄭公經世), 이공 시발(李公時發)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공이 조정에 서서 일을 행한 본말을 갖추 진달하니, 상이 특별히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고 별도로 사제(賜祭)하여 포장하였다. 그해 겨울에 청주(淸州) 치소(治所)의 동쪽에 있는 상당성(上黨城) 아래 병향(丙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인품이 온화하고 평이하며 단정하고 순수하였고,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곁에 있을 때에는 항상 온화하게 공경하고 순종하여 부모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14세에 모부인의 상을 당했는데 상을 치르면서 슬퍼하기를 성인처럼 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들 칭찬하였다. 동지중추부사공이 장수하였는데, 공이 아우 설(渫)과 함께 극진히 봉양하여 안색을 살피고 뜻을 받들어 삼가서 순종하였고, 비록 자잘한 일이라도 부친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올리는 것과 아침저녁으로 살피고 문안하는 것을 40년을 한결같이 지성스럽게 하였다. 동지중추부사공이 세상을 떠나자 치상(治喪)과 장례와 제례를 예법대로 하여 어긋남이 없었고, 수척한 안색과 슬픈 곡소리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장례를 지낸 뒤에 묘 옆에 여사(廬舍)를 짓고서 상복을 벗지 않고 잠을 잤고, 날마다 두 차례 묘에 올라가 애모(哀慕)하며 슬피 울었는데 심하게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온다고 해서 폐한 적이 없었다. 처음 상을 당했을 때부터 상제(喪制)를 마칠 때까지 쌀밥과 채소를 먹지 않아 지나치게 수척하였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이공(李公)과 유천(柳川 한준겸(韓浚謙)) 한공(韓公)이 편지를 보내 상(喪)을 견디지 못해 죽는 것은 불효라고 경계하였으나 끝내 변하지 않았다. 상을 마치고 나서 매번 기일(忌日)을 당하면 애모하기를 처음 상을 당했을 때처럼 하여 존귀한 객이 찾아와도 사양하고 만나지 않았으며, 제사를 마치고 나서도 제복을 벗지 않고 종일토록 바르게 앉아 있었다. 아우 설 역시 대관(大官)이었는데, 공이 그와 우애가 돈독하여 매일 조정에서 물러나면 반드시 함께 앉아서 화락하게 지냈고, 항상 충효와 명절(名節)로 서로 칙려하였다. 백형(伯兄)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대했고, 고아가 된 생질들을 보살펴 제때에 혼인시켰다. 친족에게 화목하여 곤궁한 자를 구휼하면서 자기의 힘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듯이 하였고, 비록 향리의 비속(鄙俗)한 사람들이라도 자신을 낮추어 대해서 한계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고을 사람들이 감격하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조정에 선 지 50년 동안 명망과 실상이 모두 성대하였는데, 언책(言責)을 맡으면 직언(直言)하는 절의를 다하였고, 논사(論思)를 맡으면 간곡한 정성을 진달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관찰사를 맡았을 때와 산계(散階)로 있을 때에는 처한 바에 따라 마음을 다하고 남과 부딪치거나 모난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비록 자애롭고 진실하며 화락하여 온화한 모습이 가까이할 수 있었지만 충사(忠邪)를 변별하고 간흉(姦凶)을 지척(指斥)할 때에는 단호하여 범할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비록 이 때문에 참소(讒訴)를 당해서 거의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빠질 뻔하였지만 끝내 후회하지 않았다. 공이 선조에게 지우(知遇)를 받아 오랫동안 경악(經幄)에서 모시면서 융숭한 총애를 받았는데 갑자기 승하하자 공이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중간에 좋지 않은 때를 만나 비록 몸을 깨끗이 하여 한가하게 지냈으나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은 잊은 적이 없었다. 만년에 인조 반정이 일어나 세상 사람들이 그가 나아가 큰일을 하기를 바랐는데 공이 이미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공은 일찍부터 사우(師友)들과 함께 경학(經學)을 연구하여 정밀하고 자세하게 분석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뜻을 기울였다. 일찍이 전주(箋註)가 복잡하고 사설(師說)이 여러 가지여서 학자들로 하여금 그 요체를 궁구하지 못하여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모르게 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길흉(吉凶), 상변(常變), 절문(節文), 도수(度數)의 동이(同異)를 변별하고, 널리 상고하고 두루 수집하여 바로잡고 편집해서 유(類)를 나누어 13권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하고도 분량이 많아서 절목(節目)이 뒤섞일까 염려하여 다시 정리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공의 막내아들 득연(得淵)이 일찍이 정 문숙공(鄭文肅公)에게 나아가 질정(質正)하니, 문숙공이 크게 칭찬하였다. 그런데 병자년의 난에 그의 평생 저술과 함께 없어져 버렸으니 아, 애석하다. 공이 또 《가례(家禮)》는 인가(人家)에서 날마다 쓰고 늘 행해야 할 책인데 몽학(蒙學)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 언문(諺文)으로 풀어서, 책을 펴면 환히 알 수 있게 하였다. 득연이 관동을 안렴(按廉)할 때 간행하여 세상에 유포시키고 또 상소하여 올리니, 옥당(玉堂)과 운각(芸閣)에 보관하라고 명하였다. 공은 평생 동안 독서를 좋아하여 벼슬살이로 일이 많을 때라도 하루도 책을 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만년에는 《주역(周易)》 읽는 것을 좋아하여 잠심하여 생각하고 묵묵히 외면서 날로 새로 깨달은 것이 있었다. “하늘이 보는 것은 매우 밝다.〔天鑑孔昭〕”라는 4자를 벽에 걸어 놓고 항상 하늘을 대하는 뜻을 보존하였으니, 그 몸을 신칙하고 행실을 가다듬기를 늙을수록 더욱 독실히 한 것이 이와 같다. 성품이 또 간소하고 담담하며 맑고 깨끗하여 중외(中外)의 관직을 두루 거치고 지위가 경재(卿宰)에까지 이르렀지만 일찍이 묘 아래에 몇 칸의 집을 지으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또 자손을 위해서 살림을 일으키지 않고서 말하기를, “만약 어질다면 가난하더라도 선조에게 누를 끼치지 않겠지만, 만약 불초(不肖)하다면 살림이 넉넉하더라도 종족을 보호하고 집안을 올바르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 신조가 또 이와 같았다.
부인 노씨(盧氏)는 좌의정 경평공(敬平公) 숭(崇)의 6세손이고, 현감 개(塏)의 따님이다. 공보다 29년 먼저 세상을 떠나 처음에 청주(淸州) 묵정(墨井)에 있는 선영에 장사 지냈다가 공의 장례 때에 옮겨 와서 합장하였다. 2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 득자(得滋)는 군수(郡守)를 지냈고, 막내 득연은 승정원 도승지를 지냈다. 장녀는 현감 김덕민(金德敏)에게 시집갔는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절의를 지키다 죽었다. 다음은 정(正) 우홍업(禹弘業)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급제(及第) 강석기(姜碩期)에게 시집갔고, 막내는 정랑(正郞) 이진영(李晉英)에게 시집갔다. 군수가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이름이 행(涬)인데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다. 장녀는 부사(府使) 이광진(李光鎭)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감찰(監察) 한세장(韓世章)에게 시집갔고, 막내는 진사 이후창(李後昌)에게 시집갔다. 승지가 딸 둘을 두었는데, 장녀는 응교(應敎) 오달제(吳達濟)에게 시집갔고, 막내는 거인(擧人) 김홍범(金洪範)에게 시집갔다. 교관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장남은 이름이 광제(廣濟)이니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를 지냈고, 다음은 경제(慶濟)이니 일찍이 거창 현감(居昌縣監)을 맡았고, 다음은 응제(應濟), 강제(康濟), 정제(庭濟)인데 모두 업유(業儒)이다. 딸이 셋인데, 현감 오구창(吳九昌), 생원 최경수(崔慶壽), 거인 이무(李懋)가 그 사위들이다. 내외의 손, 증손은 남녀 모두 몇 명이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71년이 지났기 때문에 문생(門生)과 자제가 모두 세상을 떠나서 아직까지 옛 행실을 평론하여 전례(典禮)를 거행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공의 증손자 강제가 그 형 봉사군의 명으로 가첩(家牒)을 가지고 수백 리를 멀다 않고 찾아와 나에게 그 행실을 기록하게 하여 장차 태상시(太常寺)에 시호를 청하려고 하였다. 내가 궁벽한 시골에서 후대에 태어나 고루하고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했으나 더욱 간곡히 청하기에 마침내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삼가 생각건대, 내가 후대에 태어나 공의 성대한 덕과 아름다운 범절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당시 여러 군자들이 서술한 말을 보건대 또한 가첩에 거짓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다. 정한강(鄭寒岡 정구(鄭逑))이 이른 바 “타고난 자품이 도(道)에 가깝고, 조예가 깊어 자득하였다.”라는 말과, 김사계(金沙溪 김장생(金長生))가 이른 바 “그가 예서(禮書)에 실제로 본 바가 있다.”라는 말과, 이지봉(李芝峯 이수광(李睟光))이 이른 바 “권세와 이끗을 물러나 피하기를 겁 많은 사람처럼 하였다.”라는 말과, 정우복(鄭愚伏 정경세(鄭經世))이 이른 바 “겸손하고 공손하며 정성스럽고 진실하다. 해박하고 단정하며 옛 도를 좋아하고, 예를 극진히 하여 몸을 다스렸다.”라는 말들이 참으로 이른바 진실한 말이고 확실한 의론이다. 마침내 감히 그 가첩을 근거하고 제공(諸公)들의 말을 참고해서 큰 뜻을 뽑아내서 논한다. 공은 효도하고 우애한 행실과 청렴하고 결백한 지조와 해박하고 단정한 학식과 정직하고 진실한 풍도가 모두 한 시대에 추앙받을 만하고, 그 출처(出處)의 대절(大節)과 정사(政事)에 시행한 것들도 모두 써서 후세에 보일 만하기 때문에 그 세계(世系)와 행사(行事)의 실상을 낱낱이 쓰고 그 본말(本末)의 대체(大體)를 이와 같이 갖추 논하여 태사(太史)가 채납(採納)하고 태상시에서 의시(議諡)하게 한다.
금상 19년(1693) 3월 갑자일에 구위(具位) 이현일이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