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의 묘갈명
(忠義衛檖配淑人昌寧成氏祔墓碣銘)
공의 이름은 수(檖)요, 자는 문중(文仲)이다. 고려의 호장공(戶長公) 박응주(朴應珠)를 선조로 하고, 벼슬을 높이 한 조상으로 박상충(朴尙衷)이 있는데, 그는 우문관 직제학을 지냈으며 도학과 풍절이 뛰어나 증 영의정과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박은(朴訔)은 태종을 보좌하여 좌의정이 되었고 금천부원군과 평도라는 시호를 받아 그 공훈이 국록에 널리 올라 있다.
박은의 아들 박규(朴葵)는 예조 참판이고, 그의 아들 박병균(朴秉鈞)은 홍주 판관으로 증 좌통예이고, 그의 아들 박숙은 증 좌부승지이고, 그의 아들 박침(朴琛)은 사직이고, 그의 아들 박소장(朴紹張)도 사직이다.
그의 아들 박인수(朴麟壽)는 부사직인데 이 분이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박종용(朴從龍)인데 예빈시 판관이며, 조부는 박농(朴穠)인데 선무랑이고, 아버지는 박경안(朴景顔)으로 호는 환학암(喚鶴菴)이다. 어머니는 선성김씨(宣城金氏)로 동추(同樞) 김사선(金思善)의 딸인데, 판서공(判書公) 담(淡)의 후손이다.
공은 1641년(인조 18)에 탄생하여 1709년(숙종 35) 2월 26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9세이다. 부인 성씨(成氏)는 학생 성시열(成時說)의 딸인데 1남 1녀를 낳아 기르시니 아들은 박창은(朴昌殷)이고, 딸은 선성(宣城) 김범석(金範錫)에게 시집갔다.
박창은의 아들은 박이채(朴履采)와 박이장(朴履章)이고 딸 셋은 각각 고창(高敞) 오석명(吳錫命)과 청도(淸道) 김필대(金必對), 그리고 영천(榮川) 민상용(閔祥龍)에게 시집갔다. 박이채의 아들 박시진(朴時晋)은 증 사복시정(贈司僕寺正)이고, 딸은 월성(月城) 이종택(李宗澤)에게 시집갔다. 박이장의 아들은 박시익(朴時益)과 박시겸(朴時謙)이고, 딸은 선성(宣城) 김대(金臺)에게 시집갔다.
박시진의 아들은 박성만(朴成萬)과 박성규(朴成奎)와 박성간(朴成幹)이 있는데, 박성규는 출계하고 박성간은 증 좌승지이다. 딸은 선성(宣城) 김양정(金養鼎)에게 시집갔다.
박시익은 양자로 박성규를 맞아들였고, 딸은 의성(義城) 김덕수(金德壽)에게 시집갔다. 박시겸의 아들은 박성엽(朴成燁)과 박성춘(朴成春)과 박성추(朴成秋)이고, 딸은 황중길(黃中吉)에게 시집갔다. 이하는 다 기록할 수 없다.
슬프다. 관작을 기업으로 하는 그 가문의 선함이요. 시예(詩禮)를 가계로 하는 것은 선세의 모범이다. 그것을 배워 이어가는데 어찌 출중함이 없을 것인가. 행실과 덕업을 논할 것이나 세대가 너무 멀고 징표를 잃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무섬마을은 산천이 맑고 고우며 숲이 그윽하고 정숙한 곳이다. 원암(遠岩)에서 옮겨 무섬을 택한 것은 자손들의 오랜 번창을 위한 계책이었다. 10대에 걸쳐 문장가와 벼슬하는 이들이 많이 배출되어 지금과 같이 흥성하니 이는 공이 많음 음덕을 쌓은 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이어서 명(銘)을 하는 바이다.
반남(潘南)의 아름다움과 운치가 세상에 크게 빛나니
어찌 공이 많은 음덕을 쌓아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반남의 아름다움과 운치가 세상에 크게 빛나니
어찌 환학암공(喚鶴菴公)의 명철한 지도력 때문이 아니겠는가!
공의 진실한 그 터전은 빽빽하고 푸른데
원암(遠岩)에서 수도(水島)로 옮기니
산은 맑고 강은 길구나.
넉넉한 후사(後事)는 크게 창대하길 바라는데
회곡(檜谷)의 기슭에는 높은 산소 있구나.
수갈(竪碣)에 명(銘)을 새기니 천 년을 누리소서.
1974년 10월 일.
풍산(豊山) 후인 유현우(柳賢佑) 삼가 글 짓다.
- 유현우(柳賢佑), 비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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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반남박씨 만죽재고택(潘南朴氏 晩竹齋古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229-2
건 축 주 : 박수
건축시기 : 1666년(현종 7)
소 유 자 : 박건우(관리자 : 박건우)
문 화 재 : 시도 민속자료 제93호 (영주시), 1990-08-07 지정, 1동
건축 이야기
반남박씨 만죽재고택은 무섬마을에서 가장 중심부 높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건물의 좌향은 뒷산의 지세를 따라 간좌곤향이다. 이것은 풍수학의 영향이며 대부분의 가옥들이 이 좌향을 따르고 있다.
건축 배경
무섬마을 입향시조인 박수(1641~1709)가 1666년(헌종 7)에 건립하였다. 박경안이 원암에서 수도리로 옮겨 살면서 무섬마을이 처음으로 개척되었다. 박경안은 무섬마을 건너 원암에 여러 대 동안 세거해오다 반남박씨 만죽재고택을 차자인 박수에게 물려주어 그가 무섬마을의 입향조가 되었다.
건축 특징
만죽재고택은 무섬 최초의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문중 이야기
- 반남박씨 무섬마을에 터전을 열다
박수의 선친인 환학암(喚鶴庵) 박경안(朴景顔)은 강 건너 머름마을에서 오랫동안 세거해 왔는데 무섬의 현 위치 반남박씨 만죽재고택에 처음으로 터전을 마련하고 가옥을 건축하여 차자인 박수에게 물려주었으므로 박수는 무섬마을의 입향조가 되었다. 만죽재 수리시 “康熙 五年 丙午 八月 十九日 平人 金宗一 造作(강희 5년 병오 8월 19일 평인 김종일 조작)”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지금의 만죽재 건물이 1666년(헌종 7)에 건립된 것이 확인되었다.
입향 당시부터 무섬은 섬계(剡溪)로 불려, 섬계초당(剡溪草堂)이라는 당호가 만죽재에 있었다는 구전이 있다. 박수는 현재의 주손인 박천세(朴天世)의 12대조이다. 박천세의 6대조 박제익은 섬계(剡溪)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현재의 당호인 만죽재는 박천세의 4대조 박승훈(朴勝勳)의 아호를 당호로 삼은 것이며, ‘만죽재’ 편액은 석운(石雲) 박기양(朴箕陽, 1856~1932)의 필적이다.
만죽재 박승훈은 조야의 선비들과 두루 교유하였으며, 유고집으로 『만죽재 일고』가 전한다. 박수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박창은(朴昌殷, 1669~1742)이 선성김씨 김윤일(金允一)의 딸과 혼인하고, 딸도 선성김씨 김범석(金範錫)에게 출가하였다. 또한 박수의 증손서(曾孫壻)가 된 선성김씨(宣城金氏) 김대(金臺)는 영조 말엽에 무섬에 들어와 선성김씨의 입향조가 되었으며, 지금까지 양성이 함께 이곳에서 세거하고 있다.
관련인물
- 무섬마을에 터전을 개척한 박수 선비
박경안(朴景顔)의 자는 여우(汝愚), 호는 환학암이다. 학사 김응조·검암 정언숙·매음 나이준 등 명류들과 도의로서 사귀었으며, 함께 학가산 몽음사(夢吟寺)와 초곡의 괴정 등에서 소요하여 일생을 보냈다. 특히 무섬마을 앞에 머름에다가 환학암 정자를 짓고 생활했다. 배위는 선성김씨이다.
박경안의 아들 박수(1641~1709)는 자가 문중(文仲), 충의위(忠義衛)로 배위는 창녕성씨이다. 묘갈명은 류현우가 짓고, 비문은 박찬하가 썼다. 수도리(무섬)마을의 입향 시조이다.
박제익(朴齊翼, 1806~1841)은 만죽재 출신으로 자는 홍중(鴻仲), 호가 섬계(剡溪)로 만죽재에 ‘섬계초당(剡溪草堂)’ 현판을 걸고 후진을 양성했다.
박승훈(朴勝薰, 1865~1924)은 만죽재 출신으로 자는 순가(舜可), 호는 만죽재(晩竹齋)였다.
박기양(朴箕陽, 1856~1932)은 호가 석운(石雲)으로 188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사정(副司正)·시강원설서(侍講院設書)·검열·문학·대사성·승지·이조 참의·형조 참판을 거쳐 경기도 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궁내부 특진관·중추원 의관·시강원 첨사·태의원경 등을 역임 의정부 찬정이 되었다.
1899년 궁내부대신 서리, 1910년 규장각 제학을 지내다가 한일합방으로 일본정부에 경학원부제학, 1925년에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
금(琴)·기(棋)·서(書)·화(畵)에 모두 능했으며, 글은 행서(行書), 그림은 묵죽(墨竹)에 뛰어났고 여러 번 조선미술전람회 평의원을 지냈다.
작품은 「석죽도(石竹圖)」가 있으며, 만죽재(晩竹齋) 현판을 썼다.
영주 > 평은문수권 > 수도리
- 강 사이의 섬마을, 무섬마을, 수도리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는 조선시대 영천군 진혈면 지역이다. 봉화의 내성천과 영주의 서천물이 마을 뒤에서 합수되어 마을을 둘러싸고 돌아 마치 섬과 같이 되어 있으므로 무섬 또는 수도리로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영주군 평은면이 되었다가 다시 영주시 문수면에 편입되었다. 수도리는 동으로 평은면, 서로는 탄산리, 남으로 안동시 북후면, 북으로 승문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옛날에는 산과 하천으로 마을이 이루어져 경지가 없는 마을이었다.
수도리는 수도와 소두리 마을로 나누어져 있는데, 수도는 300여 년 전 반남박씨 박수 선비가 개척한 후 그의 손서 선성김씨 김대 선비가 이곳에 옮겨와 살아 양성이 지금까지 이곳에서 터전을 잡고 살고 있다.
소두리는 수도에서 강을 따라 약 1.5km 내려간 곳에 위치해 있으며 각성이 살고 있는 마을이 송평마을인데, 지금은 소두리라고 불리고 있다. 현재 수도리에는 해우당고택(민속자료 제92호), 김뢰진가옥(문화재자료 제118호), 김정규가옥(문화재자료 제362호), 김규진가옥(문화재자료 제361호), 김위진가옥(문화재자료 제360호), 김덕진가옥(문화재자료 제117호), 만죽재고택(민속자료 제93호), 박천립가옥(문화재자료 제364호), 박덕우가옥(문화재자료 제363호), 청퇴정과 치류정 등 마을 전체가 전통마을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이 마을은 일제시대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으며 아도서숙은 그 대표적인 유적이다. 또한 시인 조지훈의 처가(김뢰진가옥)마을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