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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와 정난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제주교구 학술대회 및 제213회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 발표회
개회사: 문창우 주교(제주 교구장)
발표1 : 기억과 기록을 통해 본 정난주(정명련)의 삶에 대한 검토
- 호명(呼名)의 역사에 대해서
권이선 (한국교회사연구소)
발표2 : 문학으로 만나는 천주교 여성,정난주와 유섬이
김윤선 (고려대학교)
발표3 : 정난주 유배길 연구 - 제주 산록길을 중심으로
김장환(한국교회사연구소)
발표4 : 정난주 기념관의 방향성 모색 , 역사와 활용 사이에서
송란희 (한국교회사연구소)
폐회사: 조한건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장)
발표1: 기억과 기록을 통해 본 정난주(정명련)의 삶에 대한 검토
호명(呼名)의 역사에 대해서
권이선(한국교회사연구소)
1. 머리말
2. 정난주인가? 정명련인가?
1)문헌 속 정명련
2)전승 속 정난주
3)기록에서 사라진 정명련
3. 정명련 관련 전승 검토
1)유배 죄인의 호송 과정
2)유배지에서의 생활
3)유배 죄인의 죽음
4. 맺음말
1. 머리말
조선 시대 여성 중 이름이 알려진 이들은 거의 드물다. 서간 및 일기를 통해 이름과 호가 알려진유희춘(柳希春)의 아내 송덕봉(宋德峰), 여성 시인이자 허균(許筠)의 누이로 유명한 허난설헌(許蘭雪軒; 본명허초희[許楚姬]), 이매창(李梅窓)과 더불어 조선 여류 시인으로 유명한 기생 황진이(黃眞伊) 등 소수의 이름만 전해질 뿐이다. 공통적으로 남성 친족 혹은 문집과 같은 기록물 및 설화를 통해 그녀들의 이름과 행적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대역부도(大逆不道)에 연좌됨으로써 당시에는 멸문당했으나 역설적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도 있다. 바로 본 연구에서 살펴볼 정난주(丁蘭珠)이다.
정난주는 정약현(丁若絃)과 경주 이씨 사이의 장녀로,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조카이자「황사영 백서」로 유명한 황사영(黃嗣永)의 아내이다. 정난주 집안은 9대 옥당(玉堂)이 배출될 정도의 명문가로, 그녀는 숙부인 정약전(丁若銓)으로부터 천주교를 접하고 이승훈(李承薰)에게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1)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로 알려진 이승훈은 정난주의 고모부였으며, 초기 교회의 주역으로 평가받는 이벽(李蘗)이 정난주의 외삼촌이었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정난주 역시 어린 시절부터 천주교에 입교했을 것이고, 정난주의 남편 황사영도 정난주와의 혼인을 통해 천주교에 입교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2) 또한 황사영은 불과 16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입격(入格)할 정도로 미래가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으며 명문가의 후예였다.
이처럼 정난주를 둘러싼 화려한 가문의 배경과 대비되어 신유박해 이후 그녀의 삶은 극명하게 달라져 현대에 와서 소설과 뮤지컬로 창작되는 등 그녀의 삶은 문학작품의 영감이 되었다. 그러나 실상 “정난주의 타고난 가계(家系)”와 백서 사건 이후 제주도 대정현의 “관비(官婢)로 유배되었다.”라는 두 가지 사항 외 그녀의 삶에 대한 역사적 검증이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3) 그래서 누군가는 그녀를 정난주라 부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녀를 정명련(丁命連)이라 부르며 기본적인 호명(呼名)마저 다르게 기억하였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첫 시작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널리 불리는 정난주가 언제부터 정난주로, 또는 정명련으로 불렸는지 살펴봄으로써 그녀를 둘러싼 전승의 과정과 그 내용에 대한 역사적 검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근래 우리가 정난주로 불린 어느 한 여인에게 무엇을 투영하려 한 것인지 살펴보는 단초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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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홍동현,「다산 정약용의 조카 정난주(마리아)의 제주도 유배생활과 천주교」,『다산과 현대』10, 2017, 254~256쪽.
2)정민,『서학,조선을 관통하다』,김영사,2022, 587〜593쪽(『추안급국안』의 1801년 10월 10일 자 공초에 근거하여 황사영은 자신이 양학(洋學)을 한 것이 11년이 되었다는 진술을 토대로 황사영이 서학에 입문한 해를 1791년으로 보았다.)
3)심재우가 천주교 유배인의 현황에 대해 연구하면서 정난주가 유배길 중 추자도에 아들을 두고 왔다는 설화는 당초 역사와 다르다는 사실을 짚은 바 있다《심재우,「1801년 천주교 유배인의 현황과 유배지에서의 삶一『사학징의(邪學懲義)』분석을 중심으로」, 『한국문학』87, 2019, 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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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난주인가,정명련인가?
1)문헌 속 정명련
문헌상 정명련에 대한 첫 기록은『일성록』에서 확인된다. 정명련의 남편 황사영이 대역부도죄로 (1801년)(음력)11월 5일에 처형을 당하고, 그다음 날인 11월 6일에 홍희운(洪羲運)이 의금부의 말로 황사영의 부모, 처첩, 자녀, 조손, 형제, 자매, 아들의 처첩, 백부, 숙부 형제의 아들 등 일족을 조사하여 처벌할 것을 건의하였다.4) 한성부의 첩보(牒報)와 서부(西部)의 성책에 근거하여 황사영과 연좌된 가까운 이들이 조사되었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방금 한성부(漢城府)의 첩보(牒報)및 서부(西部)의 성책(成冊)을 보니,대역부도 죄인(大逆不道罪人) 황사영의 응좌(應坐)죄인들을 찾아내서 왔습니다. 그 어미 윤혜(允惠)는 거제부(巨濟府)에, 아내 명련(命連)은 제주목(濟州牧)의 대정현(大靜縣)으로 보내어 모두 연좌<緣坐)하여 여종으로 삼고, 아들 경한(景漢)은 나이가 아직 안 찼으니 법대로 교형(絞刑)을 면하여 영광군(靈光郡)추자도(椒子島)로 보내어 남종으로 삼되, 이상의 죄인들은 지금 서부에 갇혀 있으니 형조로 하여금 각각의 배소(配所)로 압송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윤허하였다.5)
당시 연좌 범위에 포함된 가족은 총 3명으로,『일성록』에서 황사영의 아내를 포함한 가족들의 이름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기록에 따르면 어머니는 윤혜, 아내는 명련, 아들은 경한이었다. 의금부에서는 연좌에 해당하는 가족들을 명시한 뒤 형조로 하여금 유배소(流配所)로 압송하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그다음 날인 11월 8일에 홍희운이 형조의 말로 윤혜,명련,경한을 압송할 것을 아뢰었다.
압송 기사는『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며, 이때 기록된 황사영의 가족들 이름은『일성록』과 동일하다.6)
이외『연좌안(連坐案)』에서도 가족들의 연좌 날짜 및 어머니 윤혜의 사망 날짜가 확인된다. 연대기 사료와 동일하게 황사영은 11월 5일 능지처사를 당했으며, 나머지 가족들은 11월 7일에 노비가 되었다.
또한 어머니 윤혜는 1815년 2월 7일에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었다.기 이처럼 황사영이 사망한 뒤에 국가를 중심으로 작성된『일성록』,『승정원일기』,『연좌안』속의 기사에서 확인되는 황사영의 어머니, 아내,아들의 이름은 동일하다.
황사영 가족의 흔적이 기록된 또 다른 자료로『동국교우상교황서(東國敎友上敎皇書)』가 있다.『동국교우상교황서』는 신유박해 이후인 1811년에 조선 교우들이 교회 재건을 위해 로마 교황과 중국의 북경 주교에서 보낸 문서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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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승정원일기』1843책,순조 1년 11월 6일 기묘.
5)『일성록』순조 1년 11월 7일 경진(한국고전종합 DB, 검색일자 : 2023년 11월 2일).
6)조광 편저,변주승 역,『신유박해 자료집』DI,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1999, 168쪽.
7)黃嗣永【緣坐辛酉十一月初五日以大逆不道凌遲處死】慶尙道巨濟府母允惠【Z亥五月二十七日物故】全羅道濟州牧大靜妻命連【辛酉十一月初七日 並爲婢】 全羅道 靈巖郡 楸子島 景漢 年二【辛酉十一月初七日 爲奴】(『연좌안』2책,서울대 규장각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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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황사영 가족들의 이름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어머니,아내, 아들이 흩어져 육지와는 멀리 떨어진 섬으로 유배되었음이 명시되었다.9)
정명련에 대한 지칭어는 1821년에 정약용이 작성한「큰형님 진사공 정약현 묘지명」에 나타난다.
1821년은 정명련의 아버지이자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이 사망한 해였다. 정약용은 묘지명에서 정약현의 가족 관계를 적었는데, 여기서 정명련은 “딸로 맏이이며 황시복<黃時福)에게 출가하였다.”로 기록되었다.10)
황시복은 황사영을 가리키는데 이때가 신유박해 이후였으므로 부득이하게 이름을 다르게 하여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은아버지 정약용은 당시 여성의 이름을 기록하는 보편적 방식에 따라 여성 조카의 이름을 직접 기재하는 대신, 비록 대역죄인으로 죽은 조카사위였지만 조카사위의 다른 이름을 적음으로써 조카의 존재를 표현하였다.
이후 정명련에 대한 기록은 그녀의 죽음과 더불어 다시 등장한다. 기해년(1839년) 1월 23일에 대정현 서성리에 거주하는 김상집(金相集)이 추자도의 황경한에게 보낸 부고 편지에서 확인된다. 김상집은 “정씨(丁氏) 부인이 불행하여 상년(上年,1838년) 2월 초1일 묘시(卯時)에 별세하신 고로…비”라며 정명련의 사망 일시와 무덤 위치를 적은 부고 편지를 작성하였다. 이에 따르면 정명련은 제주도 대정현의 서성리에서 사망하였고,사망할 당시 정씨 부인으로 불렸다.
1839년에 작성된 김상집의 부고 편지 이후로 정명련에 대한 공적,사적 기록은 모두 끊긴다. 다만 외국인 선교사들의 기록물에서 간간이 언급되었다. 먼저,1845년에 조선에 입국하여 1866년에 순교한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주교가 남긴『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마재 정씨 집안의 딸 중 한명”으로 기록되었다. 네 다블뤼 주교의 또 다른 기록인『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에서는 제주도로 귀양 간 “황사영의 아내”로만 기록되었다. 때 다블뤼 주교의 기록물을 마지막으로 19세기 기록에서 이상 정명련에 대한 간단한 어느 기록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시간이 지난 1909년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라크루어. Lacrouts, 具瑪瑟) 신부가 제주 선교를 위해 추자도를 방문하였다가 황경한의 손자를 만나게 되면서 다시 한번 이들 가족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다.
라크루 신부는 서한에서 정명련을 “황사영의 젊은 아내[sa jeune femme]”로 서술하였다.14 15 16) 라크루 신부의 서한과 인접 시기인 1907년 12월 27일에 발간된『경향잡지』103호의「대한성교사기(大韓聖敎史記)」에 따르면 알렉산델네의 가산 즙물(汁物)을 다 적몰하고,그의 어머니는 거제도로 정배하고,그 아내는 제주도로 귀양보내고,그 아들 경헌은 추자도로 유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16) 이상 기록물에서 불리는 정명련에 대한 호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공식적인 국가 기록물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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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광,「『東國敎友上敎皇書』의 史料的 價値」,『전주사학』4, 1996.
9)…亞肋叔黃嗣永 名家子也…以此爲罪案 論以逆律 十一月初五日 西門外陵遲處斬 母與妻子 散配絶島中…(『동국교우상교황서』, 대만: 輔仁大學 신학원 도서관).
10)…女長適黃時福…(한국고전종합 DB, 검색일자 : 년 11월 2일).
11)안성리 대정현 기록전시관 소장(정난주 마리아 부고 편지 사본).
12)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자료집 제2집』,2018, 112〜113쪽.
13)위의 책,141쪽.
14) rEvangelisation de file de Quelpaertj, Les Missions Catholiques 2113, 1909, pp.
578~579. 황사영과 정명련 사이의 아이 황경한은 세 살배기 아이로 서술되었다. 그러나 조선 왕실에서 생산한 기록물에 따르면 황경한의 유배 당시 나이는 두 살 이었다.
15)『경향잡지』에서 황사영의 세례명을 ‘알렉산델’이라고 하였으나 최근 연구 결과 '알렉시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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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록』,『승정원일기』,『연좌안』에서는 ‘정명련’이라는 이름 석 자가 명확히 기록되었다. 선교사들의 기록인『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라크루 신부 서한에서는 마재 정씨 집안의 딸, 황사영의 아내로 가문과 남편의 이름 속에 가려져 기록되었다. 마지막으로 죽음 이후에 정명련은 정씨 부인으로 불렸다. ‘명련’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녀에 대한 명칭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렇다면 기록물 외 구전 속에서 정명련은 어떻게 전해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2)전승 속 정난주
정명련에 대한 구술이 시작될 수 있었던 배경은 김구정(金九鼎)의 연구를 통해서였다. 김구정은 황사영의 생애와 귀양 간 그의 모친, 부인,아들의 내력을 연구해 오다 우연히 황사영의 5대손인 황찬수를 만나게 되었다. 이 만남을 계기로 황사영의 부인 정씨의 무덤과 아들 경헌(景憲)의 무덤을 찾게 되었다. 김구정을 통해 앞서 살펴본 김상집이 추자도로 보낸 정명련의 부고 편지도 발견되었다.
김구정은 조사 내용을 근거로 당시 서귀포 본당 주임이었던 김병준<金丙準,요한) 신부에게 부탁하여 정명련의 무덤을 찾는다.17)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기록된『가톨릭시보』1973년 7월 15일 자 기사에서는 정명련을 정씨 부인으로 명명하였다.
최초로 정난주란 성명이 보이는 문헌은 김병준 신부가 1977년에 남긴「황사영 처자의 귀양길」이란글에서다. 이 글은 김병준 신부가 제주도에서 정명련에 대한 구전을 조사한 뒤 정리하여 남긴 결과물이다.
이 글에 따르면 정난주는 정약현의 딸로 19세에 황사영과 결혼했으며,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두 살난 아들 경헌 및 시녀 한 사람과 함께 목포를 거쳐 제주도로 유배 갔다고 한다. 그러던 중 배가 추자도 가까이 왔을 때 뱃사공에게 패물을 주면서 아들이 죽어 수장했다고 조정에 보고해 달라 간청하였다.
패물을 받은 사공들이 나졸 두 명에게 술을 먹여 허락받고 추자도 예초리 서남단 물산
리 언덕배기에 어린 경헌을 내려놓았다고 한다. 또 추자도에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어린애 울음소리를 듣고 소를 뜯던 부인이 가보니 아이가 있어서 데려왔고,저고리 동정에 들어있는 것을 펼쳐보니 부모의 이름과 아이의 이름이 적혀있어 그 집에서 거두어 길렀다고 한다.
거둔 이는 바로 뱃사공 오 씨로 이때의 인연을 계기로 추자도 안에서는 황 씨와 오 씨가 서로를 가족으로 여겨 결혼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난주와 시녀는 대정현에서 원님의 고문격이었던 김석구(金錫九)의 집에서 귀양살이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김석구에게는 8살 난 김상집(金尙集)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친어머니가 일찍 사망한 뒤라서 계모의 눈칫밥을 먹던 중이었다. 김상집은 정난주 마리아의 보살핌을 받게 되면서 정난주를 무척 잘 따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 성장하여 정난주가 잘 지낼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고,처음에는 ‘서울 아줌마’라고 불렀으나 나중에는 ‘서울 할머니’로 불렀다고 한다.
정난주는 제주에서 50여 년간을 생존하였다고 전해지며,18) 귀양 갈 때 가지고 왔던 궤짝이 1948년까지 보존되었으나 아쉽게도 제주 4.3사건 때 없어졌다고 한다.19)
이때 조사된 김병준 신부의 전승 기록은 후대 연구뿐 아니라 문학 작품의 원천으로 사용되며 여러 곳에서 재생산되었다.20) 특히 전승과 기록이 혼재되어 정명련은 아명이며,둘째 작은아버지에게 서학을 배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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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가톨릭시보』1973년 7월 15일.
18) 실제 정난주는 제주도에서 38년간 살았다.
19) 김병준,『교회와 역사』25호(197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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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한 뒤에는 고모부인 이승훈으로부터 마재 강기슭에서 마리아로 세례받았다고 정리되었다. 또한 아들 황경헌은 주(문모) 신부에게 유아 세례를 받았다는 식으로 정보가 덧붙여졌다.21) 앞서 살펴보았듯이 정명련의 유배 사실이 기재된 연대기 사료는 정명련이 성인이었던 시점에 작성된문헌이므로 정명련을 아명으로 볼 수는 없다. 또한 황사영과 정명련 사이의 아들 황경한이 전승 속에서는 황경헌으로 불리고 있다. 경한(景漢)과 경헌(景憲)은 이름자가 매우 흡사하므로 이는 구전이 전승되는 과정 중 생긴 오기로 보인다.
문헌에서 보이지 않던 정난주란 이름이 보인 첫 시작은 김병준 신부가 채록한 전승에서부터였다.
1973년 첫 구술 조사 시작의 문을 연 김구정의 연구 내력이 기록된『가톨릭시보』에서도 정명련은 정씨 부인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그 호명이 정난주, 정난주 마리아로 불렸다.
분명 김병준 신부의 채록에서부터 정난주라 불렸다고 볼 수 있겠으나,왜 정명련이 정난주로 전승된 것인지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다만 난(蘭)이 가지는 전통적 의미를 통해 정난주로 전승된 이유를 유추해보려 한다. 난초는 깊은 산중에 홀로 피어나 은은한 향을 내 품었기 때문에 정의(情意)가 투합함을 가리키거나 지조 높은 선비 또는 절개 있는 여인에 비유되었다.22) 이처럼 난의 특성과 상징성에서 비롯되어 흔히 난은 열녀로 형용되기도 하였다.23) 그러므로 정명련이 제주에서 보인 인품과 삶이 난과 유사하였기에 은유적으로 난초와 같은 보배라는 뜻으로 난주라 불린 것인지 추정할 뿐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정명련의 무덤을 관리하던 김상집의 후손들 역시 정명련인지,정난주인지는 고사하고 그녀의 제대로 된 이름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서울 할머니로 불러 왔다는 것이다. 1970년대 중반에 천주교 제주교구의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장을 맡던 현임종 씨가 남긴 칼럼에서 확인된다. 평신도 사도직협의 회장을 역임하던 시절에 현임종은 서울에서 교회사 연구를 전담하던 최석우 신부와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때 최석우 신부와 대화하면서 황사영의 아내 정명련이 제주 어디에서, 어떻게 살다 돌아가셨는지 미스터리라는 이야기를 접한다. 이에 현임종은 최 신부를 도와 정난주 마리아의 행적을 찾기로 하고 수소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어느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만난 대정읍 출신의 김서연 씨(남제주군 군수 역임)를 통해 단서를 찾게 된다.
“우리 집안에서 성도,이름도 모르는 그냥 ‘서울 할머니’라고만 부르는 분의 묘를 관리하고 있는데 그게 이상하네. 조상 대대로 할머니 묘 벌초 관리를 하고 있다네.” 이 발언을 듣고 현임종은 모슬포 본당의 김병준 신부에게 연락하였고,이들은 최석우 신부와 함께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한다. 이를 계기로 정난주 마리아가 제주로 유배 올 때 황경한을 추자도에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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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전세권,『경향잡지』1518호(1994년 9월), 26〜29쪽 ; 김유정,『제주 풍토와 무덤』,서귀포문학원,2011, 231~233쪽 : 홍순만, 『사연따라 칠백리』, 제주문화원,2014, 182〜195쪽 : 홍동현, 앞의 논문,2017 ; 김선필,『한국 천주교회사,기쁨과 희망의 여 정』,눌민,2021,42쪽.
21)김찬흡,『제주사 인명사전』, 제주문학원,2002, 637쪽.
22)『주역』「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마음을 같이하는 이의 말은 그 냄새가 난초 향기와 같다個心之言 其臭如蘭)”라는 말이 있다. 이외에도『갈암집(葛庵集)』속집에서는 난초의 특성에 맞추어 비유한 “난초는 골짜기에 있어도 향기 절로 퍼지니(幽蘭在谷香 難閟)”라는 문장도 보인다.
23) 『명재유고(明齋遺稿)』권40의 고성군수 김공의 묘갈명을 보면 김성달(金盛達)의 아내 연안 이씨에 대해 “유정(幽貞)하여 옛적 열녀의 법도가 있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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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온 전후 사정이 담긴 구체적인 전승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칼럼에 따르면 조사 당시에는 정명련이 임신 만삭으로 제주도 해역에 이르러 파도가 높자 멀미가 심해 조산하였다고 한다. 출산한 그 갓난아기를 제주로 데려오면 황사영의 아들이라 하여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난주는 선원을 매수해 추자도에 잠시 정박하여 족보와 함께 포대기에 싸서 아이를 바위 위에 올려놓고 왔다 한다.24) 현재의 전승과 다소 차이를 보이는 또 다른 구전이 존재하는 셈이다.
3)기록에서 사라진 정명련
이상 문헌과 구전을 통해 타인에게 정명련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불리고,기억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면 정명련의 친족들은 그녀를 어떻게 기억하여 기록했는지 족보 안에 기재된 내용을 토대로 파악해 보겠다.
족보는 부계를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되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여성과 외손에 관한 내용이 소략해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정약용이 지은 정명련의 아버지 정약현의 묘지명과 남편 집안인 창원 황씨의 족보도 아울러 참고하여 살펴보겠다.
나주 정씨는 숙종과 경종 연간까지 본관을 압해(押湖로 써오다 영조 때 압해군(押海郡)이 폐현(廢縣)되면서 나주에 부속되자 관향을 나주로 고쳤다. 그래서 나주 정씨 또는 나주 압해정씨라 하였는데,1702년에『나주 압해정씨 족보』가, 1870년에는『경오보』가,1931년에는『신미보』가,1961년에는『신축보』가,1999년에는『기요보』가 간행되었다. 이 중 정명련의 생몰연대를 고려하면 1870년부터 1999년에 간행된 족보에서 정명련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표 1> 과 같다.
〈표 나주 정씨 족보에 기재된 정난주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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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현임吾,「[칼럼] 황사영과 정난주」,『뉴스제주』(http://w丽.newsjeju.net,검색일자 : 2023년 1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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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에 간행된『나주압해정씨족보』에는 정명련의 부모인 정약현과 경주 이씨,형제 관계가 기
록되었다. 남자 형제인 학수(學樹)•학순(學淳)이 실제 태어난 순서와 상관없이 조선 후기 족보가 그러하듯 선남후녀(先男後女) 원칙에 따라 먼저 기록되었다. 그러나 족보 어디에서도 큰딸인 정명련과 남편 황사영이 보이지 않는다.
둘째 사위인 홍영관(洪永觀)부터 막냇사위인 목인표(睦仁表)까지 족보에서 확인되나 정명련에 관한 내용은 사라진 것이다. 그 이유를 정약용이 직접 쓴 정약현의 묘지명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정약용의 묘지명에 따르면 정약현은 전취 경주 이씨와 재취 의성 김씨와의 사이에서 총 4남 7녀를 낳았다.25) 이 중 장성하여 혼인까지 한 이는 2남 7녀였다. 그러나 1870년 족보 에는 2남 5녀만 기록되었다. 묘지명과 족보를 비교하여 누락된 이들은 바로 첫째 사위 황사영과 셋째 사위 홍재영이었다.
추정컨대, 족보가 발간된 1870년은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를 겪은 이후로,지난 세월 동안 황사영 외에도 홍재영 자손들 중에서도 박해에 휘말려 사망한 이가 존재하였고,그 여파로 인해 족보에서 황사영과 홍사영이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홍재영은 천주교 신자로 기해박해에 연루되어 사망하였을 뿐 아니라 홍재영의 아버지는 1801년(신유박해)에 순교하였고,홍재영의 아들 홍봉주 또한 1866년(병인박해)에 순교하였다.
이처럼 천주교 신자로 몰려 사망한 이들이 족보에서 누락된 것은 두 가지 가능성을 시사한다. 첫째로 순교로 인해 자연스레 자손이 남아있지 못하므로 문중에서 족보를 편찬할 때 족보 작성의 기초가 되는 수단(收單)을 후손이 제출하지 못해서 누락된 것일 수 있다.
둘째로 당시 역적으로 몰려 죽었기 때문에 문중에서 의도적으로 누락한 것일 수도 있다. 이처럼 어떤 이유에서건 정명련과 남편 황사영은 족보에서 흔적이 사라지는데 이러한 경향은 1930년대까지 이어진다. 이는 이후에 간행된 족보들이 이전 1870년 본을 저본으로 하여 편찬되었기에 보이는 현상이라 생각한다. 이후 나주 정씨 족보에서 정명련의 남편 황사영이 기록되는 시점은 현대에 들어온 1999년이다.26) 신유박해가 발생하고 198년 뒤에서나 집안의 족보에 정명련의 남편 황사영이 기재된 것이다.
그렇다면 남편 황사영의 집안에서는 정명련을 어떻게 기재하였을까?
1870년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당파보『진보』의 기재 내용 중에는 오류가 상당하다. 창원 황씨 족보 중 황사영 부분을 살펴보면 우선 장인을 정약전으로 잘못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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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다산시문집』16권 묘지명(墓誌銘),「선백씨(先伯氏) 진사공《進士公)의 묘지명」.
26)이때에도 홍재영 집안은 족보에서 누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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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 대체적으로 창원 황씨 족보에서 황사영에 관한 내용은 매우 소략하다. 공통적으로 황사영에 대한 기록은 능지처사 되었다,사학(邪學)으로 복주(伏誅)당했다는 기록만 보일 뿐 정명련과 아들 경한에 대한 내용이 없다.
족보상 정명련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현대에 들어온 뒤에야 수록되었다. 우선 1957년 족보에서 비로소 황사영의 배우자로 나주 정씨가 기재된다. 이는 바로 정명련을 가리키지만 정명련의 증조 지해를 조부라 기재하고, 조부 재원을 증조로 기재하는 등의 오류를 범하였다.
또한 황사영과 정명련 사이의 아들로 두 명이 기록되는데 각자의 이름은 병진(秉直)과 경헌이었다. 병진의 존재는 기존 연대기 사료에서 확인되지 않던 인물이다. 다만 병진이 기록된 1957년 판본의 족보 안에는 별록 부분이 존재하는데,여기에서는 “정씨(丁氏)는 진사공 사영의 배우자를 말하고,아들의 이름은 모르나 경헌으로 추정된다.”며 연대기 사료처럼 경한의 존재만 기재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명련의 생년은 명확하지 않고 기년의 날짜와 묘소의 위치만 비교적 상세하게 달렸다. 또한 경헌으로 추정되는 아들의 묘소는 추자면 소예초(小禮草)의 밭에 있고 경헌의 배우자는 남평 문씨로 적었다. 이외 경헌의 아들로 장자 상록<相錄)과 차자 보록<寳錄)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같은 족보 안에서도 경헌의 아들을 건섭으로 적는 등 상극되는 내용이 뒤따랐다.
무엇보다 병진이라는 연대기 사료에서 등장하지 않던 이가 황사영과 정명련의 장남으로 서술되었다. 왜,어느 순간부터 병진이란 아들이 생긴 것인지는 1907년 황원익(黃元益)이 경리원경(經理院卿)에 올린 청원서를 통해 짐작된다. 황원익은 자신의 고조 황사영이 신유박해로 사망하고 국가로부터 재산을 몰수당하였는데,지금 고조의 관작과 토지를 회복해주는 은혜를 입었으니 적몰당한 양주군 장흥면 부곡상리 묘 아래에 소재한 일대의 땅을 복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27)
황원익은 황병진의 증손으로,실제 이들은 황사영과 정명련의 친자손이 아니었다. 다만 족보에 황병진이 혼입된 것은 한말에 있었던 연좌죄인의 사면과 관련한 재산 복급 문제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27 28)
3. 정명련 관련 전승 검토
정명련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전승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정명련은 자신의 아들 경한을 위해 뱃사공에게 간곡히 청하여 아들을 추자도에 놓아두고 왔다. ② 정명련은 김석구의 집에서 김석구의 아들 김상집을 돌보았고,말년에는 서울 할머니로 불리며 어느 정도 대우를 받다가 김상집의 집에서 삶을 마쳤다. 그러나 이는 정명련이 사망하고 한참 지난 1970년대에 와서 수집된 전승으로,전승 외에 정명련의 구체적인 삶을 보여주는 문헌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녀가 제주로 유배 오기까지 그리고 제주에서의 삶이 어떠하였을지 파악 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부득이 하지만 조선시대 후기에 있었던 유배 죄인의 호송 사례를 검토하며,
특히 연좌되어 절도로 유배된 여타 여성 죄인의 삶에 대한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정명련의 삶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검증해 보고자 한다.
1)유배 죄인의 호송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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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各司謄錄』3,「京畿道各郡訴狀」24, 黃元益 청원서.
28)족보상 황사영과 정명련의 자손에 관한 기재 내용의 복잡성은 상당한 편이다. 이는 황사영의 아버지 황석범이 조부 황재정의 계자였는데 신유박해 이후 이를 무효로 하고,후대에 문중 안에서 황석범 대신 다른 이를 황재정의 밑으로 집어넣으려던 시도와 황사영의 재산 복급 관련한 사건 등 황사영 집안을 둘러싸고 후대에 여러 갈래에서 발생한 사건의 관계성을 검토해야 하기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본고 주제와 관련성이 떨어지므로 후속 연구로 진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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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시키고,유배지에 도착한 월일(月日)과 보수인(保授人)의 역과 성명을 아울러 전례에 의거하여 계문하도록 하라. 이에 관문을 보내니 자세히 살펴서 시행하길 바란다. 이 관문이 잘 도착하기를 바란다. 위 관문을 전라도 관찰사에게 보낸다. 광서 원년 3월 21일. 29) |
형조에서 호송하는 일이다. 전라도 강진현으로 멀리 유배 보내는 죄인 이성영(李聖榮)의 원본 관문(關文)은 아울러 역자(驛子)에게 맡겼으니,경유하는 각 읍과 각 역에서 많은 군인을 차정하여 차례대로 호송해 (이성영이) 중간에 도망가는 우환이 없도록 하라. 첩을 내려보내기에 합당하니,문서와 사실을 확인하여 시행하기를 바란다. 첩이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 이 첩을 한성에서부터 배소관(配所官)까지 준하여 살필 것. -나이 : 65세. -신장 : 4척 2촌. -얼굴색 : 검붉은 색[鐵]. -수염 : 조금 하얘지기 시작함. -흉터 : 좌우 빵에 검은 반점이 무수히 있음. 오른쪽 귀는 반으로 잘림. 왼쪽 손등에는 흉터가 없고 오른손등에 새로 다친 흉터가 한 곳에 있음. -기타 : 호패를 차고 있지 않음. 끝. 광서 원년(1875) 3월 21일30) |
1875년에 남에게 상해를 입힌 죄인 이성영이 강진현으로 유배될 때의 호송 절차가 기록된 형조 관문과 첩문(怙文)이다. 죄인의 유배형과 유배지가 정해지면 형조에서는 배소지로 정해진 지역의 관찰사에게 관문을 보내 죄인의 도착 일자와 보수인을 보고하도록 요청하였다. 이 관문은 역자(驛子)에게 맡겨졌으며,역자는 죄인을 데리고 유배지로 가면서 지나가는 읍과 역에서 군인을 정해 호송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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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刑曹爲相考事李聖榮當爲閭里作拏致人成傷罪依法典遠配於道內康津縣爲去乎到配卽時可信人處保授安接令是遣到配月日及 保授人役姓名幷以依例啓聞宜當向事合行移關請照驗施行須至關者.右關全羅道觀察使.光緖元年三月二十一日.
30)刑 曹 爲 護 送 事 全 羅 道 康 津 縣 遠 配 罪 人 李 聖 榮 身 Z 原 關 幷 以 驛 子 處 逢 授 押 送 爲 去 乎 所 經 各 邑 各 驛 良 中 多 定 軍 人 次 次 護 送 俾 無 中路逃躱之患宜當向事合下仰照驗施行須至帖者.右帖下自京至配所官準此.年六十五長四尺二寸面鐵髯小始白痕左 右頰黑痣無數右耳半折左手疤無右手背新傷痕壹廛號牌不佩印.光緖元年三月二十一日護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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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중간에 죄인이 도망치는 것을 방지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때 문서 하단에 죄인의 나이,신장,생김새,호패의 착용 여부까지 참고사항으로써 기입되었다. 배소지를 관할하는 관찰사는 형조의 관문에 의거하여 죄인이 내려오는 길목에 위치한 고을에 감결(甘結)을 보내 죄인을 착
실히 호송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면서 죄인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고을의 수령은 다른 도의 분계에서 죄인을 인수 받으면 함께 건네받은 도부장(到付狀)을 점련(粘連)하여 형조와 감영에 보고하도록 하였다.31)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는 서울에서부터 배소지로 유배 죄인이 내려가기까지 감시하며 호송하는 절차 및 인원과 역할이 명확히 준비되어 있었다. 또한 죄인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관에서는 최종적으로 인수받은 죄인에 대한 신상과 도착 여부를 감영과 형조에 보고해야 하였다. 이러한 호송 절차는 중앙 관서인 형조에서 논의한 대로 유배 죄인이 오류 없이 배소지로 갔는지 중앙정부에서 확인하며,중간에 죄인이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려는 방편이었을 것이다.
죄인이 유배지에 잘 도착하게 되면 해당 지역에서는 언제 죄인이 유배지에 도착했으며,이 죄인을 담당할 보수주인이 누구인지 보수주인의 성명과 역을 성책하여 형조로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한 문서가 위〈표 4>의 성책문이다. 영해부에서 작성된 보수주인 성책문에는 유배된 이춘태의 죄목과 도착 일시,보수주인의 역과 성명이 기재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유배 죄인의 호송 과정에 대한 절차를 고려한다면 중간에 정명련이 아들 경한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뱃사공과 사령에게 사정하여 따로 떼어놓고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조선은 도중에 죄인이 도망갈 수 없는 호송 관련 행정 체계를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더욱이 도망가기 위해 청탁하였다가 발각될 경우 그 죄가 더 추가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사안이었다. 무엇보다 이미『연좌안』과『일성록』,『승정원일기』에서 확인하였듯 황경한의 배소지는 추자도로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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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甘 結 各 官 因 刑 曹 關 全 羅 道 康 津 縣 定 配 罪 人 李 聖 榮 身 Z 原 配 文 護 送 帖 並 以 該 驛 子 處 逢 授 押 送 爲 去 乎 所 經 各 邑 定 刑 吏 軍 人 次 次 着實護送俾無疎虞逃躱之患終到官段他道初面官良中押付後受到付粘連兩報宜當向事.Z亥三月二十一日在營.兼使[押]都事.始興水原振威印.
32)乾隆五十一年八月日寧海府定配罪人到配年月日罪目及保授主人役姓名成冊.彦陽縣來李春泰 丙午八月十三日至d配 保授良人金成 彬 右人段 犯科囚禁之中 妄出圖生之計 散與二百金 圖囑營邑罪 杖七十 徒一年半 定配事(E뮤지엄. 청구기호 : 울산 13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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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련의 유배길과 관련한 호송첩 및 보수주인의 성책 문서가 현재 전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구
전을 통해 정명련의 보수주인은 김석구와 김상집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2) 유배지에서의 생활
기존 신유박해에 연루된 유배인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면 가족과 함께 있지 못하도록 유배지를 분산시켰으며,외부와의 접촉을 제한하는 등 일반 유배인에 비해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보수주인은 유배지의 고을 수령이 지정하는데,유배된 교인들이 집 밖에 나오지 못하도록 격리 및 감시하였고,5일 혹은 10일 단위로 유배인의 이상 유무를 수령에게 보고해야 하였다.33) 배소지는 거리와 험악한 정도에 따라 원처(遠處),절새(絶塞),절도(絶島) 3단계로 구분하였으며,이 중 정명련이 처분받은 절도는 생활환경이 척박하여 가장 생활하기 힘든 곳이었다.34)
특히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에 배속된 여성 유배인이 겪는 고초는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약용은『목민심서』에서 유배지에서 여성 유배인이 겪는 어려움을 남긴 바 있다.35)
정명련의 유배 시기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은 1784년에 김하재(金夏材)가 대역부도죄로 죽으면서 그의 아내는 교형에 처해지고 자녀 또한 노비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노비로 전락한 김하재 자녀의 삶의 모습이 기록된 문헌이 있다. 김하재의 아들은 진도의 사내종이 되어 감옥 문가에 거주하면서 신을 삼으며 살아갔으나 속된 말을 하지 않고 단정히 꿇어앉아 사람을 대함에 공손하였다.
김하재의 아들은 관비를 얻어 아들 하나를 낳아 길렀는데,비록 집안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어도 이치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여 선조를 욕보이지 않도록 가르쳤다. 한편 그의 누이는 어려서 나주로 유배되었는데 자라서 상천(常賤)의 아내가 되었다. 여동생의 집은 조금 여유로워 새 옷을 지어 오라비에게 보냈는데 이를 받아든 오라비는 울며 옷을 불살랐다.36) 아마 김하재의 딸은 나주의 관비가 된것으로 보이는데,자신의 여동생이 고생스럽게 살다가 결국 상천의 아내가 되자 절망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에 차마 그 옷을 입지 못하고 불사른 것으로 보인다.
김하재 자녀의 사례는 19세기 후반의 일로,정명련이 살아가던 시기와 동시대이다. 이로 미루어 관노비로 살아가야 했던 정명련과 황경한의 고단한 삶도 이들 남매와 큰 차이가 없었으리라 보인다. 정명련이 관비로 대정현에 유배 중이던 1817년 무렵에 대정 현감으로 부임한 김인택(金仁澤)이 남긴『대정현아중일기(大靜縣衙中曰記)』에서도 유배 죄인에 대한 점고(點考) 모습이 확인된다.
1817년 6월 1일에 전임자로부터 인수인계를 받은 김인택은 동헌에 올라 도임의(到任儀)를 거행하고 모든 남녀 죄인을 차례대로 점고하였다. 이후 1일. 6일 41일‘ 26일 육아일(六衙日)마다 면에 사는 서리와 군교를 점고하고,죄인은 초하루와 보름에 점고를 하는 읍례(邑例)에 따라 매달 1일과 16일에 서리,군교,죄인을 점고하였다.
김인택은 대정현에 부임한 동안에 간혹 향청(鄕廳)에 지시하여 점고하도록 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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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심재우,앞의 논문,296쪽.
34)정연식,「조선시대의 유배생활: 조선후기 유배가사에 나타난 사례를 중심으로」,『인문논총』9, 2002, 108쪽 ; 심재우,「조선시대 유배제도 연구의 성과와 과제」,『도서문학』58, 2021, 48쪽 ; 임학성,「19세기 말〜20세기 초 ‘流配案’ 자료를 통해 본 島配 양상一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자료의 통계적 분석 사래」,『도서문학』59, 2022.
35)탐욕의 대상이 되거나 수령들이 점고를 빙자하여 미색을 보는 일이 발생하였다(『牧民心書』,형전 恤囚).
『梅山先生文集』52「雜錄」.…其子爲奴珍島居囹圄門側捆屨爲生口不道鄙俚之談坐必危跪接人恭謹一毫不以非義干人人皆
愛而矜之得官婢生一子敎諭諄諄曰吾家雖至此境豈可行非理之事以辱祖先乎其妹幼齡分配羅州長爲常賤之妻家力稍優製新
衣一襲送助於渠則輒涕泣而取火焚之戒勿更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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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지할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빠지지 않고 아일점고(衙日點考)를 진행하였다.37)『대정현아중일기』에 직접적으로 정명련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수차례 진행된 죄인의 점고에 당시 유배 죄인이었던 정명련도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이다. 또한『대정현아중일기』의 11월 2일 자 일기를 보면 형리 조상검(趙尙儉)이 정배된 죄인 부종례(夫宗禮)를『죄인안(罪人案)』에 기록하지 않아 곤장 6대를 맞는다.38) 이로미루어 정명련 또한 대정현에서 작성하는『죄인안』에 이름이 올라가 관리받았을 것이다.
3)유배 죄인의 죽음
순교자 유항검(柳恒儉)의 딸 유섬이(柳暹伊)는 신유박해 당시 9세의 나이로 경상도 거제부(巨濟府)의 관비가 되었다. 그녀의 삶은『사헌유집(思軒遺集)』에 실린「부거제(附巨濟)」와「제거제유처자문<祭巨濟柳 處子文)」을 통해 어느 정도 복원될 수 있었다.39)『사헌유집』의 저자 하겸락(河兼洛)은 거제 부사를 지내면서 유섬이의 죽음을 목도하고 그녀를 위해 제문을 남겼을뿐 아니라 행정적으로 검험(檢驗)이란 보고문서도 남긴 바 있다.
상고한 일을 아룁니다. 이번에 도부(到付)한 전 거제 부사 하겸락의 첩정(牒呈)에,
“본부에 정배(定配)된 의금부에서 온 연좌 위비(緣坐爲婢) 죄인 섬이(暹伊)가 이달 16일에 물고(物故)하였으므로 부사가 검험(檢驗)에 참석할 각인을 거느리고 격식을 갖추어 검험하니, 몸의 앞뒷면에 다른 상처가 없고 실인(實因)은 병사(病死)가 적실(的實)합니다.”라고 하므로, 위 거제부 연좌되어 계집종이 된 죄인 섬이는 정속안(定屬案)에서 전례대로 탈하(頗下)하고 연유를 삼가 갖추어 계문합니다.
계해년(1863) 7월 25일 40)
검험은 사망자의 사망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관에서 실시하는 것으로,죄인이 사망한 경우 검시를 하는 것이 상법(常法)이었다.41) 죄인 외에도 신역(身役)을 지고 있는 군사 및 각사(各司)의 노비,장인 중 죽은 자도 검시를 받았다.42) 이는 거짓으로 죽은 체하여 역에서 도망치는 사례가 늘자 신포(身布)의 원활한 수취를 위해 가한 일종의 제재였다.
본래 검험의 실시는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실체적 진실 요소가 강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관념적으로 이해되었다. 이는 조선 사회가 신분제 사회이자 유교 국가였기 때문인데 양반 관료제의 명예,여성의 정조 관점,영혼불멸 사상,조상숭배 같은 관념적인 요소로 인해 양반은 검험을 꺼렸다.43)
이에 후대에는 사대부의 부녀자나 종친, 문무관, 대부 이상과 왕의 측근 신하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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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백규상 역,『역주 대정현아중일기』,제주문화원,2021,
21-26-29-31-33-38-40-43-51-53-55-62-67-70-76-78-82-91-93-96-102-105-107-114-117-120-132-135-137-149-150-153-163-167-17
0-173-174-178-179-180-182-184-186-188-193-195-199-201-206-208-212-214-216-220-221-223-234-236-240-242-244-246-24 7-251-253-257-261-274-276-278-280^.
38)위의 책,85쪽.
39)하성래,「거제로 유배된 유항검의 딸 섬이의 삶」,『교회와 역사』467호(2014년 4월),한국교회사연구소 ; 김윤선,「사료와 문학 으로 구현된 유배자 유섬이(柳暹伊,1793〜1863)」,『교회사연구』50, 2아7.
40)『경상감영계록<慶尙監營啓錄)』철종 14년(1863) 7월 25일.
41)『명종실록』권33, 명종 21년 11월 16일 임신.
42)『현종실록』권22, 현종 15년 1월 4일 기사.
43)심희기,「朝鮮時代의 殺獄에 關한 연구( I )」,『법학연구』25-1, 부산대학교 법학연구소,1982, 253〜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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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죄(大逆罪)가 아니면 검시하지 않는 것이 원칙으로 정해졌다.
유섬이는 양반가의 여식이었지만 대역죄인의 연좌죄로 인해 영원히 절도(絶島)에서 관비로 속하게된 형벌을 받았다. 따라서 태어났을 때의 신분과 별개로 관비로 죽게 되자 당시 으레 행해지던 법제에 따라 검험이 이루어졌다.
하겸락은 정시처(停屍處)에서 시신을 검시하는 오작인(仵作시과 사망자의 친족인 시친(屍親),이웃에 사는 절린(切隣)과 거제부의 색리(色吏),의생(醫生),율생(律生) 등과 함께 검험에 참여했을 것이다. 어릴 때 혼자 거제도로 와서 비(婢)가 된 유섬이는 하겸락의 제문에 따르면 가족을 이루지 않고 사망했기 때문에 검험을 참관할 친족이 없었다. 그러므로 여타 노비의 물고입안(物故立案) 사례에 비추어 같은 노비 중 우두머리인 수노(首奴)가 대신 참관했을 것으로 보인다.
검험 결과 유섬이의 사망은 병사가 확실했기에 하겸락은 죄인 섬이가 사망했으므로 전례대로 정속안(定屬案)에서 탈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처럼 위노(爲奴)의 처벌을 받은 연좌죄인은 사망할 경우 공식적으로 검험을 거쳐 사망 원인을 밝혀야 했다. 정명련과 같은 사안으로 연좌되어 비가 되었던 유섬이 또한 검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 정명련의 검험 문서나 검험 결과 발급된 물고입안이 발견되지 못하였다.
다만 조선시대 법제와 전해지는 전승을 종합하면 김상집의 집에서 정명련이 사망한 뒤 시신은 정시처로 옮겨져 사망 원인을 판별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이후 타살에 협의가 없다면 정명련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관의 인정을 받아 비(婢)로서 부과된 역에서 벗어나 안식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 발굴된 정명련의 묘소와 김상집 집안의 전승을 고려한다면 검험 이후 김상집의 집안에서는 정명련의 시신을 거두어 무덤을 조성해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현전하는 정명련과 유섬이의 무덤은 그녀들이 유배지 안에서 큰 공적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당시 함께 살아가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남겼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들의 사례는 연좌죄인으로서 관노비가 된 이들이 지역사회 안에서 일정한 평판을 유지하며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따라 사후 삶의 흔적이 잘 남겨진 경우로,평소에 알기 힘든 관노비의 마지막 삶의 모습에 대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4. 맺음말
공통적으로 정명련과 관련한 전승은 전통적인 어머니의 상이 투영되었다. 이미 유배지로 떠나기 전부터 아들 황경한은 황사영의 아들로서 조정에서 인지되었고,그러므로 대역죄인의 아들이자 관노로서의 삶이 정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전승 속에서 정명련은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애끊는 마음을 품은 채 추자도에 아이를 두고 온 결단력 있는 어머니로 등장한다. 유배 죄인이 호송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호송첩을 고려한다면 이는 실제 역사적인 사실과 다소 동떨어진 전승이다.
또한, 유배지에서 여성 유배인이 겪는 어려움과 관노비가 사망 후 받아야 하는 검험을 생각하면 정명련의 유배지 생활도 녹록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아쉽게도 현재 정명련이 유배지에서 겪었던 구체적인 삶의 양상이 기록된 자료가 없어 명확히 알 수 없다. 그저 인접 시기의 다양한 자료를 통해 짐작할 뿐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물일 수도 있다.
정약용은『목민심서』에서 밝히길 부녀자로서 유배를 당한 사람의 괴로운 절개와 아름다운 행실을
표창하여 알릴 만한 것이 많겠지만 이미 집안이 엎어져 칭찬해 줄 사람이 없으니 슬프다고 한탄하였다.
이에 정약용은 여성 유배인의 삶을 기록한『홍사(紅史)』한 부를 지어 그들의 숨은 행적을 밝혀주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했다고 기록하였다. 정약용이 목도한 여성 유배인만 하여도 처녀로 온 사람이 백발이 이마를 덮도록 뒷머리를 닿으며 절개를 지킨 경우와 60년간 방문을 닫고 혼자 거처하는 사람,학대에 목을 매고 독약을 먹어 티 없는 절개를 온전히 한 사람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민관은 여성 유배인에 대해 긍휼하고 측은한 마음을 가지며 능멸하거나 학대하지 말 것을 권하였다.44)
정약용이 직접 밝힌 바는 없지만『홍사』를 짓고자 한 목적 중에 하나로 일찍이 유배당한 정명련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정해 본다. 김상집이 정명련의 무덤을 조성해 주고,정씨 부인이라 지칭하며,사후 그녀의 아들에게 부고 편지를 부쳐준 것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김상집에게 남긴 어떠한 무형의 자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정명련은 절도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타의 모범이 될 만한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약용의 주변 인물 중에는 제주에 관한 소식을 전해줄 만한 이들이 존재하였다.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李綱會)는 1813년 제주의 상찬계 비리에서 발생한 양제해(梁濟海) 옥사 사건의 전말이 담긴『탐라직방설(耽羅職方說)』의「상찬계시말(相贊契始末)」을 남긴 바 있다.
제자 외에도 이승훈의 동생 이치훈(李致薰)이 신유박해로 제주목에 유배되자 이치운의 아들 이갑규(李甲逵)가 격쟁을 치며 지속적으로 아버지의 방면을 요청한 바 있다.45) 이러한 일들은 모두 정명련이 제주에 유배되어 있을 때와 시기적으로 겹쳐진다. 정약용은 제자나 친족을 통해 어렴풋이 조카 정명련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아직도 정명련에 대한 실체는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였다. 정명련의 행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 더 다양한 방면으로 자료 발굴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정명련이 제주로 유배된 후 제주 목사,제주 판관 또는 대정 현감을 역임한 인물들을 발췌하고 그들이 남긴 문집중 정명련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지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후에 정명련의 생몰연대를 고려하여 유배된 1801년부터 사망한 1838년 사이에 제주로 유배 온 다른 유배인이나 제주 유림,제주에 유람온 이들의 저서와 문집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죄인안』,물고입안,제주에서 작성된 첩보류,호적중초(戶籍中草) 등 다양한 관문서를 발굴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여기까지 미처 조사를 다하지 못하였으나 이러한 조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전승 속 정명련과는 또 다른 모습이 밝혀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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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牧民心書』, 형전 恤囚.
45)『승정원일기』1988책,순조 10년 9월 3일 을묘 :『승정원일기』1994책,순조 11년 3월 12일 경신 :『승정원일기』2135책,순조 20년 11월 24일 정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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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제주 (https ://www. n ewsj ej u. net/)
[제1발표 토론문]
‘기억과 기록을 통해 본 정난주(정명련)의 삶에 대한 검토
-호명(呼名)의 역사에 대해서’에 대한 토론문
홍동현 (독립기념관)
본 발표문은 조선후기 실학자이자 개혁정치가인 정약용의 조카로 잘 알려진 정난주(명련)의 기록과 함께 전승 과정을 검토하고 유배지에서의 삶을 추적하고자 하였다. 전근대 시기 여느 여성이 그렇듯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기록을 남기지도 타인에 의해 남겨지지 않듯이 정명련의 경우에도 기록이 전무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이다. 더구나 그의 남편이 ‘대역부도(大逆不道)’로 비참한 생을 마감한 황사영이었기 때문에 그의 주변인들도 정명련이라는 이름을 언급하기를 꺼렸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본 발표문은 기록보다는 기억에 의존해서 그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으며,‘호명(呼名)’이라는 부제처럼 기억의 전승 과정과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했다.
본 토론자도 몇 년 전에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인 정약전의 유배 생활을 공부하면서 정난주를 알게 되었고,제주도와 추자도에서 그의 흔적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세상에 알려진 것 이외에 그와 관련된 어떠한 자료도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본 발표문은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로웠으며,이전에 갖고 있던 궁금증을 조금은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아쉬운 부분과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점을 적으면서 토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1. 호명의 역사란 당사자의 삶보다는 타자의 시선에 주목한 것으로, 그를 둘러싼 내러티브
(narrative)의 형성 과정과 그것이 갖는 현재적 의미,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본 발표문에서는 당대의 기록을 통해 그를 어떻게 호명하고 있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발표문에 따르면 그는 마재 정씨의 딸,황사영의 아내,그리고 정씨 부인,즉 “가문과 남편의 이름 속에 가려져” 호명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정명련’이라는 그의 온전한 이름 석 자가 기록된 것은 그의 처벌을 기록한『승정원일기』,『일성록』,『연좌안』정부의 공식 기록뿐이었 다는 것이다.
이외에는 그의 가족도,심지어 천주교 관계 자료에서도 그의 이름 석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전근대 사회 여성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나,대체로 이름 석자가 애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명련’이라는 이름 석 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외면된 것은 그가 황사영의 아내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2장 3절에서도 살펴보고 있듯이 황사영은 ‘대역부도’로 처벌되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집안뿐 아니라 처가 집안에서도 철저하게 지워졌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것이나,그렇다면 천주교에서는 황사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 발표문에서는『동국교우상교황서』(1811),『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1866),『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1862)를 언급하고 있는데,본 자료에서 황사영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또한 이외의 다른 자료를 통해서 조선의 천주교인과 외국 선교사들이 황사영을 바라보는 시선과 함께 정명련이 기록에서 사라지게 된 배경을 함께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된 추가적인 설명을 부탁드리고자 한다.
2. 정명련을 중심으로 한 내러티브에 관한 것이다. 우선 이름과 관련된 내러티브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름은 정명련보다는 ‘정난주’와 세례명 ‘마리아’이다. 각각의 이름이 갖고 있는 내러티브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문헌 기록에서는 ‘난주’와 ‘마리아’라는 이름을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후대 누군가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일 것으로 보인다. 본 발표문에서는 1973년『가톨릭 시보』까지 ‘정씨 부인’으로 명명되었다가 1977년「황사영 처자의 귀양길」에서 처음 ‘정난주’라는 이름이 등장한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정씨 부인’과 ‘정난주’가 담고 있는 내러티브가 전혀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난주 이전과 이후의 내러티브를 비교해서 정난주가 갖는 의미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황사영 처자의 귀양길」에서 정난주를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지 설명 부탁드린다.
3. ‘정명련 관련 전승 검토’에 대한 것이다. 본 장에서는 흔적이 매우 흐릿한 정명련의 전승 내용
을 바탕으로 유배지에서의 삶의 흔적들을 살펴보고자 했다. 발표자는 다른 여성 유배자의 삶을 통해 정명련의 삶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검증해 보고자 한다.”고 했으나,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하다. 발표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유섬이(柳暹伊)의 경우에도 신유박해로 인해 거제로 유배된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에 대해서 다행히 거제 부사 하겸락이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하지만 기록이 거의 전무한 정명련의 삶을 역사적으로 복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정명련의 삶을 역사적으로 복원하기보다는 그에 대한 내러티브를 되돌아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애초에 본 발표문에서 기획한 그의 기억과 전승에 좀 더 집중하는 것이 필요할것으로 보인다. 즉,머리말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현재 소설과 뮤지컬에서 정명련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어떤 내러티브 구성을 갖고 있으며,그것이 갖는 의미와 맥락을 짚어주는 것이 본 발표문의 취지에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4. 마지막으로 정명련에 대한 전승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김상집이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정명련의 제주 유배지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했던 인물이며,정명련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함께 공유하고 공감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앞으로 김상집 집안과 후손에 대한 조사를 통해서 좀 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길 기대하면서 토론을 마치고자 한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