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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his research began
이 연구가 시작된 발단
For one of Jehovah’s Witnesses to question the validity of this basic prophetic calculation is, then, no easy matter. To many believers, especially in a closed religious system such as the Watch Tower organization, the doctrinal system functions as a sort of “fortress” inside which they may seek shelter, in the form of spiritual and emotional security. If some part of that doctrinal structure is questioned, such believers tend to react emotionally; they take a defensive attitude, sensing that their “fortress” is under attack and that their security is threatened. This defense mechanism makes it very difficult for them to listen to and examine the arguments on the matter objectively. Unwittingly, their need for emotional security has become more important to them than their respect for truth. 당신이 여호와의 증인 중 한 사람이라면, 이 기본적인 연대예언계산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신자들에게, 특히 워치타워 조직과 같은 폐쇄적인 종교 시스템에서, 교리 체계는 영적, 정서적 안전의 형태로, 그들이 피난처를 찾을 수 있는 일종의 내부 "요새" 역할을 한다. 만약 누군가 그 교리 구조의 일부가 틀렸다고 주장한다면, 증인들은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성"이 공격받고 있고 그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방어 메커니즘은 그들이 그 문제에 대한 상대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듣고 검토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정서적 안정에 대한 필요성이 진실에 대한 존중보다 그들에게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To reach behind this defensive attitude so common among Jehovah’s Witnesses in order to find open, listening minds is extremely difficult—especially when so basic a tenet as the “Gentile times” chronology is being questioned. For such questioning rocks the very foundations of the Witness doctrinal system and therefore often causes Witnesses at all levels to become belligerently defensive. I have repeatedly experienced such reactions ever since 1977 when I first presented the material in this volume to the Governing Body of Jehovah’s Witnesses. 여호와의 증인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진실을 찾을 수 있도록 그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방어적인 태도를 극복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ㅡ 특히 "이방인의 때"와 같은 기본적인 연대교리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한 의문은 증인 교리 시스템의 바로 그 토대를 흔드는 것이므로 모든 직분의 증인들이 싸울듯이 방어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1977년 이 책의 자료를 처음 여호와의 증인 통치체에 제출한 후 그러한 반응을 여러번 경험해 왔다. It was in 1968 that the present study began. At the time, I was a “pioneer” or full-time evangelist for Jehovah’s Witnesses. In the course of my ministry, a man with whom I was conducting a Bible study challenged me to prove the date the Watch Tower Society had chosen for the desolation of Jerusalem by the Babylonians, that is 607 B.C.E. He pointed out that all historians marked that event as having occurred about twenty years later, in either 587 or 586 B.C.E. I was well aware of this, but the man wanted to know the reasons why historians preferred the latter date. I indicated that their dating surely was nothing but a guess, based on defective ancient sources and records. Like other Witnesses, I assumed that the Society’s dating of the desolation of Jerusalem to 607 B.C.E. was based on the Bible and therefore could not be upset by those secular sources. However, I promised the man I would look into the matter. 이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68년이었다. 당시 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파이오니아' 곧 전시간 봉사자였다. 내가 봉사하는 과정에서 성경연구를 함께 하던 한 남성이 바빌로니아인들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위해 '워치타워 협회'가 제시한 기원전 607년 연대를 증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모든 역사가들이 약 20년 후인 기원전 587년과 586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표시했다고 지적했다. 나는 그들의 데이터가 추측일 뿐이며, 잘못된 고대 자료와 기록에 근거한다고 말했다. 다른 증인들처럼, 나는 협회가 예루살렘의 황폐가 기원전 6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계산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세속적인 근거에 대해 기분이 언짢아지지는 않했다. 하지만, 나는 그 문제를 조사해서 알려주겠다고 그 사람에게 약속했다. As a result, I undertook a research that turned out to be far more extensive and thoroughgoing than I had expected. It continued periodically for several years, from 1968 until the end of 1975. By then the growing burden of evidence against the 607 B.C.E. date forced me reluctantly to conclude that the Watch Tower Society was wrong. 그 결과, 나는 내가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철저한 검토에 착수했다. 1968년부터 1975년 말까지 여러 해 동안 주기적으로 연구가 계속되었다. 기원전 607년이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점점 커짐에 따라 나는 어쩔수 없이 워치타워 협회가 잘못 이해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Thereafter, for some time after 1975, the evidence was discussed with a few close, research-minded friends. Since none of them could refute the evidence demonstrated by the data I had collected, I decided to develop a systematically composed treatise on the whole question which I determined to send to the headquarters of the Watch Tower Society at Brooklyn, New York. 그 후, 1975년 이후 한동안, 그 증거 자료를 몇몇 가까운 연구 지향적인 형제들과 함께 논의하였다. 그들 중 누구도 내가 수집한 자료로 증명된 증거를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워치타워 협회 본부에 보내기로 생각한 모든 질문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구성된 논문을 작성하기로 결심했다. That treatise was prepared and sent to the Governing Body of Jehovah’s Witnesses in 1977. The present work, which is based on that document, was revised and expanded during 1981 and then published in a first edition in 1983. During the years that have passed since 1983, many new finds and observations relevant to the subject have been made, and the most important of these have been incorporated in the last two editions. The seven lines of evidence against the 607 B.C.E. date presented in the first edition, for example, have now been more than doubled. 그 논문은 1977년에 준비되어 여호와의 증인 통치체에 보내졌다. 이 문서를 바탕으로 한 본 논문은 1981년에 개정 및 확장되었으며 1983년에 초판으로 출판되었다. 1983년 이후 몇 년 동안, 많은 새로운 발견과 관찰이 이루어졌으며,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두 판에 통합되었다. 예를 들어, 첫 판에 제시된 기원전 607년이 잘못되었다는 7줄의 증거자료는 현재 두 배 이상 증가하였다. |
Correspondence with the Watch Tower headquarters
워치타워 본부와의 연락
In 1977 I began to correspond with the Governing Body concerning my research. It soon became very evident that they were unable to refute the evidence produced. In fact, there was not even an attempt made to do so until February 28, 1980. In the meantime, however, I was repeatedly cautioned not to reveal my findings to others. For example, in a letter from the Governing Body dated January 17, 1978, the following warning was given: 1977년, 나는 내 연구 자료에 관하여 통치체와 연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작성한 증거자료를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이 곧 명백해졌다. 사실, 1980년 2월 28일까지 반박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 동안, 나는 내 연구 결과를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말라는 주의만을 거듭 받았다. 예를 들어, 1978년 1월 17일자 통치체가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경고가 주어졌다: However, no matter how strong the argumentation may be in support of those views, they must, for the present, be regarded as your personal viewpoint. It is not something that you should talk about or try to advance among other members of the congregation.7 그러나, 그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논거가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현재로서는, 그것들은 당신의 개인적인 견해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것은 회중의 다른 성원들 사이에서 이야기되거나 앞지를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7 I accepted such advice, as I was given the impression that my spiritual brothers at the Watch Tower headquarters needed time to reexamine the whole subject thoroughly. In their first reply to my treatise, dated August 19, 1977, they had stated: 1977년 8월 19일자 내 논문에 대한 첫 회답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답변이 왔기에, 워치타워 본부에 있는 영적 형제들이 내용 전체를 철저히 재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인상을 받아, 그 조언을 받아들였다.: “We are sorry that the press of work here has not allowed us to give it the attention we would like to up to the present time.” "이곳 부루클린의 출판 작업으로 인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And in the letter of January 17,1978, they wrote: 그리고는 1978년 1월 17일자의 편지에 다시 이렇게 답장이 왔다: We have not had the opportunity of examining this material as yet, as other urgent matters are occupying our attention. However, we will look into this material when we have the opportunity.... You can be assured that your views will be examined by responsible brothers.... In due course we hope to look into your treatise and evaluate what is contained therein. 다른 긴급한 사안들이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이 자료를 검토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되면 이 자료를 조사해 보겠습니다. . . . 책임감 있는 형제들이 당신의 견해를 검토할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 . . 적절한 시기에 귀하의 논문을 살펴보고 그 안에 포함된 내용을 평가하고자 합니다. Judging from these and similar statements, Watch Tower officials at the Brooklyn headquarters seemed prepared to examine the data presented to them honestly and objectively. In a very short time, however, the whole matter took quite a different course. 이런저런 진술을 미루어 생각했을 때, 브루클린 본부의 워치타워 관계자들은 그들에게 제시된 자료를 정직하고 객관적으로 검토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매우 짧은 시간이 지나자, 모든 문제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And further, in a letter dated May 15, 1980, they stated: 나아가, 1980년 5월 15일자의 편지에서는 이렇게 답변이 왔다: We are sure you appreciate that it would not be appropriate for you to begin to state your views and conclusions on chronology that are different than those published by the Society so as to raise serious questions and problems among the brothers.8 우리는 협회가 발표한 것과 다른, 당신이 연구한 연대에 대한 견해와 결론을 진술하는 것은 형제들 사이에 심각한 질문과 문제를 제기할 수 있으므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당신이 인식하리라 확신합니다.8 Interrogation and defamation 심문과 비방 Early in August, 1978, Albert D. Schroeder, a member of the Governing Body, held a meeting in Europe with representatives |
from European Watch Tower branch offices. At that meeting, he told the audience that there was a campaign going on both inside the movement and from outside to have the Society’s 607 B.C.E.– 1914 C.E. chronology overthrown. 9 The Society, however, had no intention of abandoning it, he stated. 1978년 8월 초에 통치체 성원인 앨버트 D 슈뢰더는 유럽에서 유럽 워치타워 지부 대표들과 회의를 가졌다. 그 회의에서 그는 청중들에게 협회의 607 B.C.E.-1914 C.E. 연대를 전복시키기 위한 운동이 밖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협회는 그 연대를 포기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Three weeks later, on September 2, I was summoned to a hearing before two representatives of the Watch Tower Society in Sweden, Rolf Svensson, one of the two district overseers in the country, and Hasse Hulth, a circuit overseer. I was told that they had been commissioned by the Society’s branch office to hold such a hearing because “the brothers” at the Brooklyn headquarters were deeply concerned about my treatise. Once again I was cautioned not to spread the information I had gathered. Rolf Svensson also told me that the Society did not need or want individual Jehovah’s Witnesses to become involved in research of this kind. 그로부터 3주 뒤인 9월 2일, 나는 스웨덴 워치타워 협회 대표 2명, 스웨덴의 두 지역 감독자들 중 한 명인 롤프 스벤슨과 순회 감독자인 하세 헐트 앞에 소환됐다. 브루클린 본사의 '형제들'이 제 논문 내용에 대해 깊은 우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협회 지부에서 그런 청문회를 열도록 의뢰받았다고 들었다. 내가 수집한 정보를 퍼뜨리지 말라는 주의를 다시 한번 받았다. 롤프 스벤슨 씨도 협회가 여호와의 증인 개개인이 이런 종류의 연구에 관여할 필요가 없으며 협회는 그런 연구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내게 말했다. Partly as a result of this meeting, I resigned from my position as an elder in the local congregation of Jehovah’s Witnesses and also from all my other tasks and assignments in the congregation and the circuit. I did this in the form of a lengthy letter, addressed to the local eldership and the circuit overseer, Hasse Hulth, in which I briefly explained the reasons for the position I had taken. Soon it became widely known among my Witness brothers in different parts of Sweden that I had rejected the chronology of the Society. 이 모임의 결과로, 나는 여호와의 증인 회중 장로직에서 물러났고, 회중과 회중에서 다맡은 모든 일과 임무에서도 물러났다. 나는 현지 장로들과 순회 감독자인 하세 헐트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 형태로 이 사실을 알렸는데, 그 자리에서 내가 취했던 입장에 대한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곧 스웨덴의 여러 지역에 있는 증인 형제들 사이에서 내가 협회의 연대를 반박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In the following months, I and others who had questioned the chronology began to be condemned privately as well as from the platforms of Kingdom Halls (congregational meeting places) and at Witness assemblies or conventions. We were publicly characterized in the most negative terms as “rebellious,” “presumptuous”, “false prophets,” “small prophets who have worked out their own little chronology,” and “heretics.” We were called “dangerous elements in the congregations,” “evil slaves,” “blasphemers,” as well as “immoral, lawless ones.” Privately, some of our Witness brothers, including a number of the Watch Tower Society’s traveling representatives, also intimated that we were “demon-possessed,” that we had “flooded the Society with criticism” and that we “should have been disfellowshipped long ago” These are just a few examples of the widespread defamation, one that has gone on ever since, although no names, for obvious legal reasons, have ever been mentioned publicly. 그 후 몇 달 동안 나와 워치타워 협회의 연대기에 의문을 품었던 다른 여러 사람들은 왕국회관(회중의 집회 장소)의 연단과 증인들의 순회대회나 지역대회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비난받기 시작했다. That such obvious slander was not just a local phenomenon, but had the sanction of the Governing Body of Jehovah’s Witnesses, was evident from the fact that similar statements were printed in The Watchtower magazine.10 This description of the situation that developed has not been given in order to criticize Jehovah’s Witnesses as individuals. These people are usually kind and sincere in their belief. The description has rather been given to illustrate how easily an individual may unwittingly fall prey to the irrational, psychological reactions described earlier in this introduction. In a letter to Albert Schroeder, dated December 6, 1978, I described the new turn of events, calling attention to the sad fact that although my treatise had been composed with the greatest thoughtfulness and sent to the Society in all sincerity, I had become the victim of backstabbing, vilification and character assassination: 이처럼 명백한 중상모략이 단순히 내가 사는 부근 회중의 현상이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의 제재를 받았다는 사실은 <파수대>지에서 이와 유사한 진술이 게재된 사실에서 확연히 드러났다.10 이처럼 전개된 상황에 대한 묘사를 보면, 여호와의 증인을 개인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보통 친절하고 그들의 신념에 성실하다. 이 설명은 오히려 서론 앞에서 설명한 비합리적이고 심리적인 반응에 개인이 얼마나 쉽게 희생양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1978년 12월 6일자 알베르트 슈뢰더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새로운 상황의 변화를 묘사하면서, 내 논문이 매우 사려깊게 작성되어 협회에 성실히 전달되었지만, 나는 배반, 비난, 인신공격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슬픈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How tragic, then, to observe how a situation develops, where the attention is drawn away from the question raised— the validity of the 607 B .C.E. date—and directed to the person who raised it, and he—not the question — is regarded as the problem! How is it possible that a situation of this kind develops in our movement? 그리고, 어떤 상황이 왜 이렇게 비난의 결과로 전개되었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즉, 기원전 607년 연대의 타당성으로부터 관심을 끌어 제기된 의문으로부터는 관심이 멀어지고, 그것을 제기한 사람에게로 비난하는 상황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상황이 이러하다면 우리의 워치타워 운동이 어떻게 제대로 전개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The answer to this question, one to which the Society never officially responded, is to be found in the psychological defense mechanism described by Dr. H. Dale Baumbach: 협회가 공식적으로 답변하지 않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데일 바움바흐 박사가 설명한 심리적 방어 메커니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Insecure individuals, when faced with a problem which highlights their insecurity, instinctively respond by attempting to destroy that which addresses their insecurity or to banish it to the recesses of the mind.11 불안정한 개인들은, 그들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본능적으로 그들의 불안을 다루지 않으려고 시도하거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그것을 없애려고 시도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11 Awareness of this defense mechanism, it is hoped, will help those readers who are associated with Jehovah’s Witnesses to examine the evidence presented in this work with due consideration and an open mind. 이러한 방어 메커니즘에 대해 눈치를 챔으로써, 여호와의 증인들과 연합한 이 논문의 독자들이 여기에 제시된 증거를 정당하게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검토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ventually the Watch Tower Society did attempt to refute the evidence against the 607 B.C.E. date, but this was not done until a special representative of the Governing Body in Sweden had written to the Society asking them to provide an answer to the content of the treatise sent to them, telling them that the author was still waiting for a reply. This representative was the coordinator of the Society’s work in Sweden, Bengt Hanson. Hanson had paid me a visit on December 11, 1979, to discuss the situation that had developed. During our discussion, he was brought to realize that it was the evidence I had presented to the Society against the 607 B.C.E. date—not me, my motives or attitude—that was the real issue. If the evidence against the 607 B.C.E. date was valid, this was a problem that should be of equal concern to every Witness in the organization. Under such circumstances, my personal attitude and motives were as irrelevant as those of other Witnesses. As a result of this, early in 1980, Hanson wrote a letter to the Governing Body explaining the situation, telling them that I was still waiting for a reply to the evidence I had brought against their chronology. And so, at long last, nearly three years after my sending them the research material, in a letter dated February 28, 1980, an attempt was made to tackle the question instead of the questioner. The argumentation presented, however, turned out to be largely a repetition of earlier arguments found in various places in the Watch Tower Society’s literature, arguments which had already been demonstrated in the treatise to be unsatisfactory. In a letter dated March 31, 1980, I answered their arguments and added two new lines of evidence against the 607 B.C.E. date. Thus the Society not only failed to defend its position successfully, but the evidence against it also became considerably stronger. No further attempt to deal with the whole matter was made by the Society until the summer of 1981, when a short discussion of it appeared as an “Appendix” to the book “Let Your Kingdom Come” (pages 186–189). This latest discussion added nothing new to the earlier arguments, and to anyone who has carefully studied the subject of ancient chronology, it appears to be no more than a feeble attempt to save an untenable position by concealing facts. This is clearly demonstrated in the last chapter of this present work, titled “Attempts to overcome the evidence.” The contents of the Watch Tower Society’s “Appendix,” however, finally convinced me that the leaders of this organization were clearly not prepared to let facts interfere with traditional fundamental doctrines. 결국 워치타워 협회는, 기원전 607년 연대가 오류라는 증거자료에 대해 반박하려고 시도했으나, 그것은 스웨덴에 있던 통치체의 특별 대표가 협회에 편지를 보내서, 그들에게 논문에 대한 답변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질문자가 아직도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대표는 스웨덴에서 협회의 업무의 조정자 뱅트 한슨씨였다. 한슨은 1979년 12월 11일, 전개된 상황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나를 방문했다. 토론하는 동안, 그가 나를 만나고자 한 것의 진정한 잇슈가 되었던 것은, 나 자신이나 질문의 동기나 태도가 아니라, 내가 기원전 607년 연대에 대하여 내가 협회에 제시한 증거자료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기원전 607년에 대한 증거자료가 타당하다면, 이것은 조직의 모든 증인들에게 동등한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 문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의 개인적인 태도와 동기는 다른 증인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무관했다. 그 결과, 1980년 초에 한슨은 통치체에 편지를 써서 상황을 설명하고, 내가 그들의 연대의 오류를 지적하는 증거자료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연구 자료를 보낸 지 거의 3년이 지난 1980년 2월 28일자 편지에서 질문자인 내게가 아니라 질문 자체에 대해서 태클을 시도해 왔다. 그러나 그들에 의해 제시된 논증은 주로 워치타워 협회 간행물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 이전의 주장의 반복임이 밝혀졌는데, 이 주장들은 이미 나의 논문에서 만족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임이 증명되었던 것이었다. 1980년 3월 31일자 편지에서, 나는 그들의 주장들에 답변했고, 기원전 607년에 반대되는 두 가지 새로운 증거들을 추가했다. 따라서 협회는 기원전 607년의 입장을 방어하는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한 반대의 증거가 더욱 보강되었다. 1981년 여름까지는 이 문제를 다루려고 시도하지 않았으며, 이 문제의 답변에 해당되는 짧은 논의가 서책 <당신의 왕국이 임하소서> (186-189면)의 "부록"에 게재되었다. 이 최근의 논의는 이전의 논증에 새로운 것이 추가되지 않았고, 고대 연대에 관한 주제를 신중하게 연구한 사람이라면, 그것은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방어할 수 없는 입장을 감추려는 나약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증거를 무효화시키려는 노력"이라는 제목으로 본 연구의 마지막 장에서 명확히 밝혀진다. 그러나 워치타워 협회의 '부록'의 내용은 마침내 이 조직의 지도자들은, 밝혀진 사실이 전통적인 근본적 교리를 개선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
6 The Watchtower, April 1, 1986, pp. 30,31.
6 파수대, 1986년 4월 1일호 30, 31면
7 Names of the authors of letters from the Watch Tower Society are never given. Instead,
internal symbols are used. The symbol “GEA” in the upper left corner of this letter shows
that the author was Lloyd Barry, one of the members of the Governing Body.
7 워치타워 협회의 편지는 글쓴이들의 이름은 결코 밝히지 않는다. 대신 내부 기호가 사용된다.
이 편지의 왼쪽 상단에 있는 기호 "GEA"는 편지를 쓴 사람이 통치체 성원인 로이드 배리라는 것을 알려준다.
8. The symbol “EF” shows the writer of this letter to have been Fred Rusk of the Writing Department.
8. 기호 "EF"는 이 편지를 쓴 사람이 집필부의 프레드 러스크였음을 나타낸다.
9 Except for my treatise, which came from inside the movement, Schroeder could have had in mind
two non-Witness publications which attack the Society’s chronology: The Jehovah’s Witnesses and
Prophetic Speculation, by Edmund C. Gross (Nutley, N. 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72),
and 1914 and Christ’s Second Coming by William MacCarty (Washington, D. 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75).
9 내부 고발자격인 나의 논문을 제외하고, 슈뢰더는 협회의 연대기를 공격하는 두 개의 비증인 출판물을
염두에 둘 수 있었을 것이다. 에드먼드 C 그로스의 <여호와의 증인들과 예언에 대한 그들의 억측>
(뉴틀리, N.J.: 1972년 장로교와 개혁 출판사), 그리고 윌리엄 맥카티의
(워싱톤 D.C.: 재고와 전령 출판 협회, 1975년)의 <1914년과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10 Abandoning the 607 B.C.E.–1914 C.E. calculation also implies abandoning those interpretations
founded upon it such as the idea that God’s kingdom was established in 1914 and that Christ’s
“invisible presence” began in that year. Of Jehovah’s Witnesses who cannot embrace such views,
The Watchtower of July 15, 1979, stated on page 13: “Lawless persons have even tried to penetrate
the true Christian congregation, arguing that the ‘promised presence’ of our Lord is not in this day . . .
Persons of this kind are included in Jesus’ warning recorded at Matthew 7:15–23: ‘Be on the watch
for the false prophets that come to you in sheep’s covering, but inside they are ravenous wolves. . . .
In that day I will confess to them: I never knew you! Get away from me, you workers of lawlessness.”
Further, The Watchtower of August 1,1980, page 19, said: “Peter was also speaking of the danger
of being led away’ by some within the Christian congregation who would become ‘ridiculers,’ making
light of the fulfillment of prophecies concerning Christ’s ‘presence’ and adopting a law-defying
attitude toward ‘the faithful and discreet slave,’ the Governing Body of the Christian congregation
and the appointed elders” [Italics mine] See also paragraph 11 on the same page and paragraph 14
on page 20 of the same issue.
10 기원전 607년–기원 1914년 계산을 포기하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왕국이 1914년에 세워졌으며,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임재"가 그 해에 시작되었다는 교리처와 같은 그 연대에 근거하는 해석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여호와의 증인 중에서, 1979년 7월 15일자
파수대 13면에서, "불법의 사람들은 심지어 우리 주의 '약속된 임재'가 이 날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참된 그리스도인 회중에 침투하려고 시도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마태복음 7:15-23에 기록된
'예수의 경고'에 포함되어 있다. "나는 양의 가죽을 쓰고 여러분에게로 오는 거짓 예언자들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은 굶주린 늑대입니다. 그 날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난 너희를 전혀 모른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더 나아가, 파수대 1980년 8월 1일
19면에서는 "베드로도 그리스도인 회중의 일부가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예언의 성취를 조롱하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인 그리스도인 회중의 통치체와 임명된 장로에 대해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그릇 인도될 위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탈릭체는 필자가 친 것임] 또한 같은 면의 11항과
같은 호 20면의 14항을 참조하라.
11 Spectrum, Vol. 11, No.4, 1981, p.63. (This journal was published by the Associations of Adventist
Forums, Box 4330, Takoma Park, Maryland, U.S.A.) The Awake! magazine of November 22, 1984,
similarly explained that such behaviour is a sign of “a closed mind,” saying: “For example, if we are
unable to defend our religious views , we may find ourselves lashing out against those who challenge
our beliefs, not with logical arguments, but with slurs and innuendos . This smacks of prejudice and
of a closed mind.” (Page 4; compare also the Awake! of May 22, 1990, page 12.)
11 스펙트럼, 제2권, No. 4, 1981년, 63면 (이 저널은 미국 메릴랜드주 타코마 파크, 박스 4330, 재림주의
포럼 협회에 의해 출판되었다.) 1984년 11월 22일자 깨어라! 지도 이와 비슷하게 "폐쇄된 마음의 표시"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우리의 종교적인 견해를 옹호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념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논리적인 논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방이나 빈정거리는 투로 공격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편견의 닫힌 마음의 결과이다." (4면; 또한 1990년 5월 22일자 12면의 깨어라!를 비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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