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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려면
글쓰기는 어렵다. 남보다 글을 잘 쓴다는 사람들, 나아가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작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대문장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첫 문장이 쉽게 떠오르지 않으면 연필을 마구 깎아대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한 미국 작가는 글 쓰는 일에 견주면 “사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다. 문학작품의 산고(産苦)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많은 이들에게 학창시절 글짓기 시간은 지루하고 당혹스런 기억으로 남아있기 일쑤다. ‘봄’이니, ‘낙엽’이니, ‘남북통일’이니 하는 천편일률의 주제들은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데, 쥐어짜듯 몇 줄 써놓고 아직 한참 남은 원고지의 공백에 막막해지던 심정 말이다. 그런데 사회로 나와도 곤혹스런 글쓰기와 영영 이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다못해 자기소개서나 업무상 필요한 보고서, 보도자료 한두 장을 쓸 일이라도 생긴다. 자주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글쓰기는 더 까다롭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맞춤법과 문장은 제대로 됐는지, 의도한 바가 잘 담긴 글인지 도무지 자신이 없다. 요즘은 ‘자기표현의 시대’다. 말도 잘해야 하지만, 글로써 자기 의사를 정확히 전달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을 것인가. 전문가들의 조언을 토대로 그 원칙들을 살피고, 분야별 글쓰기 요령도 점검해본다. ▷ 글을 잘 쓰려면 이렇게 *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한다 가장 흔히 나오는 글을 잘 쓰기 위한 방법으로는 ‘많이 읽고 많이 쓰라’는 조언이다. ‘감동적인 글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은 감동적인 글을 쓸 수 없다’는 말도 있다. 시인 김수영은 일기에서 ‘피로서 책을 읽고 무기로서 쌓아두어야 한다’고 적었다. 작가 김원일 씨는 문학을 하게 된 동기의 첫째를 독서체험으로 돌린다. “남의 글을 부지런히 읽다보면 나도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글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자비를 들여 수필집이나 자서전을 출판하기도 하고, 인터넷 사이트에는 수천 명의 사이버 칼럼니스트들이 활동 중이다. 구청 공무원이 소설을 쓴다거나 현직 순경이 자신의 경험담을 인터넷에 연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글쓰기에 대한 선망은 크면서도 그 밑거름이 되어줄 글 읽기에는 여간 소홀한 게 아니다. 한국 성인의 독서량은 한 해 평균 10권을 밑 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면 한번쯤 자신이 얼마만큼 치열하게 책을 읽고 있는지 헤아려볼 일이다. * 좋은 문장을 외운다 민음사 편집부장 장은수 씨는 “글쓰기를 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글을 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문장교육만큼은 좋은 글을 외우는 주입식이 꼭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조선시대 지식 엘리트의 평균수준은 지금보다 높았다. 조선시대 서간문을 보면 고금의 전거를 넘나들며 유려하게 문장을 펼칠 뿐 아니라 논리정연하기까지 하다. 이것은 당대의 교육방식에서 비롯된 결과다. 옛날 선비들이 어릴 때부터 달달 외우다시피 하며 배운 ‘천자문’이나 ‘논어’ ‘맹자’ 등은 사실 시와 논설문의 전형 아닌가. ‘동문선’도 고금의 대표적인 문장들을 모아 70여 가지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주는 참고서다. 결국 선인들은 이런 문장들을 되풀이 익히고 외움으로써 ‘동서고금의 아름다운 문장이 핏속에 흐르게 한’ 것이다.” 모델이 될 만한 좋은 글을 많이 접해서 내면화하는 과정을 통해 독자는 글쓴이의 독창적인 사고와 표현체계는 물론 논리적이고 수사적인 글쓰기의 기본 요령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처음에는 재미있고 쉬운 글에서 시작해 점차 정도를 높여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 말하기와 글쓰기는 다르지 않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1741-1793)가 지은 ‘사람답게 사는 즐거움’에는 선비의 예절을 이르면서 “언어는 소근거려도 안 되고, 지껄여도 안 된다. 또 산만하게 해도 안 되고, 지체해도 안 되며, 길게 끌어도 안 되고, 뚝뚝 끊어지게 해도 안 된다. 뿐만 아니라 힘없이 해도 안 되고, 성급하게 해도 또한 안 된다”고 적고 있다. 본디 이 구절은 말하기에 대한 것이지만, 글쓰기에 대한 원칙으로 바꾸어 되새겨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글을 잘 쓰는 한 방법은 말하듯 쉽게 쓰는 것이다. 자기가 쓴 글을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도 좋은 확인 방법이다. 말하듯 쉽게 쓴 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가 홍명희의 ‘임꺽정’이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얘기를 들려주듯 담담하게 적어내려 간 그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 자연스런 문장의 한 표본으로 남아 있다. * 단문을 쓰는 훈련을 한다 글을 잘 써보겠다며 수식어를 자꾸 집어넣다 보면 글이 길어지게 된다. 이것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글이 길어지면 잘못된 문장이 되기 쉽다. 특히 주어 술어의 호응이 엇갈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간단하다. 한 문장에는 한 가지 생각만 담기로 하는 것이다. 여자의 스커트와 연설은 길이가 짧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것은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렇다면 짧은 글쓰기 연습은 어떻게 할까. 미국에서 통용되는 아주 기술적인 교육법으로 단문을 반복하는 훈련이 있다. 이를테면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는 동작을 3단계로 묘사한다고 하자. 동전을 넣는다-자판기 단추를 누른다-커피를 꺼낸다가 된다. 이것을 4단계, 5단계, 10단계 하는 식으로 계속 늘려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황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묘사하는 습관, 사고훈련이 이뤄진다. * 글쓰기의 특징과 단점을 빨리 찾아내 고친다 문장도 각자 개성이 있는 것이므로 일률적으로 어떤 모범답안만을 따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일반인들은 자기 글의 특징을 빨리 발견해 단점을 반성하고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단락의 첫 부분에 ‘그러나’ ‘그런데’ 등 접속어를 계속 써야 말이 이어지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대표적인 잘못된 습벽인데, 이런 것들은 얼른 찾아내 고쳐야 한다. 또 늘 문장이 길어진다면 짧고 간결하게 구사하는 문장도 간간히 집어넣고, 늘 짧게만 쓴다면 지속성과 유장한 흐름이 없으므로 복문을 쓴다든가 하는 식으로 의식적인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 * 짜임새 있고 자연스러운 글을 쓰도록 노력한다 서울대 권영민교수는 “부분적으로 아무리 표현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잘 쓴 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전체를 훑어보아 짜임새가 있어야 한다”고 ‘좋은 글’에 대한 기준을 밝힌다. 이 짜임새란 단락의 구획이라든가 논의의 흐름 같은 여러 측면에 해당할 수 있다. 글이란 생각을 표현해놓은 하나의 덩어리이므로, 짧은 글이건 긴 글이건 사고의 균형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가 지목하는 것은 얼마나 정확한 어휘를 사용하는가이다. 상황에 맞는 어휘를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다소 전문가적인 접근이며, 사실 일반인들은 막힘없이 자연스럽게 읽힌다면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심오한 사상을 담았더라도 문장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면 잘 쓴 글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래 써온 자기 언어에 대해서는 누구나 어느 정도 직관을 가지고 있다. 좋지 않은 문장은 굳이 잘못된 점을 따져보지 않아도 단박에 부자연스런 느낌이 온다. 부자연스런 느낌이 적은 것이 좋은 문장이다. 글에 변화를 주는 것도 중요하다. 변화가 없다면 밋밋한 문장이 될 것이다. * 글에 개성을 살려라 글맛 좋기로 소문난 작가 이윤기 씨는 모든 글에 적어도 하나의 위트를 집어넣는다. 그의 글을 읽는 이들은 언제 어디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나 기대감을 갖고, 그런 덤을 만날 때마다 싱긋 웃음 짓는다. ‘관촌수필‘에서 보여준 이문구의 해학, 지적인 유머를 선보이는 성석제의 톡톡 튀는 문장도 때론 미소를, 때론 폭소를 자아내며 읽는 흥을 돋운다. 탁월한 문장가로 꼽히는 작가 이문열씨는 논란이 많았던 소설 ‘선택’에서 보듯, 옛스런 의고체(擬古體) 문장을 잘도 구사한다. 방대한 한학 지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 역시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훌륭한 도구임에는 틀림없다. 산문집 ‘풍경과 상처’ ‘자전거 기행’ 등에서 김훈은 현기증 날 정도의 미문으로 읽는 이의 기를 질리게 한다. 이렇듯 글 잘 쓰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 나름의 개성이 글에서 묻어 나온다. 유명 작가 수준의 명문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인도 자신의 글에 자신만의 체취를 담아볼 일이다. 그 방법은 솔직하게, 열심히 쓰는 것이다. 따뜻한 성품이 우러나는 글, 정직한 글, 재치 있는 글, 시원시원한 글, 모두 매력적이고 좋은 글이다. * 전문가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 우리나라는 문장 교열 전문가가 드물다. 몇몇 출판사의 고참 편집자들도 대부분 기획과 편집, 행정업무까지를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편 필자들은 자기 글에 손대는 것을 마치 권위를 침범당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것이 제대로 된 좋은 글, 좋은 책이 나오지 않는 중요한 한 가지 이유가 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아무리 유명한 대학교수라도 책을 내기 전에는 출판사를 통해 철저한 전문 교열과 편집을 거친다. 전문가들은 문제점을 지적하며, 필요하다면 책 전체의 구성을 재조정하기도 한다. 표기법이나 어법상으로 완벽하면서도 저자의 개성을 살리는 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적어도 공식적으로 출간되는 글이라면 제도적으로 전문가의 손을 거칠 필요가 있다. 일반인들도 혼자서 끙끙대지 말고 전문가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 잘잘못을 가리고 고치는 기회를 가진다면 좋을 것이다. 외국 대학에서는 자체적으로 학술문장센터가 있어 글쓰기 실력이 모자란 학생들이 잘못된 점을 교정하고 좋은 글을 쓰는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학들에도 이런 체제의 도입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고도의 지식과 자격을 갖춘, 제대로 된 편집 교열자를 길러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겠지만. ★ 스티븐 킹의 글쓰기 제안 “당신만의 ‘연장상자’를 가져라” 미국의 인기 있는 공포소설 작가 스티븐 킹(52)이 최근 글쓰기에 관한 조언을 담은 자전적인 에세이집 ‘글쓰기에 대하여(On Writing)’를 펴냈다. 킹은 30권이 넘는 베스트셀러를 출간하고, 국내에도 개봉된 ‘캐리’ ‘미저리’ ‘쇼생크 탈출’ 등 나오는 책마다 영화로 제작돼 할리우드의 간판 영화 원작자로도 꼽히는 인물. 그는 1999년에 집필한 이 책에서 작가 지망생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흥미로울만한 제안들을 내놓고 있다. 다음은 그 내용의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 어휘의 사용이 중요하다. 글쓰기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길 원한다면, 자신만의 고유한 연장상자(toolbox)를 구성해야 한다. 그 연장상자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이 되는 것은 어휘다. 그러나 어휘란 많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특히 문장에서 쓸데없는 어휘를 늘어놓는 것은 마치 애완견에게 이브닝드레스를 입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를 써라. 단어를 선택할 때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쓴다는 원칙을 명심해야 한다. 주저하고 숙고하다보면 처음 생각해냈던 것보다 더 못한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 * 문법을 지킨다. 지나치게 문법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쁜 문법은 나쁜 문장을 낳는다. 문법은 일반 교육을 마친 사람이라면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익히게 된다. 서점에 나가 책 한 권만 사서 읽어보면 해결될 일이다. * 수동태 문장과 부사는 가급적 쓰지 않는다. 수동태 문장은 가능하면 피하는 게 좋다. 수동태 문장은 글쓴이의 주저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 단문을 쓴다. 글 쓸 때는 독자를 꼬드겨야 한다. 말솜씨가 좋으면 유혹하기도 쉽듯, 말하기에 가까운 단문 문장을 써라. 그것이 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주어와 술어로만 구성된 단문 구조는 완벽한 문장으로 문법의 기본이면서 매우 유용하다. * 단락을 잘 사용하라. 단락이란 글쓰기의 기본 단위이며, 응집이 시작되는 곳이고, 단어들이 단순한 단어 이상의 의미를 나타내는 무대다. 단락은 한 단어 길이에서 몇 페이지까지 계속되기도 하는 대단히 유연한 기구다. 기본적인 단락구성 - 주제 문장 뒤에 그를 뒷받침하고 기술하는 문장이 뒤따르는 것 - 은 글 쓰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조직화하고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글쓰기를 잘 하려면 단락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 여기에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대단한 작품을 쓴다기보다는 단락 하나를 짓고, 어휘와 문법지식, 기본적인 문체들을 쌓아가며 차근차근 다음 단계로 넘어가다 보면 언어의 집을 지을 수 있게 된다. * 즐겁게 써라. 대부분의 잘못된 글쓰기의 근저에는 두려움이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기쁨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라면, 그러한 공포감은 훨씬 누그러질 것이다. * 완벽한 구성보다는 흥미있는 상황을 설정하라. 구성은 훌륭한 작가들이 맨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수단이지만, 얼간이 작가들은 이것을 맨 먼저 선택한다. * 많이 읽고 많이 써라. 만일 작가가 되고 싶다면, 다른 무엇보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게 중요하다. 내가 아는 한 이 두 가지에는 지름길이 없다. 나 역시 독서 속도가 느린 편이지만 1년에 70∼80여권의 책을 읽는다. 방망이 깎는 노인 윤오영 벌써 사십여 년 전이다. 내가 세간난 지 얼마 안 돼서 의정부에 내려가 살 때다. 서울 왔다 가는 길에 청량리역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에서 일단 전차(電車)를 내려야 했다. 동대문 맞은쪽 길 가에 앉아서 방망이를 깎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 방망이를 한 벌 사가지고 가려고 깎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방망이 하나 가지고 값을 깎으려오?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더 깎지도 못하고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못 들은 체한다. 차 시간이 바쁘니 빨리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체 대꾸가 없다. 점점 차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다. 더 깎지 아니해도 좋으니 그만 달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하면서 오히려 야단이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단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려. 차 시간이 없다니까....." 노인은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 하는 퉁명스런 대답이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 시간은 어차피 늦은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諦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 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으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투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 피우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 노인은 또 깎기 시작한다. 저러다가는 방망이는 다 깎여 없어질 것만 같았다. 또, 얼마 후에 방망이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되어 있던 방망이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本位)가 아니고 자기 본위다. 불친절(不親切)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동대문의 추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 때,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이는, 그 바라보고 있는 옆 모습, 그리고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심도 조금은 덜해진 셈이다. 집에 와서 방망이를 내놨더니, 아내는 예쁘게 깎았다고 야단이다. 집에 있는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면, 배가 너무 부르면 다듬이질할 때 옷감이 잘 치이고, 같은 무게라도 힘이 들며, 배가 너무 안 부르면 다듬잇살이 펴지지 않고 손이 헤먹기가 쉽다는 것이고,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처럼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죽기(竹器)는, 대쪽이 떨어지면 쪽을 대고 물수건으로 겉을 씻고 뜨거운 인두로 곧 다리면 다시 붙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사이 죽기는, 대쪽이 한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죽기에 대를 붙일 때, 질 좋은 부레를 잘 녹여서 흠뻑 칠한 뒤에 비로소 붙인다. 이것을 "소라 붙인다."고 한다. 약재(藥材)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숙지황(熟地黃)을 사면 보통의 것은 얼마, 그보다 나은 것은 얼마의 값으로 구별했고, 구증구포(九蒸九曝)한 것은 3배 이상 비쌌다. 구증 구포란, 찌고 말리기를 아홉 번 한 것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다섯 번을 쪘는지 열 번을 쪘는지 알 수가 없다.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남이 보지도 않는데 아홉 번씩이나 찔 리도 없고, 또 말만 믿고 3배나 값을 더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生計)는 생계지만, 물건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훌륭한 물건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心血)을 기울여 공예(工藝) 미술품을 만들어 냈다. 이 방망이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청년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물건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상경(上京)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쪽 동대문의 추녀를 바라다보았다. 푸른 창공으로 날아갈 듯한 추녀 끝으로 흰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방망이를 깎다가 유연히 추녀 끝의 구름을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 안에 들어갔더니 며느리가 북어를 뜯고 있었다. 전에 더덕북어를 방망이로 쿵쿵 두들겨서 먹던 생각이 났다. 방망이를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사이는 다듬질하는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애수(哀愁)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사십여 년 전, 방망이 깎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