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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1월 29일, 운명적인 결정이 내려졌다. 2만 6천㎢의 면적의 팔레스티나를 유대인 국가, 아랍인 국가로 분할하고 3대 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유엔의 국제 관리 도시로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이 중에 유대인 국가의 면적은 과반이 넘는 1만 4천㎢ 였고, 지중해안과 갈릴리 등 좋은 땅들이 많았다. 에일라트 Eilat 항도 포함되어 홍해로의 출구도 확보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유대인 국가로 지정된 지역의 인구는 유대인 49만 8천 명, 아랍인 49만 7천으로 거의 동수였지만, 아랍인 국가 지역은 아랍인 75만 5천 명에 비해 유대인 1만 명으로 절대 열세였다. 따라서 합쳐보면 인구는 아랍인이 130만에 가까웠지만, 유대인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으니, 절대적으로 유대인에게 유리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유대인 이민은 무서운 속도로 늘고 있었고, 앞서 이야기 했듯이 경제력과 조직력은 유대인 쪽이 훨씬 강했다. 이유야 어쨌든 아랍인들 입장에서는 2천 년 동안 살아온 조상의 땅을 ‘합법적으로 강탈’당하는 순간임은 분명했다.
드디어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게 된 유대인들은 환호했지만 아랍 인들은 망연자실했다. 사실 이 때까지 팔레스티나 아랍인들은 시위와 항의로 때로는 폭력으로 유대인들의 이민을 막기는 했지만 적어도 추축국에 가담한 후세이니 Fuseini 같은 인물에 대해서는 별다른 협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유엔이 이런 분할안을 발표하자 격렬하게 반발했다. 물론 지금까지의 통치자였던 영국은 아랍 인 들의 생존권에 대해 어떤 보장도 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의 아랍 인들은 11월 29일을 ‘상복의 날’로 정하고 팔레스타인 전역에 걸쳐 반 유대 봉기를 일으켰다. 11월 30일 유대인들이 탄 버스가 공격당해 7명이 사망하면서 팔레스티나는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예루살렘에서는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상대방의 상점을 공격했다. 서로 간에 대한 공격은 점점 격렬해졌고 복수는 복수를 낳았다.
투석, 총격, 방화, 칼침이 일상화 되었는데, 영국총독부의 집계에 따르면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에서만 분할결의안 발표 후 6주 동안 아랍인 1069명, 유대인 769명, 영국인123명이 죽었다고 한다.12월 7일, 이집트 Egypt 와 시리아, 레바논
Lebanon, 요르단 Jordan, 이라크 Iraq 등 신생 아랍 국가들은 유엔 결의안을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성전(Jihad)를 선포하였다. 유대인들에게는 당시 정규군이 없었고, 아랍 진영도 본격적으로 정규군을 동원 한 것이 아니기에 이를 팔레스타인 내전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많다. 어쨌든 이제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벤 구리온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기를 입수함 과 동시에 기술자들을 미국과 유럽으로 보내 기계들을 가져와 무기의 자체 제작을 시작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립을 하겠다는 이런 자세가 그들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리라.
여기서 당시 9할이 농민인 팔레스타인들은 거의 조직력이 없었다. 그 나마 전투력과 조직력을 갖춘 후세이니 그룹은 영국에 의해 추방당해 결정적인 순간에 그 자리에 없었다. 약간 늦었지만 레바논에 자리 잡은 후세이니가 아랍 구세군이라는 의용병 조직을 결성했는데 두 조카가 지휘를 맡았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예루살렘이었다. 1948년 3월 24일,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유대인 수송부대를 습격해 궤멸시키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북부 갈릴리에는 오스만 제국과 이라크 군에서 장교를 지낸 카우지 Kauji 등 일부 야심가들이 조직한 아랍 해방의용군이 아랍 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조직되었다. 아랍 구세군에는 시리아 출신이 더 많았다. 두 조직에 모두 ‘아랍’이라는 고유명사가 들어가고 팔레스타인이라는 고유명사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전 까지 그들은 아랍인일 뿐 팔레스타인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은 희박했다는 증거이다. 기본적으로는 주위 아랍 국가들이 유대인들을 몰아내 주기만을 바랬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저항은 조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약간 명의 나치 잔당이 아랍 측에 가세하여 지휘를 맡기도 했지만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또한 참전하고자 하는 아랍 국가들의 일차적인 목적은 이스라엘의 타도와 팔레스타인 국가의 건설이 아니라 아랍 몫인 1만 2천㎢ 의 땅을 더 많이 차지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자신들이 앞장서 싸우다가 가장 많은 피해를 입는 다는 것은 기피해야 할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랍연합군의 손발이 잘 맞을 리가 없었다. 아랍연합군 중 가장 정예부대를 가지고 있는 요르단 국왕 압둘라 Abdullah 는 비밀리에 훗날 이스라엘 총리에 오르는 골다 메이르 Golda Meir 와 모셰 다얀을 만났다. 사실 그는 다른 아랍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유대인들의 저력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인물이기도 했다. 유대인 쪽에서는 요르단의 미 참전을 조건으로 요르단으로 피난 올 주민들에 대한 지원금을 지급하고, 하이파 항을 요르단이 자유롭게 사용한다는 조건에 합의하려고 했지만 결국 결렬되었다. 나중 이야기지만 이 때문에 압둘라 국왕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를 샀고 1951년 7월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 사이 유대인들은 자기 구역뿐 아니라 유엔에서 정한 아랍인 지역에서도 아랍인들을 무자비하게 강제 추방하였고, 1948년 3월 텔 아비브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들이 실행한 추방 작전은 모두 13개 인데, 그 중 8개가 아랍인 지역에서 행해졌다. 많은 어린이들이 요르단 국경까지 걸어가다가 쓰려져 죽었다. 이를 지휘했던 라빈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내린 명령이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후방에 적대 세력을 남겨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책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자 4차 중동전 골란고원 전선에서 용명을 떨치는 아비가도르 카할라니 Avigdor Kahalani 의 아버지 모셰도 라빈을 따라 그 ‘작전’을 수행한 바 있었다. 참고로 카할라니 가문은 예멘 Yemen 출신이다.
추방 정도면 그나마 다행이었고 팔마흐가 1947년 12월 18일, 수십 명의 아랍 여성과 어린이 등을 살해한 키사스 Khisas 학살과 1948년 4월 9일, 이르군이 데이르 야신 Deir Yassin 에서 주민 250여 명을 학살한 사건까지 일어났다. 공포를 전염시켜 팔레스타인 인들을 몰아내려 했던 것인데, 강간사건과 귀중품 약탈도 적지 않았다. 이런 수법은 나치와 소련이 불과 몇 년 전에 써먹었고 자신들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실은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를 들게 만든다. 어쨌든 그들의 수법은 먹혀들어가 팔레스타인인들은 조상대대로 살던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지금까지 이어지는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물론 아랍 쪽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 대학살이 있은 지 불과 나흘 후인 4월 13일, 예루살렘의 스코푸스 Scopus 산에 있는 하사다 Hassadah 병원으로 향하는 버스 10대에 탄 의료진과 수송요원을 공격하여, 의사와 간호사 등 77명이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니 아랍 국가들에 살던 유대인들 역시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아 대거 팔레스타인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모로코 Morocco 에 살던 25만 명을 비롯하여, 알제리 Algeria, 튀니지 Tunisia, 리비아 Libya, 레바논, 이집트, 이라크, 예멘, 시리아, 레바논 등 57만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몇 년 사이에 이주하였는데, 사상자가 28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물론 한 명이라도 더 동족이 필요한 팔레스타인 유대인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엄청난 난리가 일어났음에도 아직은 ‘법적 책임자’인 영국은 양 쪽의 군사행동을 묵인 아니 수수방관 했다. 이것이 ‘백인의 책임’을 내세우며 전 세계의 4분 1을 식민지로 만들었던 영국인들의 민낯인 것이다.
* 2015년 10월 20일,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는 1941년 히틀러와 만난 후세이니가 ‘유대인들을 추방해봤자 다시 올 것’이라며, ‘불태워라(Burn them)’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히틀러가 홀로코스트를 결정했지만 이를 부추기고 영감을 준 자는 후세이니 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스라엘 국내에서도 큰 반발을 가져왔다.
* 2011년 10월 29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 아흐무드 압바스 Mahmoud Abbas는 아랍과 팔레스타인이 1947년 분할안을 거부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인정했다. 물론 이스라엘이 이를 빌미로 64년 동안이나 팔레스타인을 괴롭히고 공격했다는 비난을 빼놓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