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의 연호 : 개황
- 문제의 개혁 = 개황의 치
문제는 둘째 아들 양광의 정변으로 64로 생을 마감
* 수양제
양광이 수나라의 두번째 황제 양제가 되다
- 당시 북쪽에 유목민족 돌궐(수나라 건국 무렵 방대한 유목국가로 발전- 이후 서돌궐, 동돌궐로 분열)
- 양제가 동돌궐을 지배하에 두고 서쪽지역과 동남아시아에 진출 후 고구려를 다음목표로 설정
- 문제 시절부터 고구려와 갈등(고구려에 조공 요청했으나 오히려 고구려가 먼저 수나라 영토 요서지방 공격)
- 문제가 30만대군으로 맞서지만 고구려군에 몰살
- 612년 양제가 100만 이상의 군사로 고구려 원정 : 을지문덕 계략에 대패(살수대첩)
- 양제의 3차 구구려 원정 : 고구려 역시 막아내느라 피해가 커 화해요청하여 화해
- 고구려 원정은 끝났으나 재정 파탄, 전국각지에서 농민반란
- 황허강유역은 포기, 곡창지대인 양쯔강 유역을 지키고자 양제가 강도로 피난
- 양제의 이종사촌 이연이 반란에 가담, 장안을 점령
- 양제의 호위병들도 반란을 일으켜 결국 양제가 죽다
* 당 건국
양제의 사망소식에 이연이 장안을 수도로 삼아 618년 당나라 건국
- 이연의 세사들 중 둘째 이세민이 가장 뛰어남
- 628년 이세민의 활약으로 중국 통일
- 이세민의 활약에도 불구, 첫째인 이건성이 황태자가 되자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황태자 암살
이연이 이세민에게 제위를 물려주어 2대황제 태종이 되다(다스린 23년간을 정관의 치라 한다)
- 동돌궐과 서북지방 북방민족 복속
- 수의 율령체제 정비, 계승
- 고종때 서돌궐, 백제, 고구려 등을 멸망시키고 영토를 더욱 확장(정복지에 통치기관 도호부 설치-어느정도 자치 인정)
- 번영이 현종때까지 이어짐
당나라의 관제, 사회
- 당의 관제 : 중앙에 3성6부가 황제의 명을 비롯, 각종 정책 처리, 지방의 주, 현에 관리 파견
- 균전제, 조용조, 부병제 등을 통해 자영농 육성 재정과 군사력을 강화(동아시아 각국에 영향)
- 당은 귀족중심 사회(과거, 음서를 통해 관직 독점, 특권)- 과거제의 최종 선발 과정에서 문벌이 중시되다
- 2년 3모작으로 농업생산량 크게 증가
- 상업 발달, 일종의 약속어음 비전 사용. 상인조합 행 발생
- 아라비아 페르시아가 비단길을 통해 당과 교역
- 당시 무역선을 시박이라 부르다. 장부가 무역을 관리하기 위해 이를 본따 시박사 설치
- 수도 장안에 각국 상인 유학생, 예능이이 몰려들다
- 사회, 경제적 발전이 문화에도 반영(귀족의 니즈대로 이백과, 두보 등 시인이 유명
- 과거제 도입, 유학발달
- 훈고학 집대성한 공영달의 경전 주석 오경정의는(과거험의 수험소로 쓰였으나 사상희 획일화 초래하는 단점
당은 남북조 이래 발전한 호한융합 융합의 문화 시대
- 서역의 문화를 수용, 개방적, 국제적 문화 발전
- 불교, 도교 더욱 발전,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경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외래 종교도 유행(현장, 의정과 같은 승려가 인도 순례,
불교 경전을 들여오다)
- 주변 나라들과 정치, 군사면 긴밀한 유대관계 : 6도호부설치(몽골, 서역, 베트남 지배)
- 신라, 발해, 일본등은 당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다(이과정에서 유교, 불교, 율령과 한자 등이 동아시아
각국에 정착
- 한나라 이후 국가의 통치원리로 자리잡은 유교는 주병 여러나라에 전파되어 동아시아 지역의 정치이념, 사회규범으로 자리잡다
(유교는 정치적으로 황제와 국왕의 권한을 뒷받침, 사회적으로 사회질서의 형성과 유지에 기여)
- 불교는 위진남북조 이후 경전의 번역이 활발해지며 점차 중국화가 이루어짐
(동아시아 지역에 전파, 중교적 기반이 됨, 각국에서 불상과 석굴 사원 건축 활발)
- 당대 확립된 율령체제가 주변국에 전파되었고, 일찍부터 전파된 한자가 동아시아 지역의 공용문자로 사용되기 시작
* 당의 몰락
7세기에 돌궐, 토번, 8세기에 위구르가 당을 위협 : 이들과의 대립으로 당의 통치체제가 서서히 흐트러져 가다
(장원이 늘어나 균전제가 무너져가고, 모병제가 도입)
- 돌궐출신 안록산과 사사명이 출세를 위해 당나라 군에 들어감
(현종과 양귀비의 총애를 받아 20만대군을 지휘하는 군벌로 성장, 지방을 다스리던 절도사는 현지에서 자신의 병사 모집 허용-
모병제를 통해 봉급을 받는 조건의 병력)
- 절도사와 몰락농민, 이민족으로 이루어진 병사 사이에 주종관계 형성
-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절도사는 독립왕국을 다스리는 것과 마찬가지
- 안록산과 사사명이 15만 병력을 동원, 난을 일으킴(안사의 난, 755~763. 장안성을 점령, 황제가 되지만, 당나라와 위구르 연합군에
뺴앗고, 각자의 아들들에 피살되며 난은 실패- 당 내부가 아닌 위구르, 내분의 힘으로 진압되었기때문에 정부의 힘은 급격히 약화)
- 지방 절도사들은 독자적 지배력 강화
- 안사의 난 이후 균전제가 무너져가고 장원제가 확산되며 빈부격차가 벌어지기 시작
(개인이 확장시킨 토지를 인정하기 시작, 토지 크기에 따라 봄 가을 두번 세금걷는 양세법 시행)
- 절도사의 힘이 강해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중앙정부군 증강시키며 많은 세금 징수
(이로인해 소금의 가격이 30배까지 치솟자 소금밀매업자 등장)
- 밀매업자중 황소가 875년 난을 일으킴(황소의 난)
- 당나라 정부가 절도사들에 난의 진압을 명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황소가 장안을 점령, 황제로 등극
- 황소의 부하였던 주전충이 황소를 배신, 당나라에 투항해 난이 진압(당은 더이상 나라를 이끌 힘 부족)
- 당은 이후 30년 유지되었으나 황소의 죽음이후 세력을 불린 주전충에게 멸망(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