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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집(白水集) 양응수(楊應秀)생년1700년(숙종 26)몰년1767년(영조 43)자계달(季達)호백수(白水)본관남원(南原)특기사항권집(權), 이재(李縡)의 문인.
白水先生文集卷之十五 / 行狀 / 寒溪孫公行狀 *孫弘祿 1537 1600 密陽 景安 寒溪
公諱弘祿。字景安。姓孫氏。號寒溪。居泰仁之古縣內三里村。孫氏系出密城。始祖諱兢訓密城君。七世官冕嬋爀。至高祖諱順祖谷城縣監。曾祖諱比長。中世祖朝文科。又中重試。官至承旨。文章名世。祖諱世基參奉。考諱淑老翰林學士號淑齋。妣全州崔氏。以嘉靖十六年丁酉正月壬申日寅時生公。公生而聰慧異凡兒。及知讀書。一覽輒記。一齋李先生。嘗見公於山寺。甚奇之。遂敎以小學,孝經等書。公時年十二。已知有爲己之學。萬曆壬辰。倭寇充斥。至錦山郡。不日將逼全州。慶基殿太祖眞像及實錄。將移奉于井邑縣內藏山中。觀察使擇道內有才行智慮者二人。同殿司守衛之。於是公與同縣安公義應其選。相與揮涕慷慨。以忠義自任。分日遞番。竭誠守直。自壬辰六月。至癸巳七月。終始如一日。俄有朝命。移奉于行宮。公與安公。又自備馬贏粮從之。間關遠道。勤苦萬端。湖西檢察使李公山甫。以兩公忠勞論啓。其八月。特授公宣務郞司圃署別提。安公宣敎郞活人署別提。其後乙未二月。又除公宣敎郞歸厚署別提。二公之到任也。聯名上中興六策。而文缺不盡錄。其末段有曰。列邑所捧種租。非徒蕩盡於軍糧。或不足或腐傷。故無以付種。田多陳荒。請使納粟之人。勿論五穀。以可作種者。依式規計納。以補明春種子。又曰。民者。邦之本也。今七道之民。幾盡流亡。惟有全羅一道。僅免蕩殘。而國用軍需及饋餉天兵之資。皆出於此道。故民不堪其苦。而士族之家。亦將流離。別爲完護。以固邦本。實爲當務之急云。以此見之。其上段四五條。亦皆井井可觀。而今不可考矣。癸巳九月。又與安公爲義穀都有司。移檄遠近。募取米三百石。木花四百斤。綿紬各一疋。紙二十束。又自出米二石。木花百斤。分致于義州行臺及義兵將高敬命,崔慶會,閔汝雲三處。時湖南義穀。亦自他官輸致義州。而未有先於二公者。又自備軍器若干。選勇健奴八人。分遣于三處義兵將。崔義兵報巡使軍功狀。有曰。泰仁幼學安義孫弘祿。自以儒生不能赴戰。代送壯奴,太福,孟斤。其爲國誠心。極爲可嘉。閔義兵狀報。亦曰泰仁幼學安義孫弘祿所遣奴秋同。射殺賊若干云。公又以天兵衣絮別有司。前後募納木花凡六百五十斤。方其募納糧絮也。有詩三篇。慷慨激切。其詩曰。聖繼神承二百年。那知金闕鎖腥烟。當時害物跳梁罪。直斬其頭祭彼天。孔曰成仁孟曰義。臣民當死爲吾君。臨危財寶何須惜。恢復如今在義軍。美人何處彼西方。遙望天涯淚自滂。一倡義兵能雪恥。願君毋惜數升粮。眞殿扈從時。亦有一律。其兩聯曰。怏怏眞殿棲岐下。咄咄前旒㝢漆濱。義士荷戈忘雨雪。腐儒嘗膽守昏晨。其忠義奮發。出自情性者如此。公自承恩除。跼蹐不安。亂已退歸田里。嘗語人曰。國家有急。臣子奔問。乃是職分內事。安敢自以爲功。至萬曆二十八年庚子九月二十五日。考終于正寢。享年六十有四。葬于古縣面釜谷巳向之原。公生於詩禮之家。自少專意讀書。又得一齋以爲依歸。得安公以資觀善。學有淵源。行著鄕黨。問學之暇。兼通醫方。淑齋公患風痺之證。八年彌留。其所進藥。皆公所自命也。又設一卓于室東。每夜焚香祝天。竟得差復。其臨亂效忠。盖有所本。所謂求忠臣。必於孝子之門者。不其信然。待人接物。和氣藹如。陳說古今成敗。使聽者。亹亹忘倦。處兄弟姊妹之間。懽忻愉悅。出於至情。以及親戚故舊。曲有恩意。莫不得其歡心焉。公倫行旣篤。抱負亦大。雖遭時艱虞。略效忠貞。而僅受六品之職。旋又退屛。以不克展盡其蘊。可勝惜哉。雖然。公論不泯於百年。詢謀幸同於一路。腏享之儀。方與安公而幷擧。爲善之報。固可驗矣。公之配靈光丁氏。澹之女。育一男一女。男曰盛都摠都事。女適郡守權克正。都事娶晉州蘇氏。有一男曰虎臣都摠經歷。經歷娶慶州李氏。月川君廷馣之孫女。有二男。曰實。曰定。實海南縣監。縣監之男曰敬述副司果。娶韓山李氏。縣監穫女。余嘗讀宣廟寶鑑。見湖南人士。輸粟義州之事。竊自感焉。欲識其人姓名而不可考。則徒欷然歎想而已。今公之后孫大益。以公遺蹟及日記來示余。屬以狀文。余跪而讀之。乃知壬辰義租之倡於本道者。卽公與安公。而御容守衛及陪扈之功。又卓卓如彼。中興六策。雖不見其全文。而卽其一二條。亦可想其所抱之不草草也。仍復溯其淵源。驗之家庭。得其平生大畧。則余於此實不勝其激聳增氣。而又竊以得識其所欲識於寶鑑中者爲幸。不敢以不文而辭。謹書其所可考者如此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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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유고(頤齋遺藁) 황윤석(黃胤錫)생년1729년(영조 5)몰년1791년(정조 15)자영수(永叟)호이재(頤齋), 서명산인(西溟散人), 운포주인(雲浦主人), 산뢰(山雷), 월송외사(越松外史)본관평해(平海)특기사항김원행(金元行)의 문인.
頤齋遺藁卷之十七 / 行狀 / 有明朝鮮國故宣敎郞活人署別提勿齋安公行狀 *安義 1529 1596 耽津 宜叔 勿齋
本貫全羅道康津縣古耽津。
高祖諱起。佐翼原從功臣奉列大夫守定州牧使。贈輔國崇祿大夫禮曹判書。妣貞敬夫人南陽房氏。
曾祖諱季毅。佐翼原從功臣奉訓郞北部令。妣恭人靈光丁氏。
祖諱綰參奉。
考諱良彦。通訓大夫行司宰監主簿。妣宜人全義李氏。
公諱義字宜叔。安氏上祖譜佚焉。中世有諱祐。仕高麗恭愍王朝。由軍簿判書封鼇城君。遷平章政事。與金得培李芳實討紅巾有大勳。捷奏福州行在。爲金鏞所惎被𥚁。語在本傳。本朝祀麗哲王于崇義殿。用名臣十六人配之。是其一也。生諱顯資憲大夫兵曹判書。生諱允基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生諱士宗資憲大夫兵曹判書。贈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寔公五代祖。定州公當泰仁合設。來知縣事。刱鄕校客舘。輿地勝覽詳焉。其弟止以文章受知英陵。歷集賢殿藝文舘大提學世子左副賓客。後錄佐翼原從功臣。卒官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兼領集賢殿事知春秋舘成均舘事。謚文靖號臯隱。著于國史。北部公歷樂學都監判官。二兄孟毅朝散大夫行高敞縣監。仲毅文科中直大夫行珍山郡守。仍累世衣冠。家金堤郡。後徙泰仁之栢川。李氏亦東方大姓也。嘉靖己丑十一月初六日丑時公生。穎悟有異質。數歲考妣繼沒。旣長慨肰以失敎爲至痛。自志于學。一齋李先生授徒鄕里。公游其門。講服不少懈。先生亟許之。同業諸賢又莫之或先者。公固篤孝敦睦。內行備矣。猶念念警省。作八勿箴。遂號勿齋。其目曰勿妄言勿㬥怒勿𨠮酒勿荒色勿惰祀勿䦧墻勿疎族勿爲姘。總之爲後敍一篇。以示子孫。大略收心持身。自修是先。而不以淺近或忽。其文質愨。不事華藻。有得諸李先生者矣。又作八感詠。其目曰爲國分憂。歎命奇薄。恨竆不閔。安貧樂道。獨行不愧。餘不傳。公於世不遇甚矣。而任之而已。獨拳拳國事。發之詠歎。葢宣廟盛際。朝野淸平。文武恬嬉。鮮以南北釁爲大可憂者。公之所存。卽是可知已。萬曆壬辰四月。倭賊猝至。大駕西狩。六月公與同縣孫公弘祿大募義兵及糓。卽同門友也。鄕人前郡守金公福億及弟前主簿慶億,思齋金公後進及子知白,月峰金公大立,李先生子守一,鄭思謙,宋昌,官奴莫終。一時響合。於是列邑粟帛。咄嗟輻輳。上自行在。下逮高公敬命,崔公慶會,閔公汝雲三大將。長弟取給焉。會賊入錦山郡。窺全州府。府中慶基殿太祖御容。史庫所藏祖宗實錄。廩廩有朝夕之虞。本道觀察使李洸,都事崔鐵堅,參禮察訪尹趌,參奉吳希吉,柳訒等僉謀。移安于井邑縣內藏山。以避賊氛。患守衛疎薄。擇儒士有學行知慮者二人。竝參奉周旋。公毅肰不顧身家。又與孫公應募赴之。實錄首藏龍窟巖。七月御容以次偕安。實錄旋移隱峰庵。再相尤險絶處。移飛來庵。九月自龍窟移御容。復偕實錄安焉。十一月佐郞象村申公欽來審御容。癸巳五月奉敎趙公存性來攷宣靖二陵誌文。公必奔走先後。扃鐍開閉。雖勞亦不辭。當是時晝宵山谷。殆無寧暇。而一心彌虔。直宿無失儀。如吳,柳以至代者李道吉,仇廷呂四人。所共番遞。而課其服勤之功。公若孫公爲最焉。六月賊再猘陷晉州。朝廷憂之。命移奉御容實錄赴行在。七月井邑縣監兪濯差陪行差使。入山中奉行。卽將二公事行報知新觀察使李公廷馣。公隨至本縣。旋雇馬贏糧。馳及于益山郡。孫公亦來扈從。經龍安,林川,扶餘,定山地。間路抵溫陽郡。吏曹判書都檢察使鳴谷李公山甫適涖三南。來謁啓聞。以爲今此陪行。實出蒼黃。全羅犯境之說。旣是虛傳。匈賊退歸釜山。姑令奉安近邑。徐觀其勢。陪還舊殿。情義似便。諸議皆無異同。因留奉牙山縣官舍。又言安義孫弘祿素有家行。自變初陪侍眞殿。恪謹終始。今又自備糧馬。扈行千里。忠義可嘉。請褒奬賞職。二公又離牙山。取路水原,南陽,仁川,富平,江華諸邑。八月達江西縣則行在所也。乃聯名上疏。有曰當聖明之世。遇氣數之變。曷勝痛哉。肰而特蒙皇恩。重恢舊都。宗社之慶。臣民之福。爲如何哉。是實主上殿下盡心事大。天必感應者也。遂陳中興六策。要之固邦本爲急。而言甚剴切。上嘉之。特允李公言。公授活人署別提。孫公授司圃署別提。居亡幾俱南歸。乙未孫公別加一資。公亦或者遷轉。而不幸以丙申九月十三日卒。壽六十八。葬同縣東村水落洞坐亥之原。後九年乙巳。命策扈聖宣武二勳。貴賤存沒。恩賚悉覃。而世未有爲公言者。豈非天哉。公配宜人幸州殷氏。世彥女。文科左獻納贈判書汝霖六代孫。與公同穴。育三男。光宇,光宙軍資監奉事,光宅。一女適主簿贈判書權恕。光宇娶裕陵參奉李仁孝女。育一男偟。武科慶尙右道兵馬虞候。一女適奉事李綱。繼娶高應龍女無育。光宙娶成有光女。育一男俊。一女適李孟賢。光宅無後。權恕二男。克平都事。克正郡守贈判書。一女適萬戶洪佾。俊娶主簿申天紀女。忠臣郡守贈判書武壯公浩孫。育一男振榮。偟所後也。今公八代孫處命嘗出公遺藁若干及壬癸記事。幷其妹婿權炅甫所爲家狀。屬胤錫增定。噫。胤錫陋甚生且晩。矧玆兵燹之餘。文獻缺齾。所謂六策亦存第六卹百姓一條。公之後承才一綫比耳。其德善得有一二之可徵者。尙幸矣哉。思齋父子曁月峰三公。又胤錫外先祖也。用是于公事頗悉。不惟旁採縣志。抑竊有所感者。公故名家也。重以師友淵源。焯不可誣。非一時慷慨就義之倫所可擬。使其大有施爲。將𠅩得以禦之。顧竆而在下。不克㬥著。斯已戚矣。姑擧壬辰一節言之。廟貌蒙塵。國史爲灰。父老談者。至今涕涔淫欲下。而公以草莽疎遠。結義同志。協力單誠。用致天日之繪無恙。竹素之紀有傳。則後之摸奉於原廟。印藏於名山者。不以公爲功可乎。若其號召而扶義兵。跋涉而奔行在。外則勢成乎保障。內則論及乎根本。公葢不愧其名。而在古人猶烈者歟。或乃切切肰異議於戰亡諸公則是淺之爲公也。於公何有。記洪公汝栗負慶州集慶殿御容。避賊淸凉山。獲免于災。其視公世相竝跡相近也。公又有加進焉。肰洪公宰相子。席蔭超階。至有錄勳之命。畢竟加贈亞卿。襲封唐昌。而公則廑廑六品職耳。沒齒遐僻。俎豆且闕。庸不爲之大戚哉。雖肰公所樹立。本之問學。自外至者宜無足重輕。百世之下。第知爲李先生門人則斯亦足以有慰矣。謹叙次如右。以俟立言大君子財擇焉。崇禎三乙酉四月日。箕城黃胤錫狀。安公初諱忠烈。安君處命追後來言。故追錄于此云。○狀中八勿箴姘字。按康煕字典女部八畫註。廣韻普耕切。集韻披耕切。竝音怦。說文除也。倉頡篇男女私合曰姘。漢律與妻婢姦曰姘。又齋與女交。罰金四兩曰姘。又集韻灣丁切。音甹義同。愚謂若作姘則嬪。古文入六畫矣。○又按洪公事實。據澤堂集。而宣廟寶鑑乃云洪公時爲慶基殿參奉。此亦澤堂所修也。芝峰嘗恨宣廟時政失於掌故。于是亦可見矣。近李孟休撰春官志。亦止承用寶鑑耳。可勝歎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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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호집(渼湖集) 김원행(金元行)생년1702년(숙종 28)몰년1772년(영조 48)자백춘(伯春)호미호(渼湖), 운루(雲樓)본관안동(安東)시호문경(文敬)특기사항이재(李縡)의 문인
渼湖集卷之十三 / 題跋 / 書孫安二公事蹟後
湖南有孫君大益,安君處命者。以其先世事蹟來謁余曰。大益之祖寒溪公弘祿。處命之祖勿齋公義。皆以下土布衣。當壬辰倭難。奮不顧身。慨然應募。奉聖祖御容于井邑之深山中。日夜守護。勤苦萬端。首尾如一日者歲餘矣。及以朝命移奉于行在。俄復權安中路縣舍。則兩公皆從之。至是又間關自致于行在。聯名上中興六策。被上嘉奬。時鳴谷李尙書山甫列兩公行能忠義。並命授六品職。旣退。又相與傳檄遠近。聚米三百石。分輸行宮及諸義將所在。又以家丁之壯勇者。送隷于義軍。其忠義之心。始終彌勵盖如此。而至今百有七十餘年。竟未有表章之者。將至於泯沒已矣。不肖殘裔用是大懼。願得公一言以爲銘。余於是謹攷兩公所爲日記疏檄及當時諸公文字。益詳其所未聞知。二君之言。非子孫之私也。以余之朽筆。得托名其間。豈不光榮。而惜乎其疾病摧頹。無以揄揚盛烈。以慰子孫之孝思也。雖然。竊聞近者湖中士論方起。列邑同聲。以爲褒顯隆祀之圖。可見公議之猶存。謹書此數語。使人信其事之有徵焉爾。崇禎再周乙酉孟秋庚寅。安東金元行書。
兩公皆學於一齋。淵源之不可少如此哉。又書。
미호집 제13권 / 제발(題跋) / 손공과 안공의 사적 뒤에 쓰다〔書孫安二公事蹟後〕
호남의 손군 대익(孫君大益)과 안군 처명(安君處命)이란 자가 자신들의 선대의 사적(事蹟)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익의 선조 한계공(寒溪公) 홍록(弘祿)과 처명의 선조 물재공(勿齋公) 의(義)는 모두 남쪽 지방의 포의(布衣)로서 임진년의 왜난(倭難)을 맞아 분연히 자신을 돌보지 않고 개연히 모집에 응하여 정읍(井邑)의 깊은 산중에 성조(聖祖)의 어용(御容)을 봉안하고서 밤낮으로 수호하느라 온갖 고생을 하며 전후로 한결같이 지낸 것이 일 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정의 명으로 행재소(行在所)로 이봉(移奉)하고 이윽고 다시 임시로 도중의 현사(縣舍)에 봉안하도록 하자, 두 공은 모두 이를 따랐습니다. 그리고는 또 험로를 거쳐 행재소에 도달해서는 연명(聯名)으로 중흥(中興)에 관한 6책(策)을 올려 상에게 가상하다는 장려를 받았습니다. 또 당시 명곡(鳴谷) 이 상서(李尙書) 산보(山甫)가 두 공이 충의(忠義)를 실행했다고 진달하자 아울러 육품직을 주도록 명하였습니다. 물러난 뒤에는 또 함께 원근에 격문을 돌려 쌀 3백 석을 모아 행궁(行宮) 및 여러 의장(義將)들의 소재지에 나누어 주었으며, 또 집안의 장정 가운데 건장하고 용맹한 자들을 의군(義軍)에 보내 예속시켰으니, 그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으로 시종일관 더욱 분발한 것이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170여 년 동안 끝내 표장(表章)한 사람이 없어 장차 민멸되고 말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보잘것없는 불초 후손들이 이 때문에 몹시 두려우니, 부디 공의 한 말씀을 얻어 명(銘)을 남기고 싶습니다.”
나는 이에 삼가 두 공이 쓴 일기와 상소, 격문 및 당시 여러 공(公)들의 글을 살펴보고서 미처 듣고 알지 못했던 것을 더욱 상세히 알게 되었으니, 두 군(君)의 말은 자손으로서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의 보잘것없는 문필로 그런 글에 이름을 올려놓을 수 있다면 어찌 영광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병으로 기력이 쇠해 성대한 공렬을 선양하여 자손들의 효성스런 마음을 위무할 방도가 없다. 그렇긴 하지만 삼가 듣건대 근자에 호중(湖中)의 사론(士論)이 한창 일어나 열읍(列邑)에서 이구동성으로 포장하여 드러내고 성대한 제사를 올릴 계획을 하고 있다고 하니, 공의(公議)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삼가 이 몇 마디 말을 써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일이 근거가 있다는 것을 믿게 하고자 할 뿐이다.
숭정 두 번째 을유년(1765, 영조41) 초가을 경인일(庚寅日)에 안동 김원행이 쓰다.
두 공은 모두 일재(一齋)에게 수학하였으니, 연원을 과소평가할 수 없음이 이와 같도다. 또 쓰다.
[주-D001] 손공(孫公) : 손홍록(孫弘祿)으로, 초명은 충렬(忠烈), 호는 한계(寒溪)이다. 안의(安義)와 함께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경기전(慶基殿)의 태조(太祖) 어용(御容)과 조종(祖宗)의 실록을 보위하고 호종(扈從)한 공으로 이산보(李山甫)의 건의에 따라 사포서 별제에 제수되었다. 《頤齋遺藁 卷17 安義行狀》
[주-D002] 안공(安公) : 안의(安義, 1529~1596)로, 본관은 강진(康津), 자는 의숙(宜叔), 호는 물재(勿齋)이다. 손홍록과 함께 일재 이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경기전의 태조 어용과 조종의 실록을 보위하고 호종한 공으로 이산보의 건의에 따라 활인서 별제에 제수되었다. 《頤齋遺藁 卷17 安義行狀》
[주-D003] 임진년의 …… 봉안하고서 : 왜란이 발발한 뒤 왜적이 금산군(錦山郡)에 진입하여 전주부(全州府)를 노리자, 호남 관찰사 이광(李洸) 등이 경기전의 태조 어용과 사고(史庫)에 보관된 실록을 정읍(井邑)의 내장산(內藏山)에 옮기고는 이를 지킬 학행(學行)과 지려(志慮)가 있는 유사(儒士)를 모집하자, 안의와 손홍록이 이에 응하여 임무를 수행하였다. 《頤齋遺藁 卷17 安義行狀》
[주-D004] 조정의 …… 따랐습니다 : 1593년 5월에 왜적이 진주(晉州)를 함락하자, 조정에서 어용과 실록을 행재소로 옮기도록 명하여, 익산(益山)ㆍ용안(龍安)ㆍ임천(林川)ㆍ부여(扶餘)ㆍ정산(定山)을 거쳐 온양(溫陽)의 행재소로 이봉(移奉)했다가 다시 아산현(牙山縣)의 관사(官舍)에 봉안하였다. 《頤齋遺藁 卷17 安義行狀》
[주-D005] 명곡(鳴谷) 이 상서(李尙書) 산보(山甫) : 이산보(李山甫, 1539~1594)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거(仲擧), 호는 명곡,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568년(선조1)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해미 현감(海美縣監)ㆍ정언ㆍ동부승지ㆍ대사간ㆍ우승지를 지냈다.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대사간이 되어 난국을 수습하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또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扈從)하였고, 대사간ㆍ이조 참판ㆍ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호종 공신(扈從功臣)에 책록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주-D006] 험로를 …… 명하였습니다 : 아산을 떠나 수원(水原)ㆍ남양(南陽)ㆍ인천(仁川)ㆍ부평(富平)ㆍ강화(江華)를 거쳐 1593년 8월에 강서현(江西縣)의 행재소에 도착해서는 안의와 손홍록이 연명으로 6책(策)을 올렸는데, 방본(邦本)을 견고하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라는 것이 요지였다. 상(上)이 이를 가상하게 여기고는 이조 판서 이산보의 두 공을 포상하라는 요청을 윤허하여 사포서와 활인서의 별제를 제수하였다. 《頤齋遺藁 卷17 安義行狀》
[주-D007] 일재(一齋) : 이항(李恒, 1499~1576)으로,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 호는 일재,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며 당시의 대학자인 기대승(奇大升)ㆍ김인후(金麟厚)ㆍ노수신(盧守愼) 등과 교유하였다. 1566년(명종21) 명경행수(明經行修)하는 선비를 뽑을 때 첫 번째로 추천되어 사축 승전(司畜承傳)에 임명되었다. 이후 의빈부 경력ㆍ선공감 부정ㆍ사옹원 정을 역임하였다.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일재집》이 있다.
ⓒ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강여진 (역)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