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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1 대림 12월 21일 – 133위 005° 이승훈 베드로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루카 1,39).
133위 005°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
이름 :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출생 : 1756년, 서울 반석방(盤石坊)의 약현(藥峴, 현 서울시 중구 중림동). 조부 이광직(李光溭, 1692-1769)의 중앙 정계 진출 서울로 이주, 양반
거주 : 염초교(焰硝橋 : 서울 중구 의주로 2가) 부근. 증조 이태석(李泰錫) 이전부터 제물포에 거주.
세례 : 1784년 봄
사망 : 1801년 4월 8일(46세), 참수, 서소문
묘지 : ①인천 반주골(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②천진암(1981년 이장)
父 : 이동욱(李東郁, 1738-1794, 司憲府 持平)
母 : 여흥 이씨(驪興李氏, 中樞府 僉知事 李用休의 딸)
妻 : 나주 정씨(羅州丁氏, 마재 정재원 딸, 정약전·정약용 이복누이)[0.1]
弟 : 이치훈(李致薰)[0.2]
스승 : ①이헌경(李獻慶) ②권철신(權哲身, 1736-1801) ③외숙 이가환(李家煥, 1742-1801)
이승훈(李承薰) 베드로는 본관이 평창(平昌)이고,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으로, 서울 반석방(盤石坊)의 약현(藥峴, 현 서울시 중구 중림동)에서 태어났다.[1] 1868년에 순교한 이신규(李身逵, 마티아)와 이재의(李在誼, 토마스)는 그의 아들과 손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아 학문을 닦는 데 노력하였고, 장성한 뒤 정약종과 정약용의 누이인 나주 정씨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25세 때인 1780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1790년에 의금부 도사로, 이듬해에 평택 현감으로 임명되었다.[2]
베드로는 천주 신앙에 대해 알기 전부터 집 안에 있던 서양 서적을 읽어 왔고, 그 과정에서 특히 서양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1783년 말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되자, 그는 자신의 생각과 친구 이벽의 부탁에 따라 북당(北堂)으로 서양 선교사를 방문했으며, 이듬해 초에는 예수회 그랑몽 신부에게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한 뒤에 귀국하였다. 조선의 첫 번째 신자가 된 것이다.
귀국한 뒤 이벽과 만난 베드로는 가까운 동료들과 함께 세례식을 갖기로 하였다. 그런 다음 1784년 겨울 서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권일신과 처남 정약용, 이벽 등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함께 첫 신앙 공동체를 일구었다.[3]
그러나 베드로는 이때부터 온갖 비난과 박해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1785년 봄에는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동료들과 함께 갖던 집회가 형조의 금리들, 곧 범법 행위를 단속하는 형조의 관원들에게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1787년에는 성균관 앞의 반촌(泮村)에서 처남 정약용 등과 함께 교회 서적을 연구하다가 발각되어 곤혹을 치르기도 하였다.[3.1] 1791년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제사 폐지 문제와 관련하여 발생한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으며, 이 때문에 관직을 잃었다. 또 다음 해 초에는 평택 현감으로 부임할 때 향교의 문묘에 배례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수난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에 앞서 베드로는 1786년에 동료들과 함께 가성직 제도를 수립하고 약 1년 동안 신부로 활동하다가 잘못을 깨닫고 활동을 중단한 적이 있었다. 또 윤유일을 밀사로 선발하여 북경 교회로 파견하기도 했고, 이후 선교사 영입에도 노력하였다. 그러나 1795년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탄로 나고 윤유일 등이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베드로는 천주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예산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에야 유배에서 풀려났다.[4]
그 과정에서 이승훈 베드로는 신심이 약해지기도 하였고, 교회를 멀리한 적도 있었다. 이에 대해 정약종은 뒷날 “이승훈은 1791년 이후 신앙에 전심하지 않았다.”라고 진술하였다.[5] 마찬가지로 주문모 신부도 자신이 조선에 입국할 무렵에는 “이미 이승훈이 교회로부터 이탈한 상태(叛敎=棄敎, 교를 등지거나 버림)였다.”라고 하였다.[6] 반면에 황사영은 “이승훈은 여러 차례 천주교를 헐뜯는 글을 썼지만, 모두 본심에서 한 일은 아니었다.”라고 기록하거나 “이승훈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신앙을 위해 죽겠다는 생각이 있었다.”라고 하였다.[7]
결국 베드로는 이러한 상황에서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3월 23일(음력 2월 10일)에 체포되었다. 그런 다음 의금부로 압송되어 31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가 보여 준 순교의 용덕을 찾기는 어렵다.[8][8.1][8.2] 그러나 그는 결코 교회에 해가 되는 진술을 하거나 신자들을 밀고하지는 않았으며, 끝내는 천주교 때문에 사형 판결을 받고 4월 8일(음력 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9]
[註]__________
[0.1] 이승훈 베드로 가계도
[0.2] 이치훈(李致薰) :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나 조정에 천주교 탄압의 상소가 끊이지 않게 되자 집안 식구들과 함께 천주교인인 형 이승훈에게 배교를 강요, 이승훈을 배교시켰다. 그러나 1801년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이 일어나자 천주교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이승훈과 함께 체포되어 거제도(巨濟島)에서 유배 중,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1]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 9; 이만채 편, 『벽위편』, 2권, 안순암을사일기(安順菴乙巳日記)·홍락안여채홍원서(洪樂安與蔡弘遠書); 『평창 이씨 세보』(경신보).
[2] 『승정원일기』, 정조 14년(1790년) 10월 2일, 정조 15년(1791년) 6월 24일.
[3] 「구베아 주교가 사천 교구장 생마르탱(Saint-Martin)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서한」,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 소장 문서(SC 39, ff. 550-558); A. Daveluy, Op. cit., ff. 16-17; 정약용, 『여유당전서』, 제1집 15권, 정헌 이가환 묘지명; 『추안 및 국안』, 1801년 2월 11일 최창현과 2월 13일 최창현・이승훈 대질 신문.
[3.1]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 : 1787년 정미년(丁未年) 음력 10월경,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반촌(泮村, 서울 종로구 명륜동과 혜화동 일대)에서 천주교 서적을 읽고 연구하는 걸 목격하고 성토한 사건이다. 강세정(姜世靖, 1743-1818)의 ‘송담유록(松談遺錄)’에 “정미년(1787) 겨울에 이승훈과 정약용이 재(齋)에서 지내면서 과업(科業)을 닦겠다는 핑계로 동반촌(東泮村) 김석태(金石太)의 집에 모여 사서(邪書)를 강설하며 밤낮없이 거의 한 달 가까이 되었다. 진사 강이원(姜履元)이 거짓으로 사학을 배운다며 마침내 그 집에 들어가, 서양의 책 이름과 설법 등의 일을 살펴 얻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벗 이기경(李基慶)에게 적발되자, 강이원이 한바탕 크게 놀라 그 즉시 그만두고 나왔다. 강이원이 그 주장을 벗들 사이에 누설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한편, 이기경(李基慶)은 원래 이승훈, 정약용과 친밀한 사이라서 함께 천주교 서적을 대하며 보조를 같이했었다. 그러나 정미년 강이원의 폭로 때문에 불안해진 이기경은 그들을 멀리하며 반대하고 배척하다 못해 “정미년 음력 10월, 반촌 김석태(金石太) 집에서 이승훈, 정약용 등이 모여 서학책 독서 모임을 목격했었다고 천주교 배척론자 홍낙안(洪樂安)에게 폭로하였다. 이 말을 들은 홍낙안은 이를 상소를 올려 그들을 벌주어야 한다고 극렬하게 주장하였다. 이 상소로 관련자에 대한 박해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邪敎)로 폄훼하는 상소문이 잇달아 박해를 유발케 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4] A. Daveluy, Ibid., ff. 23-68.
[5] 『추안 및 국안』, 1801년 2월 13일 정약종의 진술.
[6] 『추안 및 국안』, 1801년 3월 15일 주문모 신부의 진술.
[7] 황사영, 「백서」, 45.17행.
[8] 다블뤼 주교는 “이승훈에게서 이전의 배교에 대한 철회의 표시나 회개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조심스럽게 기록하였다(A. Daveluy, Op. cit., f. 109).
[8.1] 이승훈 베드로는 3차례 배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①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달레 교회사 上, pp. 319-320)
“치훈(致薰)이라는 이승훈의 아우는 천주교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맹렬한 증오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자기 형을 낙심시키고 뜻을 바꾸게 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다 썼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집안의 박해로 견딜 수가 없게 된 이승훈은 마침내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그의 종교서적을 불태우고 자기가 천주교인이었음을 일반 앞에 변명하는 글을 썼다.”.
② 1790년 ‘조상제사금지명령’(달레 교회사 上, pp. 330-331)
“몇몇 마음 약한 천주교인들은 그것이 너무나 두려워서 그날로부터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을 그쳤다. 그들 중에는, 이미 두려움으로 몇 해 전에도 그렇게 통탄스럽게 넘어갔던 이승훈 베드로가 끼어 있음을 우리는 마음 아파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벼슬에 대한 야심에 이끌려, 차례차례로 여러 가지 공직을 얻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 나라에서도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미신적인 의식(儀式)에 참여하게 된다. 그 후로는 그(이승훈)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외교인들에게까지도 멸시를 당하며, 외교인들의 눈에 천주교를 들여온 죄를 완전히 씻기에 이르지 못하는 그를 드문드문 보게 될 것이다. 천주교를 들여온 것은 외교인들의 눈으로 볼 때 일종의 원죄(原罪)와 같은 것이어서, 그들은 이것을 오늘까지도 그의 후손에게 비난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승훈 베드로의 두 번째 배교에도 불구하고, 신입교우들의 신앙은 크게 흔들린 것 같지는 않으며, 대다수는 마음과 정신으로 교회의 결정에 복종하여 열심히 실천하기를 계속하였고, 모든 미신행위를 끊어버렸다.”
③ 1791년 ‘진산사건’(달레 교회사 上, pp.360-361)
“우리가 본 것과 같이 싸움도 하기 전에 그렇게도 부끄럽게 물러난 이승훈 베드로는 그때 평택 현감으로 있었다. 그가 배교한 것은 일반이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홍낙안과 그 일당은 이승훈을 천주교인들의 두목으로 지적하는 상소를 조정에 냈는데, 그가 관사에서 그 종파의 서적을 읽는 것을 보았다고 덧붙였다. 그들은 이승훈을 법정에 출두시켜 법대로 재판을 받게 하라고 요구하였다. 그가 향교에 가서 관례적인 배례를 하지 않는다고도 고발하였다. 그 사실들이 증명될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을 공공연하게 증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무함이라고 부르는 그것에 대하여 자기변호를 하기 위한 글을 발표하였다.”
[8.2] 이승훈 베드로의 배교와 순교에 대한 달레 교회사의 평가
○ 달레 교회사 上, p.396
“이승훈 베드로는 오래 전부터 천주교를 버렸었고, 자기의 배교를 공공연한 글을 써서 알렸다. 그런데도 예산(禮山)으로 귀양을 가서 1년을 지냈다. 거기서 그는 또 한 번 자기 처신에 대한 변호문을 발표하였고, 천주교인들과 관계를 끊는다는 것과 그들의 교리를 배반하였다는 것을 공언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나약함으로 인하여 하도 사람들의 멸시를 받아, 아무도 그를 믿으려 하지 않게 되었다.”
○ 달레 교회사 上, p.447
“다른 6인의 사형수, 즉 이승훈 베드로, 최필공 토마스, 최창현 요한, 홍교만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홍낙민 루가 및 정약종 아우구스띠노는 2월 26일(1801년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 달레 교회사 上, pp.447-448
그때 이승훈의 나이는 45세였다. 그의 결안(結案)은 다음과 같다.
“서양의 나쁜 책들은 고금을 통하여 유례가 없는 흉악한 것이다. 거짓말로 예수라는 자를 선전하여 세상을 속인다. 그것들이 천당과 지옥이라 하는 것은 불도(佛道)를 모방한 것이며, 신부(神父)라는 것은 인륜을 없애는 것이다. 그것들은 재물과 여자들을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으며, 형벌과 죽음을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한다, 그들의 말은 모두 악랄하고 난잡하고 뻔뻔스러운 것이니, 성현들은 그것을 배척해야 하고 백성들은 그것을 물리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이승훈)는 영세를 하고 그 책들을 사서 만 리나 되는 곳에서 가져와 친척과 인척 사이에, 서울과 시골에, 가까이 또는 멀리 퍼뜨렸다. 그것은 또 사소한 일이다. 그는 양인들과 상통하고 그들과 연락하였으며, 有一(윤 바오로)과 더불어 고약한 비밀음모를 꾸몄고, 若鍾(정 아우구스띠노)과 함께 가증스러운 일을 꾀하였다. 임금께서 법을 내리셨을 때 피고(被告)는 자기를 인도하는 악령들을 거울 속에서 보듯 하였으며, 겉으로는 회개하는 체하면서 내심으로는 타락과 무분별을 계속하였다. 천주교인들의 그 악랄한 도당과 그 불쾌한 무리 중에 그를 종교의 두목으로 알지 않고, 그를 아비라고 부르지 않은 자가 하나도 없다. 이와 같은 죄악을 저지르고 나서 어떻게 그가 천지간에 용납될 수 있으랴! 모든 증거가 드러나고 모든 죄악이 백일하에 나타났으니, 하늘의 법이 빛나고 국왕의 법이 지엄하다. 저(이승훈)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 달레 교회사 上, pp.448-449
“이승훈의 죽음은 이가환의 죽음보다 훨씬 더 비참하였다. 어떤 죄인에게도, 죄를 뉘우치기에는, 이보다 더 훌륭하고 더 쉬운 기회가 주어진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천주교인이건 천주교인이 아니건 간에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배교로도 그의 목숨은 구할 수 없었으니, 하느님께로 돌아온다는 간단한 행위로, 그는 피할 수 없는 형벌을 승리로 바꿀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거듭되고 고집스러운 비겁이, 하느님의 인내심을 지치게 한 모양이었던지, 그는 자기의 배교를 철회하지 않고 통회한다는 조그마한 표시도 하지 않은 채, 숨을 거두었다. 맨 처음으로 영세한 그가, 자기 동포들에게 성세와 복음을 가져왔던 그가, 순교자들과 함께 죽음을 향하여 나아갔으면서도, 순교자는 아니었다. 그는 천주교인이라 하여 참수를 당하였으나, 배교자로 죽었다. 하느님, 당신의 심판은 얼마나 정의롭고 무섭습니까?
이 무서운 죽음은 천주교인들은 물론이고 외교인들까지도 아연실색케 했다. 이승훈의 시신은 사흘 후에 생전의 그의 집으로 운반되었으나, 아무도 감히 상례적(喪禮的)인 조문을 하러 가지 못하였다. 그의 친척과 친구 중의 하나인 심유(沈浟)라는 사람만이 상복을 입고 그 집에 갔으나, 그의 처신은 주변 사람들의 불평을 자아냈다.
그 이후로 이승훈 베드로의 많은 친척 중에서 천주교인은 극히 적으며, 그의 친척들의 대다수는 천주교에 대한 적의로 항상 유명하였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어 많은 집안의 그루터가 되었으나, 그중 두 집안만이 오늘 천주교를 믿고 있다.”
[9] 『순조실록』, 2권, 순조 1년(1801년) 2월 26일; 『승정원일기』, 동일조. 황사영은 베드로의 죽음이 착한 죽음, 곧 순교였는지는 알 수 없다며 마땅히 사실을 더 조사해 보아야 한다고 기록하였다(「백서」, 46행). 순교한 뒤 이승훈의 시신은 인천 반주골(현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에 안장되었으며, 1981년에는 현지에서 그의 유해가 발굴되어 천진암으로 이장되었다. 한편, 이승훈 집안의 전승과 이른바 유시(遺詩)를 토대로 이승훈의 순교를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들 자료에 대한 신빙성 여부는 물론 전승과 유시 내용에 대한 해석은 학자들마다 아주 다르다. 우선 피숑 신부가 1930년 8월에 수집했다고 하는 집안의 전승은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가던 우마차 안에서 주변의 외교인들에게 ‘수확의 때가 왔다. 잘 깨어 있어야 할 때다.’라는 말을 했다.”라는 것이다(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서고 소장 미발표 원고, 피숑 신부 유고, f. 51; 류한영, 「한국 천주교 창설 주역의 생애와 순교 사실과 그 평판에 관한 연구」, 240-242면 참조). 다음으로 이승훈의 유시는 주재용 신부가 처음 전한 것으로, “월락재천 수상지진”(月落在天水上池盡)[9.1]의 여덟 자를 말한다(주재용, 『한국 가톨릭사의 옹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0, 101면).
[9.1] “이승훈 베드로가 서소문 형장에서 칼을 받기 직전, 동생 이치훈이 ‘형님, 천주학을 하지 않겠다고 한 말씀만 하시면 상감께서 살려주신답니다.’라며 소맷자락을 잡고 애원하였다. 이승훈 베드로가 동생의 손을 뿌리치며, ‘무슨 소리냐! 월락재천 수상지진이니라’(月落在天 水上之盡) 하고는 칼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승훈 베드로의 순교 전 실제 발언을 두고 이론(異論)이 있다. 글이 아니라, 말로 남겼고 황망한 자리에서 들었기 때문에 기록이나 구전 과정에서 글자나 뜻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다만 이승훈 베드로에게 자기 죽음(月落)이 천주를 위한 치명, 곧 천당에 가는(在天) 죽음이라는 의식과 지향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권력·세력(上水)은 하늘을 찔러도 바닥으로 떨어진다(池盡)는 것이다.
흔히 임종계 또는 사세구는 선문답 같아 그 표현이 문법적이지 못하고, 그 진의 또한 “들을 귀” 있는 자만 알아듣게 된다. 임종계 또는 사세구는 속기하거나 녹음하지 않고 들었다고 자임하는 이가 문자로 옮기거나 구전 과정에서 전하는 이의 주관·선입견·지식·경험·지향·신념·편견·선호 등이 작용하기 때문에 성서비판에서 겪는 어려움처럼 그 진위를 가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가 있다.
이제까지 알려진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가 순교 직전에 남겼다는 임종계는 아래와 같다.
① 月落在天 水上池盡(월락재천 주상지진) : 주재용 신부, 「한국 가톨릭사의 옹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0. p.101; 변기영 몬시뇰, 「한민족 조선천주교회창립사」,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연구원, 2004, p.59.
② 月落在天 水止池盡(월락재천 주상지진) : 오기선 신부, 「순교자들의 얼을 찾아서」 下권, 한국천주교성지연구원, 1988, p.307.
③ 日落在天 水盡在地(일락재천 수진재지) : 『平昌李氏世譜』(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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