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과 인물로 본 조선왕조 이야기 5
<정종의 가계도>
정종의 가족들
영안대군은 태조의 둘째 아들로 이름이 방과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380년 1월 공양왕을 옹립한 공으로 밀직부사가 되었다. 조선왕조가 개국하자 의흥삼군부중군절제사로 병권을 잡기도 하였다.
정종은 1명의 정비와 9명의 후궁을 두었다. 정비 정안왕후 김씨는 자식이 없었고 후궁들 사이에 아들 17명과 딸 8명을 얻었다.
정안왕후 김씨(1355~1412) | 경주김씨 천서의 딸이다. 권력이 없다고 판단한 정안왕후는 정종에게 “왕위를 정안군(태종)물려주고 편안하게 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1412년(58세)애 세상을 떠났다. |
정종, 임시직 왕이 되다
1차 왕자의 난 때 특별한 공적 없이 동생 방원의 추천으로 왕위에 올랐다. 무인정사(1차 왕자의 난)가 벌어지던 날 밤, 방과(정종)는 아버지의 쾌유를 비는 제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방원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김인귀의 집으로 숨었다. 사태를 수습한 반란군 세력은 방원을 왕세자로 추대하려 했으나 방원은 “적장자가 세자가 되어야 한다.”며 방과를 세자로 세우게 했다.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8일 후 태조는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려났다. 정종은 자신의 세력으로 왕이 된 것이 아니기에 허수아비 왕이었고 방원이 재상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방원의 측근인 이숙번이 우부승지(왕의 비서관)가 되어 왕을 감시하였다. 마치 1979년 12.12사태 이후 권력을 잡은 전두환장군이 허수아비 대통령 최규하를 내세우고 뒤에서 권력을 좌지우지 하던 모습에서 기시감이 들었다.
1399년 3월 왕위에 오른 지 6개월 만에 도읍을 개경으로 옮기고 집현전을 설치하여 경전의 강론을 담당하게 했다. 같은 해 8월 분경금지법을 제정하였다. 분경이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로 관리들이 벼슬을 얻기 위해 인사를 관장하는 고위관리나 정권 실세들을 분주하게 쫓아다니며 벼슬을 따내려 했던 엽관獵官운동이다. 행정과 군정의 혼란을 수습하고 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이다. 내용은 일족 중 3~4촌 내의 근친이나 각 절제사의 대소군관을 제외한 일체의 관리가 사사로이 만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권세가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로서의 틀을 다져나갔다. 11월에는 법전을 정비하기 위해 조례상정도감을 설치했다. 1400년 2월에 이방원이 세제로 임명되었고 4월에 이방원이 주도하여 사병혁파작업을 진행했다. 왕족과 권신들이 관리하던 사병을 폐지하고 의흥삼군부로 병권을 집중시켰다.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정몽주를 살해한 조영무와 이거이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였고 특히 조영무는 무기를 회수하러 온 간부들을 때리기도 했다.
6월에는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고려말기 권문세족들에 의해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인으로 환원시켜 국세수입을 증대하고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1399년 3월 정종이 왕위에 오른 지 6개월 만에 도읍을 개성으로 옮기자 상왕으로 물러난 태조는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명당터라고 옮긴 한양에서 신덕왕후 강씨와 아들 사위가 죽었기 때문이다.
2차 왕자의 난
박포가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이 이방원을 죽이려 한다”는 정보를 제공해 거사를 성공시키는 데 기여했다. 별다른 공적이 없는 조준과 이무가 1등 공신으로 책봉되고 자신은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과 함께 2등 공신에 책봉되자 늘 불만을 품고 있었다. 사실을 알게 된 방원은 박포를 귀양 보냈다. 유배에서 풀려난 박포가 방간에게 “방원의 눈치를 살펴보니 멀지 않아 회안군(방간)을 죽이려 할 것이다. 선제공격하면 승산이 있다.”고 꾀었다. 방간은 처조카인 교서관 판사 이래를 불러 “방원이 나를 죽이려 하는데 앉아서 죽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지원을 요청했다. 놀란 이래는 “그럴 리가 없다 지금 회안군(방간)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정안군의 덕분”이라고 설명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래는 방원을 찾아가 회안군의 음모사실을 말했다. 1401년 1월 방간이 사냥하는 척하며 병력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켰다. 방원은 1차 왕자의 난으로 피를 보았기에 형 방간을 설득했다. 방간은 “마음이 정해졌다며 돌이킬 수 없다”고 했다. 방간은 왕(정종)과 태상왕(태조)에게도 거짓으로 “정안군이 자신을 해치려고 하여 군사를 일으켰다”고 했다. 태조와 정종은 화를 냈다. 방간은 방원의 군사와 일전을 벌렸지만 적수가 되지 못했다. 방간은 토산으로 귀양 보냈고 박포는 처형되었다.
2차 왕자의 난을 제압한 방원은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하륜이 정종에게 “정몽주, 정도전, 방간을 제압하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정안군(방원)이 세자가 되어야 합니다.”고 보고했다. 방원의 세력은 거침이 없었다. 1400년 7월 아버지(태조)를 태상왕으로 올렸다. 2번이나 왕자의 난을 겪은 태조가 “조영무, 조온, 이무가 나를 배신하고 너에게 붙었으니 처벌해라”고 요구했다. 방원은 유배 보내는 척하다가 다시 불러들었다. 허수아비로 전락한 태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종 또한 1400년 11월 방원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인덕궁에 머물면서 사냥, 연회, 온천여행을 즐기면서 20년을 한가롭게 살다가 1419(63세)년 죽었다. 능은 개성시 판문구에 있으며 후릉이다. 부인 정안왕후와 함께 묻혔다.
사사건건 정도전과 부딪혔던 조준
망해가는 고려는 구체제의 모순이 극에 달했다. 가장 큰 적폐는 산과 하천을 경계로 삼아 경작량의 대부분을 앗아가던 권문세족으로의 부의 집중이었다. 백성들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갖지 못한 채 소작농 또는 노비로 몰락했다. 정도전과 조준 등 신진사대부 세력은 토지 개혁을 단행하면서 견해 차이를 보였다.
정도전의 구상은 백성의 수를 헤아려 땅을 나누어주는 계민수전計民收田의 원리에 입각한 정전제였다. 이는 곧 생산수단을 ‘무상몰수 무상분배’하는 급진적인 개혁이라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조준의 과전법科田法으로 타협하였다. 1390년 고려의 토지대장을 모두 불태우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권문세가와 겨뤄 개혁에 성과를 거둔 신진사대부들이 공신전功臣田이라는 명목으로 토지를 받아 세습하는 수조권收租權을 갖게 되었고, 조준, 정도전 등 공신에게 주어진 공신전이 태종 대에 경기도 토지의 20% 가량에 달했다고 한다. 개혁을 주창한 자들 스스로 개혁의 명분을 퇴색시켜버린 셈이다. 백성들로서는 개혁세력이 또 다른 기득권이자 적폐로 변해가는 과정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최0실 국정농단으로 대통령탄핵 후 적폐세력으로 몰아 제거작전을 펼치던 집권세력 또한 역사를 반복한다는 인식이 든다.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가 조준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개국 공신으로 문하좌시중에 임명하고 "5도병마五道兵馬를 모두 경에게 위임하겠다."며 군권을 맡겼다.
권력이 조준, 정도전, 남은에게 집중되자 이에 대한 성토도 나왔을 정도인데 변중량은 "정도전, 남은, 조준이 정권과 병권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사태를 예상했는지 조준은 그 이전부터 평양의 식읍과 도통사의 관직을 사양하는 등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권력을 내려놓으려고 해도 이성계가 허락하지 않아 그럴 수 없었다. 태조는 조준이 피부병으로 몸져눕자 사람을 시켜 문병하게 하면서 "병을 고치려면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 하니 나라 일 근심하지 말고 편안하게 요양해라."고 배려했다. 이 무렵까지 정도전과 조준은 서로 존중은 하는 사이였다.
틈이 벌어진 것은 정도전, 남은 등이 요동 공격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자 조준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정도전, 남은 등이 군사를 출병시키겠다고 하자 조준은 병중에서 일어나서 "사대의 예로는 말할 것도 없고 명나라의 위세가 엄청난데 무슨 공격"이냐고 했다. 정도전은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위해 조준을 설득하려했지만 조준과 김사형은 "지금 천도 이후 나라 백성의 사정이 좋지 않아 원망이 많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내심 요동 공격은 무리라고 생각한 태조는 조준의 의견을 따랐다.
다음은 세자 책봉 문제였다.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이 “태평할 때는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있는 아들(이방원)이 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사실상 이방원을 추천한 것이었다. 부인 강씨가 엿듣고 눈물을 흘리자 태조가 조준에게 종이와 붓을 주며 이방번을 쓰라고 하였으나 거부하였다. 이방석을 세자로 결정된 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틈이 생긴 상황에서 무인정사(1차 왕자의 난)가 일어났다. 1차 왕자의 난에서 조준은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방원은 이숙번을 보내 우정승 김사형과 조준을 데려왔다.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책봉되었다. 이는 조준이 지속적으로 정도전과 정치적 대립을 벌인 탓도 있고 세자 책봉 논의 당시 이방원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난의 정당성을 보장해주고 신구 세력간의 갈등을 막아줄 수 있는 측면도 있었다.
1차 왕자의 난이 끝나고 정종이 즉위하자 조준은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결국 정승에서 물러나 판문하부사가 되었다. 사헌부 등에서는 "조준이 음란하고 사치스러우며 남의 전답과 노비를 빼앗은 것이 수도 없이 많다"며 탄핵을 올렸지만 정종이 일축했다.
태종이 즉위하자 왕자의 난 이후 강력해진 종친과 무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했다. 1404년 조준은 좌정승이 되어 복귀했다. 행정 능력이 뛰어났지만 태종의 신임과 권세는 하륜에게 밀렸다. 1405년 결국 다시 영의정부사로 밀려난 조준은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조대림은 태종의 딸(경정공주)과 혼인해 부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