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원산 부흥 운동의 확산
하디로 인해 회개 운동이 막 촉발될 즈음 스칸디나비아 선교회 소속 부흥사 프랜슨(F. Franson)이 원산을 방문하여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선교사들과 교인들을 모아놓고 원산 창천교회에서 1주일간 사경회를 인도했습니다. 거기에서도 놀라운 영적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신학월보가 증언하는 대로 1903년 11월 상동감리교회와 제중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프랜슨의 집회가 열려 참석한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프랜슨의 입국은 하디로 인한 기왕의 부흥 운동의 열기를 한층 북돋아 준 셈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의 역사는 한국인들과 선교사들 모두에게 임했습니다. 성령께서 인종과 성별과 연령을 초월하여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강한 성령의 역사 이면에는 하디의 변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디를 통해 한국인들이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동료에 의해서 동료가 은혜를 받기가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가장 큰 바람은 교인들이 그의 설교에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설교한 것을 삶을 통해 실천하는 것입니다. 삶의 실천은 주변의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하디가 은혜를 받은 후 주변 사람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끼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의 삶의 변화였습니다. 회심 후 하디에게 삶의 변화가 따랐기 때문에 그를 통해 한국인들만이 아니라 동료들이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인격의 변화, 성품의 변화, 삶의 변화가 동반된 은혜의 경험이야말로 성경이 가르치는 성령의 충만입니다. 주님의 영이 충만하면 그 주님의 삶과 사랑을 본받고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하디와 같이 캐나다 출신에다 같은 토론토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은 하디의 동료 선교사 게일은 은혜를 받기 전의 하디와 은혜를 받은 후의 하디가 180도로 달랐다고 말합니다. 마치 은혜를 받은 이후의 하디는 모세가 40일 동안 금식을 한 후에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얼굴이 광채가 나는 것과 같았다고 증언합니다. 변화를 받기 전에는 하디에게 치료를 받으러 한국인 환자들이 잘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디가 너무 쌀쌀맞아 차라리 아픈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의사인 하디를 찾아가기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디가 은혜를 받은 이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후에는 그가 손만 만져도 병이 나았다고 증언합니다. 하디의 변화가 그만큼 사람들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이 같은 하디의 인격적 변화를 지켜본 동료 선교사들은 그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성령께서 하신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디가 만난 그 성령을 자신들도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사모했던 것입니다. 하디가 인격적으로 완벽하게 변화를 받으니까 동료 선교사들이 은혜를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는 1904년 사경회 때 같은 캐나다 출신 업아력(Alexander Fracis Robb) 선교사가 은혜를 받고 길거리를 다니면서 막 기뻐 외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하디를 통해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하디는 자신이 인도하는 집회를 통해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이 큰 은혜를 경험하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소명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민족 가운데 영적 각성 운동을 위해 자기를 도구로 부르셨다는 일종의 소명 의식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1904년 2월에 그에게 실패감을 안겨주었던 강원도 금화군 지경대로 향했습니다. 강원도 지경대로 향하던 하디는 그곳 가까이 새술막에 하루를 묵으면서 “하나님이여 원산에서 베푸셨던 똑같은 은혜를 이곳에서도 베풀어 주십시오”라며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강원도 지경대에서 집회 동안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디는 후에 이와 같은 고백을 합니다.
“주님은 나의 믿음을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그 다음 12일 동안에 사경회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은 결코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감동을 받았고, 지난 3년 동안 남감리교와 관련이 있었던 거의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몇몇 새로운 사람들이 회심을 경험했다. 사경회가 끝나기 전날 미국 영사의 소환을 받고 서울에 갔던 원산의 나의 동료 선교사들이 새술막에 도착했다. 그들도 그다음 날 그동안에 있었던, 함께 기도해왔던 사역이 성령의 권능으로 뒤덮인 것을 발견하고는 대단한 격려와 힘을 받았다. 그날의 집회, 특별히 그날 오후 집회와 저녁 집회에 대한 기억은 우리가 살아있는 한 일생 동안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강한 성령의 역사였으면 집회에 대한 기억이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일생 동안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만큼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했음을 말해줍니다. 원산에서 일어났던 그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자기에게 실패감을 안겨주었던 강원도 금화군 지경대에서도 똑같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디는 지경대에서 다시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금식 후 건강을 회복해야 되는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시는 대로 이끌려 간 것입니다. 하디는 성령의 손에 이끌려 송도의 남감리교 집회, 서울에서의 집회를 계속해서 인도합니다. 똑같은 성령의 역사가 그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 하디를 통해 부흥 운동이 서서히 확대되어 1904년 6월에 들어 비로소 ‘부흥회’라는 말이 한국에 일반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부흥회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쓰였습니다. 하나는 이미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신앙을 갱신하거나 신앙을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불신자들이 이 기회를 통해서 주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부흥회는 그런 면에서 기성 신자들이나 처음 교회에 찾아온 초신자들 모두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수단이었습니다.
3. 계속 타오르는 원산 부흥 운동의 불길
하디의 부흥회가 계속되면서 부흥 운동의 저변이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11월 안식년을 계획하고 있던 하디는 안식년을 떠나기 전 서울, 평양, 제물포 세 군데에서 집회를 계획합니다. 이들 집회 때 여러 사람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합니다. 1년 동안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쓰임 받았던 하디가 안식년을 계획한 것은 무리한 집회 일정으로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가운데 집회를 인도하고, 집회를 통해 성령의 은혜를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가운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몸이 그만큼 쇠잔해진 것입니다.
하디는 안식년을 떠나기 전 원산 부흥 운동의 불길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0월에 서울과 평양과 제물포에서 열리는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세 군데서 똑같은 회개의 역사, 성령의 강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904년 10월 1일부터 9일까지 정동감리교회에서 열린 하디의 서울집회에 성령의 능력이 놀랍게 나타났습니다. 배재학당, 이화학당의 남녀 학생들과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새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1904년 10월 16일부터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모인 가운데 열린 하디의 평양부흥회 때 주께서 권능 가운데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심령을 사로잡는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그들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한 선교사는 이보다 “더 직접적이고 더 강하게 회개하는 백성들을 본국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철저한 회개의 역사는 이어 열린 하디의 제물포 부흥회에서도 그래도 재현되었습니다. 그 현장에 있던 케이블(E. M. Cable) 선교사가 코리아 메소디스트(Korea Methodist)에 <또 다른 놀라운 부흥>이라는 글에서 “나는 결코 전에는 어떤 사람들 가운데 그와 같은 것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증언할 만큼 성령의 역사는 강력했습니다. 하디가 인도한 서울과 평양과 제물포 집회 모두에 강력한 회개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1904년 11월, 예정대로 하디는 안식년을 떠납니다. 그가 안식년을 떠난 후에도 1905년, 새해에도 성령의 역사가 남감리교 선교구 개성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이 같은 역사가 1905년 하디가 없는 가운데서도 한국교회에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 4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2개의 감리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그해 가을 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를 결성하고, 그 자리에 모여 신년 부흥회를 전국적으로 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현장에 참석했던 찰스 번하이젤 선교사가 그다음 날 자신의 일기에서 기술한 것처럼 이것은 참으로 ‘중대한 운동’이었습니다.
부흥 운동의 움직임을 보면서 선교사들은 영적 각성 운동이 이 민족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가 일차적으로 추진할 것은 불신자들을 전도해 교회로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를 믿는 기성 신자들이 성령의 충만, 영적 각성을 경험하는 것임을 간파하고 이 일에 초점을 둔 것입니다. “부흥 집회 첫 번째 목적은 새로운 신자의 등록보다 교회 내의 영적 각성이어야 합니다. 사역이 먼저 깊이가 있으면 그다음에 자연히 넓이는 따라올 것입니다.” 새신자 전도에 앞서 기성 신자들이 먼저 영적으로 각성하는 일이 선행될 때 한국교회가 참된 부흥을 경험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기성 신자들이 먼저 은혜를 받아야 전도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은 참으로 정확한 진단이었습니다.
교회는 전도를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도 못지않게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기성 신자들이 먼저 영적인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기존 신자가 먼저 성령의 기름 부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도는 자연히 따라올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영적으로 깨어야 합니다. 기성 신자들과 목회자들이 먼저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흥 운동의 발흥과 확산 과정에서 은혜를 받은 지도자를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미국의 1차 대각성 운동, 2차 대각성 운동, 무디 부흥 운동도 다 마찬가지로 교회 지도자들, 신학생들, 목회자들이 먼저 깨어났습니다. 웨일즈 부흥 운동 때 신학생이었던 이반 로버츠가 먼저 은혜를 경험했고, 원산부흥운동에서는 하디가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 때는 이길함 선교사와 길선주 장로가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먼저 큰 은혜를 받았고 이들을 통해 부흥 운동이 저변 확대되면서 다른 사람들이 은혜를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깨어나 복음을 전할 때 교회가 영적으로 깨어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기성교회 신자들이 먼저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야 한다는 1905년 가을 복음주의연합공의회의 결정은 돌이켜 볼 때 시의적절한 결정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시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주권이 상실된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주권 잃은 슬픔 속에서 민족적 위기를 비분으로 쓸어안아야 했고, 선교사들은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블레어가 증언한 대로 “많은 한국인들은 교회를 한국의 유일한 희망으로 보았습니다.” 이 시대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은 이 민족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이 영적대각성운동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전반적으로 교회는 놀랍게도 성경을 가르쳤고, 이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기도한 대로 1906년 신년 부흥회 때 놀라운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06년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신년 부흥회가 열리기 직전 1905년 12월에 하디가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옵니다. 하나님께서 또다시 하디를 예비해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릭 워렌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면 주변 환경에도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