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의 죽음은 슬프지 않다， 조 성지／（전 , 서울대교수）

[김창환]

6. 성인의 죽음은 슬프지 않다，

조 성지／（전 , 서울대교수）

방 신부님의 선종 소식을 듣고도 슬픈 감정이 우러나질 않았다. 언젠가 복자회 수녀 님에게 신부님의 안부를 물었더니 지금은 부평 병원에 계시지 않고 남자 수도원에 가 계신다고 했다. 거처를 옮기셨다는 얘기였다. 이번에 신부님이 선종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도 돌아가셨다는 실감이 안 나고 거처를 옮기셨다는 정도로 밖에 느껴지질 않았다. 부평 병원에 계시다가 성북동의 남자 수도원으로 옮기셨다가 이번에는 천당으로 거처를 옮기신 것이다. 신부님의 장례미사 때 강론하신 동창신부님의 말씀이 " 방 신부님은 성인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신부님은 연옥에도 안 들리고 천당으로 직행하셨을 게다. 그런데 뭐가 슬플 게 있겠는가？ 오히려 기뻐해야지．

오륙 년 전에 부평 병원으로 찾아가 뵈었을 때는 그래도 사람을 알아보실 때니까 "왜 점심을 사 먹고 와？ 우리 집에 와서 먹지 " 하고서 나무라셨는데 재작년엔가 찾아뵈었을 때는 웃으며 인사는 받으셨지만, 누구인지 알아보시지는 못하셨다． 내가 해방 전에 개성에서 개종할 때 그해 가을부터 다음 해 봄까지 반년 동안을 매일 밤（문자 그대로 매일 밤） 신부님 방엘 찾아가서 어떤 때는 자정이 넘을 때까지 교리 지도를 받으며 괴롭혀 드렸는데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이 대해 주셨다. 따지고 보면 44년이 지난 옛날인데 어세 일 같이 떠오른다.

이제는 천주님 옆에 가 계시니 지상에 남아있는 연약한 영혼들을 위하여 천주님께 빌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신부님！

그리고 지금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물론 방 신부님의 전모가 아니라 신부님의 지극히 적은 일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북해에 뜬 빙산은 해면에 나타난 부분은 극히 소부분이고 바닷속에 잠겨있는 부분이 몇 갑절 더 크다고 하는데 이런 수도자나 성직자들의 덕행이라고 하는 것도 사람이 알지 못하는 부분은 얼마나 큰지 천주 이외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요 우리가 아는 부분이라는 것은 극히 적은 일부분인 것이다.

내가 개성 천주교회의 주임 신부인 방 신부님의 방문을 처음으로 노크한 것은 1942년 10월이었으니까 지금으로부터 44년 전의 일이다. 가톨릭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 비판 연구를 하여 온 지 7.8년간 신부님도 여러분 만나 보았지만 그들의 설명하는 이론만으로는 그 당시의 나의 지성을 만족하게 하지는 못하였다．

이제 방 신부님을 만나서 나는 총결산을 지은 셈인데 방 신부님의 신학에 대한 이론 이 훌륭하기도 하였겠지만 나는 신부님의 이론에 정복을 당하였다고 하기보다는 그의 덕의 힘에 완전히 포로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거미줄에 챙챙 감기 어 꼼짝 못 하게 되듯이 나는 신부님의 덕에 휘감기어 꼼짝 못 하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준 신부님의 성덕의 몇 가지를 소개하여 가톨릭 성직자의 성격의 구체적 면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물론 이것은 모든 가톨릭 성직자에게 공통된 것은 아니지만）

(1) 사람의 영혼을 지도하는데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

나는 1942년 가을에 방 신부님의 문을 두드리던 날부터 그해 겨울을 지나 그 이듬해 봄까지 반년 이상을 거의 매일 밤 신부님댁을 방문하였다. 교리의 이론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밤 가는 줄을 피차에 느끼지 못하고 자정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이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요. 거의 매일 그러하였다. 나는 그때에는 천주교의 신부는 연중 매일 새벽에 미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도 몰랐고 또 매일 성직자의 일과로 한 시간 내시 두 시간이 걸리는 경본（Breviarium）을 보아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자정이 넘어서 객을 보내고 「부레비아리움」은 언제 보셨으며 새벽에 일어나 미사를 드리시면 얼마나 고단하셨을는지 지금 생각하면 송구한 생각을 금치 못하겠다．

(2) 고무공과 같은 성격

신부님은 결코 나를 이론으로 설복시키려고 하시지는 않았다. 내가 열을 올려서 이론을 전개할 때면 신부님은 다 듣고 나서「예 조 선생 말이 옳소」 하시는 것이다． 나는 열을 너무 냈던 것이 싱겁고 부끄러워진다. 또 나는 가톨릭교회의 결점, 신부님들의 결점 심지어는 방 신부님 자신의 결점을 들어 공격하면 신부님은 결코 변명하지 않았다. 얼굴색 하나 변치 않고「참 그래요. 그 점은 우리도 고쳐야 할 점입니다」 하시는 것이다. 나는 마치 힘을 들여 공을 찼던 발이 공이 맞지 않고 헛 다리질 을 한 것 같은 감을 느끼게 된다. 방 신부님의 성격은 누르면 누르는 대로 들어갔다가 놓으면 도로 올라오는 고무공과 같은 성격이다．

(3)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것

어떤 날 오후이었다． 신부님 방에 가서 있노라니까 밖에 동리 아이들이 몰려와서 신부님 방문으로 들여다보며 어떤 아이는 창문턱에 올라가서 「신부님 놀아요！」하고

떠든다．

신부님은 문을 열고 나가셔서 「얘들아 오늘은 손님이 계셔서 너희들하고 못 놀겠다. 우리 내일 놀자 응？」하고 돌려보내시었다．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신 예수 님의 태도를 본받아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것만 아니라 아이들의 동무가 되어주시는 것은 보통이 아니다．

(4) 나하고 같이 전교나 하자

내가 영세한 후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당시 학교에서 쫓겨나서 무직 상태에 있을 때였다. 모 사건으로 인하여 약 2개월간 유치장에 들어갔던 일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민족주의 사상이 있다고 해서 학교에서는 본의는 아니었지만, 사표를 받아갔다．

그래서 객지 무직 상태로 무기한으로 있을 수도 없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신부님은 나를 만류하시는 말씀이다．

「조 선생은 돈 벌 욕심이 없다는 것은 내가 잘 아오 하루 세끼 밥만 먹으면 될 것 아니오？ 고향에 갈 것 없이 여기서 나하고 전교나 합시다. 내가 조 선생의 가족은 굶기지 않고 하루에 세끼 밥은 먹여 줄 테니까」 그리고 성당 앞에 집이 하나 나는 게 있으니 그것을 사 줄 테니 있으라는 것이다. 나를 붙잡아 두면 무엇으로 먹여 살리려고 그랬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그 당시 신부님의 수입은 한 달에 20원인가 30원인가 그 정도였고 미사예물도 그렇게 많지 않은 지방이었다. 신부님의 생활도 가까스로 해 나가시는 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하신 말씀은 빈말로 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천주 성의에 합치되는 일이라면 천주께서 필요한 비용은 다 갖추어 주신다는 신앙에서 하시는 말씀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방 신부님은 모든 사업에 있어서 경제면을 걱정하시지 않는 분이다. 나쁘게 말하면 경제면은 어두운 분이다. 신부님께서 복자회 수녀원을 설립하시고 운영하시는 것도 경제적 예산이 서서 하시는 것이 아닐 것이요, 모두가 이러한 신앙으로 해 나가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또 복자회 남자 수도원도 착수하셨다고 하니 자기는 가난하지만, 백만장자이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믿고 하시는 일이다. 신부님의 개인 살림은 어떤 때는 쌀이 떨어지는 때가 종종 있다고 들었는데 도무지 걱정하시는 일이 없이 항상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하신 신앙적 태도이다.

(5) 죄수의 팔찌

방 신부님께서 제기동 본당을 맡아 보실 때의 일이었다. 하루는 서울 갔던 길에 찾아뵈었더니 저녁을 먹여 주시고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우리 얘기나 하사」고 그러시기에 나는 여관비도 절약되겠고 해서 신부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았을 때 신부님의 팔목에 흰 금속으로 만든 팔찌를 끼신 것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손목시계의 줄인가 하였으나 손목을 한 바퀴 돌려보아도 시계는 없었다. 부유한 계급의 마담들이 금으로 팔찌를 만들어 끼는 일은 있지만, 가톨릭의 신부가 팔찌를 만들어 낀다는 것은 희극이 아닐 수가 없다. 거기에다 사치품치고는 재료가 고가한 것이 못되고 모양도 굵은 쇠사슬 같은게 죄수를 연상케 하였다. 시계가 없으니 시계 줄도 아니요. 모양으로 낀 팔찌라면 너무도 모양이 허술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한 개의 난센스다. 나는 신부님을 놀려드릴 화제가 생겼다고 생각하였다. 「신부님, 그 팔목에 끼신 게 무업니까？ 꼭 죄수의 쇠사슬 같군요」

나는 이렇게 말을 해놓고도 죄수의 쇠사슬이라는 것은 너무 지나친 표현이라 뉘우쳤다. 그러나 신부님의 대답을 듣고 나는 더한층 놀랐다.

「예, 죄수입니다. 죄수는 자유가 없는 거요, 간수가 감시를 하기때문에 간수가 하라는 대로 해야지 자기 맘대로는 할 수 없는 거요, 우리는 다 천주 앞에는 죄수입니다. 천주께서 내려다보시고 감시를 하시기 때문에 꼼짝 못 합니다. 」

「그러면 신부님, 정말 그런 뜻으로 끼신 겁니까？」 「물론！」

나는 보기 좋게 또 케오（knock out）를 당하였다. 방 신부님과 마주 앉아 얘기를 하면 화재의 대부분은 으레 성덕에 관한 이야기이다. 성인의 행적이라든지 우리의 신앙심을 성장시키는데 유익한 이야기뿐이다. 신부가 신앙심에 관한 얘기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하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통 많은 신부는 사적으로 만났을 때는 세속 담화로 꽃을 피우는 것이 보통이다. 하여튼 나는 방 신부님 댁에 가서 하룻밤만 지내면 나도 모르게 사신의 영혼 상태가 에레베타를 타고 쑤욱 높이 올라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여기까지 써 놓고 보니 방 신부님 개인의 성덕에 관한 찬사를 많이 늘어놓은 것 같아서 은밀한 가운데서 덕을 닦는 분에게는 오히려 욕이 될 우려가 없지도 않다. 그러나 「백성이 보고 놀라며 이러한 권을 사람에게 주신 천주를 찬양하리라」하신 말씀과 같이 이 글을 보시는 분은 방 신부님을 찬양하는 것보다 이러한 성직자를 우리 한국에 보내주신 천주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라며 붓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