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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경자 최양업신부 생애
하느님의 섭리 때문에 한국 젊은 학자들이 자발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여 천주교회를 창설한 것은 1784년 겨울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새로운 문화나 종교를 이단으로 여겨 오랫동안 배척해 오고 있었고, 따라서 천주교회의 창설은 곧 박해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한국 천주교회는 창설 초기부터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고, 첫 번째 박해(1791년)에서부터 네 번째 박해(1801년)에 이르는 동안 이미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크고 작은 박해가 일어남으로써 순교의 행렬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비밀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박해자의 눈을 피해 가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밀사를 중국으로 파견하여 그곳 선교사들과 연락을 취했고,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으며, 더 나아가 교황청에까지 서한을 보내 한국 천주교회의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1831년 9월 9일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Gregorius XVI) 성하에 의해 마침내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탄생과 성장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821년 3월,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최양업은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던 부친을 따라다니다가 경기도 부평을 거쳐 안양에 있는 수리산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 수리산 마을은 그 후 신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비밀 신앙 공동체로 변모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 대목구의 전교를 위임받은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선교사들을 한국으로 파견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경 감시가 심한 데다가 박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서양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난관을 극복하고 처음으로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는 프랑스 출신의 성 모방 베드로 신부였다.
1835년 말, 한국 천주교회에서 파견한 밀사들의 안내로 입국한 모방 신부는 즉시 전국의 신앙 공동체들을 순회하기 시작하였고, 다음 해 초에는 부평에 있는 최경환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최양업 소년을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5살이었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은 1836년 2월 6일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어 모방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한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3월 14일에, 김대건 안드레아가 7월 11일에 각각 도착하여 함께 생활하였다.
마카오 유학과 부제 서품
최양업은 1836년 12월 3일,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성서에 손을 얹고 순명을 서약하고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다음 해 6월 7일에는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으며, 이때부터 그곳에 임시로 설립된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마카오에서의 유학 생활은 1842년까지 계속되었는데, 1837년 11월에는 동료인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고, 1839년에는 마카오의 소요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장소를 옮겨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같은 해 말에는 마카오로 돌아오게 되었다.
최양업은 아직 공부가 끝나기도 전인 1842년 4월에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한국과의 통상 조약을 원하는 프랑스 함대에서 통역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때 극동 대표부의 장상인 리브와(Libois) 나폴레옹 신부는 박해로 끊어진 한국 천주교회와의 연락을 기대하고 최양업과 김대건을 각각 다른 프랑스 함대에 승선토록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남경에 도착한 후 더 이상의 북진을 원하지 않게 되자 최양업과 김대건은 프랑스 함대에서 내려 요동으로 가게 되었다. 한국으로의 입국로 탐색을 위해서였다. 이후 최양업은 만주의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인 페레올(Ferreol) 요한 주교로부터 계속 수업을 받았고, 1843년에는 리브와 신부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무염성모성심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중 조국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 그는 프랑스로 귀국해 있던 스승 르그레즈와(Legregeois) 베드로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였다.
저는 우리 부모들과 형제들을 따라갈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사들의 그처럼 장열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저의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워,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신학 수업을 계속하던 최양업은 1844년 12월 10일경, 동료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김대건 부제가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성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 한국에 입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있으면서 매스트르(Maistre) 요셉 신부와 함께 귀국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제 서품과 귀국
귀국로를 탐색하는 동안 최양업 부제는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1846년의 박해와 동료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조국에서의 애통한 소식에 대해 알렸다.
마침내 지루했던 기나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저의 동포들한테 영접을 받으리라 희망하면서 크게 기쁜 마음으로 용약하며 변문(한중 국경의 성문)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변문에 도착하여 보니 이 희망이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소식에 경악하였고, 저와 조국 전체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하였습니다.……특히 저의 가장 친애하는 동료 안드레아 신부의 죽음은 신부님께서도 비통한 소식일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회 밀사들의 만류로 귀국을 포기한 최양업 부제는 극동 대표부가 이전해 있던 홍콩에 도착한 뒤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귀국로 탐색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847년 8월에는 프랑스 군함을 타고 한국 해안에 도달하였지만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여 귀국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상해로 거처를 옮긴 최양업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마침내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때 그에게 사제품을 준 사람은 예수회원으로 강남 대목구장으로 있던 마레스카(Maresca) 주교였다.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는 그 해 5월에 상해를 출발하여 중국 요동 지방으로 가서 성 베르뇌(Berneux) 시메온 신부 아래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1월에는 매스트르 신부를 다시 만나 귀국을 시도한 끝에, 12월 3일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 매스트르 신부는 발각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한국에 입국하지 못하였다.
사목 활동과 선종
귀국 즉시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뒤,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 시작하였는데,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 5천 여 리를 걸어다니며 신자 3,815명을 방문하였다.
이후 진천 배티를 사목중심지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사목 활동은 이후 11년 6개월 여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휴식기간을 이용하여 한문 교리서 및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Penang)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다.
물론 전국에 산재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도중에 최 신부는 서양인으로 오인을 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포졸들의 습격으로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1859년에는 순방 도중에 발각되어 포졸과 외교인들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고, 주막에서 쫓겨나 반쯤 나체가 된 몸으로 눈쌓인 밤을 헤맨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신앙과 조국애, 신자들에 대한 애정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는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경상남도의 한 모퉁이에 갇혀서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나 다른 선교사들과 연락이 끊어진 채 지내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다시 서한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한국 천주교회를 부탁하였다.
우리를 환난에서 구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시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높으신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로부터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다행히 최양업 신부는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다 마친 후,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러나 과로에다 장티푸스까지 걸려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선종
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 교장인 알브랑(Albrand)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최양업 신부의 신심과 열심, 평소에 보여 준 사제로서의 분별력을 칭송하고, 동시에 그를 잃은 아쉬움을 표시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신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과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유일한 한국인 신부 최 토마스 신부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성사 집행 후에, 내게 자신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착한 신부가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한 소식을 맨 처음 받은 푸르티에(Pourthie) 신부는 그에게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있을 만큼 일찍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그의 입술에서 아직 새어나오는 말이 단지 두 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최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
그의 죽음은 저를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최양업 신부가 배론 신학교에서 170-180리 지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 당시 신학교에 있던 푸르티에 신부가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즉시 그는 최 신부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아주 열성적으로 부르는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뿐이었다. 최 신부의 선종 후 5개월이 지난 다음 베르뇌 주교의 주례로 성대하게 장례가 치루어졌고 그 시신은 배론 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2. 최양업 신부 생애 연대표, 1
1821년 3월 1일 | 충청도 홍주 다락골의 새터(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성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과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의 6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 * 부친 최경환의 보명(譜名)은 ‘영눌’ (榮訥), 일명 ‘영환’ (永煥) 또는 ‘치운’. |
1832년경 | 부친을 따라 고향을 떠난 뒤 서울의 낙동(駱洞, 지금의 회현동) 과 여러 지방을 거쳐 과천의 수리산(修理山)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4동의 담배촌)에 정착. |
1836년 2월 6일 |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서울의 신부 댁에 도착. 라틴어 수업 시작. * 3월 14일 : 동료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가 모방 신부 댁에 도착. * 7월 11일 : 동료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이 모방 신부댁에 도착. |
1836년 12월 3일 |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모방 신부가 바라보는 가운데 십자가 앞에서 성서에 손을 얹고 순명과 복종 서약을 함.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등의 인도를 받아 변문(邊門)으로 출발. |
1836년 12월 28일 | 조선 입국을 위해 봉황성 책문(柵門)에 와있던 샤스탕(Chastant, 鄭牙各伯) 신부와 만남. |
1837년 6월 7일 |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마카오에 도착. 이후 파리외방전교회(M. E. P.) 극동 대표부(대표 : 르그레즈와 신부) 구내에 임시로 설립된 조선 신학교에서 칼레리(M. Callery) 교장 신부, 르 그레즈와(P. L. Legregeois), 리브와(Libois) 스승 신부 등에게서 수학. * 그 후 르그레즈와 신부가 교장을 맡았고, 임시로 마카오에 머무르던 데플레슈(M. Desfleches) 신부가 신학생들을 잠시 지도함. * 11월 27일 : 동료 신학생 최방제(프란치스코)가 열병으로 사망. * 1838년 8월 14일 : 페레올(Ferreol, 高)신부가 계승권을 가진 조선대목구의 부주교로 임명됨(1843년 초에 가서야 교황의 칙서를 전달받음). |
1839년 4월 6일 | 마카오의 민란으로 인해 칼레리, 데플레슈 신부 등과 함께 다시 마닐라로 피신한 뒤, 도미니코 수도회의 원장 초청으로 롤롬베이(Lolombey) 농장에서 수학. * 9월 12일 :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서울에서 옥사 순교. * 9월 21일 : 제2대 조선 대목구장 엥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의 순교로, 페레올 주교가 조선 대목구장을 승계함. |
1839년 11월 | 마카오로 귀환. * 1840년 1월 31일 : 모친 이성례(마리아), 서울 당고개[堂峴]에서 참수로 순교. |
1840년 1월 8일 |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마카오에 도착. 신학생들의 지도를 함께 맡음. |
1841년 11월 | 철학 과정 이수, 신학 과정 입문. * 1842년 2월 15일 : 동료 김대건(안드레아),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세실(Cecille) 함장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의 에리곤(l'Erogone)호에 승선하여 마카오 출발. |
1842년 4월 26일 | 마카오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첫 번째 서한). |
1842년 7월 17일 | 만주 선교사 브뤼니에르(de la Bruniere) 신부와 함께 프랑스 군함 파보리트(la Favorite) 호에 탑승하여 마카오를 출발. |
최양업 신부 생애 연대표, 2
1842년 8월 27일 | 양자강(楊子江) 인근의 오송(吳淞) 항에 도착. 8월 31일경에 동료 김대건과 상봉. |
1842년 9월 10일 |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파보리트 호에서 하선하여 중국인 신자 범(范) 요한의 안내로 황세흥(黃世興)의 집에서 유숙. |
1842년 9월 11일 | 범 요한의 안내로 영국 배를 이용하여 상해의 강남 대목구장 베시(Besi) 주교와 만남. * 9월 17일 : 매스트로 신부와 김대건이 상해 도착. |
1842년 10월 2일 | 베시 주교의 주선으로 브뤼니에르 신부, 매스트르 신부, 동료 김대건, 범 요한 등과 함께 창가루 섬으로 출발. |
1842년 10월 12일 | 창가루 섬을 출항(첫 번째 탐색 여행). |
1842년 10월 22일 | 요동(遼東) 반도의 남단인 태장하(太莊河) 해안에 도착. 이튿날 범 요한이 하선하여 보낸 그 지방의 회장 두(杜) 요셉과 함께 하선하여 세관으로 감. |
1842년 10월 25일 |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의 두 요셉 회장 집에서 유숙. * 백가점 : 태장하 인근, 즉 훗날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거점이 된 차쿠 이웃에 있던 교우촌. |
1842년 11월 3일 | 매스트르 신부, 김대건 등과 이별,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요동 반도 북단에 있는 개주(蓋州) 부근의 양관(陽關) 교우촌으로 감. |
1842년 11월 | 페레올 주교가 있는 소팔가자(小八家子) 교우촌으로 가서 신학 공부를 계속. * 소팔가자 : 길림성(吉林省)의 장춘(長春) 서북쪽 사평(四平) 인근에 있던 교우촌. * 1843년 초 : 페레올 주교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칙서를 받고 비로소 제3대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된 사실을 알게 됨. * 3월 : 조선 입국로를 탐색하던 김대건이 백가점에서 소팔가자로 거처를 이전. |
1843년 3월 |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과 모친 이성례(마리아)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됨. |
1843년 12월 31일 | 개주의 양관에서 있는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만주 대목구장 Verrolles 주교 집전)에 참석. |
1844년 1월 14일 |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소팔가자로 귀환하여 신학 공부를 계속. * 1월 말 : 페레올 주교가 소팔가자로 귀환. * 4월 : 조선의 동북쪽 입국로 탐색에 실패한 김대건이 소팔가자로 귀환. |
1844년 5월 19일 | 소팔가자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두 번째 서한). |
1844년 4월~12월 | 신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삭발례로부터 제 1~5품까지 받음. |
1844년 12월 10경 | 김대건과 함께 부제로 서품됨. * 6월 4일 : 김대건 부제, 서울에서 제물포를 거쳐 상해로 건너 감. * 8월 17일 : 김대건 부제가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 * 10월 12일 : 페레올 주교,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 김대건 신부가 충청도 황산포(黃山浦) 나바위[羅岩]를 거쳐 조선 입국에 성공. |
1846년 1월 말 |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해 훈춘(琿春)으로 감(두번째 탐색 여행). |
최양업 신부 생애 연대표, 3
1846년 2월 중순 | 두만강 국경 마을에서 개시(開市)를 기다리던 중, 만주 관헌에 체포되었으나 이틀만에 석방됨.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소팔가자로 귀환하여 신학생들을 지도함. * 6월 5일 : 김대건 신부가 해로를 개척하던 중 순위도(巡威島) 등산진(登山鎭)에서 체포되어 해주(海州) 감영,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됨. * 9월 16일 : 김대건 신부가 서울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 조선에서 병오박해(丙午迫害) 발생. |
1846년 12월 22일 | 심양(瀋陽)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세 번째 서한). |
1846년 12월 말 |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변문을 통해 입국하려다 박해 소식을 듣게 됨. 조선 교회에서 보낸 밀사들의 만류로 입국을 포기하고,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출발(세 번째 탐색 여행). |
1847년 초 |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가 이전된 홍콩에 도착. 1839년과 1846년의 박해로 순교한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 |
1847년 4월 20일 | 홍콩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네 번째 서한). |
1847년 7월 28일 |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라피에르(Lapierre) 함장이 이끄는 군함 글로와르(la Gloire) 호와 빅토리외즈(la Victorieuse) 호를 타고 홍콩을 출발(네 번째 탐색 여행). |
1847년 8월 10일 | 조선 고군산도(古群山島) 부근에서 난파하여 섬에 상륙, 조선에 남고자 하였으나 라피에르 함장이 이를 거절함. |
1847년 8월 26일 | 상해 도착. |
1847년 9월 30일 | 상해에서 르그레즈와 스승신부에게 서한 발송(다섯 번째 서한). |
1849년 4월 15일 | 사백 주일에 예수회 회원이자 강남 대목구장인 마레스카(Maresca)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됨. |
1849년 5월 | 매스트로 신부와 함께 중국 배를 타고 백령도(白翎島)를 통한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상해로 귀환(다섯 번째 탐색 여행). |
1849년 5월 12일 | 상해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여섯 번째 서한). |
1849년 5월 | 상해를 출발하여 요동으로 감. 만주의 부주교인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신부 아래서 성직 수행. |
1849년 11월 3일 | 요동으로 온 매스트르 신부를 만남. |
1849년 12월 3일 |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시도. 매스트르 신부와 헤어져 단신으로 입국에 성공(여섯 번째 탐색 여행. 13년 만에 귀국). 서울에서 하루를 유숙한 뒤 다블뤼 신부에게 가서 병자 성사를 주고, 충청도로 가서 페레올 주교를 만남. |
1850년 초~6월 | 용인 한덕골(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리)에서 아우들을 만난 뒤 순회 전교 활동(5개 도 5천리). 신자 3,815명 방문, 2,401명 고해성사, 1,764명 영성체, 어른 181명과 어린이 94명 영세, 316명 보례, 278명의 예비 신자, 어린이 455명 임종 대세, 간월(경남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교우촌 방문. |
1850년 10월 1일 | 도앙골(충남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일곱 번째 서한). |
1850년10월~1851년 | 6월 순회 전교 활동. |
1851년 초 | 매스트르 신부의 입국을 도우려 신자들을 보냈으나 실패함. |
최양업 신부 생애 연대표, 4
1851년 10월 15일 | 절골(충북 진천군 백곡면 용덕리)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여덟 번째 서한). * 1852년 8월 : 매스트르 신부, 고군산도를 거쳐 입국에 성공. * 1853년 2월 3일 : 페레올 주교 선종 후 미리내에 안장됨. * 1854년 3월 : 쟝수(Jansou, 楊) 신부 입국. 6월 18일에 둠벙이(충남 공주군 신하면 조평리)에서 사망. |
1854년 3월 | 쟝수 신부가 타고 온 배편으로 페낭(Pinnang) 신학교로 가는 신학생 3명을 태워 보냄. |
1854년 9월 | 서한 작성(아홉 번째 서한. 분실됨). |
1854년 11월 4일 | 동골(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혹은 진천읍 문봉리)에서 리브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열 번째 서한). * 1854년 8월 5일 : 만주교구의 베르뇌 부주교가 제4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됨 * 12월 27일 : 베르뇌 주교, 만주 대목구장 베롤 주교 집전으로 주교 성성식. |
1855년 10월 8일 | 배론(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 신학교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열한 번째 서한). * 1856년 3월 27일 : 베르뇌 주교,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 등이 함께 조선 입국에 성공. |
1856년 9월 13일 | 소리웃(경기도 교우촌)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열두 번째 서한). |
1857년 3월 25일 | 서울에서 있는 다블뤼 신부의 보좌 주교 성성식 참가. |
1857년 3월 26일 | 한국 최초의 교구 성직자 회의에 참석. * 3월 29일 : 페롱(Feron, 權) 신부가 서울에 도착. |
1857년 9월 14일 | 불무골(풀무골, 충북 진천군 백곡면 갈월리)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열세 번째 서한). |
1857년 9월 15일 | 불무골에서 리브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열네 번째 서한). |
1858년 10월 3일 | 오두재(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혹은 경북 상주군 모동면 수봉2리)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열다섯 번째 서한). |
1858년 10월 4일 | 오두재에서 리브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열여섯 번째 서한). |
1859년 10월 11일 | 안곡(경북 선산군 무을면 안곡리)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열일곱 번째 서한). |
1859년 10월 12일 | 안곡에서 리브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열여덟 번째 서한). 공과(功課) 번역 작업 완료. |
1860년 | 죽림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의 죽밭) 교우촌에서 경신박해(庚申迫害)를 당해 숨어 지냄. |
1860년 9월 3일 | 죽림에서 르그레즈와, 리브와 스승신부께 서한 발송(열아홉 번째 서한). * 1861년 3월 21일 : 랑드르(Landre, 洪) 신부, 죠안노(Joanno, 吳)신부, 리델(Ridel, 李福明) 신부, 칼래(Calais, 姜) 신부 입국. |
1861년 6월 15일 | 베르뇌 주교에게 보고차 상경격하던 중 문경 혹은 진천 배티에서 장티푸스와 과로로 인해 푸르티에 신부로부터 종부성사를 받고 선종. |
1861년 11월 초 | 가매장 되어 있던 시신이 배론으로 옮겨져 안장됨. |
3. 최양업 태어나다
비옥한 땅에서 싹 틔운 신앙, 한국교회 초석이 되다
- 수리산성지 성당에 걸려 있는 최경환 성인의 가족을 담은 그림.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부모가 착해야 효자 난다”는 말이 있다. 가문의 분위기나 집안 전체의 전통도 어린 자녀에게 영향을 주지만, 그 누구보다도 부모의 존재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김대건, 최양업 모두 신심 깊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의 신앙을 토양 삼아 자신의 신앙을 싹틔울 수 있었다. 최양업의 탄생을 살피면 부모의 신앙이 얼마나 큰 모범이 되는지를 살필 수 있다.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두 번째로 최양업이 태어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신앙에서 멀어진 집안, 신앙을 택한 아버지
최양업 집안 역시 김대건 집안처럼 대대로 신자 집안이었다. 최양업의 조카 최상종이 최양업 신부 생애를 기술한 「최 신부 이력서」에 따르면 최양업 가문의 신앙은 1787년 최양업 신부 증조부인 최한일이 하느님의 종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우면서 시작됐다. 최한일은 열심한 신자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그 아들 최인주의 셋째 아들이 최양업의 부친인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이었다.
최양업의 조부 최인주는 홀어머니와 1791년 신해박해를 피해 선조 대대로 살아오던 한양을 떠났다. 정처 없이 길을 떠난 이들 모자는 충청도 홍주 누곡(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에 서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지으면서 정착할 수 있었다. 박해로 살던 곳도, 재산도 버리고 떠난 그들이었지만, 신앙만큼은 놓치지 않았고, 최인주는 이존창 집안 딸과 혼인하며 자녀들에게도 신앙을 물려줬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신앙에서 멀어지고 만다.
성 현석문(가롤로)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기해일기」는 당시 최양업 집안이 신앙에서 멀어진 것에 대해 ‘최경환전’에서는 ‘가산의 부유함’을, ‘이성례전’에서는 ‘친척들의 번성’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모든 것을 잃고 떠나야 했던 기해박해 때는 신앙을 지킬 수 있었지만, 신유박해 후에는 오히려 편안한 환경이 신앙으로 가는 발목을 잡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신앙을 선택함으로써 최양업 집안은 다시 신심 깊은 집안으로 변화하게 됐다. 어려서부터 교리를 듣거나 읽기를 좋아하던 최경환은 가족이 신앙에 냉담해진 것에 회의를 느껴 왔다. 이에 여러 차례 모친과 형제들에게 고향과 재물을 버리고 신앙생활을 하기 좋은 곳으로 떠나자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최경환은 가족에게 편지를 남기고 홀로 떠났는데, 이 일로 가족들은 크게 놀라 최경환을 데려와 함께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한양으로 떠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한양에서도 박해자들의 표적이 되자 이 산골 저 산골을 떠돌며 가시덤불과 돌자갈밭을 개간해 연명하다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에 교우촌을 형성했다.
최경환의 신앙으로 온 가족이 회심하고 신앙에 의탁해 떠난 때는 최양업의 나이 12살 무렵이다. 이 사건은 최경환의 장자로서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본 최양업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사제가 된 이후에도 이날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기도 했다. 최양업은 1851년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최경환을 따라 가족이 회심한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프란치스코(최경환)의 가족은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자진해 이런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다”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더욱 철저하게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하며 살았다”고 전했다.
충남대 국사학과 김수태(안드레아) 교수는 「최양업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연구-가문의 순교자 전기 중심으로」에서 “최양업 신부는 아버지 최경환을 천성적으로 타고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였다고 이해하면서, 그것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며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에 의하여 자기 가문의 천주교 신앙이 새롭게 변화됐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 배티성지에 있는 최양업 신부 동상.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신앙을 가르친 부모
최경환은 밭에서 일할 때나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나 항상 교리와 신앙에 대한 것만을 이야기하고 주변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백방으로 도와주며 남들이 탄복할 만큼 형제들과 화목하고, 모친을 섬기는 표양을 끊임없이 보였다. 최양업은 여덟 번째 편지를 통해 최경환에 대해 “얼마나 꾸밈없이 순박하게 그리고 몸짓을 해 가면서 말하는지, 듣는 사람은 누구나 탄복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애틋한 동정심과 결합돼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최경환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은 그 자체로 최양업에게 가르침이었다.
성 최경환이 삶 자체로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쳤다면, 최양업의 모친 복자 이성례(마리아)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최양업과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쳤다. 이성례는 충청도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경기도로, 또 험한 산길을 방황하는 시간 속에서도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자녀들이 먼 길을 걸으며 굶주리고 지쳐 칭얼거리면 요셉과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가던 이야기나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른 예수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자녀들에게 신앙을 위한 인내심과 참을성을 가르쳤다. 최양업은 후에 자신의 모친이 “아들들에게 구원에 유익한 말과 모범으로 천주교 교리와 기도문을 가르쳤다”고 회고한 바 있다.
차기진(루카) 소장(양업교회사연구소)은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에서 “최양업 신부의 신앙에 영향을 준 사람으로는 먼저 부친 최경환과 모친 이성례를 들 수 있다”며 “이들의 일상생활과 육화론적 영성은 성장기의 최양업에게 많은 영향을 줘 신학생의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했으며, 그들의 종말론적인 순교영성은 최양업에게 고난을 극복하고 선교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힘이 됐다고 할 수 있다”고 풀이했다.
김대건과 최양업의 탄생에서 볼 수 있는 신앙 전수 모습은 비단 김대건·최양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시대의 김대건·최양업의 탄생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모습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앙 전수 모습을 보면 김대건·최양업의 탄생에서 보여진 모습은 찾기 어려운 듯하다. 지난해 발표된 「한국천주교회 통계」에 따르면 0~4세 신자의 인구 대비 신자 비율은 2.7%(4만9949명)에 그쳤다. 모든 연령층 가운데서도 가장 적은 비율이다. 그만큼 자녀에게 유아세례를 통해 신앙을 전수하는 이가 적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한건 신부는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의 탄생은 ‘신앙의 유산’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고, 그것은 좋은 신앙이 선대를 통해 되물림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조 신부는 “김대건·최양업 신부님의 편지를 살피면 임자, 즉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강조하며 우리의 근원, 뿌리를 찾으려 했던 신앙이 드러난다”며 “집안과 부모를 통해 뿌리내린 신앙은 우리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최양업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청양다락골성지(생가터)
청양 다락골성지(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길 78-6)는 최양업의 조부 최인주가 정착하면서 교우촌으로 변모한 마을이다. 다락골의 초입에 있는 ‘새터’는 최인주의 가족이 정착한 곳이자 최경환, 최양업 부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성지에는 최양업의 생가터와 ‘최양업 신부 기념관’ 등이 조성돼 있다.
[가톨릭신문, 2021년 1월 24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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