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에서
손 원
버스 정류장은 시골 장터만큼이나 향수를 자아낸다. 내 차를 갖기 이전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마흔까지는 그랬다. 마흔 이후로의 대중교통 이용은 뜸해졌다. 특히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에 갈 때는 거의 자가용을 타고 갔기에 오랜 세월 동안 시외버스 이용은 가물에 콩 나듯 하다.
자가용 승용차를 갖고부터 나들이가 훨씬 편해졌다. 그래도 시내 나들이할 때는 대중교통을 더 자주 이용하는 것 같다. 시내 도로는 복잡하여 운전에 부담이 있고, 주차가 쉽지 않아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반면에 시골 갈 때는 이러한 문제점이 거의 없어 자가용 승용차로 간다. 대중교통과 달리 갈아타지 않아도 되고 지름길을 이용하기에 이동시간이 절약되는 등 여러 가지로 편리하다.
꽤 오래 승용차로 시골을 다녔기에 버스로 다닐 때의 낭만을 잊고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출발지와 도착지의 버스 정류장, 마을을 지나 칠 때마다 들리는 간이 정류장의 기억이 아름답게 되살아난다.
승용차의 편리함에 취해 수십 년간 그때의 추억을 잊고 살았다. 며칠 전 시골 버스 정류장 근처에 승용차를 주차해 놓고 불현 듯 그곳이 궁금하여 잠깐 둘러보았다. 버스가 잠시 정차하는 주차선은 노선별로 예전 그대로였다. 대합실로 들어가 보니 거기에도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 같지가 않았다. 다만 표 발매기 두개가 덩실히 놓여 있었다. 표 발매기 사용이 서툰 사람을 배려하여 대면창구 한 곳만 운영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4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놀라웠다. 10년이면 상전벽해로 변하는 시대에 버스 정류장의 대합실, 승하차장 구조가 40년 전 그대로였기에 더욱 정겨웠고 향수를 자극했다. 계란, 김밥을 담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터미널을 누비던 일명 광주리 아주머니가 있을 법도 해서 살폈다.
여행 시 사 먹는 간식거리는 여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광주리 아주머니는 간곳없고, 잘 단장한 편의점만 눈에 띌 뿐이다. 대합실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생각보다는 많았다. 그 틈에 장애인 한 분이 어둔한 말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었는데 아무도 그분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난감해하고 있었다. 초췌해 보여 누군가 식사를 했냐고 물으니 말이 없었다. 그는 몇 끼를 굶은 것처럼 보였다. 식사 한 끼 하라며 그에게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쥐어 줬다. 그러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돈 받기를 거절했다. 나는 굶어서야 되겠냐며 부담갖지 말라고 하니 그제야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젊은 시절 수십 년간 그 곳을 이용했지만 그 때는 눈에 띄지 않았던 불우 이웃이 단 5분 만에 눈에 띄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주머니 사정이 빈약했던 당시에 그런 모습이 흔할지라도 외면한 것 같기도 하다.
시골 버스 정류장에는 갖가지 간식거리를 담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판매하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광주리에는 간식거리가 가득하여 여행객들의 군침을 돌게 했다. 삶은 계란, 군밤, 땅콩, 오징어로 가득 채운 간식꺼리는 누구나 선호했다. 특히 식욕이 왕성했던 학창 시절에는 지갑이 얇아도 기꺼이 사 먹는 행복을 누렸다. 정류장에 버스가 들어오면 차창을 열고 광주리 아주머니께 먹거리를 사서 먹는 이가 많았다. 당시는 냉장 시설이 발달하지 않아 김밥, 삶은 계란, 삶은 옥수수 등은 가게에는 흔치 않았다. 오직 터미널 광주리 아주머니들만의 전유물인 듯했다. 그때 터미널 근처만 가면 구운 밤 냄새와 오징어 냄새가 군침을 돌게 했고, 시선은 아주머니의 광주리에 고정되었다. 친구와 여행할 때, 버스 좌석에 앉아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볶은 땅콩에다 캔맥주 한 켠씩 사서 마시면서 완행버스의 지루함을 달래기도 했다. 차창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먹는 간식으로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했다.
소도시 버스 정류장은 예로부터 그 지역의 대표적인 공공용시설물이기도 했다. 해당 자치단체의 얼굴이기도 하기에 대부분 도시 입구의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 농촌지역도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버스 정류장 주위는 아파트 등 고층 건물이 둘러 쌓고 있어 지금의 정류장은 다소 초라한 모습이다. 하지만 아직은 그 지역의 얼굴 역할을 하고 있다. 정류장 입구에는 벽체만큼이나 웅장한 전광판과 안내 지도가 있다. 전광판은 지역의 명소, 특산품을 홍보하고 있다. 대합실에는 홍보책자나 홍보물이 비치되어 있기도 하다. 낯선 지역을 갔을 때 먼저 버스정류장 찾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물론 대도시에는 보다 규모가 큰 시외버스터미널이 몇 곳 있기도 하다. 대구만 해도 북부 터미널, 서부 터미널, 동대구 터미널은 중요 공공시설물로 성업 중이다. 대도시 시외버스터미널은 소도시 정류장과는 다소 다른 느낌이다. 승객들의 편의시설은 훌륭하지만, 지역적 특색이 덜하고 그 지역을 대표하는 공공시설이라기에는 부족한 듯싶다. 그만큼 다른 공공시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도시 버스터미널도 나름대로 옛 향수를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마이카가 보편화된 지금 대도시의 시외버스터미널이나 소도시의 버스정류장이 위축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명맥을 유지하다가 오래되지 않아 폐쇄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우리의 옛 향수가 스며 있는 유서 깊은 시설이 지역 명소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원해 본다.
사필귀정 투영
손 원
사필귀정이란 모든 일은 끝내 바르게 된다는 뜻이다. 살다 보면 옳고 그른 것이 혼재되어 혼란을 겪을 수가 있다. 때로는 그른 것이 옳은 것을 압도하는 경우도 있어 억울해하기도 한다.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손해보는 일이 있어도 마음속으로 "사필귀정"을 되뇌면서 위로를 삼기도 한다. 정의는 불의를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은 살아가는데 산소와도 같은 것이다.
매사에 정의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의를 저지르고 양심을 속이고 사는 사람도 더러 있다. 교도소가 없는 나라가 없고 교도소마다 죄지은 이가 넘쳐나고 있다. 그들은 지은 죄에 대한 인위적인 죗값을 치르고 있다. 교도소에서 죄값을 치른다고 해서 그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평생 전과자란 족쇄가 채워져 남으로부터도 무언의 죗값을 죽을 때까지 받아야 하는 가혹함에 시달리기도 한다. 만약 지은 죄가 감추어져 인위적 처벌을 면했다고 해도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혹시 누가 알까 봐 마음졸이며 살아가는 이도 있다. 종교에서는 업보를 이야기 한다. 이승에서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 저승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또한 육신은 없어지지만, 영혼은 영원불멸한 것이어서 항상 업으로 따라다닌다고도 한다.
그것이 공평한 것이 아닌가 싶다. 누구나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잘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영원불멸의 업을 생각한다면 업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덕을 쌓고 살아갈 것이다. 남으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나의 업은 없고 상대방이 지는 업이기에 측은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와 상대방 모두가 업을 지지 않는 세상이 되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고, 사필귀정이란 용어도 사라질 것이다.
얼마 전 세상의 이목이 집중된 뉴스가 있었다. 사필귀정이 와 닿을 뿐만아니라 마음도 후련했다. 영구 미제로 남을 뻔했던 은행 강도살인 사건의 진실이 과학수사 기법의 발전으로 21년 만에 밝혀졌다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소식은, 1970년 사망한 김 모 상병은 휴가 후 복귀 중 음주 상태에서 달리는 열차에 탑승하려다가 실족해 숨졌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김 상병은 지휘관의 지속적인 금품 강요에 시달리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는 휴가 때 고가의 의류와 어항을 사 오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이를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 부닥치자 결국 달리는 열차에 뛰어든 후 숨졌다. 당시 김 상병은 음주 상태가 아니었고, 실족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군은 이를 숨긴 채 거짓 사실관계를 보고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근한 예에 불과하지만 영구미제 사건이 밝혀지고, 왜곡된 사실을 바로 잡은 누군가의 끈질긴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사필귀정은 진리이고 언젠가는 실현된다는 믿음을 갖는다. 생은 업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사필귀정이 두려운가? 두렵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자신할 수 있다면 교만하다고 할 것이고, 자신 없다고 하면 겸손하다고 할 것인가? 스스로 생각해 본다. 지금까지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다. 주변의 가족, 친구나 모든 지인은 나를 위한 울타리로 여겨왔다. 그러면서 때로는 가족을 위하고 친구나 지인에게 배푼다고 떠벌렸을 지도모른다. 그 정도만 되어도 다행이고 사필귀정을 두려워할 정도는 아닌듯싶다. 알게 모르게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을까? 사회생활을 하면서 공공에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을까? 잘한 일 보다 잘못한 일이 많을 듯 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보자. 아침마다 샴푸를 하면서 오염물질을 흘려보내고 있다. 나를 고용한 사람에게 충분한 보답을 하였을까? 아닐 수도 있다. 하는 일 없이 매달 꼬박꼬박 보수를 받아왔다. 어쩌면 보수란 명목으로 고용주의 돈을 도둑질했는지도 모른다.
가장이란 명목으로 아내나 자식을 옥죄지는 않았을까? 때로는 그들에게 가부장적으로 군림하면서 명령 일변도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친구들에게 주는 것보다 받은 것이 많지 않았을까? 내가 한 끼 낼게 하며 호기를 부린 적이 몇 번이나 될까? 누군가와 사이가 틀어졌을 때, 내 잘못은 조금이라고 생각하고 상대의 잘못이 크기에 나는 절대 굽히지 않는다고 한 적도 더러 있었다. 따지고 보면 오십보백보로 똑같은 잘못이 있음에도 나는 늘 의인처럼 대우받기를 원했다.
중추절 덩두렷이 솟은 보름달을 보며 사필귀정을 스스로 투영해 본다. 사필귀정의 업이 나에게도 싸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여생 동안 업을 푸는 삶을 살기를 기원 해 본다. 때로는 가진 것이 적어서 베풀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누군가 말했다. 이웃돕기나 기부하는 자들은 많이 가진 자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성의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늙어감에 따라 봉사활동도 어려워질 것이다. 하지만 능력에 맞는 봉사활동도 많다는 것을 잊지 말고 도전해 보기로 하자. 한평생 살고난 후 사필귀정에 비추어 볼 때 보람된 한 평생이었다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 보자. 둥두렷한 보름달에게 약속을 해 본다.
< 손 원 프로필>
2021《수필 춘추》등단 / 상록수필문학회, 달구벌수필문학회 회원 / 소설 "느티나무마을 친구들의 사랑과 우정" 외 / 전 경상북도 서기관
sonwon0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