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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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역사의 아이러니인 정몽주 선생의 표충비
포은공의 높은 절개”이다. 그리고 우편(남쪽)에 있는 비석 전면에는 전자와 같은 형태로 위에는 當今御製御筆(당금어제어필)이라 쓰여 있고, 그 아래에는 “危忠大節光宇宙 吾道東方賴有公(위충대절광우주 오도동방뢰유공)”이라 쓰여 있다. 이는 “높은 충성 큰 절개 우주에 빛나거니, 공이 있어 우리나라 도덕을 이어가네"라는 뜻이다.
202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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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집(遜齋集) 박광일(朴光一)생년1655년(효종 6)몰년1723년(경종 3)자사원(士元)호손재(遜齋)본관순천(順天)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의 문인. 권상하(權尙夏) 등과 교유
遜齋先生文集卷之一 / 詩 / 敬次圃隱先生眞像御製絶句 三首○幷序
鄭生纘志來示余御製詩三絶曰。往在丁亥。圃隱先祖眞像奉安於壺洞新祠。而聖上遣承宣賜祭。詠此三絶。幽明之受賜大矣。方謀書諸軸。以爲寶重之地。願爲之寫焉。而仍次聖韻則幸矣。竊惟圃隱先生生於麗季。倡明道學。以啓我朝文明之運。而末乃扶人紀立大綱。使箕範彛倫。大明於東方。所以列聖累加褒崇。而今我聖上又於數百載下。深感先生之盛德大節。而發於詠歎者如此。噫。國家億萬年無彊之休。亦將肇於此。猗歟盛矣。遂忘其書與詞之陋拙。齋心敬書于軸。謹拜稽奉和云。
殷師東幾世。禹範彛倫重。咸仰先生高。崧山萬古聳。
其二
久切羹墻慕。况瞻遺像高。滿庭忠義士。感激奠香醪。
其三
學究天人理。道傳洛建宗。刱施文德普。郁若成周逢。
손재집 제1권 / 시(詩)
포은 선생의 초상화를 읊은 임금의 절구시에 삼가 차운하다 3수○병서 〔敬次圃隱先生眞像 御製絶句 三首○幷序〕
정생(鄭生) 찬지(纘志)가 와서 내게 임금이 지은 절구(絶句) 세 편을 보여 주면서 “지난 정해년(1707, 숙종33)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호) 선조의 초상화를 호동(壺洞)의 새로 지은 사당에 봉안하였는데, 성상(聖上)께서 승지(承旨)를 보내 제사를 하사하고 이 절구 세 편을 내렸으니, 유명(幽明) 간에 받은 은혜가 큽니다. 이를 두루마리에 써서 보배로 삼고자 하니, 글씨도 써 주고 임금의 시에 차운까지 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생각하면 포은 선생이 고려 말에 태어나 도학(道學)을 앞장서서 밝혀 우리 조선이 문명화할 운을 열어 주셨으며, 마지막에는 인륜(人倫)을 부축하고 강상(綱常)을 세워 〈홍범〉의 떳떳한 윤상(倫常)을 우리나라에 크게 빛나게 하였기에, 여러 임금들께서 여러 번 포숭(褒崇)을 더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성상께서 또 수백 년 뒤에 선생의 성대한 덕과 큰 절개에 크게 감동하여 이처럼 시를 읊으셨으니, 아! 국가의 억만년 끝없는 아름다움 또한 여기에서 비롯되리니 빛나고 성하도다. 마침내 글씨와 글솜씨가 졸렬함을 잊고서 마음을 가다듬어 시축에 쓰고 나서, 삼가 머리를 조아리고 화답하노라.
기자가 동으로 온 게 언제던가 / 殷師東幾世
우 임금 〈홍범〉의 윤상이 무거워졌지 / 禹範彝倫重
선생의 숭고함을 모두가 우러르니 / 咸仰先生高
송악산처럼 만고에 우뚝하구나 / 崧山萬古聳
2
오랫동안 갱장의 추모 간절했는데 / 久切羹墻慕
하물며 청고한 초상화 우러름에랴 / 況瞻遺像高
뜰에 가득한 충의의 선비들이 / 滿庭忠義士
감격하여 향긋한 꽃과 술을 올리네 / 感激奠香醪
3
학문은 하늘과 인간의 이치 궁구하고 / 學究天人理
도는 낙양과 복건의 종지 전하여 / 道傳洛建宗
처음으로 문덕 두루 펼치니 / 創施文德普
성대한 문채가 성주 시대 만난 듯해라 / 郁若成周逢
[주-D001] 임금의 절구시 : 숙종(肅宗)이 지은 세 편의 절구를 가리킨다. 첫째 수는 “절의가 천추에 높아, 평생토록 나는 경모했다네. 역대 임금들 누차 포숭했으니, 선비들 누가 공경하지 않으랴?[節義千秋高, 平生我敬重. 烈祖屢褒崇, 士林孰不聳?]”라는 내용이며, 둘째 수는 “도성에 사당 있어, 남은 초상화 엄숙하며 맑고 높아라. 선비들 뜰에 가득 모임에, 숭선이 한 잔 술 올리노라.[洛中祠屋在, 遺像肅淸高. 衿佩盈庭會, 承宣奠一醪.]”라는 내용이며, 셋째 수는 “횡설수설 모두 이치에 맞으니, 우뚝하게 이학의 종장 되셨다네. 경륜의 사업 다 펼치지 못한 것은, 슬프게도 말세를 만난 때문이라오.!橫豎皆當理, 蔚爲理學宗. 不盡經綸業, 吁嗟叔季逢!]”라는 내용이다.[주-D002] 정생 찬지(鄭生 纘志) : 1691~1755.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선보(善甫), 호는 고암(顧菴)이다. 박광일의 제자로, 평생을 초야에 묻혀 살았다. 《豐墅集 卷12 處士鄭公墓表》 그리고 《국역 승정원일기》 경종 1년 8월 27일, 9월 1일, 9월 4일 기사의 동궁(東宮)을 불안하게 한 유봉휘(柳鳳輝)를 흉역(凶逆)으로 다스려 종사(宗社)를 안정시킬 것을 청하는 연명의 상소에 이름이 보인다.[주-D003] 기자(箕子) : 은(殷)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숙부(叔父)로, 주왕의 폭정을 간언하다 유폐(幽閉)되었는데, 주 무왕(周武王)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풀어 주자, 주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은나라 유민(遺民)을 이끌고 조선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주-D004] 홍범(洪範) : 《서경》 〈홍범(洪範)〉의 채침(蔡沈) 주(注)에 “《한지(漢志)》에 ‘우(禹) 임금이 홍수를 다스림에 하늘이 낙서(洛書)를 내려 주므로 이것을 받아 진열하니, 〈홍범〉이 이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사기(史記)》에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세우고 기자(箕子)에게 찾아가 천도(天道)를 묻자, 기자가 〈홍범〉을 말했다.’라고 하였다.……짐작컨대 〈홍범〉은 우 임금에게서 나왔는데, 기자가 이를 부연하고 보태서 이 편(篇)을 이룬 듯하다.”라고 하였다.[주-D005] 송악산(松嶽山) : 원문의 ‘숭산(崧山)’은 개성의 북쪽에 있는 산으로, 예로부터 소나무가 많아 송악산이라고 불렀다.[주-D006] 갱장(羹墻) : 선인(先人)을 추모(追慕)한다는 말이다. 요(堯) 임금 사후에 순(舜) 임금이 지극히 사모한 나머지, 자리에 앉으면 담에 요 임금의 모습이 나타나는 듯하고 밥을 먹으면 국그릇 속에 요 임금의 모습이 비치는 듯하였다.[坐則見堯於墻, 食則覩堯於羹.]고 한다. 《後漢書 卷63 李固列傳》[주-D007] 낙양(洛陽)과 복건(福建) : 송나라의 학자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와 주희(朱熹)를 말한다. 정호와 정이는 낙양 사람이고, 주희는 복건성(福建省) 건명(建明) 사람이다. 민(閩)은 복건성의 이칭(異稱)이다.[주-D008] 성주 시대(成周時代) :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도와 흥성했던 시대를 가리킨다.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유영봉 서종태 오항녕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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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재집(三山齋集) 김이안(金履安)생년1722년(경종 2)몰년1791년(정조 15)자정례(正禮)호삼산재(三山齋)본관안동(安東)시호문헌(文獻)특기사항정조(正祖) 때의 노론(老論) 산림학자(山林學者)
三山齋集卷之一 / 詩 / 善竹橋
決決田頭水。百步聞嗚咽。荒橋復何有。古道無車轍。云何使余來。重是侍中血。四顧爲踟躕。行復讀短碣。麗政昔失紀。天人久所絶。乘運在眞主。翊戴皆英傑。先生獨何者。區區補天裂。揮涕謝禪偈。抗歌矢臣節。廢興亮有命。義分所自竭。炯炯此心明。捐生非决烈。永惟君民學。在古儷夔卨。惜哉時不祥。何由見施設。自昔喪亂際。遭罹必聖哲。湛夷在一身。人綱寄不滅。天意信在茲。志士莫寃結。
삼산재집 제1권 / 시(詩) / 선죽교〔善竹橋〕
콸콸 흐르는 밭머리의 물소리 / 決決田頭水
백 보 밖에서 서글피 오열하누나 / 百步聞嗚咽
황폐한 다리는 다시 어디에 있는가 / 荒橋復何有
옛 길에는 수레 자욱 하나 없구나 / 古道無車轍
어이해 나로 하여금 오게 하였나 / 云何使余來
시중의 피를 소중히 여겨서라오 / 重是侍中血
사방을 돌아보며 발걸음 머뭇거리고 / 四顧爲踟躕
가다가 다시 작은 비석을 읽네 / 行復讀短碣
고려의 정사 옛날에 강기 잃으니 / 麗政昔失紀
천명과 민심이 끊긴 지 오래라오 / 天人久所絶
시운이 참된 임금에게 있었으니 / 乘運在眞主
태조를 도운 이들 모두가 영걸였다오 / 翊戴皆英傑
선생은 홀로 어떤 사람이기에 / 先生獨何者
구구히 찢어진 하늘을 기우려 했나 / 區區補天裂
눈물을 흘리며 게송을 사절하고 / 揮涕謝禪偈
소리 높여 노래해 절개를 맹세했다오 / 抗歌矢臣節
나라의 흥망은 참으로 천명이 있거니와 / 廢興亮有命
의리와 분수는 스스로 다할 뿐이라오 / 義分所自竭
형형히 이 마음 밝고 또 밝으니 / 炯炯此心明
목숨 버림은 순간의 울분 아니었다오 / 捐生非决烈
길이 생각건대 공의 요순군민지학 / 永惟君民學
옛날에 비하면 기와 설에 짝한다오 / 在古儷夔卨
애석하다 때가 좋지 않았으니 / 惜哉時不祥
이를 어찌 정사에 펼 수 있었으랴 / 何由見施設
예로부터 나라가 망하는 때엔 / 自昔喪亂際
화는 언제나 성철이 당했다오 / 遭罹必聖哲
멸망을 당함이 한 몸에 있어서 / 湛夷在一身
인륜이 이에 사라지지 않았다오 / 人綱寄不滅
천의는 참으로 여기에 있나니 / 天意信在茲
지사들은 굳이 원통해하지 마오 / 志士莫寃結
[주-D001] 선죽교(善竹橋) : 이 시는 저자 나이 31세 되던 1752년(영조28) 10월에 일이 있어 개성(開城)에 갔을 때 지은 것이다. 《三山齋集 卷8 記游》[주-D002] 시중(侍中)의 피 : ‘시중’은 고려 시대 최고 정무기관인 중서문하성의 수상직으로, 종1품이다.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1390년(공양왕2)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제수되었으며, 1392년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진 이성계(李成桂)를 살피고 돌아가는 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李芳遠)의 수하인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高麗史 卷117 列傳30 鄭夢周》[주-D003] 작은 비석 : 선죽교 동쪽으로 두 개의 비가 있는데, 하나는 다리 이름을 새긴 비이고, 다른 하나는 개성 유수(開城留守) 김육(金堉)이 세운 성인비(成仁碑)로, 1649년(인조27) 3월에 ‘고려 시중 정 선생 성인비(高麗侍中鄭先生成仁碑)’라는 글자와 그 아래에 ‘일대충의만고강상(一代忠義萬古綱常)’ 8자를 새겨넣었다. 그 옆에는 또 속칭 읍비(泣碑)라고도 하는 비가 있는데, 정몽주의 녹사였던 김경조(金慶祚)를 위한 녹사비(錄事碑)이다. 이밖에 또
선죽교 서쪽에 영조의 명으로 세운 비각(碑閣)이 있는데, 1740년(영조16) 9월 3일에 영조는 ‘도덕과 충정이 만고에 이르니 포은공의 곧은 절개는 태산처럼 높도다.[道德精忠亘萬古, 泰山高節圃隱公.]’라는 어제시(御製詩)를 비석에 새겨 세우게 하고 대제학 오원(吳瑗)에게 명하여 사적을 기술하여 비석의 뒷면에 새기게 하였다. 《大東地誌 卷2 開城府 橋梁 善竹橋》 《英祖實錄 16年 9月 3日》 《潛谷遺稿 潛谷年譜》 《農巖集 卷23 游松京記》 《淵齋集 卷19 雜著 西遊記》 《硏經齋全集 續集 册12 記圃隱錄事》
[주-D004] 구구히 …… 했나 :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옛날에 여와씨(女媧氏)가 오색(五色)의 돌을 구워 찢어진 하늘을 기우고 자라의 발을 잘라 사방의 기둥으로 받쳐 세웠다.[昔者女媧氏煉五色石以補其闕, 斷鼇之足以立四極.]”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여기에서는 정몽주가 망하는 나라를 부질없이 지키려 했다는 말이다.[주-D005] 눈물을 …… 맹세했다오 : 게송은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鄭夢周)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해 불렀다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성황당 뒷담이 다 무너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아니 죽으면 또 어떠리.”라는 〈하여가(何如歌)〉를 이른다. 정몽주는 이에 답하여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는 〈단심가(丹心歌)〉를 지어 고려 왕조에 대한 일편단심을 노래하였다. 《海東樂府》[주-D006] 요순군민지학(堯舜君民之學) : 자신의 임금을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고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드는 학문을 이른다. 은(殷)나라의 탕왕(湯王)이 사람을 보내 이윤(伊尹)을 부르자 이윤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탕이 다시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 부르자 “내가 초야에 묻혀 이대로 요순의 도를 즐기는 것보다 내 차라리 이 임금을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드는 편이 낫지 않겠으며, 내 차라리 이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드는 편이 낫지 않겠으며, 내 자신이 직접 그러한 치세(治世)를 보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與我處畎畝之中, 由是以樂堯舜之道, 吾豈若使是君爲堯舜之君哉? 吾豈若使是民爲堯舜之民哉? 吾豈若於吾身親見之哉?]”라고 하였다 한다. 《孟子 萬章上》[주-D007] 기(夔)와 설(卨) : 순(舜) 임금 때의 현신(賢臣)이다. 기는 전악(典樂)으로 오성(五聲)ㆍ육률(六律)ㆍ팔음(八音)을 바르게 하였다. 설은 사도(司徒)가 되어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우(禹)의 치수(治水)를 돕기도 하였다. 설은 상(商)나라의 시조이다.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이상아 (역) |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