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영화 “영웅” 관련. 안중근 하얼빈 의거에 대한 천주교회의 반응
이토 포살은 그 당일 한국 천주교회에도 알려졌다. 하지만 이토를 저격한 이가 안중근이라는 사실은 곧바로 알려지지 않았다. 10월 28일 뮈텔 주교는 동경대교구의 뮈가뷔르(r X, Mugabure, 1850〜 1910) 주교로부터 “일본의 유력 신문이 이토의 암살자가 천주교 신자라고 하고 있으므 그 가부를 즉시 회답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뮈텔 주교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답전을 보냈다. 10월 29일 국내에서도 같은 내용이 보도 되자,뮈텔 주교는 항의하기도 하였다. 10월 30일 뮈텔 주교는 이토를 저격한 이가 안응칠 이라는 소식을 접했지만, 그가 안중근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11 월 2일 뮈텔 주교는 안응칠이 안중근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뮈텔 주교는 이토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고,11월4일 일본헌병대 병사(兵舍)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했다.
〈경향신문〉은안중근의거에 대해 자세히 보도하는 대신, 이토의 죽음을 추모하는 기사를 실었다. 특히 11월 12일자 ‘이등공의 조난에 대하여 경고하노라’는 기사에서 “공을 암살한사람은 나라를 사랑함으로 하였다 하며, 그 일을 하 기 위하여 제 생명을 일정 바치기로 예비하였으니 그 마음이 영특하고 용맹하다 하나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악한 일인즉 악한 일이라 하노라”고 하며 안중근의거를 ‘악한일’로 규정하였다.〈경향신문〉이 천주교회의 기관지였기 때문에 안중근 의거가살인 행위라는 인식은 천주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의 허락이 없었음에도 3월 8일부터 11일까지 안중근을 면회하고 그에게 성사를 주었다. 이로 인해 3월 15일 그는 뮈텔 주교로부터 2개월 동안의 성무 집행 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런데 빌렘 신부가 교구장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여순에 간 것은 안중근 의거를 공감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하느님 의 자녀 인 안중근을 끝까지 인도하고, 이토 처단을 ‘교회회오’ 하도록 하며, 선량한 신자로 복귀시키기 위함이었다. 즉 종교적 신념에 의한 것이었다.
이처럼 선교사들은 안중근의거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리하여 안중근의거는 천주교회 내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오랫동안 애국자로서의 안중근은 기억된 반면, 신앙인으로서의 안중근은 잊히게 되었다.
천주교회 내에서 안중근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1970년대 이후의 일이다.1979년 9월 2일,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 기념 추모 미사가노기남 대주교의 주례로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것이다.
이 미사는 천주교회가 신앙인 안중근에 대한 그동안의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하고, 그를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후 명동 본당은 안중근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높이기 위해1986년 3월 26일 한국교회사연구소 발의로 ‘안중근 의사 순국 76주기 추모미사’를 봉헌하였다.
이 미사를 계기로 1987년 9월에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하 ‘정의구현사제단’)이 새남터에서 추도 미사를 봉헌하는 등 천주교회에서 안중근을 기리는 활동이 꾸준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1990년대에는 학문적으로 신앙인 안중근을 재조명하려는 음직임이 나타났다. 1990년 3월 25일에는 정의구현사제단이 ‘안중근 서거 80주년’을 기념하여《안중근 의사추모 자료집》을 간행하였고, 1993년 8월 21 일에는 한국교회사연구소 외곽 단체 인 한국가톨릭문화사연구회 주최로 ‘안중근의 신앙과 민족 운동’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특히 심포지엄과 함께 거행된 추모 미사에서 서울 대교구장 김수환(金壽煥,스테파노,1922-2009) 추기경은 당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잘못 판단한 데 대한과오를 반성하며, 안중근이 이토를 포살한 행위의 정당성을 천명함으로써 신앙인 안중근에 대한 재평가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자료: (한국천주교회사책권35-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