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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회봉사 신학
선교는 영적인 활동이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업인 반면에 사회봉사 활동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선한 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한국교회 안에 깊이 퍼져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은 성경을 조금만 읽기 시작하면 이내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사회봉사는 선교와 마찬가지로 성서의 하나님이 명하는 매우 거룩하고 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봉사라는 말에 신학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봉사는 신학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영생의 길과 관련을 맺고 있다.
사회봉사는 정말 영적인 일인가? 그리고 그것은 정말 영생의 길과 관련을 맺고 있는가? 사회봉사에 신학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어색하지 않은가? 사회봉사 신학이란 무엇인가? 사회봉사 신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와 같은 문제를 다음의 글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 무엇이 진정한 경건인가?
무엇이 진정한 경건인가? 신약성서의 야고보서는 다음과 같이 경건에 대해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 이 본문에서 우리는 경건이라는 매우 영적이고 종교적인 단어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보고”라는 세상적인 사회적 책임과 결부되어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야고보서에 의하면 진정한 경건은 곤경 속에 있는 사람을 건지는 사랑의 행위 속에 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 경건의 소극적 차원이라면 경건의 적극적 차원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경건을 종교적이고 영적인 삶과 연결해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경건한 교회는 영적이고 종교적인 훈련에 치중하는 교회라는 인식도 아울러 갖고 있다. 이러한 경향과 인식은 상당한 부분까지는 정당하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다시 한번 유념해야 하는 것은 진정한 경건은 곤경 속에 있는 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감당하는 곳에 존재한다고 선언한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음에 나오는 구약의 말씀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
위의 본문에서 우리는 금식이라는 단어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눠주며”와 같은 행위와 결부되어 언급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금식이라는 단어는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닌 영적이고 종교적인 단어이다. 그런데 이 영적이고 종교적인 단어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눠주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구체적 책임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금식은 흉악의 결박과 멍에를 풀어주는 것이요,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다. 곤경 속에 있는 자에 대한 구체적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참된 금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구체적 사랑의 행위를 요청하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한국교회 속에서는 오랫동안 영해(靈解)되어 설교 된 적이 많았다. 영해해서 설교한다는 것은, 주린 자를 영적으로 주린 자로 해석하고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라는 말씀은 그들에게 떡을 주라는 말씀이 아니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해 영적으로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예수님을 전하라는 말로 해석해서 설교하는 것이다. 이렇게 설교하면 많은 한국의 성도들은 그 설교를 신령하다고 평가하고 그렇게 설교한 목사를 신령한 목사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정반대로 뒤집어서 설교한 0점짜리 설교이다. 그것은 신령한 설교가 아니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격의 설교이다. 이런 설교들 때문에 한국의 교회는 성서가 언급하고 있는 곤경에 처한 자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책임을 망각하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눠주라”는 이 이사야서의 말씀은 주린 자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책임을 요청하는 말씀이다. 이것을 영해 해서 종교적인 영적 책임으로 바꾸면 안 된다. 성서의 하나님은 바로 이런 경제적, 사회적 책임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시다. 성서의 하나님은 경제적,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고 종교의 세계 속에서 만족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이고 경건한 행위가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가증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하나님에 의하면 고아를 신원하며 과부를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따르는 것이고 영적이고 경건한 행위이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1:10~17).
위에 인용한 이사야의 예언과 같은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도 나타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십일조를 드리고 성회에 참석하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행위의 가치를 예수님은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것 역시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인간이 행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 일을 위해 힘쓰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행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정의와 자비와 사랑을 버리고 성회로 모여 하나님께 분향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위선이요,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예언자 이사야와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의 본질이 정의와 자비와 사랑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의 경건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길에 서서 큰 소리로 기도는 하지만, 정의와 자비와 사랑을 버리고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눅20:47) 자들이요 “탐욕으로 가득 찬”(마23:25)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의 진정한 경건은 사랑이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정신이고(마22:34~40)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경건이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십일조와 주일성수와 금식기도 등을 강조해 왔다. 교회의 경건한 성도들은 십일조를 드리고 주일성수에 힘쓰고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출석해야 했다. 이와 같은 강조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잘한 것이라고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경건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예수님에 의하면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은”(막12:33)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이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은”(막12:34) 사람이었다.
무엇이 진정한 경건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사랑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고(롬13:10), 사랑하는 자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이루고 있는(롬13:8)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거짓말하는 자(요일4:20)인 동시에 진정으로 경건한 자만이 참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요일4:7) 진정 경건한 사람인 것이다.
2.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성서의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인가? 그는 가난한 자를 사랑하고 의지할 곳 없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신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은 성서 전체에 걸쳐서 매우 분명하게 나타난다. 가톨릭의 구약학자 서인석은 구약 율법의 정신은 가난한 자에게 권리를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그 핵심이고 구약의 예언자는 가난한 자의 대변인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구약의 지혜문학과 시편 등의 성문(聖文) 시집은 가난한 자가 하나님을 통해 얻게 되는 기쁨을 노래한 것으로 정의했다. 이와 같은 서인석의 정의는 구약의 핵심을 잘 간파한 훌륭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성서의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보호하고 의지할 곳 없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먹을 양식과 거처할 집을 마련해 주시는 신이시다. 바로 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교회의 사회봉사 신학의 근거이다.
1)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보호자이신 하나님
성서 속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불쌍한 사람은 고아와 과부이다. 이들이 불쌍한 이유는 그들을 먹여주고 보호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나 배고프고 학대받기 쉽다, 그런데 성서의 하나님은 이 불쌍한 고아와 과부의 눈물을 기억하시고 이들을 돌보시는 신으로 나타나고 있다. 시편 68편 5절에 의하면, 하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를 보호하는 재판장으로 정의되어 있다. 성서의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로, 과부의 보호자로 정의해도 이 정의는 결코 과장되거나 지나친 정의는 아니다. 오랫동안 기독교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정의할 때 하나님의 불변,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 등의 추상적인 개념으로 정의해 왔다. 이와 같은 정의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기독교 신학이 받은 결과로 그 나름대로 장점은 있으나 하나님의 모습을 매우 추상화시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 문제점은 성서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모습을 파악하는 데 실패할 가능성과 깊이 연계되어 있다. 하나님의 불변이나 하나님의 무소 부재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잘 파악되지 않았던 그러나 성서 속에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이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보호자이신 하나님의 모습이다. “세상에 신도 많고 주도 많지만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말로 신이시요 주이시다. …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세워 주시고 떠도는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신10:17~18). 성서의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고 그들의 인권을 세워 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인권을 짓밟고 이들을 학대하는 일은 용납될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 행위가 된다. “떠돌이와 고아의 인권을 짓밟지 말라. 과부의 옷을 저당잡지 말라”(신24:17).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출22:22~24).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보호자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는 것이다(약1:27). 하나님이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보호자라는 이 성서의 정신은 고대 다른 종교의 신의 모습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독특한 특징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고대 종교의 신은 제왕이나 지배자의 신으로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고대의 왕정 사회에서 왕은 일반적으로 신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신을 섬긴다는 것은 곧 신의 아들인 왕을 섬기는 것과 일치했다. 따라서 신은 왕권을 보호하고 지배 체제를 영속화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이런 일반적인 종교의 신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구약의 예언서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왕권을 보호하기는커녕 예언자를 시켜 왕권의 부패를 심각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언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대변인으로 고아와 과부의 아픔을 신원해 주는 자로 나타나고 있다. 예언자 이사야에 의하면 하나님은 과부의 재산을 털고 고아들을 등쳐 먹는 자들을 시체들 사이에 뒹굴도록(사10:1~4)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보호자라는 성서의 정신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가르쳐 준다. 교회는 고아와 과부로 상징된 의지할 곳 없고 보호받을 길 없는 자들의 아버지요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소년 소녀 가장들의 문제들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교회가 결손 가정을 돌보는 것은 부차적인 과제가 아니라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보호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명령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교회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사회봉사 활동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활동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2) 인권의 보호자이신 하나님
성서의 하나님은 또한 인권의 보호자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을 가혹하게 대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신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품을 파는 사람을 억울하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너희 나라, 너희 성문 안에 사는 사람이면 같은 동족이나 외국인이나 구별없이 날을 넘기지 않고 해지기 전에 품삯을 주어야 한다. 그는 가난한 자라 그 품삯을 목마르게 바라고 있는 것이다. 너희를 원망하며 외치는 소리가 야훼께 들려 너희에게 죄가 돌아 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신24:14~15).
너는 이웃을 억누르거나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네가 품꾼을 쓰면, 그가 받을 품값을 다음날 아침까지, 밤새 네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레19:13).
맷돌은커녕 맷돌 윗짝도 저당잡힐 수 없다. 그것은 남의 목숨을 저당잡는 일이다(신24:6).
생존과 관계되는 것은 결코 억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생존권의 보호자이기 때문이다. 생존권이 침해당하는 그곳에는 하나님의 분노와 아픔이 존재한다.
주인의 손을 벗어나 너희에게 피신해 온 종을 너희는 본주인에게 내주지 못한다. 어느 성 안에서든지 너희와 함께 살고 싶다고 하면 어디든지 그가 고르는 곳에서 살게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를 괴롭혀도 안 된다(신23:16~17).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에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지 않았느냐?(출22:20).
주인의 손을 피해온 종을 주인에게 돌려주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 종은 주인의 손에 죽을 것이다. 이 가련한 종의 생명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이 명령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위의 구절들은 피신자, 망명객, 힘없는 외국인의 인권과 관련해서 깊이 생각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서는 인권의 보고이다. 그리고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에게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신다. 성서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인 종은 종살이 7년째 되는 해에는 해방시키기를(출21:2) 원하시고 또다시 종살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양 떼와 타작마당에서 거둔 것과 술틀에서 짜낸 것을 한 밑천 되게 마련해 주어서”(신15:12~15) 해방해야 한다고 명하고 있다. 종살이했던 자들을 인간답게 살도록 만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그 핵심에 들어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인간다움을 상실하고 비참한 상태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오히려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다움을 상실해 버린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시고 이를 위해 행동하시는 신이시다.
3) 곤경 속에 있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기독교 사회봉사 신학은 곤경 속에 있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그 신학의 기초를 두고 있다. 성서의 하나님의 매우 두드러진 성품은 곤경에 빠진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이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긍휼과 자비이다. 이 긍휼과 자비가 결정적으로 계시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곤경 속에서 사형 선고를 받아 죽어야 할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이들을 구원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회봉사 신학은 십자가의 사건에 정초 되어 있는 신학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곤경 속에 있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그는 채무자가 채무로 인해 겉옷까지 담보로 잡혀 밤의 추위를 막을 길 없는 가련함을 기억하시고 “해 질 무렵이면 그 담보물을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는 그 옷을 덮고 자리에 들며 너희에게 복을 빌어 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의로운 일이다”(신24:13)라고 명하고 계신다. 성서의 하나님은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와 농토 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가련함을 기억하시고 “너희가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너는 내 밭에 모서리까지 모조리 거두어들이지 말라. 그리고 거두고 남은 이삭은 줍지 말라. 가난한 자와 나그네가 따먹도록 남겨 놓아라”(레19:9~10)라고 명하셨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성서의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정의했다.
여호와는 …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시146:6~9).
성서의 하나님이 하시는 매우 중요한 일이 곤경에 있는 자를 구원하시는 일임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곤경 속에 있는 억울한 사람을 위해 신원하시는 분이시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보호해 주시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시편 68편 6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갇힌 자에게 행복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이시다. 시편 14편 6절에서는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피난처로 정의되어 있다.
하나님이 곤경 속에 있는 자를 구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시편 기자에 의하면 왕은 곤경 속에 있는 자의 보호자여야 한다. 왕은 약한 자의 권리를 세워 주고(시72:2), 백성들을 억압하는 자를 쳐부수고(시72:4), 빈민들을 구제해야 한다(시72:4). 하나님은 자신이 행하시는 일에 상응하는 행위를 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긴다는 것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곤경 속에 있는 자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활동에 상응하는 사회봉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5~17). 일용할 양식이 없는 자를 먹이지 아니하는 교회의 믿음은 죽은 것이다. 사회봉사 신학이 살아있지 않은 공동체는 죽은 교회요 죽은 공동체이다.
4) 가난을 제도적으로 없애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
구약의 율법 가운데 안식년 법이나 희년 법을 살펴보면 가난을 제도적으로 없애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살펴볼 수 있다. 7년마다 한 번씩 종을 해방하라는 명령(출21:1~2, 신15:12~15)이나 빌린 돈을 탕감하라는 명령(신15:1~2)은 가난의 영속화를 단절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잘 반영된 규정이다. 또한 7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해에 오는 희년이 되면(50년째 되는 해) 땅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제 소유지로 돌아가야 한다는 규정 역시 영속화될 수 있는 가난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의지가 그 속에 들어있다. “네 동족 가운데서 누가 옹색하여 제 소유를 팔았을 경우에는 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와서 그가 판 것을 되돌려 살 수 있다. 그것을 되돌려 살 친척이 없을 경우에, 그가 나중에 스스로 힘이 생겨 되돌려 살 길이 트이면, 판 다음에 지나간 햇수에 해당하는 값을 빼고, 나머지를 그 땅을 산 사람에게 물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소유지로 돌아 갈 수 있다. 그러나 되돌려 살 만한 돈이 손에 들어 오지 않으면 그가 판 것은 희년이 오기까지 그것을 산 사람의 손에 남아 있게 된다. 그랬다가 희년이 되어 해약이 되면 그는 제 소유지로 돌아갈 수가 있다”(레25:25~28). “오십 년이 되는 이 해를 너희는 거룩한 해로 정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킬 해이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찾아 자기 지파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레25:10). “너희와 함께 사는 너희 동족 가운데 누가 옹색하게 되어 너희에게 몸을 팔았을 경우에 너희는 그를 종 부리듯 부리지 못한다. 너희는 그를 품꾼이나 식객처럼 데리고 살며 일을 시키다가 희년이 되면 자식들과 함께 집에서 내보내어 자기 지파로 조상의 소유지를 찾아 돌아 가게 해야 한다”(레25:39~41). 우리는 이상에서 희년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희년 법은 가난으로 종이 되어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그 가난의 사슬을 끊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드신 제도이다. 물론 이 희년 법이 역사적으로 거의 지켜지지 못했지만, 영속화되는 가난을 제도적으로 막아보려는 하나님의 의지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가난한 동족들에게 세나 이자를 받지 못한다(레25:35)는 규정 역시 가난한 자를 보호하고 그에게 살길을 열어주기 위한 또 하나의 하나님의 법이다.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살리기 위한 법과 제도를 마련하신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교회가 개인적인 동정의 차원에서만 가난한 자의 문제를 취급하고, 법적인, 제도적인 차원으로까지 발전시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은 가난한 자를 위한 법과 제도를 마련하신 성서의 하나님의 의지와는 상당한 부분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3. 영생의 길로서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
신약성서 누가복음 10장 25~27절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서 거의 다 죽게 된 사람을 보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쳐갔지만, 유대인들이 천하게 생각하고 상종하기조차 꺼렸던 사마리아인은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짐승에 태워 주막까지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주며 주인에게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돈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겠다고 한, 이 유명한 비유 속에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는 말씀은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의지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구약의 율법의 정신이나 예언자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역시 곤경 속에 있는 자,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서는 구약의 율법이건 예언서이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건 모두 한결같이 곤경 속에 있는 자,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명하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유념해야 하는 것은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0:25)라는 한 율법사의 영생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예수께서 언급하셨다는 점이다. 진정한 영생의 길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었고 바로 이것이 또한 영생의 길이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을 도덕적인 착한 행실 정도로 밖에 그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많은 한국의 교회들은 이것이 바로 영생의 길이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이 영생의 길이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뜻은 마태복음 25장 31~46절의 양과 염소의 비유 속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41~46).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영생의 길이고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영벌의 길인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정신은 디모데를 권면한 바울의 말씀 속에서도 계승되어 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8~19). 영원한 생명은 선한 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선한 일에 힘쓰고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교회의 부차적인 일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인 과제이고 영생의 길이다. 전도는 영적인 일인데 반해 봉사와 구제는 세상적인 일이라는 사고방식은 고쳐야 한다. 사랑과 봉사 활동은 곤경에 빠진 자를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에 동참하는 것이고, 교회는 바로 이 일을 통해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게 된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뜻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42)이다. 교회는 사랑과 봉사 활동을 통해 그 선한 빛을 드러내는 것이고 바로 이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4. 평화와 사랑의 공동체 형성
기독교 사회봉사 신학이 지향하는 것은 단순한 구제나 자선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공동체, 곧 평화와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평화와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중요한 신학적 정신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 청지기 정신
재산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정신은 재산에 대한 청지기 정신이다. 이 청지기 정신은 자본주의 정신도 아니고 사회주의 정신도 아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레25:23). 자기 소유로 등기된 땅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자기의 사유지로 생각하면 안 된다. 자본주의적인 사유 개념 속에는 공동체를 충분히 파괴할 수 있는 악한 요소가 들어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다른 재산도 하나님의 것이다. 인간은 잠시 그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청지기는 언제나 주인의 뜻을 생각하고 주인의 뜻에 따라 재산을 관리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이 있을 때 청지기는 그 가난한 이웃을 반드시 도와주어야 한다. 도와주면서 거드름을 부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주인의 것으로 주인의 뜻을 행하는 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청지기라는 개념은 관리자라는 개념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관리자라는 말보다 청지기라는 말이 훨씬 성서의 정신을 대변한다. 왜냐하면 관리자라는 말속에는 자본주의적인 기업의 경영자 개념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청지기 정신은 사회주의 정신과도 완전히 일치되는 정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유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국유화 내지는 공유화하는 사회주의 정신 속에는 개인의 책임성이 희석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청지기 정신은 모든 것을 국유화 내지는 공유화하자는 정신이 아니다. 모든 것이 국유화되면 청지기 정신은 아무런 의미 없는 정신이 된다. 사회 속에는 공유하는 것이 좋은 것도 있고 개인의 책임으로 두는 것이 좋은 것도 있을 것이다. 청지기 정신은 모든 것을 국유화 내지 공유화하는 정신이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정신이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신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맡은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는다. 그러므로 그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 자신의 창의성을 살리고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발전시켜야 한다.
2) 나눔의 신학
기독교 사회봉사 신학은 나눔의 신학이 그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나눔의 신학은 가난한 자를 없애기 위한 신학이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공동체는 나눔의 공동체였다. 그들은 가난한 자를 위해 “재산과 소유를 팔아 … 나누어 주었다”(행2:45). 그 결과 이들의 공동체 속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게”(행4:34) 되었다. 나눔이라는 것은 이 땅 위에 가난한 자를 없애기 위해서 꼭 있어야 하는 중요한 정신이다. 나눔은 가난한 자가 자신의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기틀이 될 수 있다. 나눔이 없으면 빈부의 갈등은 깊어지고 땅의 평화도 언젠가는 깨어지게 될 것이다.
나눔은 한 국가 안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부유한 국가는 빈곤에 허덕이는 국가에 나누어 주어야 한다. 이 나눔 속에는 과학기술의 이전 같은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나눔은 세계를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로 만드는 기초가 되는 정신이다. 국가나 종족 이기주의에 물들게 되면 세상의 평화는 깨어지고 세계는 폭동과 테러와 살인과 도둑의 땅으로 변하게 된다. 나눔은 이웃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고 곤경 속에 있는 이웃 국가에 대한 책임을 의미한다. 나눔은 곤경에 빠진 이웃을 살리는 행위인 동시에 살아있는 믿음의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3) 형제자매의 공동체 정신
기독교 사회봉사 신학은 형제자매의 공동체 정신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지역이나 계급이나 인종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정신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흑인과 백인이, 한국인과 중국인이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오늘의 세계는 이데올로기 체제가 붕괴되면서 민족 이기주의로 치닫고 있다. 그 결과 지구 곳곳에서 처절한 전쟁과 탐욕의 살육으로 깊은 절망과 어두움이 깔리고 있다. 유대인과 헬라인이, 흑인과 백인이, 아랍인과 서구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정신은 땅의 평화를 위해서 꼭 필요한 정신이다.
형제자매 공동체 정신은 사랑과 평화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신이다. 기독교 사회봉사 신학은 형제자매 공동체 정신을 구현하는 신학이다. 장애인도, 망명객도, 힘없는 외국인도, 오늘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흑인들도 모두 우리의 형제자매이므로 이들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는 것이 기독교 사회봉사 신학이다.
성서는 사랑의 교과서이다. 성서만큼 사랑을 언급하고 이웃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고 있는 책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요일4:8). 사랑은 하나님을 정의하는 단어이고 사랑하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교회이다. 그리스도교 계시의 핵심인 십자가도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사람은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0~11). 십자가의 사랑이 무조건적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사랑도 조건이 없어야 한다.
기독교 사회봉사 신학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신학이다. 이 사랑의 실천은 가난한 자, 장애인, 소외된 자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된다. 그것의 목표는 이 세상을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진정한 경건이요 영생의 길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신학이 기독교 사회봉사 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