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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첫번째 죽음
그것은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다. 모두들 잠시 입도 열지 못했다. 다만
잠자코 쓰러진 머스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암스트롱 의사가 제정신으로 돌아와 머스턴 옆으로 달려가 무릎꿇고
들여다보았다. 의사가 머리를 들었을 때 그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듯
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두려움에 떨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었소!」
모두들 의사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죽었다! 스칸디나비아 신화에 나
오는 젊은 무신처럼 건강과 정력이 넘쳐흐르던 그가 죽어 있다! 건강한
젊은이가 위스키 소다에 목에 메인 것쯤으로 죽을 리 없다. 아무래도 믿
어지지 않았다.
암스트롱 의사는 죽은 사나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보랏빛이
되어 비틀린 입술의 냄새를 맡았다. 그런 다음 머스턴이 마신 잔을 집어
올렸다.
매커서 장군이 말했다.
「위스키에 체하여 숨이 막혀 죽었다는 거요?」
의사는 말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잠깐 사이에 질식한 겁니다.」
그는 글라스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글라스 밑에 묻어 있
는 액체를 찍어 혀끝에 갖다댔다.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매커서 장군이 말했다.
「이런 죽음은 본 적이 없소. 잠깐 사레가 들었을 뿐이잖소.」
에밀리 브랜트가 말했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암스트롱 의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확실히 사레가 들린 것쯤으로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머스턴의 죽음
은 우리들이 말하는 이른바 자연사가 아닙니다.」
베러가 겁에 질려 조그맣게 말했다.
「위스키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나요?」
암스트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확실한 것은 말할 수 없지만, 청산가리가 아닌가 여겨집
니다. 먹으면 곧바로 반응이 나타나는 무서운 독이지요.」
판사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의 글라스에 들어 있었소?」
「그렇습니다.」
의사는 위스키 병이 놓인 테이블로 가서 병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은
다음 혀끝으로 핥아 보았다. 그리고 소다수에 혀를 대보았다. 그는 머리
를 저었다.
「둘 다 이상없습니다.」
롬버드가 말했다.
「그렇다면 스스로 자기 잔에 독약을 넣었단 말입니까?」
암스트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입니다.」
블로어가 말했다.
「자살이라고요? 이상한데.」
베러가 말했다.
「그 사람이 자살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그토록 기운찼는데, 인생
이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오늘 석양 무렵 언덕
에서 내려왔을 때에는, 마치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그녀가 말하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젊고 정력적으로 보인 앤터
니 머스턴은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는 듯 눈에 비쳤던 것이다. 그 머스
턴이 지금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져 있다.
암스트롱 의사가 말했다.
「자살 말고 달리 죽은 원인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고개를 저었다. 달리 설명할 수 없었다. 머스턴
이 사이드 테이블로 가서 위스키와 소다수를 글라스에 따르는 것을 모두
들 보았다. 따라서 마실 것에 청산가리가 들어 있었다면, 머스턴 자신이
넣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면 머스턴은 왜 자살한 것일
까.
블로어가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하군. 머스턴은 자살할 것 같은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
았는데.」
암스트롱이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것이 모두의 결론이었다. 달리 할말이 없었다. 암스트롱과 롬버드는
머스턴의 시체를 그의 침실로 옮기고 시트로 덮어씌웠다.
두 사람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모두들 한데 모여 있었다. 추운 밤이
아닌데도 모두 몸을 떨고 있었다.
에밀리 브랜트가 말했다.
「자러 가지요. 이제 늦었으니까요.」
12시 지나 있었다. 그녀의 제의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곧
바로 찬성하지 않았다. 서로 떨어져 있게 되는 일이 불안한 것이었다.
판사가 말했다.
「그렇소, 자는 게 좋겠소.」
로저스가 말했다.
「아직 식당을 치우지 않았는데요.」
롬버드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일 아침에 해도 되오.」
암스트롱이 로저스에게 말했다.
「당신 부인은 정신을 차렸을까요?」
「보고 오겠습니다.」
로저스는 금방 돌아왔다.
「잘 자고 있습니다.」
의사는 말했다.
「다행이군. 그대로 두는 게 좋을 거요.」
「그러겠습니다. 나는 식당을 치우고 자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홀을 가로질러 식당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2층으로 올라갔다. 마음내키지 않는 듯한 걸음이었다.
만일 이 저택이 검은 그림자가 어린 오래된 건물이었다면, 음침한 분위
기가 생겨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저택은 근대 건축
의 정수를 모아 지어졌다. 어두운 구석은 없고, 벽에 어떤 장치도 있는
것도 아니며, 전등이 환하게 비치고, 무엇이나 모두 새롭고 밝았다. 감출
것도, 감춰질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밝음이 오히려 불쾌하게 느껴지
는 것이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저마다 자기 방에 들어가자 일곱 사람 모두 저도
모르는 새 문을 잠갔다.
부드러운 색조로 둘러싸인 기분좋은 방에서 워그레이브 판사는 옷을
벗고 침대에 들려 하고 있었다.
그는 에드워드 시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시튼을 잘 알고 있
었다. 아름다운 머리, 푸른 눈, 친밀감을 주는 눈매로 상대를 바라보는 붙
임성있는 표정. 배심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르엘린 검사의 논고는 너무도 조잡스러웠다. 정도가 지나쳐 필요 이상
의 죄상을 강조했다. 그에 비해 매슈즈 변호사의 변론은 훌륭했다. 정연
하고 조리있어 반대신문에서도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시튼은 격렬한 반대신문에도 잘 견디었다. 그는 흥분하지도 당
황하지도 않았다. 배심원들은 강한 인상을 받았다. 매슈즈 변호사의 변론
만 남았을 뿐 이미 재판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겨졌으리라.
판사는 시계의 태엽을 감아 조심스럽게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
그는 그즈음의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판사석에 앉아 한마디도
흘리지 않도록 귀를 곤두세워 메모하고, 피고의 죄상을 증명하기 위해 채
택된 증거를 하나하나 음미해 갔던 기분을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 사건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매슈즈 변호사의 마지막 변론은 아주 훌륭했다. 그 뒤에 있은 르엘린
검사의 논고는 변호사가 구축해 놓은 인상을 허물어 뜨릴 수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판사인 자신이 의견을 논술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워그레이브 판사는 주의깊게 틀니를 빼내어 물이 담긴 글라스 속에 떨
어뜨렸다. 주근깨투성이의 입술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입가에 냉혹한
표정이 떠올랐다.
판사는 눈 가장자리에 잔주름을 잡으며 미소지었다. 나는 시튼을 보기
좋게 요리했었다! 그는 중얼거리며 침대에 들어 전등을 껐다.
층계 밑 식당에서는 로저스가 이상스러운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는
테이블 한복판의 도자기 인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혼자말을 했다.
「이상하군, 분명히 열 개가 있었는데…….」
매커서 장군은 침대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잠들 수 없었던 것이다. 어
둠 속에 아서 리치먼드의 얼굴이 보이고 있었다. 그는 아서를 좋아했었
다.
레슬리가 그를 좋아하는것도 기쁘게 여겼다. 레슬리는 까다로운 여자였
다. 그들 주위에 훌륭한 사나이가 많이 있었지만, 레슬리는 어떤 남자를
만나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말했다.
「지루한 사람이에요!」
언제나 그러했다. 그런데 아서와는 처음부터 마음이 맞았다. 언제나 연
극이며 음악이며 그림 이야기를 등을 했다. 그리고 레슬리는 때때로 아서
를 놀리며 즐거워했다. 매커서도 레슬리가 어머니 같은 애정으로 그를 사
랑하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어머니처럼! 리치먼드가 28살이고 레슬리가 29살인 것을 잊은 건 우둔
한 짓이었다. 매커서는 레슬리를 사랑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녀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하트 모양의 얼굴, 언제나 꿈꾸는 듯한 짙은 잿빛 눈, 아름답게 굽실거
리는 숱이 많은 다갈색 머리칼. 그는 레슬리를 사랑하고 믿었다.
프랑스 전선에 있을 때도 그는 언제나 레슬리의 사진을 주머니에서 꺼
내 보며 그녀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발견을 한 것이다!
마치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일이었다. 레슬리가 리치먼드에게 보내는
편지를 잘못하여 자기에게 보내는 봉투에 넣었던 것이다. 매커서는 지금
까지도 그때 받은 큰 충격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
더욱이 그것은 이미 오래된 관계였다. 편지가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
었다. 리치먼드의 마지막 휴가 때의 여러 날……레슬리――레슬리와 아
서!
얼마나 비열한 사나이인가! 그 웃음짓는 얼굴! 또렷한 말투로 「네, 각
하」라고 말하는 그 표정! 거짓과 위선으로 뭉쳐진 사나이가 아닌가. 남
의 아내를 훔치고도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격렬하고 차가운 분노가 차츰 높아져 왔다. 그러나
되도록 평온한 태도를 가지려고 마음먹었다. 리치먼드에 대해서도 그때까
지와 다름없는 태도를 취하려 했다. 그것은 성공했던 것일까. 그는 성공
했다고 믿고 있었다.
인간의 신경이 끊임없이 긴장을 강요받는 곳에서는 기질의 변화가 간
단히 밝혀진다. 젊은 아미테이지가 때때로 이상한 눈치를 보이게 되었다.
아직 젊었으나 날카로운 신경을 가진 사나이였다. 아마도 아미테이지는
눈치채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매커서는 도저히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리치먼드를 정찰보냈
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는 임무였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매커서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마음에 걸리지도 않았다. 과
실이 끊임없이 일어나 장교들이 사실상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사지(死地)
로 쫓겨갔다. 모든 게 혼란과 공포였다.
사람들은 뒷날 말했다.
「냉정한 매커서도 초조했겠지. 그 작전은 큰 실패였어. 우수한 부하를
희생시키고 말았으니까.」
아무도 그 이상의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미테이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매커서를 이상한 눈길로 바
라보았다. 리치먼드를 일부러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지껄여댄 것일까?
레슬리는 아무것도 몰랐다. 애인의 전사에 눈물흘렸겠지만, 매커서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눈물이 말라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
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는 옛날과 다름없었다. 다만 레슬리의 모습에서
때로 공허함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3년쯤 뒤 그녀는 폐렴으로 죽었다. 이
미 먼 옛일이다. 15년――아니, 16년 되었을까?
그 뒤 그는 육군을 나와 데븐셔에 자리잡았다. 전부터 갖고 싶었던 땅
을 사들인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착했고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그는 사냥과 낚시를 하고 지내며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다. 그러나 다
윗이 우리아를 싸움터에서 위험한 곳으로 내보냈다는 설교가 있던 날은
가지 않았다. 차분히 앉아서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친절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차츰 자
기 험담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불안이 일었다.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져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소문을 들은 것은 아닐까…….
(아미테이지겠지. 그 사나이가 지껄였을까?)
그는 사람들을 피하게 되었다. 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먼 옛일이었다. 레슬리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아서
리치먼드도 죽었다. 사건은 완전히 잊혀졌다. 다만 그의 인생이 쓸쓸해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예전의 군인 친구들도 만나지 않게 되었다.
(아미테이지가 떠벌렸다면,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밤――누군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그 옛 사건을 지껼였
다. 자기는 그때 당황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아마 레코드의 말을 진실로 믿는 이는 없을 것이
다.
자기만이 아니다. 모두 살인죄를 문초받았다. 저 아름다운 아가씨가 아
이를 물에 빠뜨려 죽게 했다고 한다.
바보 같으니! 미치광이가 횡설수설한 것이다! 에밀리 브랜트만 해도 같
은 연대에 있던 톰 브랜트의 조카가 아닌가. 그녀가 살인했다고 한다! 누
가 보나 첫눈에 신앙심이 두터운 여자임을 알 수 있는 그녀가…….
이번 일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미친 짓이었다. 이 섬에 왔을 때부터…
…그게 언제였던가. 그렇다, 오늘 저녁 무렵이었다. 이곳에 온 지 벌써 오
래된 듯 여겨진다.
그는 생각했다. 언제 이 섬에서 나가게 될까? 물론 내일 아침 모터 보
트가 육지에서 올 것이다.
이상스럽게도 그는 섬을 꼭 떠나고 싶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육지로 돌
아가면 조그만 시골에서 다시금 어두운 생활을 보내게 된다.
열어제쳐진 창문으로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파도 소리는 날이 밝아짐에 따라 더욱 높아졌다. 바람도 더 세어진 것 같
다.
그는 생각했다. 얼마나 평화로운 소리인가. 그리고 평화스러운 곳인가.
섬이 좋은 것은 한번 이곳에 오면――이젠 더 앞으로 갈 수 없는 점이다.
모든 것의 종말에 와버린 것이다.
그는 그때 참으로 이 섬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베러 크레이슨은 침대에 누워 눈을 뜨고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쪽
에는 스탠드가 켜져 있었다. 그녀는 어둠이 두려웠다.
그녀는 생각했다. 유고……유고……어째서 오늘 밤은 당신이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까요. 어딘가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대체
그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영원히 알 수 없겠지. 그는
그냥 가버린 것이다. 내 생활 속에서.
지금 유고를 생각해 보았자 아무 소용없다. 그러나 유고는 그녀가 잊을
수 없는 남자였다. 아무래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콘월……콘월……검은 바위, 평평하고 누르스름한 모래, 사람좋고 친절
한 해밀턴 부인. 언제나 반쯤 우는 목소리로 그녀의 손을 잡고 말하던 시
릴.
「바위있는 데까지 헤엄쳐 가고 싶어요, 크레이슨 선생님. 왜 바위까지
헤엄쳐 가면 안 되는 거지요?」
올려다보면 유고의 눈이 그녀를 지켜 보고 있었다.
밤이 되어 시릴이 잠들고 나면…….
「산책나가지 않겠습니까, 크레이슨 양?」
「네, 좋아요.」
바닷가의 산책. 달빛, 대서양의 부드러운 공기, 그리고 유고의 팔이 그
녀의 몸을 끌어안는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소. 알고 있겠지, 베러?
」
분명 알고 있었다. 적어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당신에게 결혼을 청할 수 없소. 내게는 재산이 없소. 나 혼자
살아가기도 힘겹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이야기지. 나는 석 달 동안 재산
을 손에 넣을 기회를 쥐고 있었소. 시릴이 태어난 건 모리스가 죽은 지
석 달이 지나서였소. 만일 시릴이 여자 아이였다면…….」
만일 여자 아이였다면 모든 건 유고의 것이 될 터였다. 그는 분명 실망
한 것 같았다.
「물론 실망하는 게 틀린 생각이오. 그러나 확실히 내게는 운이 없었
소. 시릴은 사랑스러운 아이요. 나는 그 아이가 좋소.」
그렇다, 그는 시릴을 좋아했다. 언제나 스스로 놀이 동무가 되어 주곤
했다. 유고의 마음에는 시릴을 원망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시릴은 건강이 나빴다. 몸이 허약하여 제대로 자랄 수 있을 지 어떨지
염려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시릴은 울먹이며 몇 차례나 되물었다.
「크레이슨 선생님, 왜 바위까지 헤엄쳐 가면 안 되나요?」
「너무 멀기 때문이야, 시릴.」
「그렇지만 크레이슨 선생님…….」
베러는 일어나 화장대로 가서 아스피린을 세 알 먹었다. 그녀는 생각했
다. 진짜 수면제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생각했다. 만일 자살한다면 베로날을 정량 이상 먹는게 좋다.
청산가리 같은 건! 그녀는 앤터니 머스턴의 보라빛이 된 얼굴을 떠올리고
는 몸을 떨었다.
베러는 벽난로 앞에서 액자에 든 자장가를 올려다보았다.
열 인디언 소년이 식사하러 갔다.
한 소년이 목이 메어 아홉 소년이 되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아, 무서워! 꼭 오늘 밤의 우리들 같군!
앤터니 머스턴은 왜 죽은 것일까.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다
는 기분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죽음은 자기 이외의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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