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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박해와 기해일기
1. 기해박해
천주교 4대 박해 중의 하나. 1839년(기해년. 헌종 5) 3월(움)에서 10월까지 계속되었다. 이 박해로 인해 참수된 천주교 신자는 70명이고, 옥중에서 죽은 신자는 60여 명이었는데. 그중 70명이 훗날 성인품에 올랐다. 박해의 표면적인 원인은 사학(邪學〉이라 불리던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것이었지만, 직 집적인 원인은 시(時) - 벽(僻)의 정치적 갈등, 즉 시파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파인 풍양 조씨(豊壞趙氏)가 일으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배 경〕순조(純祖) 재위 초기에 정사를 마음대로 하던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영조의 계비요 순조의 계 증조모(繼會祖母)로 1801년에 신유박해(辛西 迫害)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는 바로 천주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노론(老論) 벽파(僻派)에 속했었다. 그러나 1802년 안동 김씨로 시파(時派)에 속해 있던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순조 비가 되면서 정권이 바뀌어 이후 36년간은 안동 김씨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다가 김조순이 1832년 4월(음)에 죽으면서 세도는 그 아들 김유근(金睦根)에게 돌아갔고, 1834년 11월(윤) 순조가 승하하면서 그의 손자인 헌종(憲宗〉이 8세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에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오라버니인 황산 김유근이 판서로서 대비의 정사를 보필하였다.
안동 김씨는 벽파와 달리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이어서 순조 재위 기간과 헌종 초까지도 천주교 문제에 대해 개의치 않으려 하였고, 나이 어린 헌종이 성년이 될 때까지 현상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김유근은 원래 천주교에 호의적이었고, 당상 역관이며 천주교 신자인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과 절친하여 1840년 12월 죽기 전에 그에게서 대세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조선 천주교회는 1836년 이후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신부들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될 수 있었고, 신자 수는 약 1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풍양 조씨가 세력을 잡으면서 바뀌게 되었다. 풍양 조씨 세력은 그에 앞서 조만영(趙萬永)의 딸이 효명세자(孝明世子) 익종(翼宗. 만 종의 부친〉의 비로 간택되고. 1827년 익종이 대리 청정을 하게 된 이후부터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1830년 익종이 사망하고, 1837년 안동 김씨 김조근(金祖根)의 딸이 헌종비로 간택되면서 다시 안동 김씨 세력에 밀리게 되었다. 그러던 중 김유근이 1836년 무렵부터 중풍에 걸려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못하게 되면서 정권은 우의정인 이지연(李止淵)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그는 풍양 조씨와 손을 잡고 천주교 박해를 계획하는 동시에 이를 계기로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고자 하였다.
[초기 상황〕천주교에 대해 박해는 이미 1838년 말부터 시작되었다. 조정에서 공식적인 체포령이 내려진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의 포졸들에 의해 서울 일부 지역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6일에 권득인(權得仁. 베드로)이 체포되었으며. 1월 말에는 강원도 서지 땅에 살던 최해성(요한)이 체포되어 원주 감옥에 투옥되었고. 오월에는 서울 한강 변에 살던 박아기(안나)가, 3월 21일에는 경기도 광주의 구산(想山, 현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에서 김성우(안토니오)의 두 아우가 체포되었다. 이때 김성우는 피신해 있던 덕택에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또 4월 7일에는 서울의 회장 남명혁 (다미 아노) , 이 광헌(아우구스티노)과 그의 가족들이 모두 체포되 었으며 ,이매임(데레사)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허계임(막달레나)과 두 딸인 이정희(바르바라)영회(막달레나), 김성임 (마르타), 김누시아(루시아) 등이 남 다미아노와 이 아우구스티노 자녀들의 용기를 본받고자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4월 12일에는 최 야고보 가족들이. 4월 15일에는 궁중 나인 전경협(아가다)과 박희순(루시아)이 체포되었다. 이에 앞서 제2대 조선교구장 앵 베르 주교는 갓등이(현 경기도 화성군 왕림리) 공소에 숙소를 정하고. 서울 남명혁의 집에서 성사틀 주고 다시 갓등이로 둘아가 있었다.
이처럼 각처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면서 감옥은 이미 그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당시의 형조 판서 조병현은 가능한 한 신사들의 목숨을 구해 주려고 배교를 권하였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사정을 우의정 이지연에게 보고해야만 하였다. 이지연은 이를 기회로 1839년 4월 18일(음 3월 5일) 천주교 박해를 허가해 주도록 대왕대비 순원왕후에게 아뢰었고, 대왕대비 전에서 이를 재가하여 공시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이 일명 사학 퇴치령’ (邪學討治令〉이다. 이때 이지연이 아뢴 내용을 보면, 천주교인은 무부 무군(無父無君)의 역적 무리이니 좌우 포도청에 하명 하여 조사와 기찰을 강화토록 하고. 형조 판서는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 뉘우치지 않는 자를 처형할 것이며, 서울과 지방에 다시 오가 작통(五家作統)의 법을 시행하여 빠셔 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대왕대비 전에서 내린 퇴치령은 이보다 더욱 엄하였다. 그러므로 이미 투옥되어 있던 신자들은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 3일(옴 3월 20일)까지 새로 체포된 신자는 한 명도 없었는데, 이날 사헌부 집의(執義) 정기화는 ‘만일 원흉을 잡지 못하면 천주교 근절을 기할 수 없다’ 는 요지의 상소룰 올렸다. 그리고 갖은 날 경기도 고양의 용머리〔能頭里]에서 김효임(골롬바).효주(아네스) 자매가 체포되었다.
한편 형조 판서의 5월 3일자 보고에 의하면, 포청에서 형조로 이 송된 천주교 신자가 도합 43명 인데 그간 15명이 배교하여 석 방되었다고 하였으며 . 동월 11일자 보고에 의하면, 나머지 28명 중 11명이 배교하여 곧 석방될 예정이라 하였다, 이들 중, 5월 24일(음 4월 12일) 사형 선고를 받고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사람들은 남명혁 - 이광헌 - 박아기 - 박희순과 이미 1836년에 체포되어 오랫동안 옥중에서 고난을 겪어 오던 이소사(아기다), 김업이(막달레나), 한아기(바르바라), 김아기(아가다) 등 모두 9명이었다.
앵베르 주교는 3일 뒤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낼 수 있었다. 이 밖에도 5월 26일에는 한강변 서강(西江)에서 살다 체포된 장성집(요셉)이 장사(杖死)로 옥중에서 순고하였고. 다음날에는 14살 된 어린 동정녀 이 바르바라가 포청의 옥에시 굶주림과 열병으로 옥사하였으며 , 같은 무렵에 김 바르바라와 정 아가다도 신앙을 지키다가 형조에서 옥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는 1827년의 정해박해(丁玄迫舍) 때 체포되어 대구 옥에 간혀 있던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 김사건(金忠健. 안드레아)과 전주 옥에 갇혀 있던 신태보(申太甫, 베드로). 이태권(李太權. 배드로), 이일언(욥), 정태봉(鄭太奉. 바오로),김대권(金大權, 베드로) 등에게도 각각 5월 26일과 5월 29일에 참수형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박해의 확대〕박해는 5월 말부터 일단 누그러져 약 1개월 동안은 평온을 되 찾았다. 그 동안 앵베르 주교는 서울을 떠나 손경서(안드레아)가 마련해 놓은 경기도의 피신처(현 화성군 양감면 용소리의 상게 마을)로 갔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부도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세도가 조만영을 위시한 풍양 조씨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7월 5일(음 5원 25일) 천주교 신자 색출에 노력하라는 내왕대비의 전교가 있게 되면서 다시 상황이 바뀌어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때 배교자인 김순성(일명 여상〉이 밀고자 역할을 하였다. 그의 제보로 며칠 사이에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있던 현석문(가를로).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조신철(가롤로), 정하상(바오로), 역관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체포되었다. 이때 정하상은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호교론서인〈상재상서〉(上幸相書를 지어 품안에 품고 있었는데, 그의 예상대로 이 글은 체포된 후 조정에 보고되었다. 이어 7월 20일에는 형조에서 문초를 받아 오던 이광렬(요하), 김장금(안나), 김노사( 로사), 원귀임(마리아) 등과 언제나 신앙을 함께해 오던 이영회,이매임, 김성임 , 김누시아 등 8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당시 앵베르 주교는 상게 마을 피신처에서 신자들로부터 전해지는 모든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는 7월 하순경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자신의 거처로 오도록 하여 앞으로의 할 일을 의논한 다음 다시 교우촌의 신자들을 찾아보도록 하였다. 같은 시기에 김순성을 앞세운 포졸들은 수리산(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4등) 교우촌으로 몰려가 최양업(토마) 신부의 부모인 최경환( 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 이 에메렌시아 등 여러 교우들을 체포하였다. 김순성은 이어 간계를 써서 앵베르 주교의 처소를 거의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앵베르 주교는 포졸들이 들이닥치 기 전에 자수를 결심 하고 홀로 포졸들에게 자현(自現)하였으니, 이때가 8월10일이었다. 앵베르 주교의 자수는 조정을 매우 놀라게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모방,샤스탕 신부를 체포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8월 22일에는 이들을 잡기 위해 충청도에 오가작통법을 엄격히 적용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러자 앵베르 주교는 교우들의 재난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두 신부에게 쪽지를 보내어 자수를 권고하였고,이에 따라 두 신부는 9월 6일 충청도 홍주에서 자수히며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에 앞서 그들은 로마의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장관에게 보고서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당시의 교세가 '신사수 약 1만 명, 영세자 1.200명, 견진자 2.500명. 고해자 4.500명, 영성체자 4,000명 혼배자 150명 , 종부성사 60명 , 예비 신자 6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압송되어오자. 앵베르 주교는 그들과 함께 포청에서 신문을 받은 다음 의금부에서 다시 여러 차례에 걸쳐 신문을 받았다. 그리고 9월 21일(음 8월 14일) 군문 효수의 판결을 받고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 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그 후 20일쯤 뒤에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서 일단 노고산(현 서강대학교 뒷산)에 묻혔다가 1843년 박 바오로에 의해 삼성산(三聖山, 헌 서울 관악구 신림동)으로 이장되었으며. 1901년 다시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이장되었다가 시복에 앞서 1924년에 로마, 파리 등지로 보내졌다. 선교사들의 순교에 앞서 8월 말에는 한 안나와 김 바르바라. 김 루시아 등이 포청 에시 옥사하였으며. 충청도 홍주에서도 유 바오로가 옥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9월 4일에는 이미 순교자를 낸 집 안이 거나 신앙이 굳기로 유명한 박후재(朴厚載,요한), 박큰아기(朴大阿丹.마리아), 권희(바르바라). 이정희,이연희마리아). 김효주 등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선교사들을 처형한 뒤 조정에서는 나머지 신자들의 처형을 서둘렀다. 그 결과 2개월여를 갇혀 있던 정하상 , 유진길 등이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9월 26일에는 조신철이 다른 8명의 신자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순교한 사람들은 교회지도자 중 한 사람인 남이관(세바스티아노), 김대건 신부의 부친 김세준(金濟俊. 이냐시오), 김유리대 (율리에타) , 진경협 (아가다) , 박봉손(막달레나), 홍금주(빼르빼투아),허계임. 김효임 등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신문을 받는 자리에서 국적과 입국목적을 명백히 밝힌 다음, 입국시 의주로부터 조신철과 정하상의 인도를 받았고, 서울에서는 정하상의 집에 거처 했다는 사실만을 자백하고, 그 밖의 신문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유진길은 선교사가 천주교에 불가결하므로 조선에 모셔 왔으며, 이것은 교회와 관련되는 일이지 반역이 아니라 주장하고, 부귀 공명을 위해 천주교를 믿은것이 아니며 이 모든 것은 교회법을 행하려는 절차였다고 하였다. 정하상도〈상제상서〉에서 밝힌 대로, 사람은 만물의 조물주인 천주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으며 천주는 모든 민족의 기원이라고 대답하였다. 또 그는 외구(外寇)를 불러 본국을 해치는 일 같은 것은 교회법에는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선교사의 처형으로도 박해는 끝나지 않았다. 밀고자 김순성은 교우를 고발하는 데 더욱 열을 올렸고, 그러는 사이에 서울의 옥중에서는 이 가타리나, 조 막달레나, 조 바르바라 등이 순교하였다. 그리고 10월 6일에는 원주에서 최해성이 참수되었고, 이어 그의 고모인 최 브리지다도 옥중에서 교수되었다. 이것은 조정에서 공적인 처형이 너무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옥중의 신자들을 교수형에 처하도록 지시한 때문이었다.
당시 이지연에 이어 우의정이 된 조인영도 이러한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 지시의 최초의 희생자는 유진길의 아들인 유대철(베드로)과 최희득(필립보), 고집종(베드로) 등이었다. 그들은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는데, 그중에서도 13세의 유 베드로가 보여 준 신앙심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또 이 무렵 충청도 해미에서는 전 베드로가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하였으며, 전라도 전주에서도 송인원(야고보) 등 여러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박해의 종식〕이와 같이 서울과 지역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죽임을 당할 즈음, 조정에서는 11월 23일(음 10월 18일) 척사 윤음(斥邪論音)을 반포함으로써 천주교가 사학임을 다시 한번 민중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이 대대적인 박해를 끝내고자 하였다. 이것이 바로 검교제학(檢校提學) 조인영이 지어 올린 ‘기해 척사 윤음’ 이다.
당시 조정에서 이를 반포한 이유는 여론이 학살을 중지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고. 신유박해 때와 마찬가지로 이미 대부분의 주동자들이 체포 처형되었으므로 더 이상 박해를 끌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이후 새로운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기존에 체포된 신자들로 인해 순교자는 끊이지 않고 태어났다. 포청에서는 정하상의 모친 유(柳) 세실리아가 옥사하였고, 전라도 나주에서는 이춘화(베드로)가, 경기도 양근에서는 장사광(베드로)과 손 막달레나 부부가, 전주에서는 심소사( 바르바라)와 김소사(아나스타시아)가 옥사하고, 12살쯤 된 이 아나스타시아가 교수형을받아 순교하였다. 뿐만 아니라 12월 29일(음) 11월 24일에는 서소문 밖에서 7명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들 중 최창흡(베드로)은 초기 신자의 한 사람인 최창현(요한)의 아우였고, 정정혜(바르바라)는 정하상의 여동생이자 유 세실리아의 딸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 사람은 순교자 허계임(막달레나)의 딸이자 동정녀인 이영덕(막달레나), 고순이(바르바라), 과부 현경련(베네딕다)과 조증이( 바르바라). 한영이( 막달레나) 등이었다. 그러나 우의정 조인영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옥중에 있는 신자들을 교수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포청의 옥에서 최 필립보와 동정녀 이 아가다, 순교자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의 딸이요, 손연욱(요셉)의 아내인 김 데레사, 이 막달레나, 정 안드레아, 앵베르 주교의 피신처를 마련하는 데 노력했던 손경서(안드레아), 민극기(스데파노), 이사영(고스마) 등이이 형벌로 순교하게 되었다.
기해박해의 마지막 순교자는 전주와 서울에서 탄생하였다. 기해년이 저물게 되자 조정에서는 옥에 갇혀 있는 나머지 신자들의 처형을 서두르게 되었는데, 이때 전주에서는 오랫동안 함께 신앙을 지켜오던 홍재영 (프로타시오), 오종례(야고보), 이소사,(막달레나), 최소사(바르바라) 등 4명이 1840년 1월 4일(음 1839년 11월 30일)에 참수되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1840년 1월 31일(음 12월 27일)과 2월 1일, 당고개 (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에서 10명이 참수형을 받았다. 이처럼 처형지가 서소문에서 당고개로 바뀐 이유는 상인들이 그 해 설날 대목장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정에 요청한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곳에서는 첫날 회장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과 홍재영의 아들 흥병주(베드로), 권진이(아가다), 이경이(아가다) , 최창흡의 아내 손소벽(막 막달레나), 동정녀 이인덕(마리아), 최경환의 아내 이성례(마리아) 등이 순교하였고, 이튿날에는 홍병주의 아우 홍영주( 바오로). 손소벽의 딸 최영이(바르바라), 회장 이문우(李文弼, 요한) 등이 순교하였다.
〔박해의 의미와 시성〕기해박해는 신유박해에 비해 체포된 신자수는 적었으나 그 대상 지역은 더 넓었다는 데 특징이 있다. 박해 이전에 신자들이 이미 서울과 경기도는 물론 충청도와 전라도, 그리고 강원도와 경상도 등지에 넓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서울과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가 탄생했지만, 강원도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는 1백 명 이상의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당시의 기록인《기해일기〉(己亥日記)에 의하면, 참수된 순교자가 54명,옥사나 장사 또는 병사한 신자수가 60명이나 되며, 달레의《한국 천주교회사》에서는 참수된 신자가 70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된 신자들, 자료가 없는 관계로 기록에서 누락된 신자들을 생각하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늘어날 것이다. 더욱이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와 지도자들을 잃음으로써 일시 침체에 빠지게 되었고, 신앙 공동체는 이전보다 더 가난한 서민층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는 국경 감시를 강화했고. 살아 남온 신자들은 깊은 산중으로 피신하거나 신자임을 감추고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 결과 신자들이 현실을 외면하는 경향이 집어지게 되었고, 신앙 내용은 더 복음적이고 교리 실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또 교회 서적이 부족하게 되면서 후세나 이웃에게 구전으로 교리를 전수해야만 했으므로 어린이나 예비 신자들은 깊은 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예도 있었다. 반면에 박해의 여파로. 또는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으로 더 넓은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다음으로 이 박해는 처음 시작과는 달리 박해가 진행되면서는 정치적인 갈등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신유박해 때와 달리 신자들 가운데는 정치적으로 보복을 받을 만한 인물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해가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천주교인을 처단하라는 상소문이 거의 조정에 올라오지 않았으며, 조정 안에서도 박해를 강력히 주장하던 풍양조씨 외에는 이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거나 앞장서서 이를 주장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다만. 이 박해가 세도의 변화 즉 기존의 안동 김씨 대신에 풍양 조씨가 세력을 잡는 데 한 원인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이후 풍양 조씨의 세도는 1849년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 합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국 교회에서는 그 후 1857년부터 기해박해와 1846년의 병오박해 순교자 중에서 79명을 선택하여 시복 운동을 전개하였고. 교황청에서는 즉시 이를 받아들여 가경자(可敬者〉로 선포하는 한편 시복에 필요한 사항을 심의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68년이 지난 1925년 5월 10일 교황 어전 회의에서 시복이 확정되고. 7월 5일 이들을 복자품에 올리는 시복식이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이 중 1839년을 전후하여 순교한 복자는 선교사가 3명, 남자가 24명, 여자가 43명으로 모두 70명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어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따라서 복음사의 입장에서 볼 때 기해박해의 순교자들은 한국 교회의 또 다른 초석이 되어 왔고,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복음의 전통이 더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기해일기》己衣日記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죽음을 당한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자 전. 1856년 병오박해(丙午迫害) 때 순교한 현석문(가롤로)이 편찬하였다. 그러나 그 작업은 이미 1838년 말부터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에 의해 시작되었고, 현석문이 순교 일기를 완성한 뒤에는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이를 보완하였다.
(편찬 과정〕이 책을 편찬하게 된 동기는 1836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던 앵베르 주교가 1838년 말 박해가 일어나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자 이들의 사적을 기록하기 시작한 데 있다. 이때 그는 같은 해 12원 31일부터 자신이 체포되기 3일 전인 1839년 8월 7일(음 7월. 2일)까지의 순교 사적을 수기 형태로 기록하여〈1839년 조선 서울에서 일어난 박해에 관한 보고〉(약칭 1839년 서울박해 보고서’)라 명명하였으며, 이 보고서는 9월 6일 모방과 샤스탕 신부에 의해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내졌다. 훗날 다블뤼 주교는 이 앵베르 주교의 보고서를 자신의 비망기 기록에 인용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추가하거나 중국식 발음으로 기록된 고유 명사를 모두 조선식 발음으로 교체하였다.
이 기록을 마치기에 앞서 앵베르 주교는 몇 개월 전부터 자신이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정하상( 바오로)과 현경련(베네딕다)에게 순교자들의 사적을 면밀히 조사하여 정리하는 일을 계속하도록 하였으며. 이문우(요한), 최영수(필립보), 현 석문 등에게도 같은 임무을 맡겼다.
예상대로 앵베르 주교는 8월 10일 자신을 찾아다니는 포졸들에게 스스로 체포되는 몸이 되었고, 9월 21일에는 모방 . 샤스탕 등 두 선교사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리고 정하상. 현경련. 이문우 등도 1839년에 모두 순교하였다. 이때부터 현석문과 최영수는 주교의 명대로 산간 벽지를 돌아다니며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정리하기 시작하였는데, 1841년 8월 최영수가 순교한 뒤에는 현석문이 전적으로 이 일을 맡게 되었다. 현석문은 이후 이재의(토마)와 최 베드로의 협력을 얻어 전후 3년 동안 교우들로부터 모아들인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하여 기해박해 순교자 전을 완성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원본《기해 일기〉이다. 그 후 1845년 조선에 입국한 페레올 주교는 이를 입수하여 그 내용을 다시 검토하고, 1846년의 병오박해(西午迫害)로 순교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와 현석문 등의 전기까지 추가로 수록하여 1847년 ‘증보판《기해일기》’를 완성하였다.
이증보판은 본래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로 기록한 것을 홍콩에 있던 최양업(崔良業, 토마) 부제가 라틴어로 옮겼는데, 그 이름은 “1839년과 1846년 조선 왕국에서 발생한 박해 중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기, 현 가롤로와 이 토마가 수집하고. 벨리나 (Bellia, 페레올 주교의 명의) 주교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을 최 토마 부제가 라틴어로 옮긴 것"이었다. 이처럼 최 부제는 페레올 주교의 증보판에 ‘현 가롤로와 이 토마 수집’ 이라고 전제함으로써 이것이 원본《기해일기》와 별개의 것이 아님을 명시하였다.
〔간행과 내용〕《기해 일기》원본은 그 후 박해가 계속 되면서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그 사본이 전해져 오게 되었고, 제8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뮈텔 주교가 순교자의 자료를 수집하던 중 1904년을 전후하여 우연히 한글로 된《긔히일긔》한 벌을 입수하게 되었다. 당시 뮈텔 주교는 그것이 원본《기해일기》인지 알 길이 없고,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던 탓에 첫 장과 끝의 몇 장이 다 썩어 버려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완전한 것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1905년에 이를 활판으로 출판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에 의해 필사되어 오면서 일부가 수정되거나 새로운 사실이 첨부되었을 것이다.
1905년에 간행된〈긔히일긔》는 모두 246면에 달하는데, 뮈텔 주교의 서문에 이어 원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총론과 순교자의 일기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한편 현존하는 필사본으로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 소장의《긔히년일긔》와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의 상, 하권《긔히일긔》가 있는데, 전자는 1885년 4월 25일에 로베르(金保錄) 신부가 79위 시복을 위한 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필사한 것이고, 후자는 1905년의 활판본 간행을 위해 다시 필사된 대본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긔히일긔》가《긔히년일긔》를 필사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수 없다.
다음으로 필사본《긔히일긔》에 수록된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 수는 78명이었으나 페레올 주교의 증보판《기해 일기》에서는 그중 6명을 제외한 72명만을 수록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후자에는 서문과 본문 사이에 조선의 형벌과 감옥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 있는데. 이 사실들은 시복 수속을 염두에 두고 신중을 기해 작성한 때문이었다.
본래 현석문이 수집 정리한 순교자 수는 사형을 당한 숫자가 54명 . 옥사한 순교자가 60여 명으로 도합 114명이 넘었으나,《긔히일긔》에는 78명의 순교 사기만이 들어 있다. 필사본《긔히일긔》에서는 이 순교자들의 행적을 연 ‘ 월,일순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옥사자를 따로묶어 끝 부분에서 다루거나 한 집안인 경우에는 순교일에 관계없이 함께 다룸으로써 일기체와 열전체(列傳體)를 혼합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78명은 거의 모두가 기해년에 순교한 사람들이었고, 그중에 남자가 28명, 여자가 50명으로 대부분이 서울에서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지방의 순교자들을 소홀히 했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다른 기록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순교자들의 전기 대부분이 목격 증인들의 증언을 초대로 하고 있고, 여기에 수록된 78명의 순교자 중 1925년 7월 5일 복자위에 오른 순교자의 수가 69명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 순교 사적이 매우 정확했음을 뒷받침해 준다.
자료: 가톨릭 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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