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 역사, 문화
대관령 역사
대관령 숲길은 살아 숨쉬는 역사와 문화를 보고, 하늘, 산, 바다를 향해 일상생활에서의 지치고 힘든 일을 버리고 삶의 여유를 찿아 떠나는 곳입니다.
인간은 무한정 가치창출을 위하여 일만하며 살수는 없습니다. 개개인의 수준과 취향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대관령 숲길에서 높푸른 하늘과 피톤치드 향기가 가득한 산과 저 멀리 푸른 동해바다를 바라보면서 걷는 숲길은 한 차원 높은 삶의 여유를 가지실수 있을 것입니다.
대관령 문화
대관령 숲길은 살아 숨쉬는 역사와 문화를 보고, 하늘, 산, 바다를 향해 일상생활에서의 지치고 힘든 일을 버리고삶의 여유를 찿아 떠나는 곳입니다.
대관령 소나무숲에 들어서면 숲길 곳곳에서 아름드리 금강소나무를 만난다. 국제 규격의 축구장 571개 규모(400ha)에 솔방울에서 채취한 종자를 땅에 심는 ‘직파방식’으로 만들어진 100년이 넘는 수령을 가진
금강소나무 숲이다. 일제의 목재수탈로 민둥산이 된 이곳에 조성한 인공조림지이다.
거북이 등처럼 딱딱한 붉은빛을 띠는 껍질로 마치 아픈 자신의 탄생비밀을 감추려 하는 것 같다.
1988년 문화재 복원용 목재 생산림으로 지정되었고, 2000년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
22세기를 위해 보존할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되었다.
이 곳 대관령 자연휴양림소나무숲길은대관령 금강소나무숲길로 구성 되어 있는데요
100년 명품 소나무 숲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동경로:삼포암 주차장- 하제민원-치유의 숲-전망대-숯가마-금강송정-도둑재(대통령쉼터)-노루목이-솔고개-솔숲교-삼포암- 주차장(9km/4~5시간)
대관령옛길(명승제74호), 관동대로, 유혜불망비
1. 대관령 옛길 <명승 제74호>
대관령은 강릉에서 서울로 통하는 관문이자 지역문화의 산실로 조상 대대로 진산이었다. 대관령이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에 처음 나타나며, 그 이전에는 대령(大嶺), 대현(大峴), 굴령(崛嶺), 대령산(大嶺山) 등이라 불리며 서울에서 평해까지
연결되는 조선시대 관동로의 주요 교통로였다.
수 많은 이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대관령 옛길은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친정어머니를 그리며 걸은 길이고,
율곡의 친구인 송강 정철이 이 길을 걸어 관동별곡을 썼으며, 김홍도가 이 길 중턱에서 대관령의 경치에 반해
그림을 그렸던 유서 깊은 길이다.
현재 대관령옛길에는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산신당과 강릉 단오제의 주신인 범일국사를 모신 대관령국사성황사,
험난한 고갯길에 변변한 쉼터가 없어 목숨을 잃는 이들을 안타깝게 여겨 사재를 털어 주막을 연 지방 향리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서운 기관이병화유혜불방비 등이 남아 있다.
주변의 주요 능선 등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풍부한 문화관광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대관령옛길은 신작로가
개설되기 전까지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어 온 곳으로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문화재청으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 명승 제74호(2010.11.15)로 지정되었다.
2. 관동대로
조선 시대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각 지역으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 9개 가운데 제3로이다.
관동대로는 서울의 동대문을 출발하여 중랑포를 지나 평구역, 양근, 지평, 원주, 다시 삼척, 울진을 거쳐 평해로 이어진다.
관동대로의 종점은 평해이지만 '동대문 밖은 강릉이다"라는 옛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실질적으로 관동대로는 강릉과 서울을
연결하는 도로였다.
서울에서 강릉까지 관동대로는 약 236km정도 된다. '한양에서 말을 타고 이레 걸리던 대관령'이라는 옛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말을 타고 여행을 할 경우 '하루 약 35km(3식)'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식은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로,
1식은 약 12km 정도이다. 따라서 관원의 공무 여행이라 하더라도 하루 최대 약 35km를 여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관동대로에는 대관령이라는 험준한 고개가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대략 강릉에서 말을 타고 서울로 갈 경우 7일 정도가 걸렸다.
대관령은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는데 삼국시대에는 대령이라고 불렀으며, 고려 시대에는 대현이라고 하였다.
대관령이라는 이름은 조선 시대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대관령에 사는 사람들은 대관령이 높고 험해서 꼭대기에서
강릉으로 대굴대굴 굴러 넘는다고 하여 대굴령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도로는 폭을 기준으로 대로, 중로, 소로로 구분하는데, 조선 중종 재위 기간 중 강원도 관찰사 고형산이 대관령을
대로로 확장하였다.
대관령에는 교통과 통신을 담당하는 역과 숙박을 담당하는 원이 남아 있다. 대관령의 아래에는 구산역이 있고,
대관령 위에는 횡계역이 있다. 제민원은 여행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설치한 원이 있던 마을이다.
대관령 주민들이 '제멩이'라고 불렀던 제민원은 상제민원과 하제민원으로 구분된다.
반정은 대관령 초입에 있는 구산역과 대관령 위에 있는 횡계역의 중간 지점이라는 뜻인데, 옛날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주막이 있었다. '원울이재'는 대관령 정상에 오르기 전에 있는 고개로 강릉 부사로 부임했던 사람들이 돌아갈 때
되돌아보면서 슬프게 눈물을 흘렸다는 곳이다.
3. 기관 이병화 유혜불망비
기관 이병화 유혜불망비는 대관령을 오가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개인 재산으로 반정에 주막을 지은 기관 이병화의
은덕을 기리고자 세운 비석이다.
대관령은 사람들이 자주 다니기는 하였으나 길이 험준하여 사람이 살지 않았다. 겨울이면 험난한 고개를 지나다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강릉부의 향리 이병화는 개인의 재산을 내어 대관령 중턱 반정에다 주막을 설치하였다.
이후 대관령을 오가는 여행객들이 주막에 쉬거나 묵을 때마다 그의 공덕을 잊지 않았다. 이를 기념하고자 대관령을 오가던
행상인들이 순조24년(1824)에 이병화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반정 아래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