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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익(金之益,1685~1746) : 본관 상산. 김천시 농소면 율리(밤실)거주
<열락재 유고 3권> 개인소장
黃岳山錄(황악산록)
황악산을 기록하다
庚申(1740년) 淸和月(4월) 상산인 김지익(金之益,1685~1746)
黃岳之山跨湖嶺兩界 而爲之鎭. 雖無峰巒之尖秀 岩石之奇恠 而其勢繼而且邃. 其中廓而容琳宮梵宇, 谷谷皆有法界道場 淸淨瀟洒. 盖金陵自是佳麗之地 而玆山實金陵之勝境也. 山光既靑 水色亦綠 以黃岳爲名者 不知其何據, 而地扶黃溪之水 山自白華之岳, 古人命名 無乃以是歟. 抑又思之 黃鶴岳陽之樓近接, 金陵之地而山中 萬歲之樓勝槩與黃鶴岳陽, 無異安知 其採彼古樓之佳名 寓此名山之羙號也.
황악산은 호남과 영남 두 지방의 경계로 진(鎭)이 되었다. 비록 봉우리는 없지만 뫼가 뾰족하고 빼어나며, 바위와 돌들이 기괴하다. 그 산세가 이어져 또 깊숙이 들어가면 그 중간에 임궁과 범우를 담고 있고, 골짜기마다 법계의 도장을 가지고 있어 청정하고 깨끗하다. 무릇 금릉은 여기서 비롯되는 아름다운 땅이기에 이 산은 실로 금릉의 뛰어난 경치다.
산의 풍광이 이미 푸르고 물색 또한 녹색인데, 황악으로 이름 지은 것이 어떤 근거에서 그러한지는 알 수 없지만, 땅이 황계의 물을 떠받치고 산은 백화악에서 비롯되는데, 옛사람이 이름을 지은 것이 어찌 이와 같지 않겠는가. 억지로 생각하면 황학루와 악양루에 근접하지만, 금릉 땅은 산중에 있고 만세루는 황학 악양보다 좋은 경치인데, 저 오래된 루의 아름다운 이름을 캐서, 이 명산의 아름다운 이름에 머무르게 하는 것을 편안히 알고자 하는 것과 다름없다.
家在鑑湖之上 宅近靑山之下 每欲一觀而遷延未能. 歲庚申之淸和月 友人李汝仰 文人金子精 請與偕逰 不敢以事免以二靑衿爲同行. 一白足爲先導 竹杖芒鞋 直向直指, 而中間泉浦呂學士周翰 靜洞沈斯文久甫亦從爲. 于時夕陽在山 鐘聲落風 知寺不遠 歸負遽催促捷逕.
집안은 감호의 상류에 있고 집은 청산 아래에 있어 매번 한번 보기를 원했지만 미루다가 하지 못했었다. 경신년(1740년) 청화월(4월)에 친구 이여앙과 문인 김자정이 함께 유람할 것을 청하여, 감히 일로 미루지 못하고 두 유생과 동행하였다.
승려를 선도로 대지팡이에 짚신을 신고서 직지사로 바로 향했는데, 중간에 천포 학사 여주한과 정동 사문 심구보도 따라왔다. 석양이 산에 걸렸을 때 종소리가 바람결에 떨어져서 절이 멀지 않은 것을 알고서, 갑자기 지름길을 재촉하였다.
暫休瓦所 役僧雲集 土役方張 左右尾窰 烟熖漲天 亦一壮觀. 入一柱門 登萬歲樓 徘徊周覽. 寶殿法堂 入雲造天 衆寮諸房 星羅碁布. 緇髠寔其儷不億 眞所謂古禪宗大伽藍也.
잠시 기와 만드는 곳에서 쉬었는데, 승려가 구름처럼 모여 일하면서 흙일을 한 참 진행 중인데, 좌우 꼬리 가마에서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아 역시 장관이었다.
일주문을 들어가 만세루에 올라 여기저기 둘러보니, 보전법당은 구름에 들어가 하늘을 이루었고, 중생들이 기거하는 방은 별처럼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승려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는데 참으로 오래된 선종 대가람이라 말할 만하였다.
*성라기포(星羅碁布) :「별같이 벌여 있고 바둑돌처럼 늘어 놓였다」라는 뜻으로, 物件이 여기저기 많이 흩어져 있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치곤(緇髠) : 검은 옷을 입고 머리를 깍았다는 뜻으로, 중을 이르는 말. *기려불억(其儷不億) :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余考古迹 可異爲寺以直指名厥意何居. 新羅時有僧曰能如, 自西方來 入山中剏二房寺. 寺之右邉 有一高岡, 能如登其岡以手直指其下曰, “此地可作大刹.” 此丘以其言 建大叢林 仰以能如 名二房寺 盖明其能如之道場也. 以直指名大刹 取能如以手直指之意也. 能如所登之岡其上有見佛庵, 庵之以見佛稱者 亦以能如入此山修道 終爲成佛之故也. 然則能如乃黃岳之本寺 而直指見佛皆能如作後作歟者也.
내가 오래된 발자취를 상고해 보니, 절 이름을 직지로 한 넓은 뜻이 어디에 근거하는지 가히 이채로웠다. 신라시대에 능여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서방에서 와서 산중에 들어와 이방사를 창건하였다.
절의 오른쪽에 높은 언덕이 있었는데, 능여가 그 언덕에 올라 손으로 그 아래를 가리키며 말하길 “이 땅에 큰 절을 지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 말에 따라 이 언덕에 큰 사찰을 세우고, 능여를 받들고자 이방사라 이름 지어 그 능여의 도장을 밝혔다.
큰 절의 이름을 직지라 한 것은 ‘능여가 손으로 똑바로 가리켰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능여가 올라간 언덕 위에 견불암이 있었는데, 암자를 견불로 칭한 것 역시 능여가 이 산에 들어와 수도하여 성불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능여가 황악의 본사이고, 직지사와 견불암은 모두 능여가 만든 후에 만들어 진 것이다.
下萬歲樓 宿詠流堂. 詠流乃寺之西偏 而淸流循除 寒聲入戶 能使騷人起詠 堂名詠流 誠不虗矣.
만세루를 내려가 영류당에서 잤다. 영류당은 절의 서편에 있는데, 맑은 물이 섬돌을 따라 돌아나가면서 차가운 물소리가 집에 들어와 능히 시인과 문사로 하여금 시를 읊게 하니, 당의영류라 함은 참으로 빈 말이 아니다.
翌之日轉向于雲水庵. “塔庙浩劫 浮雲常衛 沙門淨地 流水長淸” 眞所謂 雲水之庵. 道僧眞訔 首英曾居其庵皆成佛, 中間定慧居之 移居于靑岩 今則觀澄方誦經于此 能傳鉢道僧者也. 訔·英之迹古矣. 慧禪平日所欲見者 而既去不見 澄亦出去未遇 深恨只見其庵 未見其人也.
다음날 운수암으로 방향을 돌렸다. “탑묘를 오래도록 뜬구름이 호위하니, 사문의 맑은 땅에 흐르는 물 오래고 푸르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뜬 구름 같은 암자였다. 수도승 진은과 수영스님이 일찍이 그 암자에 기거하였는데 이미 성불하였고, 중간에 정혜가 있다가 청암사로 이거하여 지금은 관증이 이곳에서 경을 외고 있는데, 능히 발우을 전할 만한 수도승 이다.
진은과 수영 스님의 자취는 오래되었다. 정혜선사를 평소에 보고 싶었으나 이미 가버려 보지 못했고, 관증 역시 나가서 만나지 못했다. 매우 서운한 건 그 암자만 보고 그곳의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운수(雲水) : 떠가는 구름이나 흐르는 물같이 정처 없음. 탁발승. 운수암에 주석했던 스님 : 진은 >영수 >정혜 >관징 *정혜(定慧,1685∼1741) : 호는 晦庵. 만년에 청암사에 주석함. 김천 청암사에 신도비가 있음. *은영지적(訔·英之迹) : 진은, 수영 스님의 오래된 자취 *혜선(慧禪) : 정혜선사를 말함
仍向于靈雲庵 地是山靈之所護 閑雲之所留 靈雲揭號 其意有在. 庵中有僧曰, 處明. 古氣松形異扵凡僧, 性頗聦明 道又能識, 明以爲名 能副其實. 吾非尊其道 而惜別乃人情, 故以數句詩留贈. 而太行上人亦與我有舊者 適遇扵此 半日淸談偷得 浮世之閑奇哉.
거듭 영운암을 향하여 갔다. 이 땅은 산봉우리가 보호하고 한가한 구름이 머무는 곳이었기에 ‘영운’이라 부른 뜻이 있다. 암자에 ‘처명’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고귀한 기운과 수척한 모양이 평범한 스님과 달랐고, 성품은 자못 총명하여 도를 능히 알만하였으며, 명을 이름으로 삼으니 그 실질을 능히 따르고 있었다. 나는 그 도를 존경하지 않으나 석별하는 인정이 있었기 때문에 수구의 시를 남겨 주었다. 태행상인 역시 나와 구면인데, 우연히 이곳에서 만나 반 일 동안 청담을 얻으니 뜬구름 같은 세상의 한가로움이 기이하였다.
午飯後 入于深寂. 山深庵寂 此政道释 藏修之處. 而僧談肅者 以許合知所 贈之示詩余 余乃和之. 盖其談氣肅 亦可與言詩者也.
점심 후 심적암에 들어 갔다. 산은 깊고 암자는 적막하니 이곳이 도불을 바로잡아 수양하는 곳이다. 승려들이 담소하는 곳에 합석이 허락되어 알게 되니, 나에게 시를 보여주기에 화답하였다. 그 기운이 정중하여 역시 말과 시를 나눌 수 있었다.
飛錫呤笻 上去于白雲庵. 神屳盡去 白雲空留 身遂輕雲 雲亦隨我. 直有秉白雲 上太淸之心也. 庵僧守安 引我雲深之處 指路金剛之臺. 臺高千仞 上架數椽, 猿獇飛鳥 亦愁攀授, 凜不可以久留.
석장을 날리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백운암에 올라갔다. 신선은 모두 가고 백운만 허공에 머무는데, 몸이 가벼운 구름에 이르니 구름 역시 나를 따르네. 흰 구름 바로 타고 태청의 마음에 올라갔다.
암자의 승려 수안이 구름이 깊은 곳으로 나를 이끌어 손가락으로 금강대의 길을 가리켰다. 금강대는 천길 높은 곳에 석가래 몇 개 올려두었는데, 원숭이 같은 짐승과 나는 새도 오르내리기 걱정되는 곳으로, 두려워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攀木緣厓 又上上院. 上院乃山之絶頂 最高庵也. 憑闌闢窓 萬景森羅 此上院之大觀也. 東瞻金烏 揖冶老之淸風, 南指伽倻 慕學士之屳蹤. 其北則曹碩人梅溪之所 盤旋也. 其西亦登階祖師之所 剏佛院也. 景物無窮 眼力有限 而逍遙客與白日己暮矣.
나무를 잡고 절벽 가를 따라 다시 상원에 올랐다. 상원은 산의 정상에 있는 최고 높은 암자이다. 난간에 의지해 창을 열자 수많은 삼림이 펼쳐졌는데. 이것이 상원의 가장 좋은 볼거리였다. 동쪽의 금오산을 바라보며 야로(야은) 선생의 맑은 기운에 절하고, 남쪽의 가야산을 가리키니 학사(최치원)의 신선자취가 그리웠다. 그 북쪽은 조석인 매계가 돌아와 서성거린 곳이고, 그 서쪽은 서산대사가 창건한 절이 있는 곳이다. 경물은 무궁한데 시력은 한계가 있고, 소요객과 함께하던 한낮이 이미 저물었다.
*등계(登階) : 청허당(淸虛堂) 휴정선사(休靜禪師),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 賜禪號登階.
庵上更無去庵 庵下尙多看庵 故遂下于內院. 院下扵上院 而在扵谷內 故曰內院. 院中多念佛僧 皆着袈裟 長夜跏趺, 竹批鐘磬之聲 卷卷錚錚, 檻外寒泉之鳴 㶁㶁汨汨, 逰人借眠 眠不得成, 開戶視之 東方既白.
암자 위에 다시 가야 힐 암자 없고, 암자 아래에 보아야할 암자가 여전히 많기에 내원으로 내려왔다. 내원은 상원보다 아래에 있고, 골짜기 안에 있었기에 내원이라 말했다. 내원에는 염불하는 승려가 많았는데, 모두 가사를 입고 밤늦도록 가부좌하고 있었다. 죽비와 종성의 소리가 곡진하고 맑게 울리고 난간 밖의 차가운 샘은 콸콸거리며 흘러내렸기에, 잠을 청하였으나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문을 열고 바라보니 동쪽이 이미 훤했다.
履峗岩 披蒙茸 下能如寺. 金沙淨界 道場如舊, 極樂靈山 棟宇維新, 可想祖師之功德也. 佛尊元一 所甞來往者 白飯松醪 欣迎款接, 山中別味 勝扵魚果 可感其情悃也.
위태로운 바위를 밟으며 우거진 숲을 헤치고 능여사로 내려왔다. 대웅전의 도장은 옛 모습 그대로이고, 극락 영산의 건물은 새로워졌지만, 조사의 공덕을 상상할 수 있었다. 불 존 원일은 내왕한 적이 있었기에 흰밥과 송료주로 정성껏 대접해주었고, 산중의 별미가 고기와 과일보다 나았다. 가히 그 정성스러운 대접을 느낄 수 있었다.
逶迤于見佛庵 浮屠亦座列于庵前. 又有石假山在浮屠之前 吾指山問曰山耶. 山僧曰 非山也乃能如祖師之浮屠也. 盖能如浮屠則既琢其石 又尋拳石欲其愈久而愈堅 不亦異哉. 其下有龍湫 其深不爲不測 而激湍飛瀑 敝石成湫 亦爲蛟龍可占之窟也.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견불암에 이르니, 부도가 역시 줄지어 암자 앞에 있었다. 또 석가산이 부도 앞에 있어 내가 석가산을 가리키며 “산인가?” 하고 묻자, 산승이 말하기를 “산이 아니라 능여조사의 부도입니다.”하였다. 능여의 부도는 그 돌이 이미 마모되어, 오래도록 견디고 더욱 견고하게 하고자 권석을 붙였는데 역시 이채롭지 않은가.
그 아래에 용추폭포가 있는데 그 깊이는 가름할 수 없고, 콸콸대며 폭포가 떨어져서 돌을 깨고 웅덩이를 이루었는데 역시 교룡이 차지할 만한 굴이 되었다.
浮屠殿 隱屳庵在其南 欲爲盡觀 而山雨方降洞 雲深鎖浮庵忘却. 落後屳庵忽爲在前 始覺浮屠雖厭俗客 而神屳尙有緣分也. 庵僧方供佛禮拜 政若羣仙之禮 白雲庵號, 隱仙亦以是耽. 僧餽齋飯以此療飢.
부도전과 은선암이 그 남쪽에 있어 모두 다 보고자 하였으나, 산비가 사방 골짜기에 내리고 구름에 갇혀 부도전과 은선암을 잊게 되었다. 비가 그친 후에 은선암이 갑자기 앞에 나타나, 부도전은 비록 속세의 손님을 싫어해도 신선암은 항상 연분이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은선)암의 스님들이 공양하고 예배하는 것이 여러 신선의 예와 같았기에 백운암이라 불렀고, 은선(암) 역시 이러한 것을 좋아했다. 스님이 재반을 보내주어 이것으로 요기를 하였다.
厯入于明寂庵 距大寺冢近 而山明境寂 作一別區, 譬若城市山林也. 來路路傍有平岡 余登其上 又有浮屠十六爲. 昔聞 黃岳以名山名, 今見佛道 自古而盛山既靈矣, 是何成佛之多也. 摩洚古石 嗟歎極多.
차례차례로 명적암에 들어갔는데 거리가 큰 절의 제단 가까이 있었지만, 산이 좋고 경계가 고요하여 다른 구역을 만들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산속의 성시 같았다.
오는 길의 길가에 평평한 언덕이 있어 그 위에 올라가 보니, 또 부도 16개가 있었다. 전에 황악이 명산으로 이름난 것을 들었는데, 지금 보이는 불도는 옛날부터 있었고 성대한 산으로 이미 영험하였다. 어찌 성불한 이가 많지 않겠는가? 오래된 돌들을 문지르며 크게 탄식하였다.
冒雨旗于西殿 還于大寺. 靜洞沈丈 金陵諸友 既留且至數日 團图還忘 滯雨之苦 而僧統太監 三寶淨勳 乃吾同鄊之僧 不以糧餽. 飯或以酒輸款何論異道可謂同風.
비를 무릅쓰고 서전으로 기를 돌려 큰 절로 돌아왔다. 정동의 심어른과 금릉의 여러 벗은 이미 머문 것이 수일에 이르렀지만, 단체로 돌아갈 것을 잊고 비에 갇혀 고생하고 있었다. 승통태감 삼보정훈은 나와 동향인 승려이지만 양식을 주지않았다. 밥이나 술로써 정성을 보내는 것에 어찌 다른 도를 논하겠는가. 같은 풍속이라 말할 수 있다.
累日逰賞之興 庶遂宿昔之願. 而天雨既霽 鄊思還促 乃與二客. 返于常閭 囬首雲山 今人惘悵. 噫, 自古文章 亦多逰覽. 屈原之遠逰 以其遠逝而自疎也. 子長之周覽 以其悏氣而吐辭也. 今吾生世與世 疏濶用才文章不能, 太肆從慕古人之風 未作古人之逰心 常鬱仠氣常局束.
여러 날 동안 여행의 흥으로 오래전부터 원했던 바를 이루었다. 비가 그치고 이미 개었기에 고향 생각에 돌아오는 길을 재촉하였다. 두 객과 함께 마을로 돌아와 운산을 돌아보니 지금 사람이 서글퍼졌다.
아, 옛날부터 문장 중에는 유람의 글은 많다. 굴원은 먼 여행 중에 죽음으로서 스스로를 지켰고, 사마천은 두루 구경하면서 그 협기를 글로서 토해냈다. 지금 나는 세상과 더불어 세상속에서 살면서, 재주를 사용하는 것이 이그러지고 문장을 쓸 수 없지만, 크게 방자하게도 옛사람의 풍류를 모방하면서 옛사람이 노닐던 마음을 지어내지 못하고 항상 꽉 막힌 기운에 항상 묶여 있었다.
*굴원(屈原,(BC 343년경~BC278경) : 전국칠웅시대 초나라 사람. 초사의 창시자 *자장(子長,BC145~BC87) : 사마천의 字. 20세 전후에 부친의 권유로 전국을 유람하였다.
此身雖在几席之中 而魂夢長入山水間矣. 世故多碍塵緣未磨 黃山乃是至近之地而今始逰爲 而况絶遠之域 象外之勝 何以遍閱乎. 金剛俗離 亦吾平生之所欲見者. 偷得數年之閑 可副半世之願 而身精漸消 脚力既倦 未可必也. 然而 先聖有訓曰, 登高必自卑 行遠必自邇. 今日 黃山之逰爲 將逰金剛俗離之乘也此幸也. 不幸而未見彼山 以理神會可以心融 既見此山之 如此可知彼山之. 亦然又何必厯遠而劬勞後 志而疲神乎. 山經地誌 茫昧非受, 粗敍所經 掛一漏萬 而山水之形 既移扵此 山水之樂 寓之扵此. 後之欲觀山水者 先觀此文, 則雖未脚踏 必有心得 其扵仁智之樂. 文章之肆 亦不爲無助爲耳.
이 몸이 비록 궤석속에 있지만 꿈속에서는 오래도록 산수 속으로 들어갔다. 세상에 장애가 많고 세상인연으로 연마하지 못했지만, 황산이 가까운 거리에 있어 지금 처음으로 여행하였는데, 멀고 외진 곳이더라도 세상 밖 좋은 경치를 어찌 두루 살피지 않겠는가.
금강산과 속리산 역시 내가 평생 보고싶은 곳이었기에, 수년간의 시간을 내어 반평생의 소원에 부응하고자 하였으나, 몸과 마음이 점차 소진해지고 다리 힘이 이미 약해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옛날 성인의 가르침에 이르기를 “높은 곳을 오르기는 반드시 낮은 곳에서 시작하고, 먼 길은 갈 때는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시작한다”고 하였다. 오늘 황악산 여행을 하였기에 장차 금강산과 속리산을 유람하여 오를 것이니 이것은 다행이다. 불행하게도 저 산들을 보지 못했지만, 이치와 정신이 만나 마음으로 깨닫게 되면, 이 산을 보았던 것이 저 산을 아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필 멀리 여행한 시기가 환갑 후이니 뜻이 피로하지 않겠는가.
산경지에 대해 어둡고 배우지 못하여, 간략히 경로를 서술하고 몇 가지만 인용하고 많이 빠트렸다. 산수의 지형을 여기에 옮겼고 산수의 즐거움을 여기에 담았다. 뒤에 산수를 보고자하는 사람이 이 글을 먼저 본다면, 비록 발로 답사하지 않더라도 인자와 지자의 즐거움에 대하여 마음으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문장에 거리낌 있더라도 귀로 듣고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없기를 바란다.
*괘일누만(掛一漏萬) : 하나를 인용하고 만 개를 빠뜨림. 유류가 대단히 많음을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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