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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자
2024년 2월 4일 / 마 5:3, 눅 6:20
【 하나님께서 당신의 눈을 열어 그분이 실제로 누구신지 알게하여 그분의 이름이 다른 어떤 것보다 당신의 마음에 귀하게 여기지도록 기도하십시오. - 존 파이퍼 -
우리는 죄로 인해 눈이 어두워졌다. 그동안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서 살았다. 이제 희미하게 보였던 그리스도를 선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아갈수록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우리의 신앙은 한 가지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아마도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았다고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일평생 동안 주님을 다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 이름 안에 숨겨져 있는 비밀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지 못한다. “주님, 내 눈을 열어주소서. 하나님을 더 알게 하소서.” 이보다 더 절실한 기도는 없을 것이다. 】
현대인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가운데 가난이라는 것이 들어있다. 어느 유명한 사상가가 이렇게 외쳤다. ‘가난해지지 않도록 결심하십시오. 가난은 행복의 적입니다.’ 아마 이 한 마디가 현대인들의 그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가난은 악인 것 같다.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갖가지 사회악을 키우는 온상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난이라는 용어를 서슴지 않고 사용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누가복음에서는 심령이라는 말을 빼고 이야기하셨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돈이나 부나 향락을 우상처럼 생각하고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정말 매력 없는 말씀처럼 들릴 것이다.
더욱이 이 ‘가난’이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원래의 의미를 알게 되면 더더욱 이 말씀은 복이 될 수가 없다. 헬라어로 ‘프토코스’(ptokos) 입니다. 이 말은 재물을 적당히 가지고 살면서 약간 아쉽게 느낄 정도의 그런 가난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굽실거리면서 동냥을 하는 거지의 형편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자집 대문 밖에서 죽을 때까지 평생 구걸하면서 살다가 간 나사로와 같은 형편을 의미한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프토코스’라고 말한다. 이 ‘프토코스’라는 단어가 바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난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신 용어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슨 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주스러운 것으로 어떻게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셔도 그것은 마치 정가표를 바꿔 달아 놓은 상품을 보는 것 같다. 1-2천만원 짜리 밍크코트에 붙어있던 정가표를 떼어다가 만원짜리 티셔츠에 옮겨 붙였다고 해서 티셔츠가 밍크코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난은 가난이고, 부한 것은 부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가 공감할 수 있도록 말씀하려고 하셨다면 ‘심령이 부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셔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부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셔야 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말씀을 접할 때의 느낌이고 반응이다. 우리 자신은 가난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를 가지고 선언하시는 진리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들에게 선언하시는 말씀이다. 무지함과 어리석음과 어두움에 쌓여있는 인간들에게 빛과 진리와 거룩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언하는 진리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느니라.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느니라.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열어야 한다. 이 말씀 안에 구원이 있다. 이 말씀 안에 행복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선입견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면을 생각할 때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심령의 가난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될 마음의 태도를 가리킨다. 사람 앞에서 심령이 가난하거나 부한 것은 상관이 없다. 사람 앞에서는 그저 있는 대로 대하면 된다. 그러나 만유의 주가 되시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갈 때는 심령이 가난해야 자가 되어야 한다. 좀더 쉽게 표현하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말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심령의 가난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낮아지는 마음의 태도이다. 마음을 비우면 낮아지게 된다. 낮아진 사람은 마음이 비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 있다.
▶ 마음이 빈 자와 마음을 비우지 못한 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아주 짤막한 에피소드로 잘 설명하신 구절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8장 9절 이하에 나오는 비유이다.
어느 날 바리새인과 세리가 어떻게 시간이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남들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는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흠 잡힐 것이 없을 만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거룩한 생활을 한다는 자부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한편 세리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매국노요, 모리배 같은 인간이요, 양심을 떼어 놓고 살아서 사람들로부터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는 쓰레기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돈이 많은 사람이다. 두 사람이 성전에 들어갔다.
바리새인은 자신만만하게 성전 저 깊숙한 앞자리까지 들어가더니 두 손을 번쩍 들고 하늘을 향해 머리를 치켜들고 눈을 뜨고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구별이 되는 사람입니다. 토색하는 사람, 간음하는 사람, 또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과 저는 다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하고 구별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기도를 합니다. 저는 십일조를 꼬박꼬박 냅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마음이 부한 자라고 하신다. 심령이 부한 자, 심령에 무엇을 가득히 담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자꾸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하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C.S. 루이스라고 하는 유명한 기독교 변증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좀더 선하다, 좀더 낫다, 좀더 거룩하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니고 악마의 지배를 받고서 행동하는 사람이다. 이것을 꼭 기억하라. 왜냐하면 그런 마음의 태도는 영적으로 교만이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셨고, 그런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대적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교만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대적하는 인간의 악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대적하는 마음의 상태가 교만이요, 마음에 무엇인가 가득히 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세가 교만이다. 바로 바리새인이 이와 같은 사람이었다.
▶ 한편 세리는 어떠했는가? 성전 앞자리까지 가지도 못했다. 뒷구석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 그저 이 말밖에 하지 못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 내놓을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하게 자기를 비하(卑下)시켰고 철저하게 자기를 포기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긍휼히 여기신다. 왜냐하면, 마음을 비우고 나왔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하면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자를 두고 하시는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교회를 다니지만 안타깝게도 심령이 가난한 분들을 거의 보지 못한다. 그중에 나 자신도 마찬가지라도 할 수밖에 없다. 나 자신부터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앉아 있다. 부인하고 싶지만, 오늘만큼은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이 이를 증거가 되고 있다.
마 8:5-12 /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다; 눅 7:1-10, 요 4:43-54]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였다. 한 백부장이 와서 자기 하인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으니 낫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예수께서는 7) ‘그래, 내가 가서 고쳐주마’ 하고 대답하셨다. 8) 그러자 백부장이 말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집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이 다만 이 자리에서 ‘나으라.’ 하고 말씀만 해도 제 하인은 나을 것입니다. 9) 저도 지휘관 밑에 있고 제 밑에도 부하들이 있어 제가 이 사람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하인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저는 주님이 ‘병이 나으라’ 하고 말씀만 하시면 그 병이 나을 줄 압니다.' 10) 그 백부장의 말에 감탄하신 예수께서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온 땅에서 나는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본 일이 없다. 11) 이 백부장과 같은 많은 이방 사람들이 세계 여러 곳에서부터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늘나라에 들어가 앉을 것이다. 12)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늘나라가 마련되어 있는데도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땅을 치며 통곡을 할 것이다.’
칭찬받는 신앙 / 도널드 맥컬로우가 ‘하찮아진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우리의 편의에 따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인 믿음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본 훼퍼가 ‘나를 따르라’라는 책에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를 싸구려로 바꾸었다’라고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값싼 싸구려로 생각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히 11:6 상반 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겨우 명목만을 유지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칭찬받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의 믿음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다. 왜냐하면 백부장은 겨우 명목만을 유지하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 칭찬받는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까지 기이히 놀랄 정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기이히 여겨도 하나님에게는 별로 기이하지 않은 일들이(슥 8:4-6) 보통인데,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까지도 기이히 여긴 믿음이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그래서 13절에서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라고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간구에 응답을 주셨다.
▶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서(계 3:15-22) / 왜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깊이 만지지 못하는가? 왜 우리의 심령에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는가? 한 번밖에 없는 이 한 생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 드리고 싶은 마음이 왜 생기지 않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마음이 가득해서 그렇다. 아쉬운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기댈 데가 많아서 그렇다.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그렇다.
계 3:15-22 /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나는 네가 차든지 덥든지 어느 한쪽이면 좋겠다. 16) 그러나 너는 미지근하기만 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내 입에서 토해내겠다. 17) 너는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손에 넣을 수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너는 네 자신이 불쌍하고 비참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18) 그러므로 나는 네게 충고한다. 불로 제련된 순금을 내게서 사라. 그것만이 네가 참다운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깨끗하고 순결한 흰옷을 내게서 사라. 그래야 너는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네 눈을 치료하려거든 내게서 안약을 사라. 그러면 시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19)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훈련과 징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무관심한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일에 열성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벌할 수밖에 없다. 2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21) 이기는 사람은 마치 내가 이긴 후에 내 아버지께서 당신의 보좌에 나를 함께 앉히신 것처럼 나도 내 보좌 곁에 그를 앉게 하겠다. 22)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일러주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러한 마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불행하게 생각하신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자랑하는 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하여 성경을 들이대면서 남의 잘한 것들을 비하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지위가 아무리 높고 세상 사람 보기에 능력 있고 성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런 것들을 들고나와 하나님 앞에 자랑하려는 마음을 가져서도 안 된다. 사람에게는 대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뿐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선하게 살고 있고, 양심적으로 살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무슨 특별한 죄를 범한 일이 있는가? 이만하면 하나님도 인정해 주실 것이다.’라는 케케묵은 생각하고 있엇서도 안 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마음에 담고 나오면 그 사람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 있는 자, 행복한 자가 되기 어렵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나 재산 때문에 마음이 든든할지 모른다. 그러나 든든한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 앞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걸림돌이 된다. 그런 것이 하나님 앞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자기가 대단한 것을 가진 줄 알고 교만하여 상당한 긍지를 가진 삶을 살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 모든 것들을 다 저 화장실에서 물속에다 흘려보내는 배설물과 같이 생각했다. 다 쓸어 버리고 조금도 내 속에 남김없이 마음을 완전히 비웠다. 예수님 앞에 나오자 지금까지 너무나 귀하게 여겨서 꼭 쥐고 놓지 않았던 것들이 다 소용없는 것임을 알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매일같이 고백해야 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싹 쓸어 버렸다. 예수 믿는 사람의 마음이 이러해야 한다. 마음을 비우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천국으로 채워주신다고 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맺는 말
▶ 손경민의 작사 작곡 ♬ 은혜 /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 ♬ 해 같이 빛나리 / ❶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겸손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믿음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❷ 당신의 그 순종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사랑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찬송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헌신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불타는 사랑으로 가득 찬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 우리의 기도 제목 / 마 6:9-13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높임을 받으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13)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우리의 의는 만나와 같이 일회용에 불과하다. 시들어버리는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몸을 가리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을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 하나님의 종이 갖추어야 할 자세 / 눅 17:7-10 종이 밭을 갈거나 양을 치고 돌아왔다고 해서 그대로 앉아서 먹을 수는 없다. 8) 자기가 먹기 전에 먼저 주인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고 시중을 들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9) 그렇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특별히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10) 이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단순히 내 말에 복종한 것을 가지고 너희 자신이 칭찬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하였기 때문이다.'
▶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 있는 자 / 마 5:3-9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슬퍼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온유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올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만족할 것이다. 7) 친절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9)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10) 올바른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나의 제자라는 이유로 모욕당하고 박해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받을 때 너희는 행복하다. 12) 그럴 때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이같이 박해를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라.
▶ 우리가 늘 빠지기 쉬운 영적인 교만의 함정있다. 큰 마귀는 우리가 종교적으로 열정을 내는 것을 결코 방해하지 않는다. 바리새인들이 기도하고 바리새인들이 구제하고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사울 왕이 제사를 드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 제사드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 모든 일을 한 다음에 심어주는 교만한 마음, ’내가 이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을 심어주게 될 때 망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누가 복이 있는 자인가?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옵니다.’ 거룩하게 살려고 했지만, 또 미움이 속에서부터 솟아나고 교만한 마음이 솟아나고 다른 사람을 향한 멸시의 마음이 솟아나고, 정말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내가 어디로 가겠나이까?’라고 부르짖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히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고 푸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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