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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문학사 작품선
김윤숭 선
<고려사 > 지 권제25 > 악2(樂 二) > 삼국속악 > 백제(百濟) > 지리산>
智異山.
求禮縣人之女, 有姿色, 居智異山, 家貧盡婦道. 百濟王, 聞其美, 欲內之, 女作是歌, 誓死不從.
지리산(智異山)
구례현(求禮縣) 사람의 딸이 자색(姿色)을 지녔는데 지리산에서 살면서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여자로서의 도리를 극진히 하였다. 백제의 임금이 그 여자의 아름다움을 듣고 궁궐로 들이려 하자 여자가 이 노래를 지어 죽기를 맹세하고 따르지 않았다.
*삼국사기 > 열전 제8 > 도미(都彌) > 백제인 도미와 그의 처
先是, 蓋婁王, 聞都彌妻之艶, 召都彌語, 曰婦人之德貞潔爲先, 然, 在幽昏無人之地, 誘以巧言, 能不動心者鮮矣, 對曰若臣之妻, 雖死, 無貳者也, 王留都彌, 使近臣詐爲王 , 抵其家語妻, 曰已與都彌博賭 , 將亂之 , 婦請更衣 , 雜餙一婢進之, 王怒 , 誣都彌以罪矐兩眸, 泛之河, 又引其婦强之 , 婦請薰沐 , 逃至江 , 乘舟至泉城島, 遇其夫, 同舟至高句麗蒜山下, 麗人哀之, 丐以衣食, 終於羈旅.
*삼국유사 > 권 제1 > 제1 기이(紀異第一) > 도화녀 비형랑(桃花女 鼻荊郞) > 폐위된 사륜왕이 도화녀와 관계하여 비형랑을 낳다
前此 , 沙梁部之庻女 , 姿容艶羙時號桃花娘. 王聞而召致宫中欲幸之, 女曰 “女之所守 , 不事二夫. 有夫而適他 , 雖万乗之威 , 終不奪也.” 王曰 “殺之何”, 女曰 “寧斬于市 , 有願靡他.” 王戱曰 “無夫則可乎”, 曰 “可”. 王放而遣之. 是年王見廢而崩, 後二年其夫亦死. 浹旬忽夜中 , 王如平昔 , 來於女房曰, “汝昔有諾 , 今無汝夫可乎”, 女不軽諾 , 告於父母, 父母曰 “君王之敎 , 何以避之.” 以其女入於房. 留御七日 , 常有五色雲覆屋 , 香氣滿室. 七日後 , 忽然無蹤. 女因而有娠 , 月滿將産 , 天地振動, 産得一男 , 名曰鼻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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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 권 제5 > 제8 피은(避隐第八) > 영재우적(永才遇賊 ) > 영재 스님이 도적을 감화시키다>
永才遇賊
釋永才性滑稽不累於物善郷歌. 暮嵗将隐于南岳至大峴嶺, 遇賊六十餘人. 将加害才臨刄無懼色怡然當之. 賊恠而問其名曰, 永才. 賊素聞其名, 乃命□□□作歌. 其辭曰. “自矣心米皃史毛逹只将來呑隐日, 逺鳥逸□□過出知遣, 今呑藪未去遣省如. 但非乎隠焉破□主, 次弗□史内於都還於尸朗也, 此兵物叱沙過乎好尸曰沙也内乎呑尼, 阿耶唯只伊吾音之叱恨隐㵛陵隐安攴尚宅都乎隐以多.” 賊感其意贈之綾二端. 才笑而前謝曰, “知財賄之爲地獄根夲, 将避於窮山以餞一生, 何敢受焉.” 乃投之地. 賊又感其言, 皆釋釼投戈落髮爲徒, 同隐智異不復蹈世. 才年僅九十矣在元聖大王之世.
영재우적(永才遇賊)
스님 영재(永才)註 310는 성품이 익살스럽고, 재물에 연연하지 않고, 향가(鄕歌)를 잘 하였다. 나이 들어 남악(南岳)註 311에 은거하려 대현령(大峴嶺)註 312에 이르렀는데, 도적 60여 사람을 만났다.註 313 [도적이] 해를 입히려 하자, 영재는 칼날을 앞에 두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고, 온화하게 그것을 대하였다. 도적이 괴이하여 그의 이름을 물으니, 영재라고 말하였다. 도적은 본디 그 이름을 들어서, 이에 노래를 짓도록 하였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제 마음의 모습 모르던 날에, 멀리 새 달아나듯 지나서 알고, 이제는 숲에 가고 있노라. 다만 잘못된 것은 때리는 님에, 저 세상에 다시 돌아갈 사내들, 이 칼 따위 허물될 날 세우니, 아아 오직 내 몸의 한은 선업은 아니, 바라는 집으로 모아짐입니다.”
도적이 그 뜻에 감동하여, 비단 두 단註 314을 주었다. 영재는 웃으며 앞서 사양하며 말하길, “재물이란 것이 지옥 가는 근본임을 알아, 피하여 산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려 하거늘, 어찌 감히 받겠습니까.” 하고는 이를 땅에 던졌다. 도적이 그 말에 더 감동하여, 모두 칼을 풀고 창을 던지며, 머리를 깎고 [영재의] 무리가 되어, 지리산(智異)에 들어가 함께 숨어 다시는 세상을 밟지 않았다. 영재의 나이가 90에 가까운 원성대왕 註 315의 때였다.
註 310 신라 元聖王(785~798) 때 지리산에 은거한 高德으로 승속 간에 널리 알려진 鄕歌 歌僧인 듯하다. 여기 외에는 그의 행적에 관한 기술을 볼 수 없다. 인명 ‘永才’에 대하여 ‘길치’, ‘길째’로 읽고, ‘길’을 ‘長命’, ‘치’‘째’를 각각 인명 접미사와 차례를 나타내는 말로 읽은 이가 있고(양주동, ≪고가연구≫, 일조각, 1957, 639쪽 참조), 그가 ‘善鄕歌’했다는 데 근거를 두고 ‘永言之才’에서 그 이름의 유래를 말한 견해도 있다(최철, ≪신라향가연구-그 작자와 배경설화를 중심으로≫, 개문사, 1979, 143쪽 참조).
註 312 宜寧縣 서쪽 30리에 大峴의 지명이 있다. 闍崛山의 지맥에 해당하는데, 대동여지도에 三嘉縣 동남에 표시된 大峴도 이것이다. 현재의 경북 청도군 大峴(한재)를 말하는 것으로 청도군과 밀양시의 경계에 있는 華岳山과 북쪽의 南山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성호경, 「향가 우적가의 창작배경 고찰 -청도군 ‘대현(한재)’ 일대와 작품의 관련 양상을 중심으로」, ≪한국학보≫ 93, 일지사, 1998, 5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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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白雪)이 잦아진 골에
이색(李穡)
白雪(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반가온 梅花(매화)는 어느 곳에 픠엿는고.
夕陽(석양)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함양군 유림면 국계리에 목은의 별장 제계서재(蹄溪書齋)가 있었다.
蹄溪書齋 姜弼周詩曰
方塘土塞麻初藝,古岸沙崩樹半傾,桑梓今爲誰氏物,石淙猶送舊時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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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렴 부디 갈다
성종(成宗)
있으렴 부디 갈다 아니 가든 못할소냐.
무단(無端)히 싫더냐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려도 하 애닯고야 가는 뜻을 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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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봉집(文峯集) 정유일(鄭惟一)생년1533년(중종 28)몰년1576년(선조 9)자자중(子中)호문봉(文峯)본관동래(東萊)특기사항이황(李滉)의 문인
文峯先生文集卷之五 / 閑中筆錄
兪好仁字克己。號㵢溪。咸陽人。成廟朝。以文章最承恩遇。置經幄備顧問。引見無時。自謂得佳士。而公以母老。懇乞外補。遂自玉堂。出守居昌。公儒者。居官頗疏闊。及考居下。上見之。下書問監司曰。兪好仁。是予儒臣。爲其母老。聽其補外。今居下考。未知所坐。具悉以聞。監司回啓曰。不顧民事。吟詩不輟。 上見之笑曰。題目頗不俗矣。未幾。復以玉堂召。公復請外。上曰。汝母雖年老。豈不能來京師。予當益汝祿俸。以厚養親之資。汝當率汝母入京。予欲處汝經席。朝夕引見。汝不可棄予遠去也。公感上知遇。不忍復求外。遂受由省親。以上意言于母。爲奉母西歸之計。母曰。吾非惟有疾。汝兄窮不能自存。吾不可棄去。公知母意不欲歸京。遂以具奏。上以手札付銓曹曰。兪好仁爲親乞郡。自咸陽一日程內。守令有闕處。以單望注擬。可也。於是。遂有陜川之命。在官踰年而卒。年纔五十。上聞之痛悼。賻贈有加。初。公以母病呈辭歸省。上遣中使問疾。且謂中使曰。好仁必有詩。汝到其家。凡墻壁几案間。如有所題。汝可潛書以來。中使至其家。見案上有一聯云。北望君臣隔。南來母子同。及回。遂以上聞。上曰。忠孝兩全矣。公以高文淸德。被遇聖主。不能久享福壽。士林惜之。公有㵢溪集行于世。公子漠稍能詩。中司馬。晩年。題詩㵢溪亭曰。平生只解林泉趣。奔走紅塵性未能。老境情懷猶澹泊。一窓梅竹是良朋。年踰八十而死。
유호인(兪好仁)은 자가 극기(克己)이고 호는 뇌계(㵢溪)로, 함양 사람이다. 성묘조(成廟朝)에서 문장으로 임금의 은혜로운 대우를 최고로 받았으며, 경연(經筵)에 들어 고문(顧問)으로 참여하였다. 임금이 수시로 인견하고는 스스로 뛰어난 선비를 얻었다고 생각하였다. 공은 모친이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간절히 외지로 보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마침내 옥당(玉堂)으로 있다가 거창(居昌)의 군수로 나갔다. 공은 유자(儒者)였지만 관직에 있으면서 자못 성글고 어설펐다. 고적(考績)하자 최하위를 차지했다. 임금이 그것을 보고 글을 내려 감사(監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유호인은 나의 유신(儒臣)이다. 그의 모친이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외직으로 보임해 달라는 것을 들어주었는데, 지금 최하위로 평가를 받았다 하니 연유를 알지 못하겠다. 모두 갖추어 아뢰라.” 감사가 다음과 같이 회계(回啓)하였다. “백성들의 일을 돌아보지 않고 시 읊는 것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이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포폄 제목이 자못 속되지 않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옥당으로 불렀다. 공은 다시 외직을 청했다. 임금이 말했다. “그대의 모친이 비록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어찌 경사(京師)에 올 수 없겠는가. 내가 마땅히 그대의 녹봉을 늘려서 모친을 봉양할 밑천을 넉넉히 해 줄 터이니, 그대는 모친을 모시고 경성으로 들어오라. 나는 그대를 경연에 참석하게 하여 아침저녁으로 인견하고자 하니, 그대는 나를 버리고 멀리 가지 말라.” 공은 임금의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차마 더는 외직을 구하지 못하고 결국 말미를 받아 모친을 살폈다. 임금의 뜻을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서쪽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모친이 말하였다. “내가 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네 형이 가난하여 생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니 나는 여기를 버리고 떠날 수 없다.” 공은 어머니의 뜻이 경사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임을 알았다. 마침내 임금에게 갖추어 아뢰자 임금이 손수 적은 서찰로 다음과 같이 전조(銓曹)에 분부하였다. “유호인은 모친을 위해 걸군(乞郡)하니, 함양에서 하룻길 이내가 되는 곳 중에 수령이 빈 지역이 있으면 단수로 추천하여 올리라.” 이에 마침내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임명되었다. 관직에 있다가 해를 넘겨 세상을 떴다. 나이가 겨우 오십이었다. 임금이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부의(賻儀)를 일반적인 규례보다 넉넉히 보냈다.
이전에 공이 어머니의 병환으로 사직의 글을 올리고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돌아가 보살펴 드렸다. 임금이 중사(中使)를 보내 병문안을 하며, 또 중사에게 다음과 같이 일렀다. “유호인에게는 분명 시가 있을 것이다. 네가 그의 집에 도착해서 무릇 담이나 벽, 궤(几)나 책상에 그가 지은 시가 있으면, 네가 몰래 적어 오면 좋겠다.” 중사가 집에 도착하니 책상 위에 오언 율시 한 연(聯)이 있었는데,
“북으로 바라보니 군신이 막히었고, 남으로 오니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하네.〔北望君臣隔, 南來母子同.〕”
㵢谿集卷之五 / 五言律詩 / 登鳥岾
凌晨登雪嶺。春意政濛濛。
北望君臣隔。南來母子同。
蒼茫迷宿霧。迢遞倚層空。
更欲裁書札。愁邊有北鴻。
속동문선 제6권 / 오언율시(五言律詩) / 등조령(登鳥嶺)
登鳥嶺 등조령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
凌晨登雪嶺 릉신등설령
春意正濛濛 춘의정몽몽
北望君臣隔 북망군신격
南來母子同 남래모자동
蒼茫迷宿霧 창망미숙무
迢遞倚層空 초체의층공
更欲裁書札 경욕재서찰
愁邊有北鴻 수변유북홍
새재에 올라
이른 새벽에 눈 내린 재에 오르니
봄뜻은 정녕 몽롱하구나
북으로 바라보니 군신은 막히었고
남으로 오니 모자가 같이하는구나
아득하여라 짙은 안개에 헷갈리고
까마득하여라 높은 하늘에 기대었네
다시 편지를 쓰려고 하는데
시름 가에 북으로 가는 기러기 있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9
라고 하였다. 돌아와서 이윽고 임금에게 아뢰자, 임금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충과 효 둘 다 온전하구나.” 공은 뛰어난 문재(文才)와 청아한 덕으로 성스러운 임금을 만났지만, 행복과 장수를 오랫동안 누리지 못하여 사림들이 안타까워하였다. 공에게는 《뇌계집(㵢溪集)》이 있어 세상에 유포되었다.
공의 아들 유막(兪漠)은 시에 조금 능하였고, 사마시에 합격했다. 만년에 뇌계정(㵢溪亭)에 대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평소에 그저 숲과 샘의 정취만을 깨달을 뿐이니 / 平生只解林泉趣
홍진 속에서 분주한 것은 천성으로 할 수 없네 / 奔走紅塵性未能
늘그막에 품은 마음 오히려 담박하니 / 老境情懷猶澹泊
작은 창의 매화와 대나무, 바로 좋은 친구라네 / 一窓梅竹是良朋
나이 팔십을 넘어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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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면 가랴하고
선조대왕
오면 가랴하고 가면 아니오네
오노라 가노라하니 볼 날히 전혀업네
오날도 가노라하니 그를 슬허 하노라.
*선조 5년 조선의 문신인 노진이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갈때
선조가 이 시조를 지어 중사를 보내 전했다고 한다.
만수산 만수동에 만수정이 있더이다.
그 물로 술 빚으니 만수주라 하더이다
이 한 잔 잡으시면 만수무강 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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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製歌 先生上章歸養。方渡漢江時。 宣廟特製此歌。寫于銀錚。追遣中使以 贈之。
오면 가랴하고 가면 아니오네。오노라 가노라니 볼날히 젼혀업네。오날도 가노라하니 그를 설워 하노라。
進豊宴。獻萬壽山歌。
萬壽山 萬壽洞의 萬壽泉이 잇더이다。이물의 슐을 비져 萬壽酒라 하더이다。이 잔을 잡으시오면 萬壽無疆 하시리다。
母夫人壽宴歌
日中 金가마고 가지 말고 내말 드러。너난 反哺鳥라 鳥中之 曾參이니。오날은 나를 위하야 長在中天 하얏고댜。
母夫人若歌
國家 太平하고 萱堂에 날이 긴 제。머리 흰 判書아기 萬壽杯 드리난고。每日이 오날 같다면 셩이 무에 가싀리。아마도 一髮秋毫도 聖恩잇가 하노라。
附次 門人趙宗道號大笑軒
가마고 톡기 즘생 그 무어시 바앗바셔。九萬里 長天을 허위허위 가시난고。이제난 십니의 한번식 수염수염 가렴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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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류산 양단수를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頭流山(두류산) 兩端水(양단수)를 녜 듯고 이졔 보니,
桃花(도화) 뜬 맑은 물에 山影(산영)조차 잠겻셰라.
아희야 武陵(무릉)이 어듸오 나는 옌가 하노라.
삼동에 베옷 입고
조식(曺植)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뉘조차 쬐인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진다 하니 그를 설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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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가삼결(短歌三闋)
강익(姜翼)
물아어데가난나갈ㅅ길머러셔라。
뉘누리다채와지내노라여흘여흘。
滄海예몯밋츤젼의야근칠쭐이이시랴。
芝蘭을갓고랴하야호믜를두러메고。
田園을도라보니반이나마荊棘이다。
아해야이기음몯다여져믈까하노리。
柴扉예개즛난다이山村의긔뉘오리。
댓닙푸른데봄ㅅ새울소리로다。
아해야날推尋오나든採薇가다하여라。
개암(介菴) 강익(姜翼, 1523-1567) 시조
물아 어디 가느냐 갈 길 멀었어라.
뉘누리 다 채와 지내노라 여흘여흘
창해(滄海)에 못 미칠 전이야 그칠 줄이 있으랴.
시비(柴扉)에 개 짖는다 이 산촌에 그 뉘 오리.
댓잎 푸른데 봄새 울음소리로다.
아이야 날 추심(推尋) 오나든 채미(採薇)갔다 하여라.
지란(芝蘭)을 가꾸려 하여 호미를 둘러메고
전원(田園)을 돌아보니 반이나마 형극(荊棘)이다.
아이야 이 기음 못다 매어 해 저물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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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상팔경가 (瀟湘八景歌)
(아니리) 송기덕이가 소상팔경을 헙니다.
(중머리)
산악(山嶽)이 잠형(潛形)하고 음풍(陰風)이 노호(怒號)하니
수면에 듣는 소리 천병만마(千兵萬馬) 서로 맞아
철기도창(鐵騎刀槍)이었는 듯 처마 끝에 급한 형세
백절폭포(百折瀑布) 쏘아 있고 대수풀 흩뿌릴 제
황영(皇英)의 깊은 한(恨)을 잎잎이 호소하니
소상야우(瀟湘夜雨)라 하는 데요.
칠백평호(七百平湖) 맑은 물은 상하천광(上下天光) 푸르렀다.
얼음바퀴 문득 솟아 중천에 배회하니
계궁(桂宮) 항아(姮娥) 단청(丹靑)하고 새 거울을 열었는데
적막한 어룡(魚龍)들은 세(勢)를 얻어 출몰하고
풍림(楓林)에 귀아(歸鴉)들은 빛을 놀라 사라지니,
동정추월(洞庭秋月)이 아니냐.
연파만경(烟波萬頃)은 하늘에 닿았는데
오고 가는 상고선(商賈船)은 북을 둥둥 울리면서
어기여차 닻 감는 소리 보아 알든 못하여도
다만 앞에 섰던 산이 문득 뒤로 옮아가니
원포귀범(遠浦歸帆) 이 아니냐.
수벽사명양안태(水碧沙明兩岸苔)에 불승청원각비래(不勝淸怨却飛來)라
날아오는 저 기러기 갈순(葛筍) 하나 입에 물고
일점이점(一點二點) 점점마다 행렬지어 떨어지니
평사낙안(平沙落雁) 이 아니냐,
격안전촌(隔岸前村) 양삼가(兩三家)에 밥 짓는 연기 일고
파조귀래(罷釣歸來) 배를 매고 유교변(柳橋邊)에 술을 산 후
애내성(애乃聲) 부르면서 흥을 겨워 비겼으니
소림(疎林)에 던진 새는 지는 해를 설워 울고
벽파(碧波)에 뛰는 고기 비낀 볕 맞아 노니
어촌낙조(漁村落照) 이 아니냐.
천지 자욱하여 분분비비(紛紛비비) 나리는 양 분접(紛蝶)이 다투는 듯
유서(柳絮) 전광(顚狂)한 듯 위곡(委曲)한 늙은 가지 옥룡(玉龍)이 서리었고
기괴한 성낸 바위 염호(鹽虎) 엎쳤는 듯
강산이 변화하여 은세계(銀世界)를 이뤘으니
강천모설(江天暮雪) 아니냐.
산천에 싸인 안개 무르녹아 빚어 내니
청담(淸淡)한 새 얼굴은 가는 구름 속에 있고
진천(秦川)에 고운 계집 깁비단 씻어 건듯
발 밖에 기음저서 취적적(翠滴滴) 전비비(轉비비)하니
산시청람(山市晴嵐)을 구경하고.
만리청산(萬里靑山)이요 일편고성(一片孤城)이라
달 떨어지자 가마귀 까욱까욱
서리 가득한 하늘에 난데없는 쇠북 소리
객선(客船)에 뎅뎅 떨어지니
한사만종(寒寺晩鍾)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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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상팔경(瀟湘八景) : 중국 소수(瀟水)와 상수(湘水) 부근에 있는 여덟 곳의 아름다운 경치로 평사 낙안(平沙落雁)ㆍ원포 귀범(遠浦歸帆)ㆍ산시 청람(山市晴嵐)ㆍ강천 모설(江天暮雪)ㆍ동정 추월(洞庭秋月)ㆍ소상 야우(瀟湘夜雨)ㆍ연사 만종(煙寺晚鍾)ㆍ어촌 석조(漁村夕照)를 말한다. 《夢溪筆談 書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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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사설 변강쇠가 (성두본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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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에 둥구마천 백모촌에 여러 초군 아이들이 나무하러 몰려 와서 지게 목발 뚜드리며 방아타령, 산타령에 농부가(農夫歌), 목동가(牧童歌)로 장난을 하는구나. 한 놈은 방아타령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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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을 둘러보니 둥구마천 가는 길에 어떠한 장승 하나 산중에 서 있거늘 강쇠가 반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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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목정정(伐木丁丁) 애 안 쓰고 좋은 나무 저기 있다. 일모도궁(日暮途窮) 이내 신세 불로이득(不勞而得) 좋을씨고.”
74
지게를 찾아 지고 장승 선 데 급히 가니 장승이 화를 내어 낯에 핏기 올리고서 눈을 딱 부릅뜨니 강쇠가 호령(號令)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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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놈, 누구 앞에다 색기(色氣)하여 눈망울 부릅뜨니. 삼남(三南) 설축 변강쇠를 이름도 못 들었느냐. 과거(科擧), 마전(馬廛), 파시평(波市坪)과 사당(寺黨) 노름, 씨름판에 이내 솜씨 사람 칠 제 선취(先取) 복장(腹腸) 후취(後取) 덜미, 가래딴죽, 열 두 권법(拳法). 범강(范彊), 장달(張達), 허저(許저)라도 모두 다 둑 안에 떨어지니 수족(手足) 없는 너만 놈이 생심(生心)이나 방울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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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들어 불끈 안고 엇둘음 쑥 빼내어 지게 위에 짊어지고 유대군(留待軍) 소리 하며 제 집으로 돌아와서 문 안에 들어서며, 호기(豪氣)를 장히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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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에 장승 목신 무죄(無罪)히 강쇠 만나 도끼 아래 조각 나고 부엌 속에 잔 재 되니 오죽이 원통(寃通)켔나. 의지(依持)할 곳이 없어 중천(中天)에 떠서 울며, 나 혼자 다녀서는 이놈 원수 못 값겠다. 대방(大方) 전에 찾아가서 억울함 원정(原情) 하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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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京畿) 노강(鷺江) 선창(船艙) 목에 대방 장승 찾아가서 문안(問安)을 한 연후에 원정을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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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小將)은 경상도 함양군에 산로 지킨 장승으로 신지(神祗) 처리(處理) 한 일 없고, 평민 침학(侵虐)한 일 없어, 불피풍우(不避風雨)하고, 각수본직(各守本職) 하옵더니 변강쇠라 하는 놈이 일국의 난봉으로 산중에 주접(柱接)하여, 무죄한 소장에게 공연히 달려들어 무수(無數) 후욕(후辱)한 연후에 빼어 지고 제 집 가니, 제 계집이 깜짝 놀라 도로 갖다 세워라 하되, 이 놈이 아니 듣고 도끼로 쾅쾅 패여 제 부엌에 화장(火葬)하니, 이 놈 그저 두어서는 삼동(三冬)에 장작감 근처의 동관(同官) 다 패 때고, 순망치한(脣亡齒寒) 남은 화가 안 미칠 데 없을 테니 십분(十分) 통촉(洞燭)하옵소서. 소장의 설원(雪寃)하고 후환 막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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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이 대경(大驚)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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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변이 큰 변이라. 경홀(輕忽) 작처(酌處) 못 할 테니 사근내(沙斤乃) 공원(公員)님과 지지대(遲遲臺) 유사(有司)님께 내 전갈(傳喝) 엿쭙기를 ‘요새 적조(積阻)하였으니 문안일향(問安一向)하옵신지. 경상도 함양 동관 발괄(白活) 원정을 듣사온 즉 천만고 없던 변이 오늘날 생겼으니, 수고타 마옵시고 잠깐 왕림(枉臨)하옵셔서 동의작처(同意酌處)하옵시다.’ 전갈하고 모셔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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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 혼령(魂靈) 급히 가서 두 군데 전갈하니, 공원 유사 급히 와서 의례 인사한 연후에 함양(咸陽) 장승 발괄 내력 대방이 발론(發論)하니 공원 유사 엿쭙되,
91
“우리 장승 생긴 후로 처음 난 변괴(變怪)이오니 삼소임(三所任)만 모여 앉아 종용작처(從容酌處) 못 할지라, 팔도 동관 다 청하여 공론(公論) 처치하옵시다.”
92
대방이 좋다 하고 입으로 붓을 물고, 통문(通文) 넉 장 썩 써 내니 통문에 하였으되,
93
“우통유사(右通喩事)는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하고, 지초(芝草)에 불이 타면 난초가 탄식(歎息)키는 유유상종(類類相從) 환란상구(患難相救) 떳떳한 이치로다. 지리산중 변강쇠가 함양 동관 빼어다가 작파(斫破) 화장하였으니 만과유경(萬과猶輕) 이 놈 죄상 경홀 작처할 수 없어 각도 동관전에 일체(一切)로 발통(發通)하니 금월 초 삼경야에 노강 선창으로 일제취회(一齊聚會)하여 함양 동관 조상(弔喪)하고, 변강쇠놈 죽일 꾀를 각출의견(各出意見)하옵소서. 년 월 일.”
110
팔도 장승 청령(廳令)하고, 사냥 나온 벌떼같이 병 하나씩 등에 지고, 함양 장승 앞장 서서 강쇠에게 달려들어 각기 자기네 맡은 대로 병도배(病塗褙)를 한 연후에 아까같이 흩어진다.
128
“천하언재(天下言哉)시며 지하언재(地何言哉)시리오마는 고지즉응(叩之卽應)하나니 부대인자(夫大人者)는 여천지합기덕(與天地合其德)하며 여일월합기명(與日月合其明)하며 여사시합기서(與四時合其序)하며 여귀신합기길흉(與鬼神合其吉凶)하시니, 신기영의(神其靈矣)라, 감이수통언(感而遂通焉)하소서. 금우태세(今又太歲) 을유이월(乙酉二月) 갑자삭(甲子朔) 초육일(初六日) 기사(己巳) 경상우도(慶尙右道) 함양군 지리산중거여인(智里山中居女人) 옹씨 근복문(謹伏問). 가부(家夫) 임술생신(壬戌生身) 변강쇠가 우연 득병(得病)하여 사생(死生)을 판단(判斷)하니 복걸(伏乞) 점신(占神)은 물비(勿秘) 괘효(卦爻) 신명(神明) 소시(昭示), 신명 소시. 하나 둘 셋 넷.”
153
함양(咸陽) 자바지 명의(名醫)란 말을 듣고 찾아 가서 사정(事情)하니 이진사(李進士) 허락하고 몸소 와서 진맥(診脈)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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絶命詩 절명시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
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沉淪 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절명시
새 짐승은 슬피 울고 바다 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세계는 이미 침몰하였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역사를 회고하니
인간세상에 지식인 되기도 어렵구나
*매천사(梅泉祠): 매천고택, 전남문화재자료 제37호,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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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開吟 화개음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風蒲泛泛弄輕柔 풍포범범롱경유
四月花開麥已秋 사월화개맥이추
看盡頭流千萬疊 간진두류천만첩
孤舟又下大江流 고주우하대강류
화개에서 읊다
갯버들 하늘하늘 부드럽게 흔들리고
사월달 화개땅은 보리 이미 익었구나
두류산 천만 봉우리 다 보고나서
외로운 배타고 또 큰강 따라 내려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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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伽倻山讀書堂 제가야산독서당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狂奔疊石吼重巒 광분첩석후중만
人語難分咫尺間 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 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 고교유수진롱산
가야산 독서당에 쓰다
돌들에 미친 듯 내닫고 첩첩산중 울부짖으니
사람 말소리를 면전에서도 분간하기 어렵네
시비하는 소리가 귀에 들릴까 늘 두려워하여
짐짓 흐르는 물로 다 산을 감싸게 하였구나
*고운 최치원 선생은 가야산에 은거하기 전에 함양목민관 천령군 태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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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園 二首 다원 2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欲奉靈苗壽聖君 욕봉영묘수성군
新羅遺種久無聞 신라유종구무문
如今擷得頭流下 여금힐득두류하
且喜吾民寬一分 차희오민관일분
차밭 1수
신령한 차 받들어 임금님 축수하고자 하나
신라 때 남겨진 씨앗을 찾지 못하였다
이제야 두류산 아래에서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또한 기쁘다
竹外荒園數畝坡 죽외황원수무파
紫英鳥嘴幾時誇 자영조취기시과
但令民療心頭肉 단령민료심두육
不要籠加粟粒芽 불요농가속립아
차밭 2수
대숲 밖 거친 동산 1백여 평의 언덕
자영차 조취차 언제쯤 자랑할 수 있을까
다만 백성들의 근본 고통 덜게 함이지
무이차 같은 명다를 만들려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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登龜寺 贈敏修禪師 등구사 증민수선사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
坦夷堂裏共幽期 탄이당리공유기
香燼堆盤夜正遲 향신퇴반야정지
萬丈頭留眞面目 만장두류진면목
坐來收拾入吾詩 좌래수습입오시
등구사에서 민수선사에게 주다
탄이당에서 그윽한 만남을 함께 하니
향불 재 쌓이고 밤은 정녕 더디구나
만길 되는 두류산의 진면목을
앉아서 거두어 내 시에 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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頭流歌 두류가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
天王峯外山無尊 천왕봉외산무존
夜半日出扶桑曉 야반일출부상효
直視東南萬里間 직시동남만리간
一髮靑島海雲表 일발청도해운표
두류산 노래
천왕봉 밖에는 높은 산이 없고
밤중에 해 뜨니 동쪽나라 동트네
동남쪽 만리 사이 똑바로 보니
한올같은 푸른 섬 바다구름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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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德山溪亭柱 제덕산계정주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請看千石鍾 청간천석종
非大扣無聲 비대구무성
爭似頭流山 쟁사두류산
天鳴猶不鳴 천명유부명
덕산 냇가 정자에 쓰다
천 섬들이 종을 보게나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지
어찌 같으랴 두류산이
하늘이 울려도 울지 않는 것과
德山卜居 덕산복거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春山底處無芳草 춘산저처무방초
只愛天王近帝居 지애천왕근제거
白手歸來何物食 백수귀래하물식
銀河十里喫猶餘 은하십리끽유여
덕산에 자리잡다
봄 산 어딘들 꽃다운 풀이 없으랴만
천왕봉이 하늘나라 가까움 사랑해서지
맨손으로 와서 어느 것을 먹고 살꼬
십리 흐르는 맑은 물 먹고도 남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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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希朗和尙 증희랑화상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步得金剛地上說 보득금강지상설
扶薩鐵圍山間結 부살철위산간결
苾蒭海印寺講經 필추해인사강경
雜花從此成三絶 잡화종차성삼절
희랑대사에게
금강의 지위에 올라서서 하신 설법
보살이 철위산 속에서 결집한 불경
비구가 해인사에서 불경 강의하니
화엄경이 이로부터 애독될 것이리
* “希郞大德君 夏日於伽倻山海印寺 講華嚴經 僕以捍虜所拘 莫能就聽 一吟一詠 五仄五平 十絶成章 歌頌其事 防虜大監 天嶺郡太守 遏粲 崔致遠”. <伽倻山海印寺古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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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經 심경
서산대사(西山大師)
光陰繩不繫 광음승불계
衰病藥難醫 쇠병약난의
我有眞方術 아유진방술
心經勉受持 심경면수지
세월은 밧줄로도 묶을 수 없고
노쇠는 약으로 고치기 어렵네
나에게 참다운 방술이 있으니
반야심경을 힘써 수지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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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정 思雲亭
인산仁山 김일훈金一勳(1909~1992)
천강유선수식림 天降儒仙手植林
위성시백읍상심 渭城詩伯揖相尋
대황대야금파동 大黃大野金波動
장벽장공옥로심 長碧長空玉露深
지락고금신성지 志樂古今神聖志
심통역대준웅심 心通歷代俊雄心
사중현사치평일 社中賢士治平日
거세효친송덕음 擧世孝親頌德音
하늘이 내린 선비신선 심은 상림에서
위성음사의 시인들 서로 읍하며 찾네
크게 누런 큰 들에 황금 물결 움직이고
길게 푸른 긴 하늘에 옥같은 이슬 짙네
뜻은 고금 성현의 뜻을 즐거워하고
마음은 역대 영웅의 마음을 통하네
위성음사의 어진 회원들 태평 시대에
온 세상이 효도스런 덕성을 칭송하네
불초삼남 김윤수 근역
(2006.12.26 함양문학 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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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문학관 육행시 장원작
2011년 8월
연당 김태근
지리산아!
이쁜 여인을 닮았구나!
산세가 엄마품처럼 깊고 고우니
문학인들이 찾아오고
학자들도 모여들고 너도나도 찾아드네.
관광지 중에 관광지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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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림의 노래
김윤숭 작
신라 천년 문화 정기 사량부에 맺히어
고운선생 홀로 받아 동국문학 비조 되고
함양땅 천령군 태수 백성 위한 선정 펴
신라 문호 유가 신선 손수 심은 상림숲
위천수 홍수 막고 해충류 쫓아내고
천년숲 천연기념물 애민정신 길이 펴
신라 왕손 인산선생 죽염 처음 밝히고
문향 따라 함양 살며 어진 손길 의가 신선
사운정 사모 시 짓고 활인구세 인술 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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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허영자(1938~ ) 시인
시집 <빈 들판을 걸어가면>, 1984
제삼시집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1977
시집 <은발의 무게>
시집 <친전>, 1971
수필집 <한 송이 꽃도 당신 뜻으로>, 1978
시선집 <젊은 시인들>, 1978, 허영자, 조태일 등
함양 김석규(1945~) 시인
산문시집 <늪에다 던지는 土俗>, 1968
함양 김성진 시인
<고암문학전집(시`시조)>, 2010
<고암문학전집(수필`평론)>, 2010
함양 오동춘(1937~ ) 시조인
제4수필집 <새끼 서 발과 인간 백발>, 2007
산청 강희근(1943~ ) 시인
시집 <새벽 통영>, 2010
산청 임종찬(1945~ ) 시조인
수필집 <간직하고 싶은 우리의 정서들을 위하여>, 1996
저 <개화기 시가의 논리>, 1998
저 <고시조의 본질>, 2006
시조집 <나 이제 고향 가서>, 2008
시조집 <논길이 보이는 풍경>, 2000
저 <시조문학탐구>, 2009
저 <시조에 담긴 주제와 시각>, 2010
시조집 <청산곡>, 1974
저 <현대시조의 정서와 방향>, 2009
저 <현대시조탐색>, 2009
진주 이형기(1933~2005) 시인
저 <당신도 시를 쓸 수 있다>, 1991
시집 <별이 물되어 흐르고>, 1991
시집 <보물섬의 지도>, 1985
평론집 <시와 언어>, 1987
시집 <절벽> , 1998
공저 <한국문학개관>, 1987
진주 김정희 시조시인
현대시조 100인선 <망월동 백일홍>, 2006
시조집 <빗방울 변주>, 2004
시조선집 <세한도 속에는>, 2004
시집 <풀꽃 은유>, 1994
저 <화엄을 꿈꾸며>, 2004
하동 이병주(1921~1992) 소설가
하동 토지의 박경리(1926~2008) 소설가
하동 정공채(1934~2008) 시인
하동 정호승(1950~ ) 시인
구례 김성종(1941~ ) 소설가
구례 이시영(1949~ ) 시인
시선집 <긴노래, 짧은 시>, 2009
공편 신경림 <마침내 시인이여(17인신작시집)>, 1984, 조태일,김용택 등
시집 <만월>, 1977
시집 <만월>5쇄, 2008
시집 <무늬>, 2008
시집 <바람속으로>, 1986
시집 <바람속으로>7쇄, 2006
시집 <바다호수>, 2004
시집 <사이>, 2005
시집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2009
시집 <은빛 호각>, 2004
남원 최승범(1931~ ) 시조시인
산문집 <글마을 사람마을>, 2002
수필 <남원의 향기>, 2005
수필 <맵시`맘씨`솜씨=?>, 2009
수필선 <먼 풍경>, 2009
시,에세이집 <바람처럼 구름처럼>, 1986
시집 <발해의 숨결을 찾아서>, 2008
에세이 <벼슬길의 푸르고 맑은 바람이여>, 2007
저 <선악이 모두 나의 스승이라>, 1997
저 <소리, 말할 수 없는 마음을 듣다, 2008
저 <시조에 깃든 우리얼>, 2005
공저 강우식 <우리문화의 길잡이>, 1989
에세이 <즈믄 새해를 위한 단장>, 2000
편 <퇴계가훈으로 배우는 인생의 소중한 지혜>, 2003
저 <한국을 대표하는 빛깔>, 1996
남원 혼불의 최명희(1945~1998) 소설가
1988년 戊辰 80세 1월 삼남 윤수 최은아 결혼, 9월 손녀 예정 출생, 최은아 함양에서 인산선생 시봉, 사리장(四利醬) 제조법 전수함
1989년 己巳 81세
김옹의 仁術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바램에 따라 월간 (民醫藥) 89년 7월호로 창간돼 김옹을 회장으로 추대. 삼남 김윤수 민족문화추진회를 사직하고 솔가하여 함양에 이주, 인산선생은 삼남가택 신약당에 거주, 무수한 암환자 등에게 처방을 해줌.
신약당-김윤숭 작
신의망록숙남당 神醫忙碌叔男堂 신의는 삼남의 가택에서 바쁘게 살며
일처백인수신방 日處百名神藥方 날마다 수백 명의 환자에게 처방하네
불출호지천하병 不出戶知天下病 문밖을 안 나가도 천하가 병든 것 알아
활인구세익창황 活人救世益倉皇 활인 구세의 마음이 급하기만 하네
인산을 사랑하는 벗님들 | 仁山 김일훈 - Daum 카페
1957년 丁酉 49세
여름에 계룡산 도화동을 떠나 전북 남편과 운봉에서 한 달 가량 살다가 경남 咸陽으로갔다. 함양에서는 名醫로 이름난 郵泰振의정약국 사랑채에서 두어 달 지내고 하한조의 백연리 山亭에서 또 두어 달 지냈다. 이때 함양읍에서 가깝게 지낸 인물들로는 정약국, 정태진, 함양 양조장 대표 노영인, 유림면장 허사원, 함양군 교육감 정연섭, 정연창, 휴천양조장 대표 정낙현, 하한조, 윤일병, 민영조(상월면 사람) 등이었다. 겨울에 함양읍을 떠나 휴천면 행정리(살구쟁이) 삼봉산 골짜기 마을로 들어가 이계춘, 최동기, 林尙允 씨 등의 소유 빈집 또는 곁방서 살면서 함지박을 깎아 팔아다가 生計를 이어갔다. 함지박을 잘 파서 함지박 하나의 값으로 쌀 서 말 값을 받았다. 이때 함지박을 팔기 위해 지게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오도재를 넘어 마천 장터까지 70~80리 산길을 오가기도 하였고 뒤에는 주로 30리 거리의 함양 장에 내다 팔았다. 이 무협 한 친구의 부인이 胃와 膽의 오랜 고질로 고생하기에 중완에 침을 깊숙이 놓았다가 갑자기 뽑으니 피 고름이 분수처럼 솟구쳐 한동안 방안을 적시었다. 부인은'10년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듯하다'고 시원함을 토로하였다. 침을 맞고 난 이후 그 부인의 오랜 고질병은 완전히 해결되었다.
인산초당-김윤숭 작
지산심곡행화정 智山深谷杏花亭 지리산 깊은 골짝에 행정마을 있는데
정유행단임행청 庭有杏壇林杏靑 뜰에는 행단이 있고 행림이 푸르구나
은자훈몽고목기 隱者訓蒙刳木器 은자는 동몽을 가르치고 함지박 파며
일구단약야관성 日究丹藥夜觀星 날마다 단약 연구, 밤에 별 관찰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