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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문헌에 나타난 예배 이해
3.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요한복음 4장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예배 장소에 대한 심각한 논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이것은 “과연 예배드리기에 합당한 장소는 어디인가?”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어디에서 예배하기를 원하시는가?”라는 물음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합당한 장소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본문은 신명기 12:5~6이다.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이 말씀에 따르면,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를 찾아가 거기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지시하고 있다. 예배드리는 자들이 예배드릴 곳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받으시는 분인 하나님께서 예배드리는 자들에게 자신이 예배받기에 합당한 장소를 정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본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가 어디인지 명시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그 장소에 대해 상이한 견해를 나타내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그 장소가 예루살렘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한 곳은 솔로몬이 처음 세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인정했다. 그들은 신명기 규정에 따라 예루살렘에 제의를 집중시킨 요시야 왕의 개혁(주전 621년) 이래로 유대인들의 유일한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예루살렘의 성전 외에도 이집트의 레온토폴리스(Leontopolis)에 있던 오니아스(Onias) 성전(주전 약 170~주후 73년)과 같은 몇몇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한 예배 장소가 있었으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온 세계의 유일한 유대교 성전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 외의 곳은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 순례자들은 해마다 세 번씩 전 세계로부터 이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렸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세겜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리심 산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 처소라고 주장했다. 히브리 성경 유대판은 이러한 서로 간의 주장의 차이를 불러일으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주 너의 하나님께서 정하실 곳’이라는 표현이 사마리아판에는 ‘주 너의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곳’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렇듯 사마리아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곳은 이미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장소를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 처음 단을 쌓은 곳인 세겜과 관련이 있다고 해석했다(창12:6 이하). 사마리아 성경의 십계명(출20:17; 신5:21)에는 제10계명에 대한 부연된 설명이 있다. 이 구절들은 신명기 27:2~7과 11:29~30이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이미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그리심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정착한 뒤에, 여호수아는 그리심 산에서 백성들에게 축복을 선포하였다(수8:33; 신27:12 참조). 그래서 훗날 사마리아인들이 이에 근거해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웠던 것이다. 신명기 27:4의 마소라 텍스트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첫 감사제와 화목제를 가나안 정복 후에 에발 산에서 드린 반면, 사마리아 오경은 제사 장소로 정해진 곳을 그리심 산이라고 한다(신11:29; 27:12은 그리심 산을 축복의 산으로 에발 산을 저주의 산으로 알고 있다).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722년 북왕국의 멸망 시에 국외로 추방되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의 후손과 사마리아의 정복자들인 앗시리아에 의해 바벨론과 메디아에서부터 옮겨진 식민지 이주자들의 후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마리아는 앗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그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간 후 이 지역에 대신 옮겨다 정착시킨 외국인 식민지 거주자들과 토박이 이스라엘인의 남은 자들로 형성되었다. 그들은 그 후에 서로 피를 섞었을 뿐만 아니라 야훼 혼합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불결하다고 적대시하며 상종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정치적, 종교적 이유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전 4세기 말 그리심 산 위에 그들의 성전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사마리아와 유대인들 간의 갈등을 더욱 첨예하게 대립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 위에 그들의 성소를 세우고, 유대인들의 제의에서 분리된 이후 단지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정경으로 인정한 모세 오경을 통해서 그리심 산 성소에 대한 근거를 찾았다. 이와 같은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적인 신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한 분 하나님만이 존재한다.
2) 종교의 기초는 모세와 율법이다.
3) 하나님 숭배의 장소는 그리심 산이다(출20:17~21).
4) 임박한 날에 대한 대망을 가진다.
이러한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의 대립은 기원전 2세기에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의 독립전쟁인 마카비 혁명 때에 시리아 왕조에 도움을 줌으로써 더욱 심화되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마카비 혁명의 초기부터 그들 편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마카비1서 3:10에서 볼 때, 사마리아인들은 심지어 마카비 혁명에 가담한 자들과 대항하여 싸웠다. 이러한 사마리아인들의 행위는 마카비 혁명의 승리로 유대인들이 독립을 쟁취한 후에 요한 힐카누스의 보복 조치를 불러일으키게 한 원인이 되었다. 주전 111년 예루살렘 제사장 요한 힐카누스가 사마리아 성소를 파괴했으며, 이러한 행위는 서로 간에 극한 대립을 야기시켰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의 성전이 파괴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리심 산을 그들의 성지로 인정했으며, 성전 예배를 계속하였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드리는 예배의 정당성을 의심하였고, 또한 그들과의 관계도 제한하여 사실상 이방인처럼 취급했다. 이러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간의 갈등의 상황이 요한복음 4장에 잘 반영되어 있다.
요한복음 4장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신 장면이다. 이 대화의 중심은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제의의 분리와 참된 예배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은 수가라는 동네의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그녀와 대화를 나눈다. 이 같은 행동은 예수님의 사마리아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보여 주며, 사마리아인들이 제의적으로 부정하다는 기존 관념을 극복한 것이다(7~9절).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과의 교제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으며, 유대인 남자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접촉은 더욱 그러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금기를 깨뜨린 선구자 역할을 하셨다. 이 여인과의 대화 중에 예수님은 그녀가 다섯 명의 남편을 가졌음을 지적한다(18절). 그러한 여인의 행동은 당시의 관습에 크게 어긋난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 번의 결혼만이 허락되었다. 그리고 이 기준은 사마리아인에게도 적용되었다. 이렇듯 이 여인에게 다섯 남편이 있었다는 사실은 비정상적인 결혼행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성서해석의 초기 시대부터 다섯 명이라는 이 여인의 남편의 수를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었다. 오리겐은 사마리아인들이 모세의 다섯 권의 책만을 정경으로 간주했는데, 이 여인의 남편이 바로 그것을 의미한 것이라 주장했다. 또한 이 구절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해서, 그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을 대표하고 다섯 남편은 사마리아인들이 섬기는 다섯 신들을 가리킨다고도 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그 이야기가 그러한 의도로 기록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 이야기에서 그 여인이 어떻게 다섯 번 결혼했느냐 하는 것은 관심 밖의 일이다. 요한은 불법적이고 세속적인 여인의 행위를 지적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택한 것이 아니다. 그가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지니신 초월적인 지식이다. 보통 사람을 능가하는 신적인 존재로서의 지식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께서 자신의 생활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놀라며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에게 예배를 드려야 할 참된 장소에 대해 묻는다(요4:19~20).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이 두 곳은 전승에 따라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예배를 드리기에 합당한 장소로, 거룩하고 성스러운 장소로 여겨져서 그 각자의 장소만이 참된 예배의 자리라는 논쟁이 있었던 곳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초월적인 지식을 가진, 자신이 선지자라고 믿는 예수께 이러한 전승에 대해 질문을 하고 있다. 두 장소 중에 어느 곳이 참으로 거룩한 곳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이 기대했던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것과는 전혀 다른 답변을 함으로써 그 두 곳을 참된 예배의 처소로, 거룩한 장소로 구별하여 생각하는 그들의 사고를 무시해 버린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4:21). 예수님은 예배드리기에 합당한 곳을 다른 것으로 대치했다. 예배드릴 거룩한 장소가 이 산(사마리아)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라는 것이다. “…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4:21~23). 참다운 예배는 그들이 거룩한 장소로 여기는 그곳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는 것이다.
당시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건물보다는 다음과 같은 예배 체계를 함축했다. 건물과 예식을 거행하는 제사장, 그리고 희생 제물, 십일조와 같은 전체 성전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봉헌물들, 명확히 규정된 축제 일정, 예배자들과 제사장들의 구분, 남성과 여성의 분리,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인들의 분리를 유지하기 위한 장벽들이 그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전은 단지 건물로써 만의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중심으로 유지되는 여러 제도들과 분리된 통제를 의미한다. 특히 성전은 거룩한 곳으로 여겨져, 공간적으로 다른 곳과 분리되었으며, 또한 여러 면에서 사람들을 구별하는 역할도 했다. 성전으로 인해 사제 계급과 일반인, 남성과 여성, 유대인과 이방인, 정결한 자와 부정한 자 사이의 구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성전은 사람들에게 차별을 두어 그들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류와 통제의 역할을 하는 성전이 유대와 사마리아에 각각 하나씩 존재함으로 그 분류 체계가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바로 이러한 성전을 부인해 버렸다. 그것은 이 산과 예루살렘이 거룩한 장소라는 것을 부정함으로 성전이 가지는 분류 체계를 파기해 버린 것을 의미한다. 이 산도 예루살렘도 특별히 구별되는 장소가 될 수 없으며, 그곳을 통해 사람들을 구분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새로운 다른 어떤 특별한 장소를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예수님은 이때부터 자신이 성전을 대신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예수님의 몸이 이 산과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할 새로운 성전이라는 주장이다(요2:13~25).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예수님의 이 놀라운 선언을 그의 대적자들은 물리적인 성전에 대해 말씀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한 숨은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21). 요한은 예수님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부언하면서, 동시에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이 새로운 성전이라고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이 말씀을 통해 독자들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이 예루살렘이나 다른 고정된 지리적인 장소에 위치한 성전을 대신할 그들의 새로운 성전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자신의 몸이 성전이라는 예수님의 이러한 선언은 기존 성전이 해 왔던 구분이나 분리를 없애 버리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제사장과 일반인,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정결법 체계에 의해 분류된 정결한 자와 부정한 자의 구분을 없애 버린다는 것이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거룩한 곳으로 구분되지 않은 동산과 묘지, 갈릴리 바다와 해변가 등 여러 장소에 나타나셨으며, 거룩한 자들의 부류에 속하지 않는 막달라 마리아, 도마, 시몬 베드로, 사랑받는 제자,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과 같은 제자들과 접촉하셨다. 새로운 성전인 부활한 그리스도는 특정한 곳, 구별된 자들에게가 아니라 거룩하지 않은 장소와 거룩하지 않은 자들로 분리된 자들에게 나타나심으로 모든 사람이 어느 곳에서나 직접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열어 두신 것이다. 이로 인해 초기 교회는 ‘예수의 이름’으로 모였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는 마태복음 18:20의 말씀은 유대교적 예배 이해를 분명하게 거절한 것이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영적으로 드리는 예배이기에 성전 예배를 넘어선 것이다.
참된 예배자는 예루살렘에도 말고 그리심 산에도 말고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지금이다. 그러므로 이제 모두가 구별 없이 어디에서나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올바른 예배는 영과 진리에 의한 예배이다. 그리심 산이냐, 예루살렘이냐를 따지는 시대는 끝이 났고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어디에서 예배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이다.
4. 어떠한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요한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예배자에게 중요한 것은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자세라는 것을 말해 준다. 어디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느냐보다는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이 보다 중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세는 어떠한 것인가?
요한은 ‘영과 진리’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각각의 명사에 관사를 붙이지 않고 하나의 전치사만 사용한다. 이것은 ‘영과 진리’가 각각의 뜻을 갖는 것이 아니라 거의 동의어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서 신앙인들의 상태를 나타냄을 의미한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통해 영이신 하나님과 만남이 있는 신앙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아버지의 영을 소유한 자들에 의해 드려지는 예배,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드리는 예배(롬8:15~16), 바른 신앙고백을 한 자들이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 곧 만남이 있는 예배를 의미한다.
요한이 예배하는 자들의 자세에 대해 강조하는 이유는, 아마도 요한의 교회에 예수님과의 지속적이며 개인적인 만남을 갖지 못하고 형식적인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로 인해 문제가 야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복음 6장에 의하면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의 차이로 인해 많은 제자들이 물러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요한1서에서 볼 때, 예수님이 누구시냐는 이해의 차이로 인해 공동체 내에 갈등이 생기고 결국 교회가 나누어지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한 요한은 무엇보다 신앙인 개개인의 분명한 신앙고백이 절실히 요구됨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인들의 개인적인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생명을 얻은 기독교인들이 그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장소나 예전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이며 개인적인 만남을 강조하며, 예배자의 현재의 신앙의 상태를 중요하게 여긴다. 예배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과 지금 어떠한 관계에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는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먼저,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들보다 현재 완료형을 더 자주 사용한다. 마태복음에는 7번, 마가복음에는 8번,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14번인데 반해, 요한복음에는 77번 사용한다. 완료형은 과거의 사건이 현재에도 계속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나타낸다. 요한이 완료형을 빈번히 사용함으로 의도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님이 예배 중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다. 예수님의 사건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예배를 드리는 자들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과거의 주님이 아니라 현재 교회에 활동하시는 주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에게 있어 신자들은 예배 중에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만나며, 그와 영적인 교제를 계속해서 나눌 수 있으며 나누어야 한다.
또한 요한은 파라클레토스(보혜사)를 통해 우리가 예배 중에 임하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처럼, 파라클레토스는 예수께서 떠나신 후에 예수님의 요청으로 신자들에게 보냄을 받아 예수님을 대신한다. 예수님은 진리이며(14:6), 파라클레토스는 진리의 영이다(14:17). 그는 예수님의 분신이요, 연장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칠 것이며(14:26), 신자들 안에 거하고, 신자들에게 다가올 일에 대처하도록 한다. 이와 같이 파라클레토스는 신자로 하여금 예수님과 직접 교제를 하게 하며, 전체 교회에 의해 공유되고 있는 새 생명의 차원에로 이끄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신앙인으로서 일상적인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교회에 약속된 파라클레토스를 보내 주셔서 그를 대신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파라클레토스를 통해 예배 중에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만남의 경험을 할 수 있다. 요약하면, 영과 진리의 예배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예배 중에 임재하는 영이신 하나님과 만나고, 또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는 행위를 말한다.
5. 결 론
유대교의 종교적 전승을 이어받고 배타적인 유일신론을 공유한 초기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것이었다. 이에 덧붙여 제기되는 질문은 예수님이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였다. 물론 요한 문헌에는 일관되게 예수님을 하나님과 구별되는 존재라고 진술한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 역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려는 데 있었다(요20: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예수님을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두었으며, 비록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을 범할 가능성 때문에 초기에는 논란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중재적인 역할과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에 근거해 예수님을 예배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로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예배는 교리적으로 결정하기 이전에 초기 교회의 찬송시들과 예배에 자발적으로 나타났으며, 예수께 하나님 칭호를 직접 드리는 행위를 포함한 고등 기독론이 매우 초기의 예배 상황에서 형성되어 예배의 대상으로 자연스럽게 인정되었던 것이다.
요한복음 4장에 기술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시한다. 당시 성전은 예배 장소로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를 구별하고 분리하는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당시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예배에 관한 논란을 종식시키는 새로운 예배를 제시한다. 예수님이 제시한 새로운 예배는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통해 드리는 예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사마리아 종교와 유대 종교의 장벽을 다 헐고 과거의 모든 인간적인 인식과 습관과 제도를 초월해서 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다. 예수님은 종교적인 구별을 없애고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는 자신의 몸을 성전으로 삼고 드리는 예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된 종교의 시대가 도래함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하셨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요4:23)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요한은 당시의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장소를 중시하는 예배, 외적인 형식에 치중하는 예배, 서로 간에 차별과 분리를 야기시키는 예배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있고,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을 드리는 결단이 있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이며 모든 신앙인들이 이러한 예배를 드려야 함을 주지시키고 있다. 이러한 요한의 예배에 대한 이해는 오늘의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