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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사사화 1 유상이 흑매라는 별호를 얻은 것은 검은빛의 오금으로 된 수리검에 의해서였다. 수리검을 사용하여 적을 암습하는 때는 절대 실수가 없고, 특히 주변의 사물을 이용하는 능력은 더욱 뛰어났다. 그래서 그는 어떤 일을 맡더라도 절대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아무 일이나 돈을 낸다고 해서 맡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인품을 높이 사서 자객이지만 별호에 고고하다는 뜻으로 매화 매(梅)자를 붙여 주었다. 그는 자객들 중에서는 이름 난 고수였고 사파 무림이나 동창에도 친구들이 많았다. 동창의 높은 환관들이 그를 고용해서 많은 정적들을 제거했다. 그는 이번 일을 맡지 않았다면 아마 많은 부를 가지고 조용히 은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 일을 맡지 않을 수 없었다. 자객도 인간이다. 자객은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이들이 많지만 유상은 자객이며 인간이었다. 그는 남을 존경할 줄 알았고 그 중에서도 곤륜왕을 존경해왔다. 그가 곤륜왕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아주 사소한 일로 인해서였지만 그 사소한 만남에서 그는 곤륜왕의 인품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알아 본 그 자리에서 곤륜왕에게 충성을 약속했다. 말하자면 돈 대신 존경심이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이다. 유상은 연검을 허리 뒤로 돌린 채 몸을 비스듬히 틀고 천천히 한발 한발 앞으로 나섰다. 모두 다섯 걸음. 어떤 보법을 밟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리를 옮긴 것 뿐이다. 자신이 서있는 발 아래에 야유화가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격전 중에 자칫 그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운수육검이 일제히 검 끝을 흔들며 검기를 사방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조운류합(朝雲流合). 유상은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조운류합은 조운검문의 정통 합공의 한 가지다. 검을 보아서는 안된다. 검기는 피부로 느끼고 눈은 줄곧 상대들의 발에 두어야한다. 그래야 허초의 눈부신 검기에 현혹되어 방어에 급급하다 쓰러지지 않는다. 물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하나하나의 보법이 어우러져 마치 작은 지류가 흩어졌다 다시 모이고 흩어졌다 다시 모이기를 반복하는 듯했다. 그러면서 사방에서 검기가 유상의 전신혈을 노리고 압박해왔다. 지쳐서 기가 흐트러지기를 기다리는가. 그렇다면, 유상은 빙글 몸을 돌렸다. 동시에 그의 연검이 허공에서 펼쳐든 우산이 돌아가듯 빠르게 회전했다. 줄기줄기 분수처럼 검기가 운수육검을 향해 뻗쳐나갔다. "구살분금(九殺分襟)!" "동귀어진이닷!" 운수육검은 미처 예상치 못한 유상의 공격에 당황하여 일제히 사상유합의 보법으로 미끄러져 나가며 대신 검을 놓았다. 쐐애애액! 여섯 자루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조운검문의 절예인 원섬추혼검을 펼친 것이다. 허공에서 검과 검이 부딪치며 검화가 송이송이 피어올랐다. 운수육검은 실로 당황하여 일제히 약속도 하지 않은 합공을 펼쳤다. 그들은 유상이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도 않고 같이 죽자고 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정통무공을 소유한 그들의 대응은 너무도 빨랐다. 사상유합은 합공을 하다가 물러날 때 쓰는 보법으로 서로를 다치지 않게 하면서 마치 모래 위로 물이 스미듯 물러서는 보법이다. 그리고 원섬추혼검은 검을 허공에 놓고 오직 기로만 움직이는 이기어검술이다. 운수육검이 보낸 여섯 자루의 검은 그들의 기가 이끄는 대로 유상의 검기를 뚫고 들어가 그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나갔다. 그러나 유상이 펼친 것 또한 동귀어진으로 악명 높은 살초 구살분금이다. 운수육검도 자신들의 가슴에서 울컥 기혈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유상의 전신에서는 검붉은 선혈이 뭉클뭉클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신형을 흐트리지 않고 그대로 연검을 휘둘러댔다. 전신의 기가 점점 사라져가고 단전에서 열기가 들끓고 있었지만 그는 무감각했다. 칼을 들었으니 칼로 죽는다. 칼을 든 자의 인생을 칼을 들지 않은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검 끝이 밀리고 있음을 느꼈다. 상대들은 기혈이 뒤집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신들의 검이 허공에서 쉬지 않고 유상의 전신을 공격하도록 만들었다. 유상은 점점 더 상처가 깊어지고 많아졌다. 그러나 그는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마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이제는 나설 때가 되었다. 유상은 살아남아서 귀찮은 존재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상을 입었다. 그리고 놈들은 야유화에게는 아직 손이 미치지 못했다. 뒤집힌 기혈을 추스르지 못하고 유상을 쓰러뜨리기에 급급했다.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녀의 손목에서 앵두같은 은빛 추가 달빛을 받으며 살짝 빛났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운수육검은 또 다른 적이 나타났음을 느끼고 일제히 검을 손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허공을 가르고 쏘아져오는 은빛 추. 그것은 절대 자신들을 향해 날아올 리가 없는 비선과였다. "비선과!" 울부짖음과도 같은 고함이 그들의 입에서 터져나오고 여섯 개의 인형이 동시에 검을 휘둘러 전신을 검막으로 감쌌다. 그것은 정통무공을 익힌 그들로서는 실로 치졸하기 짝이 없는 호신의 방편에 불과했다. 그만큼 그들은 놀랐다. 상대가 어디서 공격하는지는 보지도 못했다. 비선과는 천잠사에 매달려 삼십 장을 나른다. 쉬아앗! 은빛 추가 빠르게 여섯 인영들의 검막을 뚫고 지나갔다. 그것은 밤하늘에 마치 한줄기 은빛 물고기가 춤을 추며 지나가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지나가는 곳마다 붉은 혈화가 점점이 흩어져나갔다. 우르르. 기왓장이 깨어져 나가고 운수육검의 넋을 잃은 몸뚱아리들이 부스러기들과 함께 지붕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추는 사라지고 여섯 개의 인영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들은 죽는 순간에도 자신들이 이렇게 어이없이 당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본 비선과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비선과에 죽었다. 유상은 연검을 거두었다. 이미 검을 든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검 끝을 볼 수가 없었다. 이미 그의 눈은 시력을 잃었고 전신에서 뿜어져 나가는 피로 인해 감각도 잃어버렸다. 그는 천천히 몸을 굽히고 연검을 버렸다. 편안히 몸을 누이고 숨을 들이마셨다. 유상이 이렇게 죽었다고 하면 동창의 친구들이 혀를 찰 것이다. 구살분금으로도 동귀어진이 불가능했다니. 새삼 정통무공을 익힌 소위 명문정파라고 불리는 치들의 무서움을 경험한 셈이다. 그는 자신의 머리맡에 날아와 서는 마고의 기척을 느꼈다. 종잇장처럼 가볍게도 느껴지고 얼음처럼 차게도 느껴지는 작은 인영 하나. 숨소리도 내지 않았고 발소리는 더욱 내지 않고 다니는 여자. 마고, 그녀가 온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임무를 다했음에 만족하면서 절명했다. 2 우두두두두두……! 말발굽소리가 관도를 뒤흔들고 필마 여섯기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금사강을 따라 치달렸다. 선두에는 사이룡과 왕문희가 말고삐를 쥐고 있었다. 처음엔 셋이었고 타봉신개가 보여주려던 것이 있어 함께 움직였으나 도중에 직천에서의 사건을 듣고 바람처럼 목적지를 향해 달리게 된 것이었다. 왕문희는 만일을 생각해서 가장 기마술이 뛰어난 부하 넷을 합세시켰고, 그 와중에서 타봉신개는 빠져버렸다. 당연한 것이, 개방의 제자들은 짐승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말을 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도로 지붕 위로 기어올랐다. 사건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오후의 햇살이 따가운 때였다. 사이룡과 왕문희는 어수선한 현장을 가로질러 장원 안으로 들어섰다. 지붕 위로부터 떨어져 내린 기왓장들이 흩어져있고, 그 가운데 시체 여섯 구가 즐비하게 가로놓여져 있었다. 왕문희가 앞에 나서서 허리를 굽히는 형리에게 물었다. "현장을 만졌는가?" "아닙니다, 그저 시신들만 가지런히 옮겼을 뿐입니다." "함께 죽었다는 자객은?" 형리가 지붕 위를 가리켰다. "위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왕문희는 사이룡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말이 있을 법도 한데 사이룡은 말이 없다. 그저 잠시 시신들을 내려다보더니 훌쩍 몸을 띄워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그는 먼저 함께 죽었다는 자객을 보고싶었다. 시신은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채 곱게 드러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편안한 잠에라도 빠져진 듯한 인상이다. 이미 흘러내린 피가 주변의 기와들을 검게 물들였고 시신의 옷에도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왕문희는 사이룡의 말을 기다리다 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 "서로가 싸우다가 양패구상을 당한 것일까?" "싸운 것은 사실이나 양패구상은 아닐세." "그런가?" 왕문희는 사이룡과 시신을 번갈아 보며 자신의 추리가 또 틀린 것에 머쓱해졌다. 그러나 시기심이나 화가 나지는 않았다. 사이룡보다 나은 추리력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이미 오래 전에 포기한 바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자를 아네." 사이룡의 말에 왕문희가 다시 시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그는 깨달았다. 시신의 얼굴이 너무 평온한 것이다. 그것은 편안히 누워서 자신의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뜻이 된다. "이 자는 유상이라는 자로 흔히들 흑매라고 부르는 자일세. 동창의 간신배들 치고 이 자에게 정적의 암살을 청탁하지 않은 자가 없을 것이네." 사이룡의 말에 왕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정말 이 사건도 우리가 쫓고 있는 사건들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당연하지 않은가? 더 조사해보면 알겠지만 이 장원 안에는 필시 이국의 여인이 있었을 것이네." 왕문희는 얼떨떨했다. 타봉신개의 재촉으로 무조건 달려오기는 했으나 어떤 설명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사이룡의 조언으로 부하들까지 몰고 오기는 했지만 사건의 연관성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그였다. "아까 노선배의 말씀대로라면 모악귀도 이국여인 덕에 죽었고 그 후에도 알게 모르게 많은 무림의 자객들이 이국 여인을 추적하다 죽었다는 얘기가 되네. 그러니 이번 사건도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이 자는 필시 운수육검의 손속에 죽었겠지?" 사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어검술이네. 상처가 예리하기는 하지만 힘이 없이 가볍네. 기를 이용해서 허공에 띄워놓고 쓰는 검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법이거든. 하지만 이 자도 대단해. 수리검의 달인으로만 알았는데 수리검이 아닌 연검으로도 운수육검이 합공을 하게 만들었다니 말일세." "오면서 보다시피 여기 아니고도 자객들 시체가 즐비했네. 모두 수리검으니 이 자가 정말 보통은 아니군. 헌데 양패구상이 아니었다면 이 자의 동행이 있었다는 얘기인데……." 왕문희의 말에 사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행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같은 편이 있기는 있었던 것 같네. 다만, 이 자가 불리한 동안에는 나타나지 않았겠지." "어떻게 그렇게 단정하나?" "그건 그냥 내 생각일세. 무림인 중에서도 마도의 인물들이나 자객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야. 정도무림인들은 동료가 위험하면 일부러라도 쫓아가서 함께 싸우지만 자객들은 틀리네. 동료가 최선을 다해서 싸우고 죽을 때까지 그대로 숨어서 엿보는 법이네. 그래서 적이 최대한의 타격을 입고 약해진 다음 자신이 나서는 거지." 왕문희는 혀를 찼다. 친구는 마도의 인물들이나 자객들만 그렇다고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칼을 쓰고 힘으로 먹고사는 인간들이라면 다 그렇게 살지 않겠는가? "이제 그만 내려가 보세." 사이룡이 또 훌쩍 먼저 몸을 날렸다. 여섯 구의 시신은 각기 아주 작은 검흔만을 남긴 채 죽어 있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암기를 사용해서 혈도만을 찍어 죽인 듯한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왕문희가 아는 체를 하고 나섰다. "언뜻 보기에는 암기를 사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암기가 아닌 검흔이 아닌가?" 사이룡이 고개를 끄덕이자 왕문희는 신이 났다. "내 보기에는 이 검법이 단검진백귀토(斷劍震魄歸土)라는 검법 같네. 그 검법으로 차례차례 해치운 것 같은데 말일세. 수법이 같은 것으로 보아서 필시 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사이룡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왕문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시체들만은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왕문희도 그제서야 사이룡이 심각해졌음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보던 사이룡은 옆에 선 부하들에게 말했다. "이 시신들을 내가 시키는 대로 옮겨놓아 보게." 그의 말에 따라 부하들이 시신을 들어 이리저리 줄을 맞추었다. 그러자 시신들은 장원의 마당 한가운데에 합공을 펼치려고 서있던 모습 그대로 여기저기 서서 원을 그린 상태로 뉘어졌다. "무엇을 보는가? 이 시신들에 내가 모르는 어떤 비밀이라도 있는겐가?" 왕문희가 물었으나 사이룡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안면은 다른 때처럼 여유와 호기가 넘치는 그런 얼굴이 아니었다. 그의 두 눈은 긴장으로 번쩍였고 입술은 얇게 다물어졌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보기란 매우 어렵다. 사이룡이 긴장하는 모습을 왕문희는 생전 처음 보았다. 그가 긴장할만한 일도 없었거니와 설사 그만한 일이 생긴다해도 긴장하고 겁을 먹을만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 왜 그러는가? 나는 답답해 죽겠네." 왕문희가 재차 묻자 사이룡이 손을 들어 가장 오른쪽의 시체를 가리켰다. "이 시신을 기점으로 해서 왼쪽으로 옮겨가 보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을 걸세." 왕문희는 사이룡이 시키는 대로 시선을 옮겨갔다. 첫 번째 시신은 대거혈에서 피를 흘렸고 그 다음은 천구, 태을, 중완, 기사, 마지막 시체는 수돌혈에서 피를 흘렸다. 그제서야 왕문희는 입을 딱 벌렸다. 그도 바보는 아니다. 사이룡만큼은 무림에 대해서 모르고 그보다 판별력이 뒤떨어지기는 했지만 장안성에선 이름난 판관이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이럴 수는 없네. 어떻게 단 일검으로 이 여섯을 죽인다는 말인가?" 그러나 나타난 검흔은 그대로 일검에 해치웠음을 그 궤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건 평범한 단검진백귀토가 아니다. 왕문희는 부르르 몸을 떨고 사이룡을 돌아보았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단검진백귀토가 일검에 상대의 중요혈을 베어서 죽이는 검법으로 이름이 나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일검에 여섯 명을 죽일 수는 없다. 그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무언가 유사하지만 훨씬 더 고강한 검법이어야 한다. 검이 지나가면서 그어낸 단 일검으로 여섯 명은 나란히 혈도를 베이고 동시에 황천행이 된 것이다. 사이룡이 긴장해서 입을 열었다. "중요한 점은 그게 아닐세. 이 검법이 단검진백귀토가 상승된 것이라고 볼 때만도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는데 지금 이 상흔은 검법을 펼쳤으되 검으로 펼친 것이 아니니 그것이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왕문희가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뭐라구? 검으로 시전된 무공이 아니라구?" "맞네. 검으로 시전된 것이 아니네. 언뜻 보기에는 검흔같지만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는 게 있네. 바로 상흔이 검보다는 두꺼운 두께로 찢어졌지 않은가? 보통 검흔은 빠르면 빠를 수록 가늘게 그어지게 마련인데 이 상흔들은 일검에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두껍게 찢어졌네. 그것은 바로 이 상흔은 검흔이 아니라는 뜻이네." 왕문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대체 무엇으로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사이룡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르겠네. 단정지을 수가 없어." "예측이라도 해보게나." 사이룡이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는 없네. 뭔가 내가 잘못 짚은 것 같네." 사이룡이 돌아서는데 형리 하나가 바쁘게 달려왔다. "장원 안에 어젯밤 이국의 여인이 한 명 묵었는데 배가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침에 보니 사라졌다고 합니다." "저런!" 왕문희가 낭패한 듯 혀를 찼다. 형리의 보고로 인하여 사이룡과 왕문희는 일단 헤어지게 되었다. 왕문희는 직천을 중심으로 사방의 관도를 막기로 하고 사이룡은 장안으로 되돌아가 타봉신개를 만나기로 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이국의 여인이 왜 무림인들에게 쫓기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야만 사건의 실마리가 풀린다. 이제는 모산파의 혐의는 벗겨진 것이나 다름없다. 오히려 떠오른 것은 조운검문이다. 조운검문은 무슨 연유로 이국의 임산부들만 죽이려고 하고 누가 그것을 막는가. 사이룡은 말을 달려 장안으로 돌아오며 생각에 빠졌다. '흉살성. 혹 그게 원인은 아닐까? 예로부터 별의 징조는 새로운 인물의 탄생이나 죽음이라고 했는데. 혹시 태어나는 아이와 흉살성의 징조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처음 흉살성을 보았을 때 오도인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오도인의 말 중에는 흉살성의 사기를 안고 태어나는 아이를 막겠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었다. '그렇다면 오도인마저 이번 사건에 관련이 되어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렇다면…… 아이는 바로 흉살성을 안고 태어나는 흉인인가?' 사이룡은 등골이 서늘함을 느꼈다. 안개 속에서나마 사건의 실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드러나고 보니 보통의 사건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조정의 당쟁과도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특히 동창과 가까운 인물인 유상이 나섰을 때에야 무언가 연관이 있지 않겠는가? 오도인을 다시 만나보아야겠다.' 3 사이룡은 마음이 급해져서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장안에서 직천은 꼬박 하루거리다. 그것을 쉬지 않고 달리면 한나절에 달릴 수 있다. 사이룡은 땅거미가 몰려드는 때에야 장안성에 도착하여 말을 추관에게 돌려주고 타봉신개를 찾아 나섰다. 개방의 제자를 잡고 물은 즉, 여전히 타봉신개는 장춘각을 엿보느라 지붕 위에 있는 모양이었다. 홍등가에 등롱불이 아롱아롱 켜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손님을 받을 시간인지라 기루마다 어린 동기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향긋한 사향 냄새가 퍼져나갔다. 단 한 곳, 선향루만은 예외였다. 항상 가장 먼저 불을 켜 손님을 받았고 가장 마지막까지 손님을 받던 그곳이었으나 오늘은 어인 일인지 대문을 굳게 잠근 채 등롱불조차 켜지 않았다. 타봉신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향루의 장춘각을 엿보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더운 날씨인지라 장춘각의 창은 항상 열려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장춘각의 창문마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등롱불빛에 사람의 움직이는 그림자가 비쳐 나오기는 했지만 사사화의 고혹적인 자태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쉬웠다. 타봉신개는 무료했지만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무공을 배운다는 것은 제일 먼저 인내심을 배운다는 얘기가 된다. 특히 거지로 떠도는 개방의 제자라는 것은 일반 무인들과는 또 다른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래서 그 역시 참는 것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인내심이 강했다. 밤이 점점 더 깊어지고 주위는 시끄러워지는데 아직도 선향루는 불을 켜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홍등가의 골목 입구에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일단의 행렬이 나타났다. 행렬의 선두에는 깃발을 든 기수가 말을 달려왔고 그 뒤로 십여 필의 마상에 건장한 표사들이 칼을 차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한 대의 마차가 보였다. 마차는 검은 휘장으로 둘러쳐져 있어서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되어있었다. 마부석에는 몸매가 호리호리한 젊은 청년이 피풍으로 몸을 가리고 두건을 깊이 눌러쓴 채 앉아있었다. 선두가 들고있는 삼각의 깃발에는 '낙양표국'이라 은수가 놓아져있었다. 낙양표국이라면 중원천지에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크고 유명한 표국이었다. 표국주는 강길이라는 젊은 사람이었지만 그것은 대외적인 대표일 뿐이고 실제로는 복록대인 상낙주가 주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상낙주가 주인인 만큼 관의 비호까지 받아가며 중원제일의 표국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행렬은 대문이 굳게 닫혀진 선향루 앞에 멈추었다. 선두의 표사 중 하나가 말에서 번개처럼 뛰어내려 대문을 두드렸다. "낙양표국에서 왔소." 대문이 열리면서 어린 동기가 경계의 눈초리로 밖을 내다보았다. 곧이어 대문이 활짝 열렸다. 행렬은 말에 탄 그대로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마차까지 다 들어선 후에 다시 대문이 닫혔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표사들이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봉신개는 지붕 위에 엎드린 채 안력을 높이며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다른 움직임보다도 마차에서 누가 내리는가에 시선을 모았다. 마차의 휘장이 걷히더니 한 여인이 내려섰다. 여인은 몸이 불편한지 움직임이 느렸다. 그녀는 호리호리한 마부의 손에 이끌려 후원으로 사라져 가고 무사들만이 무엇이 바쁜지 기루 안을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곧 그들 역시 후원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 버렸다. 선향루는 다시 정적에 싸였다. 타봉신개는 허리춤에서 호리병을 꺼내 술 한 모금을 꿀꺽 삼켰다. 그는 상황을 한눈에 간파했다. 낙양표국은 유명한 만큼 규율이 엄하기로 소문난 표국이다. 무장을 했다면 표물을 운반하는 중일 것이고 표물을 운반하는 중에 홍등가에 들린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선향루로 어떤 표물을 나르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얼마나 귀중한 표물이기에 영업을 쉬면서까지 기다렸다 받는가? 그렇다면 당연히 표물은 마차의 사람이 된다. 사람을 운반하는 일은 드물지만 사람을 운반하는 것도 표국의 일에 속한다. 타봉신개는 호리병을 다시 허리춤에 넣고 코를 팽 풀었다. '오래도록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그는 마차에서 내린 여인이 쫓기고 있는 이국여인이 아닐까 싶은 예감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선향루 안으로 들어가 보고도 싶었지만 거지가 자연스럽게 들어가기는 어려우니 억지로 숨어들다가 상대를 놀라 움츠리게 할까 싶어서 그대로 있었다. 바로 그때 그의 등 뒤에 사이룡이 나타났다. "어떻습니까? 사사화가 오늘도 사내를 끌어들였습니까?" 타봉신개는 엎드렸던 몸을 일으키며 선향루를 가리켰다. "보면 모르냐? 오늘은 아주 깜깜하다. 그보다 네가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노선배님 예상대로였습니다. 이번 사건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것들이 뒈졌더냐?" "조운검문의 운수육검이 여섯 모두 죽었고 흑매 유상이 죽었습니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 꽤나 많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추격전 끝에 그리 된 것 같습니다." "그럼 유상은 운수육검이 죽였을테고…… 운수육검은 누가 죽인 것이냐?" "모르겠습니다." "몰라?" 타봉신개가 뚱한 눈으로 사이룡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죽은 사람의 이름만 대도 벌써 누가 누구에게 죽었구나를 알 정도로 머리회전이 빨랐다. 그래서 그는 당연히 사이룡이 운수육검을 죽인 자에 대해서 정보를 가져왔을 것으로 생각했다. "무슨 소리냐? 직접 가서 송장을 보고 와놓고도 모른다니. 송장이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형태가 망가졌더냐?" "차라리 그렇게 되었으면 어떤 무공인지 알 터인데…… 시신은 아주 깨끗했습니다." 사이룡은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흉살성에 대해서만은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조정에서 오간 이야기인지라 아무리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 해도 함부로 발설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타봉신개는 사이룡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앞일이 몹시 걱정되는 듯했다. 그는 한동안 침묵한 뒤 탄식처럼 말했다. "검이 아닌 다른 병기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객은 많지 않다. 그나저나 동창과 가까운 유상이 끼어들었다니 정말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서 기인한 것이냐? 그걸 모르겠구나." 사이룡은 무어라 해줄 말이 없어서 그저 어둠에 싸인 선향루만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선향루의 전각들이 환하게 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사이룡은 멈칫해서 몸을 낮추었다. "이제야 영업을 시작하는 모양이다. 한 번 들어가 볼래?" 사이룡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와중에 기루엘 들어갑니까? 그깟 사사화가 사내들을 끌어들이거나 말거나 그다지 큰 연관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타봉신개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아, 대가리 크더니 이젠 어르신 머리통보다 네놈 머리통이 더 큰 것 같이 느껴지냐?" 사이룡은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타봉신개가 사사화가 머무는 장춘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선향루가 아무 표적도 아닌데 내가 줄기차게 이 위에 올라와서 똑같은 계집년 알몸이나 보면서 시간을 보냈겠냐? 이상한 사건이 일어나기 보름 전부터 저 선향루에는 온갖 강호의 위인들이 드나들었다는 걸 알아야지. 오죽하면 내가 여기서 저 남사군도의 털북숭이 뱃놈이 와서 하는 짓거리까지 보았겠냐?" "남사군도의 털북숭이라면 남사쌍극으로 유명한 공하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래, 바로 그 작자다. 그 작자가 뭐 빌어먹을 게 없어서 여기까지 기어 올라와서 저 사사화와 뒹굴고 갔겠냐? 아무리 구모란 사사화가 그짓이 도화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그짓하러 예까지 오기야 했겠냐?" "그건 그렇겠습니다만……." 타봉신개가 이제 막 돌아 다니는 동기들을 턱짓하며 말했다. "네놈 오기 전에 바로 저 선향루에 낙양표국의 마차가 들어갔다." "그야 표사들이 종종 기루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흐흥, 무장하고 마차까지 끌고?" "그야…… 봉물을 배달하려고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닙니까?" 딱! 기어코 사이룡의 머리에 타봉신개의 탄지신공이 날아가 부딪쳤다. "이 멍청아, 사람을 배달했단 말이다. 그것도 임산부를." 그 한 마디에 사이룡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임산부라니. 4 선향루는 금세 왁자지껄하니 변했다. 전각마다 탄금소리가 울려 퍼지고 기녀들의 간드러진 교소 소리와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흥을 돋구었다. 어린 동기들이 전각에서 전각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술시중을 들고 있었고 점소이들은 점소이들 대로 술과 요리를 나르느라 바빴다. 사이룡은 동기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며 주변을 눈여겨보았다.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다른 손님들의 마차들이 마부들과 함께 대기하는 후원에 있으리라. 동기는 그를 장춘각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대뜸 은자를 쥐어주며 장춘각주 사사화를 보자고 했으니 일단 장춘각으로 모셔놓고 각주에게 여쭈어볼 생각이었다. 쿠사리를 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재물도 꽤 있어 보이고 용모도 준수한 데다 지위도 높은 것 같았다. 사람 보는 눈에 있어서는 자신이 관상쟁이 못지 않다고 자신하는 동기였다. 장춘각 내에는 세 개의 주청이 있었다. 하나의 주청이 한 층을 차지했고 그 주청들마다 사사화를 보고자 하는 주객들이 다른 기녀들과 아쉬운 대로 술을 마시면서 기다리고는 했다. 그리고 자신의 차례가 오면 사사화를 맞이해서 술을 마시고 그녀의 마음에 들면 그날은 그녀의 침소에 함께 갈 수 있는 것이었다. 장춘각은 사층으로 지어진 전각이었다. 욕조의 물이 출렁 넘쳤다. 사사화는 벌떡 일어났지만 이내 신색을 고치고 날카롭게 동기를 쏘아보았다. 동기는 겁이 나서 모기소리를 냈다. "그, 그냥 돌려 보낼까요?" 사사화는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웬만한 인물이면 자신있게 상대한다. 자신이 가진 미모와 색공으로 이제까지 녹이지 못한 사내가 없었다. 그동안 무림인들 중에서 협조를 약속하고 간 인물만도 정사마를 합쳐 스물이 넘는다. 명단에 있는 인물은 모두 복록대인의 협력자로 만들어 놓았다. 사내라면 소림의 고승이 오든 동창의 환관이 오든 다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엎어지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상대는 주사판관이다. 사이룡. 가령공주가 흠모하여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물이라 들었다. 가문도 가문이려니와 그 무공이 고강하여 웬만한 색공으로는 눈도 돌아가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인품이 고고하여 여색도 즐기지 않는다 한다. 사사화는 욕조에서 나와 몸의 물기를 청의시비에게 내맡긴 채 곰곰이 생각했다. 복록대인은 이번 일을 맡기면서 다른 때와는 달리 목숨을 걸으라 했다. 목숨을 걸으라면 걸어야 한다. 그녀 자신의 목숨이 복록대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동경 앞에 앉았다. 분을 바르고 입술을 찍으면서 내내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묘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주사판관은 무언가 냄새를 맡고 추적해 온 것이 틀림없다. 장안성 제일의 판관이다. 캐고 들면 실수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어쩌면 정말 죽게 될지도 몰랐다. 이번 일만 끝내면 이제는 강호를 떠나려고 했다. 고향은 찾지 못하더라도 어딘가 조용한 곳이 많을 것이다. 그러면 복록대인도 더는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마지막이 중요한 것. 마지막 고비에 실패하는 인생들이 많은 법이다. 그녀는 머리에 화접을 하나하나 꽂았다. 그냥 화접이 아니라 언제라도 암기로 변할 수 있는 오독화접(蜈毒花蝶)이다. 그래도 안심이 안되어 다시 계(비녀)를 두 개나 꽂았다. 그녀가 자랑하는 독문절기 사사화계다. 그녀의 이름을 따서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이 사사화계에 살갗을 스쳐 살아남은 자는 없다. 그녀는 태어나기를 노비로 태어났다. 부모가 노비였으니 당연했다. 그녀가 미색을 갖고 태어난 것이 불행이어서 열네 살 나던 해부터 주인은 그녀를 사막의 대상들을 상대로 몸을 팔게 했다. 바람을 피해 모래구덩이에서 지나는 대상들에게 몸을 팔았다. 도적떼에게 끌려가 인간이하의 생활로 스물이 되었다. 자살을 하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음이었다. 생에 애착을 갖는 것이 비참한 세월이었다. 그러다가 복록대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지나는 길에 우연히 도적떼를 만나 싸우게 되었고 도적떼는 전멸을 당했다. 그리고 복록대인은 그녀를 구해 먼저 주인에게 돌려보내지 않고 자신이 거두었다. 그녀는 먼저 주인이 찾아와서 자신을 도로 데려갈까 두려웠지만 괜한 기우였음을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복록대인에게 와서 자신의 노비를 돌려달라고 말할 만한 인물은 강호를 통틀어 몇 안되었다. 복록대인은 그녀를 거두어서 우선 배불리 먹고 쉬게 하였다. 몸을 가꾸고 탄금과 소리를 배우게 하고 글을 배우게 하였다. 그녀는 나날이 달라져갔고 스물 이전의 그녀를 본 어느 누구도 그녀를 다시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 후에 그녀는 색공을 배웠다. 그녀는 복록대인의 은혜를 생각해서 무엇이든 열심히 배웠고 자신의 변한 모습에 반하여 또 열심히 배웠다. 그녀는 선향루를 세웠다. 복록대인은 많은 돈을 들였고 운영은 그녀가 맡아서 했다. 그리고 가끔씩은 복록대인이 원하는 상대를 선향루에서 대접하고 쉬게 했다. 관이나 무림인들에게 쫓기는 자들도 와서 쉬었고 어느 때는 쉬다가 죽기도 했다. 명령이 내려오면 대접하던 자도 죽여야하는 때가 있었다. 그런 때는 사사화가 직접 죽여서 처리했다. 그녀는 오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의문스러웠다. 사이룡의 무공수위는 몰랐지만 누구나 그 고강함을 보지도 않고 칭송한다. 들이닥칠 때는 틀림없이 사건의 꼬리라도 잡고 왔을 것이다. 사방에 눈이 있는데 마차가 들어 온 것을 모를 리는 없다. 최대한 속이다가 안되면 죽인다. 그것이 그녀의 결심이었다. 그녀는 동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싸우려면 투지가 일어야 한다. 상대가 누구든 겁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서 승부를 가려야 한다. 자신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색공과 방중술을 익히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쓴다면 승산이 나올 수도 있다. 그도 남자다. 유혹하면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사사화는 자신의 풍만한 젖가슴을 두 손으로 만지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아직 안 넘어간 사내가 없었다. 이 뽀얗게 부풀어오른 젖무덤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열락의 도원경을 헤매었던가. 그녀는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동경 앞을 떠났다. 사이룡은 술잔을 내밀었다. 기녀가 옥잔에 백주를 채웠다. 많은 좋은 술이 있었지만 사이룡은 백주를 즐겼다. 그는 백성들이 즐기는 술을 같이 마시면 자신도 평범해지는 것만 같아서 그 기분을 즐기고는 했다. 기녀 하나는 창가에 앉아서 비파를 뜯었다. 은은한 비파소리에 달빛이 얹혔다. 사건만 아니면 술에 흠뻑 취해도 좋으련만. 은보요가 발길에 따라 딸랑거렸다. 그 소리를 신호로 기녀들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고 주렴이 다시 헤쳐지면서 사사화가 사뿐히 들어섰다. 아름다웠다. 예쁘다거나 사랑스럽다거나 귀여운 것이 아니라 정녕 아름다웠다. 멀리서 보던 그녀의 자태와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그녀의 자태는 달랐다. 드러난 어깨며 가슴에는 티 하나 없고 작은 손과 발이 운율을 타듯 살랑이며 술상 앞으로 움직였다. 사이룡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옥잔을 비웠다. 이제부터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네와 시를 읊고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싸워야한다니 섭섭할 뿐이다. 그녀가 사건에 깊이 연결되어 있지 않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까지 들었다. 그대로 실토하면 아무 해도 입히지 않으리라. 사사화는 맑은 눈동자로 사이룡을 바라보며 맞은 편에 앉았다. 똑바로 바라보다가 숨이 턱 막혔다. 눈에서 서기를 느꼈다. 얇게 다문 입술이 의지를 보여주고 각진 턱이 강인함을 나타냈다.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나 자연스럽게 뻗어 나오는 경기는 그녀 자신이 이제까지 사내들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깊고 안정된 것이었다. "이렇게 달빛이 좋은데 어찌하여 화장으로 낯빛을 가리었소?" 사이룡이 먼저 말을 걸었다. 주인인 자신이 먼저 말을 걸어야 할 터인데 그녀는 그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얼른 보조개가 패이도록 웃으며 사이룡을 바라보았다. "화장 없는 청초함을 즐기시려면 기루가 아닌 마을로 가셔야지요. 마을이 멀면 저잣거리도 좋지요." "하하하." 사이룡은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실언을 했소? 나는 이 곳에서는 돈이라면 무엇도 다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어찌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곳이 있겠습니까?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마음을 합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사이룡이 사사화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사이룡이라 하오." "사사화라고 하옵니다." "피차에 이름은 들어서 알 것 같으니 인사는 생략하고 몇 마디 말이나 나눕시다." "말동무가 필요하시옵니까?" 사사화는 술잔을 들고 사이룡의 옆으로 옮겨 앉았다. 술잔을 들어 사이룡의 손에 건네고 술을 따랐다. 은은한 사향 내음이 사이룡의 코 끝을 어지럽혔다. 사이룡은 술을 받아 단숨에 들이키고 이번에는 사사화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사사화가 술잔을 받으며 슬쩍 손을 마주 대었다. 그리고 사이룡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아무 느낌도 없는 눈동자와 부딪쳤다. 다시 숨이 턱 막혔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