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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생존자(生存者)들 번쩍- 자시(子時)의 하늘은 푸른 번개날에 의해 검은 천이 찢어지듯이 처절하게 끊어져 가고 있었 다. 모든 것이 불타고 무너진 폐허는 푸른빛에 의해 일순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속, 하나의 고영(孤影)이 휘청거리며 이동해 가고 있었다. 불타 버린 장포, 노랗게 타 버린 머리카락. 본시 화려한 차림새였으나, 지금 그의 몰골은 용광로 안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의 모습과 다 를 바 없었다. "철저히 농락당했다. 악마십화(惡魔十花)의 종사(宗師)는… 잠룡비전을 과대 소문내어, 백도 기인들을 유인하여 모조리 불태워 죽인 것이다. 큿큿! 그 자는 항차 강호(江湖)를 정복하고 자 함에 틀림이 없다."휘청거리며 걷는 인물, 그는 천하에서 가장 용맹한 무사라고 소문난 바 있는 인물이었다. 지금은 주홍무(朱洪武)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측근 인물이며, 강호인으로 황실에 투 신하였기에 이단자라고 배척을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철혈무후(鐵血武侯) 진자백(陣子伯). 그는 폭발 가운데에서도 죽지 않았다. 그는 폭발과 더불어 산사태가 시작되자, 철신은둔공(鐵身隱遁功)으로 흙 속으로 파고들어 위 기를 구사일생 피한 것이다. 비틀비틀……! 그는 진흙탕이 되어 버린 악마의 터전 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여간… 홍무제가 내린 밀명은 완수된 셈이다. 어쨌든 간에… 이제부터 원의 기세는 무너 질 것이다. 악마무후라는 자가 원의 저력을 악용하여 세력을 팽창시킬 것이되, 그것은 강호 계(江湖界)에 한(限)하는 일이 될 것이다. 대명황실(大明皇室)로서는 어쨌든 큰 골칫거리를 해결한 것이다!"그는 휘청이며 걸었으며, 품안에서 하나의 단약을 꺼내어 그것을 입 안에 털 어 넣으려 하다가 문득 손을 정지시켰다. 번쩍-! 뇌섬(雷閃)으로 인해 일대가 순간적으로 환히 밝아졌다. 만에 하나, 이 순간에 번개가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철혈무후는 이 자리를 그냥 스쳐 지나 갔을 것이다. "저것은?" 그는 갑자기 흠칫거렸다. 무너진 벼랑 아래쪽, 무엇인가가 꿈틀꿈틀거리고 있었다. 너덜너덜한 옷자락에 헝클어진 머리카락, 지극히 자그마한 몸뚱이 하나가 애벌레처럼 꿈틀 꿈틀거리고 있었다. 불에 데인 상처는 없는 것으로 보아, 폭발보다는 산사태에 의해 피해를 받은 생존자 같았다. "지독히도 끈질긴 목숨이군." 철혈무후는 차라리 섬찟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허리에 달린 검을 움켜쥐며 꿈틀거리는 몸뚱이 쪽으로 다가갔다. '죽여 버려야 한다.' 그는 모진 각오를 하며 입술을 질끈 물었다. '어린 나이로 미루어 보아, 십대잠룡 가운데 하나이다. 악마성이 골수까지 파고든 악마의 자 식들! 역시 끈질긴 목숨들이로군.'철혈무후는 살기를 일으키며 천천히 검을 빼어 들었다. 창-!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이 척 팔 촌 길이의 거궐검(巨闕劍)이 흰빛의 호선(弧線)을 만들어 냈다. 금석(金石)을 두부처럼 베어 버리는 상고기병(上古奇兵) 거궐검은 번쩍 쳐들렸으며… 바로 그 순간, 하늘은 또 한 차례 번개에 유린되었다. 번쩍-! 새파란 섬전이 일대를 환히 밝힐 때였다. 철혈무후는 너무나도 해맑은 소녀의 얼굴을 문득 볼 수 있었다. 멍한 눈빛, 무엇인가 말할 듯하나 입술이 말라붙어 잘 떼어지지 않는다. 눈이 크고 콧날이 오똑한 미소녀. 피부에 상처가 있기는 하나, 그녀의 아름다움은 절대 감추어지지 못할 완전무결한 아름다움 이었다. 소녀는 더듬더듬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소년(少年)을 못 보았나요? 조운(照雲)이라는……?""……." "착한 소년입니다! 저는 그 소년을 찾고 있답니다. 좋아하기 때문이지요."바보처럼 말하는 소녀. 마치 실성한 듯이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뒤쪽 뇌호혈(腦戶穴) 부위에는 꽤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아마도 상당히 큰 돌이 머리 뒤쪽으로 떨어져 내리며, 뇌호혈을 심하게 건드린 것 같았다. 철혈무후는 검을 내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 또한 천천히 벌어지고 있었다. "너무나도… 어여쁜 소녀로군! 그리고… 눈빛이 저렇게 맑을 수가……!"그는 검자루에 힘을 가하지 못했다. '저 눈을 보자, 살심이 사라져 버리는군.' 그는 천천히 검을 내리고 말았다. 그는 성큼 다가갔으며, 소녀의 손목을 가볍게 거머쥐었다. "아마도 너는 대명과 인연이 있는 듯하다." "……." 소녀는 웃기만 했다. 몇 마디 의미 모를 말을 토해 내기는 하였으되, 정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말하는 것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한 송이 꽃과 같은 소녀, 해어화(解語花). 그녀는 자꾸 웃기만 하였으며, 철혈무후는 자신이 먹으려 했던 주홍빛의 신단을 그녀의 입 에 밀어 넣어 준 다음 그녀를 점혈했다. 얼마 후, 그는 아버지가 어린 딸을 업듯이 그녀를 들쳐업고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폐허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다시는 무림을 밟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어린 소녀야, 너는 무림과는 완전히 다른 곳에서 지 내게 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는 이유를 나도 잘 모르겠구나. 아마도 너의 눈빛이 내가 전 란(戰亂) 가운데 잃어버린 딸아이의 눈빛과 너무나도 흡사하기 때문이리라."철혈무후는 중얼 거리며 폭우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곳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곳이다. 기둥이 무너지고, 기와가 산산조각 나서 어지럽게 널리어 있다. 그 곳에도 비는 쉴새없이 퍼부어지고 있었으며, 일각 전부터 묘한 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를 검은 천으로 휘어 감고 있는 괴인,그리고 창백한 얼굴로 반듯이 누 워 있는 냉막한 인상의 소년. 쏴아아… 쏴아아……! 빗소리가 요란하다. 너무나도 심하게 퍼부어지는 비인지라, 눈을 부릅뜬다 하더라도 일 장 밖을 제대로 알아보 기 힘들다. "고약한 놈! 노부가 너를 제자로 거둬 준다는데도 싫다니… 대체 네놈은 어떤 놈이냐?"눈에 서 핏빛 광채를 뿜어 내는 자. 그는 등에 화려한 피풍의(避風衣)를 걸치고 있는데, 그것은 귀퉁이가 불타 너덜너덜해진 상 태였다. 자객지왕(刺客之王)이라 불리는 인물 마접(魔蝶). 그도 살아 있었다. 사실 몸이 금강불괴에 달한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폭발로 인해 죽지는 않는다. 마접은 이틀에 걸친 폭발 가운데 아끼던 피풍의를 불태웠으며, 그것을 몹시 고약한 낭패로 여기며 돌아가려 하다가 한 소년을 발견한 것이다. 마접 자신보다도 더 오만하고 냉막한 소년. 마접은 그의 눈빛을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거울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히 고 말았다. 천하제일재(天下第一才)라 하기에는 부족하나, 천하제일살(天下第一煞)이라 불리기에는 부족 하지 않는 기린아. 그는 사앙(史仰)이라고 불리는 자였다. "나는 기경팔맥(奇經八脈)이 모두 끊어졌소. 무공을 배우기 힘드오! 그러니 나를 포기하기 바라오. 게다가 나는 살기 귀찮아 하는 놈이오."사앙은 몹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죽어 가고 있는 처지에 그리 오만하기도 힘들 것이다. "큿큿… 노부는 너를 구할 재간이 있다." "흠……!" "큿큿… 사실, 노부는 너보다도 더욱 뛰어난 천재를 바라고 여기에 왔다. 하나, 너 정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너를 선택하고자 하는 것이다.""큿큿… 나는 모진 놈이오. 그리고… 은원(恩怨)의 개념이 남과 다르오. 나는 살기 지겨워 하는 놈이오. 나의 죽을 기회를 방해하 지 마시오. 나를 구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대를 은인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 원수 로 여길지도 모르오.""큿큿… 네놈의 말이 점점 더 마음에 드는군. 좋아, 하여간 가자꾸나!" 마접은 통쾌히 웃으며 피풍의를 흔들었다. 진흙에 널브러져 있던 사앙의 몸뚱이가 섭물진기(攝物眞氣)에 휘말려서 허공으로 둥실 떠올 랐다. "가지 않겠소!" 사앙은 화를 내며 소리쳤으나, 지금 그로서는 마접이 자신의 몸뚱이를 공깃돌 놀리듯이 놀 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휘리리리링-! 표풍(飄風)이 일어난다. 마접은 사앙의 목덜미를 덥석 낚아챈 채 허공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카카카… 이 년 안에 너는 천하제일의 자객(刺客)이 된다. 물론 고금제일(古今第一)의 자객 이 되기는 힘들 것이나, 당세제일의 자객은 될 수 있을 것이다!"휘이이이잉-! 마접은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검은 바람으로 화해 사라져 갔다. 지금 잠룡대산의 능선(陵線)이 비에 잠기고 있다. 잠룡비전에서 백 리 정도 떨어진 곳이다. 잠룡비전 쪽에서부터 나타나는 하나의 행렬이 있 었다. 실로 기이한 행렬이다. 총인원은 십이 인(人). 열하나는 걷고 있으며, 하나는 반듯이 누워 있었다. 다시 말해, 십일 인의 괴인들이 연자(輦子) 하나를 번쩍 쳐든 채 치달리고 있었으며… 연자 위에 한 소년이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는 것이다. 팔다리뼈가 부러지고, 옆구리에 심한 상처가 있으되 그의 표정은 지극히 편안한 것이었다. "훗훗… 이제야 집에 가게 되는군. 사실 나는 원(元)의 사람도 아니고, 명(明)의 사람도 아니 다. 나는 일(日)의 인물이다. 나는 신풍(神風)의 우두머리가 되어야 할 처지인데, 운 나쁘게 잡혀 십 년 고생한 것이다!"히죽거리는 소년, 그는 억세게도 운이 좋은 다섯 천재 가운데 하 나였다. 대폭발 당시 잠룡비전 안에 다섯이 있었고, 외부에 다섯이 있었다. 외부에 머물러 있던 다섯 기재는 대폭발의 중심에서 벗어난 상태이기에, 은잠술(隱潛術)을 발휘해서 폭발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소년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철태랑(鐵太郞). 그는 신풍도(神風島)의 후계자였으며, 지금 그를 모셔 가는 사람들은 그를 가주(家主)로 섬 겨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는 부풍십일랑(扶風十一郞)이었다. 그들은 철태랑을 중원에서 잃어버린 신풍검호(神風劍豪) 철검랑(鐵劍郞)의 제자들로서, 지난 십 년 내내 신풍검호의 후예인 철태랑을 찾아다녔었다. 철태랑은 폭우를 토해 내는 검은 하늘을 바라봤다. 이제까지는 웃고 있었는데, 지금은 표정이 달라졌다. 어딘지 모르게 우울한 표정, 그리고 다분히 인간적인 표정이었다. "좋은 녀석들이었는데… 다시는 못 보겠군." 쏴아아… 쏴아아……! 퍼부어지는 빗물 가운데, 여러 얼굴이 나타난다. "사실… 그 녀석들이 살아 있다면… 항차 나는 천하제일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 녀석들 만이 나의 경쟁자가 될 테니까. 그리고 능조운, 그 녀석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꺾지 못할 진정한 천재였다."콰르르릉- 콰쾅-! 천둥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부풍십일랑은 연자를 쳐든 채, 잠룡대산을 뒤로 하고 쉬지 않고 이동해 갔다. 철태랑은 웃다가 울었고, 그러다가는 탈진한 나머지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모름지기 그는 신풍도에 도착해서야 잃어버린 의식을 되찾게 될 것이다. 세 노인, 하나같이 처참한 몰골들이다. 옷이 타 버리고, 얼굴이 뭉그러졌다. 백 년 수위가 넘는 내공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구사일 생하기는 하였으되, 내외상(內外傷)이 실로 엄청나다. 이들은 폭발이 시작되는 찰나, 용호삼재진(龍虎三才陣)을 순간적으로 펼쳤기 때문에 대폭발 가운데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미(峨嵋) 강룡선사(强龍禪師),무산(巫山) 천예낭낭(千藝娘娘),그리고 곤륜(崑崙) 종대선생 (鐘大先生). 무림삼성(武林三聖)으로 존경받고 있는 거두들이다. 이들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잠룡대전 쪽으로 들어섰었고, 지금은 너무나도 경이로운 표정 이 되어 탄성을 발하고 있었다. "놀랍소. 모두 건재하다니……!" 강룡선사는 저도 모르게 합장을 했다. 신녀곡의 태두인 천예낭낭 또한 경건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을 짓는다. "놀라운 목숨들이오. 아아, 셋 다 살아 있소. 외상이 심하기는 하나, 능히 살 수 있소."그녀 가 감탄할 때, 종대선생은 쭈그리고 앉아 이남일녀(二男一女)를 진맥하고 있었다. 하나는 거인(巨人)이고, 하나는 키가 꽤 큰 소년이다. 또 하나의 인물은 소녀인데, 얼굴이 흉칙하게 타 버려서 보기에도 끔찍할 정도였다. "모두… 대단한 근골이외다." 종대선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의술에도 상당한 조예를 갖고 있는 인물이기에, 맥을 짚는 것으로 세 사람의 병세를 간파해 내는 것이다. "하나는 철골(鐵骨), 또 하나는 문창골(文昌骨)이오. 그리고 얼굴이 뭉그러진 소녀는 예혼(藝 魂)을 지니고 있소. 아아, 모두… 하늘이 내린 천재들이오."종대선생은 감탄에 감탄을 거듭 하며 두 사람을 돌아다봤다. 그는 실로 흥분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그의 뒤쪽에 있는 두 기인 또한 마찬가지의 표정 이었다. 무언(無言) 가운데 말이 통한다고나 할까? 세 기인은 어떠한 일에 대해 무언중에 일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운이 나쁜 것이 아니라… 운이 좋았소!" "그렇소. 뛰어난 후기지수(後起之秀)가 없는 구파일방(九派一幇)에 세 마리 신룡(神龍)이 날 아든 것이오!""아아, 이 어린아이들을 참살하기 위해 삼만 리 넘게 온 것이 어리석게 여겨지 는구려. 악마무후라는 자는 우리들을 끌어들여 죽이기 위해 잠룡비전에 대한 것을 과다 소 문낸 것이오. 그는 지금 웃고 있을 것이며, 우리 백도인들은 무슨 수를 쓰던 그의 마수(魔 手)를 잘라야 하오!""그렇소. 우리는 백도(白道)의 기둥들을 길러야 하오! 훗날을 위해 ……!""아미타불… 우리들을 이 곳으로 보낸 신승(神僧) 초의선사(草衣禪師)께서도 우리들을 용서하실 것이오!"세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종대선생은 단약 세 개를 꺼내 세 명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그것은 곤륜파의 비방에 따라 만든 청송신단(靑松神丹)으로, 구명의 효력을 나타내는 것이었 다. 세 사람 가운데 상세가 가장 적은 소년 하나가 제일 먼저 의식을 찾는데 걸린 시간은 일각 정도였다. 더듬더듬……. 그는 입술을 푸들푸들 떨다가 이렇게 내뱉었다. 그가 하는 말은 너무나도 엄청난 말인지라,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 그 녀석이 허공으로 치솟으며 화탄을 위로 퉁기어 냈거늘… 크으으… 나는 죽음이 두 려워 대지(大地) 속으로 은잠했으니……!"멍한 눈빛이다. 나이답지 않게 회한에 가득 찬 눈 빛이기도 했다. "그 녀석이라니……?" 종대선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능… 능조운, 그 놈은…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 잠룡등풍(潛龍騰風)으로 떠오르며… 혼신내 공을 발휘해 폭발음을 몸으로 막았소!"소년은 여불군(呂不君)이었다. 그는 넋 나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놈은 실 끊어진 연(鳶)처럼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풍운(風雲), 그 녀석이 뒤따라 떠올랐소. 한데, 나는 죽음이 무서워 돌바닥 속으로 뚫고 들어가… 이 구차한 목숨을 살린 것이오!"눈 물(淚)일까? 그의 뺨으로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는 넋 빠진 얼굴로 중얼중얼거리기를 계속했다. "그 덕에 내가 살고, 철거가 살고, 묘묘가 살았소. 우리 셋은 십대잠룡 가운데 가장 약했기 에, 도저히 살 수 없었는데… 능조운, 그로 인해 산 것이오. 큿큿… 큿큿……!"말미의 웃음소 리에는 광기가 서리어 있었다. 그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실로 심한 타격을 입었는지라,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지껄이고 있 는 것이다. "놈은 불바람에 휘어 감겼소. 아마 불타 죽었을 것이오!"실로 처절한 어조였다. 세 기인은 야릇한 기분에 휘말려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여불군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비 내리는 하늘을 응시하며, 그는 피눈물을 쏟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새(鳥)를 봤소. 거대한 금빛 날개를 가진 새를. 그 새가 조운, 그 놈과 더불어 날아올랐소. 큿큿! 아마 환상이었을 것이오. 놈은 불타 죽었고, 혼백만이 살아남아 불사조(不死鳥)로 화 해 날아올랐을 것이오!"한 마리 금빛 새,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세 기인의 표정이 확 달라 졌다. "금빛 새?" "설마… 설마……?" "으으, 설마 천하대상(天下大商)이 기르는… 황금신붕(黃金神鵬)이 나타났었단 말인가?"콰르 르르릉- 쾅-! 뇌성벽력은 폐허를 또다시 폐허로 붕괴시킬 듯 지칠 줄 모르고 떨어져 내렸다. 대폭발 이후의 일은 무림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완전한 비밀사였다. 누가 살고, 누가 죽었는지……. 누가 남고, 누가 떠났는지……. 모든 것은 뇌우(雷雨)에 파묻혀 버리고 마는 것이다. 대폭발은 잠룡비전을 핵(核)으로 삼고 있었다. 다시 말해, 악마무후가 안배한 폭발은 잠룡비전을 완벽히 허물어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잠룡비전 안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살인멸구(殺人滅口)하자는 것이야말로, 악 마무후가 진심으로 바라던 일이었다. 그는 원황실이 안배한 무사세력(武士勢力)을 장악하고 있으며, 열 개의 집단을 강호에 심어 두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그는 그 세력을 사용(私用)하여 자신의 왕국(王國)을 건립하고자 한 것이며, 그 일에 방해를 없애기 위해서 잠룡비전의 위치를 천하에 은근히 소문내어 기인이사들을 불렀던 것 이다. 하여간 잠룡비전은 무너져 버렸으며, 그 날 그 곳에 갔던 사람들 가운데 되돌아온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중원(中原)에는 봄이 깊어 가고 있었다. 어느 새 오월(五月)인가? 창 밖의 빛깔이 나날이 화려해지고 있었다.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으며, 산의 빛깔이 그로 인하여 북종화(北宗畵) 짙은 채색(彩色) 그림처럼 화려해지고 있었다. 그 곳에서는 계절(季節)이 느끼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메말라 있는 대사막(大沙漠). 가도가도 끝이 없는 모래의 바다이다. 이름조차 갖고 있지 않는 곳이며, 소유주 또한 존재하 지 않는 곳이다.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하기 힘든 장소, 어디를 봐도 건조한 모래밭이 보일 뿐이다. 하나, 단 하나의 장소만은 그러하지 않았다. 녹원(綠園), 그 곳만은 푸른빛에 뒤덮이어 있었다. 가물거리는 아지랑이로 인해 시작된 신기루(蜃氣樓)일까?본시 없는 것인데, 기후의 조화로 인해 이루어진 환상일까?하여간 녹원 하나가 망망대해의 무인도(無人島)처럼 형성되어 있었 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푸른 빛깔의 금강보옥(金剛寶玉) 벽처럼 하늘은 사막 지대를 뒤덮고 있었다. 끄으으윽-! 돌연, 기이한 조성(鳥聲)이 들리며 하늘 높은 곳에서 하나의 거대한 금빛 동체가 날아 내리 고 있었다. 거대한 새(巨鳥), 날개를 활짝 펴면 그 넓이가 집채 하나를 연상케 한다. 눈알은 타오르는 붉은빛이며, 몸뚱이는 잡모(雜毛)가 하나도 없는 순금(純金)의 빛깔이었다. 태양천조(太陽天鳥)라고도 불리우는 황금신붕(黃金神鵬). 그 거대한 새는 녹원 지대를 향하여 정확하게 날아 내리고 있었다. 거조의 등. 피떡처럼 듬직한 물체 하나가 있고, 자애스럽게 생긴 노인 하나가 머물러 있었 다. 어찌나 늙었는지 얼굴이 주름살로 뒤덮여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입가에는 신선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나이답지 않게 하이얀 치아. 신선도에서 튀어나온 듯 기품이 있는 노야(老爺)는 만신창이가 된 소년 하나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으며, 주름진 손으로 소년은 피에 찌든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다 왔다!" "……." 소년은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이틀 전에 의식을 찾았으며, 지금까지 이상한 공허감이 느끼어지는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헛헛… 충격이 클 것이다. 하나, 세상이란 그러한 것이다.""……." "노부가 한 발만 빨리 갔다 하더라도, 너를 무사히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나, 그것도 운 명(運命)이겠지.""……." "네가 비록 폐인(廢人)이 되었다. 하나, 너의 길은 절세고수(絶世高手)의 길과는 다른 길이 니… 좌절할 것 없다!""……." "녀석, 네 가슴에 맺힌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 지금 어떠한 말로 너를 위로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하나, 한(恨)으로 인해 지혜(智慧)를 파묻어서는 아니 된다. 대인(大 人)이 되기 위해서는… 심신의 상처를 의지로 가다듬는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황금신붕 은 천천히 날아 내렸다. 소년은 그 때까지도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찌나 심하게 다쳤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다. 피부는 한 꺼풀 벗겨졌으며, 코는 뭉그러졌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운 눈망울 두 개만은 신성할 정도로 반짝거렸으며, 그 눈빛에 담긴 의미 는 가히 절세적이었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입술을 떼었다. "왜… 나를 구했소이까?" 쉬어 버린 목소리이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만은 진실되고 처절했다. "구해야만 하기 때문이지." "왜……?" "노부는 세상(世上)에, 그리고 세월(歲月)에 빚을 많이 지고 있다. 젊었을 때는 실수도 많이 했다. 헛헛! 사실 꽤 많은 것을 이룩했지. 타인들이 노부를 욕하고 증오하나, 노부는 나름대 로 최선(最善)을 다했으며… 남들이 상상하기 힘든 기업(企業)을 이룩했다."웃는 노인, 그는 일반 강호인들과는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작고 왜소한 체격, 늙고 주름진 얼굴이며 평범한 표정. 늙은 농사꾼을 연상시키게 하며, 강상(江上)에서 세월을 낚으며 머리를 희게 물들게 한 늙은 어부(漁夫)를 느끼게도 한다. "실로 거대한 기업이란다. 노부가 갖고 있는 기업은……!""……!"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 이 갑자(甲子)를 바쳤다. 꽤 힘든 나날이었으나, 운(運)도 따랐는지라 수많은 실패를 극복하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하나, 불행히도 후계자를 찾지 못했다. 뛰어난 청년들이 많았으되… 오만하고 독선적이기에 안심하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없었고, 어떠한 녀석은 인내력이 부족하여 좌절하기 쉽기에 후 계자로 선택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너를 찾게 된 것이다. 그게 전부이다. 훗훗! 어쩌면… 폐인이 되어 버린 너 를 선택한다는 것이 노부 최후의 실수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노부는 너를 단념하지 않겠 다!"노인은 소년을 등에 업고 걸었다. 소년은 회의에 가득 찬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노인의 말을 듣다가는 피식 웃고 말았다. "훗훗… 단념하실 것이외다, 노야." "글쎄." "나는 단전(丹田)이 완전히 파괴되어 무공을 시전할 수 없소.""안다." "또한 나는, 상전을 모시기 좋아하는 약골(弱骨)이 아니라, 독종(毒種)이오.""안다. 너는 십대 잠룡 중에서 가장 뛰어난 녀석이다. 훗훗! 너에 대해 모르는 것은 거의 없다."노인은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히죽 웃어 가며 말을 이었다. "네 이름은 능조운(凌照雲), 나이 십칠 세(歲), 출생지는 제남부(濟南府)이고… 태어난 곳은 능가장(凌家莊)이다. 너의 부친은 능천하(凌天河), 모친은 송황실(宋皇室)의 피를 이어받은 송조의 마지막 공주(公主) 정혜공주(淨慧公主) 조혜란(趙慧蘭)이다. 너의 부모는 네 나이 다 섯 살 때 병사했으며, 너는 그 때 포대선생(鮑大先生)의 제자로 들어갔다. 그리고, 네 나이 일곱 살이 되던 해, 잠룡비전의 제일교두에 의해 납치되어 잠룡비전으로 들어갔다!""으 으……!" 소년의 눈빛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아아, 능조운(凌照雲). 그는 바로 능조운이었다. 잠룡비전의 제일천재인 능조운은 죽지 않았다. 그는 대폭발의 순간에 천하 기인들 모르게 그 곳으로 날아든 신비노인에 의해 구출된 것이다. 천하에서 가장 방대한 소식통을 지니고 있으며, 과거 원(元)이 수백 차례 살해하고자 했으나 하지 못했던 인물. 무림인(武林人)이 아니되 무림을 막후(幕後)에서 지배한 진정한 거물(巨物). 천하거상(天下巨商) 석대숭(石大崇). 그는 자신의 측근들에게조차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속가(俗家)의 제일기인이며, 불가(佛家)의 성승 초의선사와 더불어 천하의 양대신비로 꼽혔 던 인물이다. 그가 얼마나 거대한 부를 이루고 있으며, 그가 부를 이룩하기 위해 어떠한 일을 하였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능조운을 구한 사람은 석대숭이었다. "너는 거상(巨商)이 되어야 한다." "거… 거상?" "그렇다. 너는 난세(亂世)의 거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너의 진정한 운명이다. 네가 부정하고 무시한다 하더라도, 노부는 너를 그렇게 만들 자신이 있다. 그리고 너는 해낼 것이 다. 그것이 너의 숙명이고, 너의 숙명은 바로… 강호의 운명이 되고 말 것이다. 훗훗! 너도 모질고 고집이 세나, 노부도 보통은 아니다. 훗훗! 노부는 무공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난세를 이 갑자나 버티어 왔다. 너의 생존력은 무공에서 온 것이되, 노부의 생존력은 철저한 처세술에서 온 것이다. 훗훗! 이제 우리 두 사람의 재주가 하나로 합쳐져야만 한다. 그래 야… 중원이 산다. 고약한 녀석!""어… 어리석은 짓이오." 능조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어리석은 짓이다. 네놈을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강호거상(江湖巨商)으로 기른다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 노부는 해내고 말 것이다. 그것이 어려운 일이기에… 훗 훗! 꼭 해 보고 싶은 것이고… 해 버릴 것이다.""할 수 없을 것이외다, 노야." "할 수 있다." 사막의 저녁은 아름답다. 모든 것이 피에 잠기는 듯하며, 달이 떠오르는 사막의 아름다움은 무릉도원의 아름다움을 오히려 능가한다. 밤이 되어 갈 때, 신비한 녹원은 기문진식의 발동 가운데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고 말았다. |
첫댓글 재미납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