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독교의 승리와 실패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들로부터 박해를 받기 시작한 지 거의 두 세기 반이 지난 311년에 공식적으로 예배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줄곧 박해에 시달려야 했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이교도 신전이 폐쇄되고 기독교가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가 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불가능한 일이 현실이 되었다. 교회가 로마제국 전체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법이나 관습, 혹은 계급 윤리에 맞추어서 행동하지 않았다. 이방 종교를 믿는 로마의 상류층은 도시와 자신들의 영광을 과시하려고 축제 때마다 엄청난 돈을 쏟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고, 병들고, 부모를 잃고, 그리고 배우자와 사별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서 도움의 손길을 베풀었다. 덕분에 삶이 고달픈 이들은 그리스도인들과 강력한 연대감을 느꼈다. 피비린내 나는 희생물, 향내, 신상이나 신전 의식을 배격하고 영적이면서도 철학적으로 예배하는 기독교가 교육 수준이 높고 부유한 이들 사이에서 점차 인기를 얻게 되었다. 올바른 교훈보다 올바른 삶과 행동에 관심을 가진 교회는 부드러운 혁명으로 사회 전반을 파고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로 기독교는 현실 정치와 밀착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로마의 황제들은 교회를 위해 기꺼이 관대한 후원자와 보호자가 되어주었고, 교회는 제국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서 기도했다. 이단의 위협이 심각할 경우에는 황제가 직접 나서서 전체 주교들을 소집하고 회의를 진행했다. 이것이 선례가 되어서 신학이나 목회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른바 공회가 소집되었고, 황제는 최고의 사제로서 회의를 주도하면서 긴급한 현안을 논의하고 처리했다. 황제와 주교들은 서로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기독교는 황제의 적극적인 비호를 받으면서 서서히 로마제국을 닮아 갔다. 교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통성과 보편성을 추구했고, 점차 법률적인 체제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제국과 교회의 이런 밀월 관계가 늘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교회가 외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어느 정치 집단보다 권력에 예민하고 세속화를 거부하지 못하는 기독교 교회를 사람들은 언제나 승리자로 간주하지 않았다.
몰락하는 로마제국과 기독교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제국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불길한 조짐이 제국 안팎에서 꼬리를 물었다. 로마는 전성기를 지나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226년에 등장한 대제국 사산조 페르시아는 로마 북쪽의 게르만족에게 시달리고 있는 로마제국에 심각한 위협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로마인들이 고티(Ghoti) 혹은 그토네스(Gtones)라고 부르던 고트족은 흑해 연안을 근거지로 삼아서 로마제국의 동쪽 국경을 넘나들며 약탈을 일삼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프랑크족, 카르파족, 그리고 반달족이 앞다투어서 도나우강을 건너서 침략해왔다. 이민족들이 자연의 재앙처럼 로마제국을 향해서 밀어닥치고 있었다.
제국의 지배자였던 황제들의 권위 역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3세기에는 서로 권력을 차지하려고 암투를 벌이는 바람에 몇 번이나 황제가 바뀌고 살해당했다. 로마 황제가 되기를 주저하거나 심지어 페르시아의 포로로 잡혀서 죽을 때까지 노예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황제까지 있었다. 국경지대에서는 군인들이 내키는 대로 황제들을 선출하기도 했다.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 쇠망사』에 의하면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코모두스가 근위대장에게 살해되면서 군인황제 시대가 열렸는데, 그 기간에 26명의 황제가 즉위했으나 평균 재위기간은 5~7년이었고 3년 이하가 16명이었다고 한다. 지중해 일대를 호령하던 로마제국이 중심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파티가 부른 비극
마흔다섯 살의 율리우스 필립푸스(Julius Philippus)가 나이 어린 황제를 독살하고 그 자리에 올랐다. 로마제국 최초의 아랍인 출신 황제였던 그는 248년 로마에서 화려한 연회를 개최했다. 로마의 건국 1천 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하는 행사였다. 날짜를 정확히 계산하면 247년 4월 21일이 되어야 했지만, 필립푸스는 이듬해에 성대하게 연회를 베풀었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는 수많은 이벤트가 진행되었다. 제국의 과거를 축하하고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줄잡아 엘크 10마리, 호랑이 10마리, 하이에나 10마리, 사자 10마리, 기린 10마리, 표범 30마리 등 수많은 짐승들과 함께 1천 명의 검투사들이 피를 흘려야 했다.
하지만 행사는 행사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후의 상황은 기대했던 것과 달리 말 그대로 절망과 탄식뿐이었다. 이민족의 침입은 더욱 극성이었고, 로마에는 전염병까지 나돌면서 민심이 악화될 대로 악화되었다. 결국 필립푸스는 부하들의 등살에 떠밀려서 또 한 명의 황제가 되었던 데키우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죽음을 당했다.
마침내 249년에 황제가 된 데키우스(Decius, 249~251 재위)는 국경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는 로마인들이 예로부터 섬겨오던 신에게 가호를 구하고는 칙령을 반포했는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악몽 그 자체였다. 누구든지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고 리벨루스(libbellus)라는 이름의 제사증을 받도록 요구했다. 제사증이 없으면 예외 없이 투옥되고 고문을 당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오리게네스를 비롯한 여러 명의 감독들이 검거 열풍의 희생양이 되어서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민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데키우스의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해를 당연하게 간주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전에 개국 기념 연회에 참석하기를 거부한 게 빌미가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때문에 이교 축제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사흘간 거리에서 연회를 즐기며 건국을 축하하는 시민들의 눈에는 한심한 방관자로 비쳐졌다. 미운털이 박힌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누구도 변론을 자청하지 않았다. 다행히 데키우스의 박해는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박해는 이후 수십 년간 지속될 갈등의 불씨를 남겼다. 황제는 251년에 고트족과의 전투를 치르다가 늪지대에서 전사했다. 그곳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시신의 수습조차 불가능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했다.
사과는 어느 선에서
박해는 지나갔지만, 교회는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했다. 불행한 시절의 과거사 청산 문제 때문에 갈등이 빚어진 것이다. 순교를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없던 그리스도인들은 목숨을 보존하려고 도망하거나 일반인처럼 제사를 지내고 호의적인 관리들에게서 제사증을 얻었다. 그런 그들이 정치 환경이 바뀌자 다시 교회로 돌아온 것이다. 국가와 타협한 교인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미 잘못을 회개했으니 박해 이전의 지위를 회복시켜달라고 요구했다.
교회는 딜레마에 빠졌다. 목숨을 걸고 신앙을 고수한 이들이 배교자들을 순순히 용서할 리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회개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아누스 역시 그런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키프리아누스에게 있어서 배교자 처리 문제는 자신의 신상과 직결되어 있었다. 그는 데키우스의 박해를 피해서 한동안 교회를 비우고 은거했다가 복귀한 바 있었다. 교회 역시 그런 선택을 권유하기도 했었지만, 박해 때 감독을 잃어야 했던 로마교회가 키프리아누스를 비난하는 서신을 보낼 정도로 여론은 곱지 않았다.
라틴어권 신학자를 대표한 키프리아누스는 고심을 거듭한 끝에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것은 차등적 처벌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한 자들은 엄벌하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굴복한 신자들에게는 참회의 기간을 단축해주는 게 바람직하다는 내용이었다.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처럼 교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범한 잘못을 참회하고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입증해야 했다.
하지만 누구나 이런 해결책을 수용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카르타고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박해자들에게 협력한 감독은 누구든지 간에 합법적인 성직 안수나 세례 혹은 성만찬을 집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실제로 카르타고의 신임 감독을 배격하기도 했었다. 신임 감독을 안수했던 감독이 박해 때 성서를 불사르도록 넘겨준 잘못을 범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 그리스도인들은 나중에 자신들의 지도자 도나투스(Donatus)의 이름을 따라서 도나투스주의자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7년 뒤에 또다시 박해의 물결이 밀려왔다. 데키우스 사후에 몇 차례 더 권력 다툼이 벌어진 뒤에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253~260 재위)에게 황제의 자리가 돌아갔다. 발레리아누스는 동방의 강력한 제국 페르시아와 버거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황제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페르시아군과의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계사의 한 장을 차지할 정도로 중대한 전투를 앞두고 있는 로마군 진영에 불행이 닥쳤다. 유프라테스강이 범람하고 흑사병이 나돈 것이다. 발레리아누스는 하늘을 노하게 만든 이유를 따져보았으나 딱히 짚이는 게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도 수천 명씩 죽어 나갔다.
좌절한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의 불경한 행동 때문에 로마의 신들이 분노해서 흑사병과 페르시아인을 보낸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칙령이 내려졌다. “가장 신성한 황제 발레리아누스는 다음과 같이 명한다. 어떠한 곳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집회는 불허한다. 그들은 공동묘지에 자주 가서도 안 된다. 이 자애로운 명령에 불복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참수될 것이다.” 이때 키프리아누스는 이전에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싶었다. 그는 이교신에게 제사하라는 재판관의 지시를 당당히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소망을 이루었다. 258년 9월 14일, 형장에서 형리가 휘두른 도끼날에 자신의 목을 맡겼다.
마지막으로 찾아온 박해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4~305 재위)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훤칠한 키에 마른 몸매, 그리고 창백한 얼굴에 코가 컸던 그는 성격이 강인했고 모든 면에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전통적인 종교를 추종한 로마의 마지막 황제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주피터와 이란의 신 미트라(광명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고, 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내장을 뒤적거리면서 하늘의 뜻을 가늠했다. 그러나 그는 광신이나 감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주 냉정하고 논리적인 행정가였는데,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능수능란하게 흐트러진 제국을 통합하고 황제의 권한을 강화해나갔다. 그는 권력의 누수를 막기 위해서 자신의 제국을 둘로 쪼갰다. 오랜 전우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286~305 재위)에게 서방을 맡긴 채 자신은 동방을 직접 통치했다. 지금으로서는 서방을 택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동방의 막대한 경제력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와의 경쟁 관계를 고려한 결정이었다. 이제 무게의 중심은 동방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두 황제는 서로 형제의 의를 맺었으나 제국의 총지휘권은 여전히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있었다.
두 명의 황제만으로는 외부의 위협과 대제국의 행정 업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93년에 사분통치(司分統治, Tetrarch)를 시작했다. 두 명의 정황제(正皇帝, Augustus)는 밑에 부황제(副皇帝, Caesar)를 두었다. 부황제들은 황제의 근위대장 출신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를,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를 부황제로 선택했다. 그리고 다시 두 황제는 결속력을 한층 더 다지기 위해서 부황제들을 입양했다. 이것은 두 명의 황제들이 전임자들과 달리 암살당하지 않고 온전하게 황위에서 물러나는 데 필요한 안전장치였다. 부황제들은 부인들과 이혼하고 황녀들과 다시 결혼해서 사위가 되어야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기대한 것처럼 네 명의 황제들은 로마제국의 드림팀이 되었다. 그들은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했고, 295년부터 305년 사이에 로마제국은 동방에서 강국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아프리카에서는 이집트의 반란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을 강화시켰다. 그 중심에는 물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있었다. 그는 제국을 위해서 재정을 확보하고, 제국을 관통하는 도로를 닦았고, 화려한 건물들을 건축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시대의 흐름에 정통한 개혁자였지만 종교만큼은 달랐다. 하루는, 황제가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제물에 문제가 생겨서 의식을 치르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부황제 갈레리우스의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 책임을 모두 그리스도인의 탓으로 돌렸다. 황제는 로마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공직에서 해고했다. 일차 정화 조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제는 교회의 기물을 약탈하고 파괴하도록 지시했다. 303년 2월 23일의 일이었다. 일차 정화 때 해고되지 않은 군인과 관리들이 결국 자리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피를 부르는 박해는 없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궁에 화재가 두 차례 발생했다. 두 황제의 목숨이 위협받는 지경이 되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신하를 추궁했고, 갈레리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을 의심했다. 두 번째 화재는 사실 갈레리우스가 벌인 자작극이었으나 네로 시대처럼 그리스도인들이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갈레리우스에게 설득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아내와 딸이 그리스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해서 엄격한 태도를 취했다.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목숨을 잃었다. 그리스도인들이 거쳐야 할 마지막 박해의 관문이었다.
밀비아누스 다리의 전투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나란히 황제의 자리에서 은퇴하자 갈레리우스(Galerius, 293~311 재위)와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293~306 재위)가 정황제가 되었다. 갈레리우스는 성격이 강하고 무자비했다. 그는 이전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설득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게 만들었고, 303년부터 304년까지 직접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했다. 콘스탄티우스가 나이가 많고 선임이었지만, 갈레리우스는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다. 갈레리우스는 동료 황제의 영토까지 넘봤다. 때문에 그는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인질로 잡았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콘스탄티우스가 초급장교 시절에 소아시아의 비티니아에서 술집 하녀 겸 마구간지기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었다.
정치적으로 수완이 좋은 콘스탄티우스는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눈에 띄어 승진을 거듭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는 공동 황제들의 요구 때문에 아들을 낳아준 여인을 버리고 황녀를 아내로 맞았다. 나중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콘스탄티누스는 친모를 잊지 않고 황궁으로 불러들였는데, 그녀가 헬레나(Helena, 248~330)였다.
마침내 콘스탄티누스가 갈레리우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브리타니아에서 토착민과 전쟁을 준비하던 콘스탄티우스가 갈레리우스에게 자신의 아들을 전쟁에 파견해달라고 전갈을 보내온 것이다. 갈레리우스로서는 요구를 물리칠만한 마땅한 구실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와 재회했다. 305년에 콘스탄티우스가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자 군부가 곧장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갈레리우스는 군부의 요청대로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인정했다.
하지만 이미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황제의 자리에서 동반 은퇴한 막시미아누스는 의견이 달랐다. 그는 자신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콘스탄티누스보다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막센티우스는 서방 부황제 세베루스를 몰아냄으로써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했다. 갈레리우스는 자신이 임명한 세베루스를 폐위시킨 막센티우스를 황제로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월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회복할 수 없는 병을 얻어서 자리를 깔고 누운 갈레리우스는 자신이 구상한 박해 프로그램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로마 신들을 믿지 않고 여전히 그리스도를 따랐다. 311년, 갈레리우스는 숨을 거두면서 기독교를 믿어도 좋다는 칙령을 내렸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아야 한다”는 궁색한 조건이 붙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꿈
사분통치가 막을 내리자 콘스탄티누스는 권력을 독점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런데 그 원인을 막센티우스가 직접 제공했다. 그는 로마에 있던 콘스탄티누스의 조각상을 파괴해버렸다. 이것은 선전포고와 다름이 없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서 진군했다. 많은 병력을 거느린 막센티우스는 로마의 울타리 안에서는 거의 무적이었지만, 시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욕심이 많고 부도덕한 폭군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막센티우스가 만일 콘스탄티누스와 맞서려고 군대를 이끌고 로마의 성문을 나서지 않았다면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켰을 것이다.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에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고 밀비아누스 다리를 파괴했다. 그리고 혹시 있을지 모를 퇴각을 예상해서 여러 척의 배를 엮어서 다리를 만들었다. 강의 북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수적으로 열세였던 콘스탄티누스의 기병대와 보병대가 막센티우스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결국 한계를 느낀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배다리를 통해서 로마로 도망치려고 했다. 막센티우스가 강을 건너는 순간 묶여 있던 배들이 갑자기 깨졌다. 막센티우스를 비롯한 수백 명의 병사들이 테베레강에서 익사했다.
로마 시민들은 콘스탄티누스가 생소한 상징이 그려진 깃발을 앞세우고 입성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콘스탄티누스는 과거 황제들처럼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있는 신전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전통을 중시하는 원로원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밀비아누스 다리에서 전투가 진행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사실이 그랬다. 전투를 벌이기 하루 전에 콘스탄티누스는 기도를 올렸다. 모르긴 해도 평소처럼 태양신에게 기도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태양을 바라보자 십자가가 보였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왔다. “이 표적으로 승리를 얻으리라”(In hoc signo vinces). 또 다른 전설은 꿈속에서 그리스도가 콘스탄티누스의 방패에 기독교의 상징을 그려 넣도록 지시했다고 전한다. 문양은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첫 두 글자인 XP처럼 생겼다.
아무튼 다음 날 아침 콘스탄티누스의 병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자신들의 방패에 이 글자들을 그려야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개인 전투 깃발에도 십자가를 그렸다. 그는 자신의 종교체험을 통해서 승리를 확신했고, 누가 보더라도 불리한 전세를 역전시켰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역사상 최초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속의 권력 다툼에 연루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