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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창세기 4:1-8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TZzXkweim8c
로마 시대에 안드로 크루스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안드로는 큰 실수를 저질러 주인에게 얻어맞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주인은 그를 실컷 두들겨 패고도 화가 풀리지 않아서 그를 죽여 버리겠다며 벼르고 있었습니다. 겁을 먹은 안드로는 살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막상 도망 나와 보니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법에 의하면 도망친 노예가 잡히면 원형극장에 들어가 굶주린 사자와 싸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안드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인적이 드문 야산에 숨었습니다. 그는 산 속에서 굵고 큰 가시에 찔려 신음하는 사자를 발견했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 가시를 뽑아주고 사자의 상처를 싸매 주었습니다. 그 일로 사자와 친해져 그는 사자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로마 군병들에게 붙잡혀서 원형극장에 서게 되어 죽음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문이 열리고 굶주린 사자가 쏜살같이 그에게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드로는 기쁜 환성을 지르며 달려가 사자를 다정스럽게 포옹하였습니다. 그 사자는 안드로가 숲속에서 만나 함께 살던 사자였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워했고 그가 사자와 친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안드로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자 그의 말에 감동을 받은 로마 시민들은 그에게 자유를 허락해 달라고 일제히 외쳤습니다. 마침내 안드로는 노예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어 사자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야생의 사나운 짐승도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다 형용 못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셔서 화목제로 삼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사랑입니다. 측량 못할 영원한 사랑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예배자가 됩니다.
사람은 예배로 가는 길이 달라집니다. 본문에 보면 두 사람의 제사가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 가인과 아벨의 제사입니다. 이 두 사람은 제사로 가는 길이 달라졌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가인은 몹시 분했고 안색이 안 좋았습니다. 가인은 아벨에 대하여 살인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생각을 아시고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시며 가인의 제사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열납되지 않은 것을 지적하셨고, 그가 분을 품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자신의 감정과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들에서 아벨을 쳐서 죽였습니다. ‘쳐 죽였다’는 뜻은 세게 쳐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실수가 아니라 계획된 살인이었습니다. 가인은 예배를 잘못드려서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가는 길은 제사로 달라진 것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을 예배의 시초로 봅니다. 가인과 아벨은 둘 다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항상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예배만 받으십니다. 가짜 예배는 받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예배를 기다리십니다. 아니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요 4:23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우리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를 위한 이곳”에 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예배자를 찾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노래한 곡입니다. 이런 가사입니다. “주를 위한 이곳에 예배하는 자들 중에/ 그가 찾는 이 없어 주님께서 슬퍼하시네” 저는 주를 위한 이곳에 주님이 찾는 이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적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그가 찾는 이 없어”를 “그가 찾는 이 적어“로 바꿔서 부릅니다. 사람은 예배로 인하여 가는 길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간절히 찾으십니다.
어느 시골에 명절이 되어도 잘 내려오지 않은 자식들 때문에 부모님이 화가 났습니다. ‘다른 자식들은 내려오는 데, 우리 자식들만 안내려오다니’ 화가 난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야, 난 네 어머니와 이혼하기로 했다. 니 엄마하고는 더 이상 못산다.” 아들이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이혼이라니요.” 아들은 기가 막혔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하다. 게다가 너희도 장가가고 시집갔으니 우리가 더 이상 같이 살 이유가 없다.” 아들이 여동생에게 전화하자 딸도 깜짝 놀랐습니다. 딸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빠, 무조건 이혼은 안돼요. 거기 꼼짝 말고 계세요. 오빠랑 같이 내려갈테니” 아버지가 전화를 끊으며 아내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여보, 성공했어. 애들이 금방 내려온대”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을 표현한 유머입니다. 진정한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더 간절하실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인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자기를 드리는 예배입니다.
본문 4,5을 보겠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보다 먼저 아벨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시기 전에 먼저 가인을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아벨의 제물이 열납 된 것은 아벨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가인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자의 제물보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이사야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드리는 무수한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많은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오지만 하나님은 그것들을 싫어하시고 그것이 오히려 무거운 짐이셨습니다. 말라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드리는 제사를 헛된 제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누가 성전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예배의 근본적인 문제는 예물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나를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버지가 예배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오늘 설교는 참 따분하고 길고, 성가대 찬양은 그게 뭐야? 아, 오늘 은혜가 없었어.” 이 말을 듣던 고등학생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헌금시간에 주섬주섬 호주머니 뒤져서 겨우 천 원짜리 한 장 헌금하시고 예배에 대하여 뭘 기대하세요?” 아들이 썩 잘한 말은 아니지만 제대로 예배드리지 못한 아버지에게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예배자들의 잘못 중에 하나는 예배를 드리면서 지나치게 받기만 원합니다. 예배는 받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말씀을 받고, 생명을 받고, 응답을 받고, 치유를 받고, 축복을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초점은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데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본다. 예배를 받는다고도 말하지 않고,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시간과 정성과 마음을 드리고, 찬양과 기도와 헌금을 드립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잘하면 받는 것도 잘됩니다. 아벨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잘못하면 하나님께 받는 것도 안 됩니다. 가인이 그랬습니다.
고인이 되신 강윤정권사님이 이야기입니다. 강권사님은 가양동에서 오셨습니다. 교회 오는데 최소 1시간 40분, 버스타고 지하철타고 마천역에서 걸어서 교회까지 오셨습니다. 건강할 때는 일주일에 4,5번씩 예배드리고 중보기도를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당뇨가 있으신 분이 그 먼 길을 거의 지각하는 일 없이 오셨습니다. 저는 그것만도 이미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에 늦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감사합니다. 예배에 안 오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오는 것이 낫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예배에 늦는 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더군요. “여러분이 사업을 하는 데 사업상 이권이 걸려 있는 만남이라면 늦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친구와 영화 보러 간다면 늦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해외여행가기 위해 공항에 간다면 늦겠습니까?”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다는 의미는 자신의 시간도 포함 됩니다. 미리 오셔서 자신의 영혼과 예배와 목사를 위해서 기도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도로 준비한 예배는 그렇지 않은 예배보다 훨씬 좋은 예배가 될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드립시다.
오래 전에 스코틀랜드의 셀콕에서 전도집회가 열렸으나 사람들이 몇 명 참석하지도 않았고, 아무도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있는데, 마지막 날 헌금시간에 어떤 한 소년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가난하기 때문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 대신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저의 몸을 드리겠습니다. 저의 몸을 받아 주옵소서” 그 아이는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저는 너무 가난하여 헌금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헌금 대신 저의 몸을 드립니다. 제 인생을 주님께 바칩니다.” 사람들은 그냥 어린 아이가 ‘한 번 해본 소리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린 소년의 믿음과 중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러서 이 소년은 의과대학에 진학해서 의사가 되었고, 자신의 고백대로 아프리카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그가 바로 아프리카의 선교의 아버지 리빙스턴입니다. 그는 죽어가는 아프리카를 살리는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배를 습관적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십시오.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드고, 찬양과 기도도 드립시오. 진지하게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립시다.
2. 피가 있는 예배입니다.
가인은 곡식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드렸습니다. 제사에서 제물을 드리는 것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유화’(宥和, propitiation)라고 부릅니다.
야곱과 에서 사이에서도 유화가 있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가 받을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했기에 야곱은 밧다아람에 있는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갔습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아내 넷씩과 자녀 열한 명을 얻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20년이 지났지만 형의 노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생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사를 거느리고 야곱이 있는 곳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형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려고 자기의 양떼와 소떼 중에서 일부를 먼저 앞으로 보냈습니다. 잠 21:14입니다.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지혜로운 야곱은 선물이 상대의 노를 쉬게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받고 형의 진노가 누그러지길 바랬던 것입니다. 야곱이 쓴 작전이 바로 유화작전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양심 속에 죄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에 대해서 제물 때문이라는 데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구약의 제사 중에는 곡물의 가루를 드리는 소제(素祭)라는 것도 있었기 때문에 꼭 피의 유무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결정적인 이유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의미지 속죄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속죄를 위해서는 반드시 피가 있어야 합니다. 히 9:22입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습니다. 죄사함을 위해서는 반드시 피가 있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짐승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줍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한 후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오셔서 짐승을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짐승이 피를 흘리므로 수치를 가릴 수 있었습니다. 이 짐승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그 피는 주님의 보혈을 의미하고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입게 되는 의의 옷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에 출애굽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주지 않는 애굽의 장자를 치셨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애굽 전역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모든 가정의 장자를 치셨습니다. 그때 보호 받은 장자들이 있습니다.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른 집 안에 있던 장자들은 죽음을 면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을 상징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피가 없는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시고 피가 있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해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격을 얻게 됨을 보여주는 그림자인 것입니다.
유명한 인도의 영성가 선다싱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고 있었습니다. 마침 산중턱에 산불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불을 끄고 있었습니다. 선다싱이 그곳으로 가까이 가다 나무 위에 있는 어린 새들의 둥지를 보았습니다. 새 둥지 위에는 어미 새가 어쩔 줄 모르고 슬피 울며 빙빙 날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새들의 둥지에도 불이 옮겨 붙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어미 새가 단념하고 날아가 버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날아가 버릴 줄 알았던 그 어미 새는 새끼들을 날개로 감싸고서 그 불을 막다가 불에 타 죽었습니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너무나 안타까워했습니다. 선다싱은 이 어미 새로부터 큰 깨달음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말할 수 없이 크고 깊어서,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내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한 마리의 어미 새가 자기의 새끼들을 사랑하여 불 가운데 그 몸을 던지듯, 죄로 말미암아 죽어 가는 인류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그 몸을 저주의 십자가에 던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은총의 날개로 우리를 덮어주십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어릴 때 할머니하고 살았습니다. 추운 겨울날 어린 조용기가 이브자리를 발로 차고 배를 내놓고 자면 할머니가 자다가 몇 번이나 일어나서 이브자리를 목까지 덮어 주면서 “야 이놈 자식아 배탈 나겠다. 왜 자꾸 이불을 차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배를 덮어 주셨답니다. 그래서 할머니를 기억하면 겨울에도 이불을 덮어 주시고 여름에도 홑이불로 배를 덮어 주시며 배탈난다고 걱정하던 할머니가 기억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덮어 주시면서 “언제나 보혈 아래 있어라. 보혈을 떠나지 마라라. 보혈 떠나면 배탈 난다.” 그러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날개와 보혈로, 은혜와 사랑으로 덮어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피로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구약 시대처럼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릴 필요가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셨고 그 피로 우리를 덮기 때문입니다. 예배자에게는 주님의 피에 대한 믿음, 보혈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3. 믿음의 예배입니다.
히 11:4에 보면 가인과 아벨의 예배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의 예배가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가인의 예배가 하나님께 인정되지 못한 것은 가인이 믿음이 없는 형식적인 에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잡아서 드린 것은 그가 목자엿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믿었기 때문에 양의 첫 새끼로 에배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복음의 계시를 주셨습니다. 창 3:15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절망 중에 있던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실 메시야의 예언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원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원복음으로 계시를 주신 것처럼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에게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복음을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 갈 3:8입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의 계시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계시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저는 아벨에게도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히 11:13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여기서 이 사람들은 구약의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믿음은 대상이 있는데 그들이 믿었던 믿음의 대상은 장차오실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약속이 현실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보고 환영했던 것입니다.
정호승 시인이 쓴 시중에 “어느 벽보판 앞에서”란 시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가 길을 지나가다가 현상수배범의 얼굴이 나온 전단지를 보고 쓴 시입니다. “현상수배범 전단지 사진 속에/내 얼굴이 있었다./ 안경을 끼고 입꼬리가 축 처진 게/ 영락없이 내 얼굴이었다./ 내가 무슨 대죄를 지어/ 나도 모르게 수배되고 있는지 몰라/ 벽보판 앞을 평생을 서성이다가/ 마침내 알았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죄/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린 죄” 저는 여기서 정호승 시인이 말하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넓게 모든 이웃을 말하는지, 아니면 아내나 특정한 어떤 인물을 말하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이 시를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해석해 봅니다. 믿음은 사랑입니다. 주님을 믿으면 주님을 소망하고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 13:13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적으로 생각할 때, 이 시의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한 죄,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죄가 가장 큰 죄입니다.
롬 14:23입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이 말씀은 먹고 마시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먹고 마실 때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면 그것도 죄가 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예배하지 않는다면 그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예배는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히 11:6을 보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예배일 수도 있고 기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든지 예배를 하든지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예배했기 때문에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내가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나에게 응답하신다. 반드시 나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다.” 예배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예배하는 우리에게 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상급이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예배합시다.
4. 하나님께 속한 자의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배를 받으신 또 다른 이유는 아벨이 하나님께 속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가인은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마귀에게 속한 자였습니다. 요일 3:12입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마귀에게 속한 자가 하나님께 속한 자처럼 예배한다고 하나님께서 속으실리가 없습니다.
요일 4:3입니다.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예배자가 되려면 가장 먼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전도집회를 할 때 크라이막스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진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에서 토요일마다 실버예배를 드립니다. 실버예배에 나오시는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매주 예배에 오십니다. 그런데도 저는 자주 어르신들이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시킵니다. 왜냐하면 의미 없이 따라하다가 어느 순간에 중심을 드려서 진실하게 따라하시는 분이 나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수십 년 다녀도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닙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입니다. 그런 분이 제가 인도하는 영접기도를 따라하다가 어느 순간에 영적인 스파크가 일어나고 신실한 마음으로 영접기도를 한다면 그 순간 그 영혼은 거듭나는 것이고, 그동안 마귀에게 속해 있었는데 그 순간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윤재목사님이 이스라엘 회당예배에 참석하셔서 은혜를 받으셨답니다. 안식일에 드리는 회당예배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남녀노소, 모두 가족이 함께 드립니다. 둘째, 성경읽기와 기도를 중심으로 2시간 이상 드립니다. 셋째, 그 시간동안 내내 서서 예배드립니다. 왜 의자에 앉아서 드리지 서서 드릴까요? 의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차마 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서서 드리는 예배를 “아미다” 예배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아미다”는 “선다”는 뜻입니다. 서서 드리는 예배의 원형은 옛날 성전의 지성소입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에서 예배할 때 먼저 이방인의 뜰을 거쳐 성전구내에 들어가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을 거쳐 지성소로 나아갑니다. 문을 여러 개 거쳐 하나님이 임재하는 지성소로 나아갑니다. 그 성소에 들어가면 빽빽한 구름과 연기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서 감히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얼굴을 들 수 없는 데 어떻게 앉습니까? 그래서 서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몸만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일어섭니다. 죄인인 내가 감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들어오다니, 그 은혜가 너무 크고 황송해서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미다’, 섭니다. 그리고 찬양합니다. “왕 되신 주께 감사하세/ 그 사랑 영원하리라/ 모든 것 위에 뛰어 나신 주/ 그 사랑 영원하리라/ 찬양 찬양"
이렇게 자격 없는 자를 부르셔서 왕 되신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하신 은혜를 입으면 어떻게 예배할까요? 이윤재 목사님은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2005년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에서 한 축사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셨습니다. “졸업생 여러분, 마지막으로 제가 제 마음에 항상 두는 두 마디 말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픈 채로 머무십시오. 그리고 어리석은 자로 사십시오. 배고파야 채우고 어리석어야 겸손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Stay hungry! 하나님 앞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서십시오. Stay foolish! 하나님 앞에 어리석고 겸손한 자로 서십시오. 간절히, 간절히... 주님이 채우실 것입니다.
오늘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1. 자기를 드리는 예배입니다. 2. 피가 있는 예배입니다. 3. 믿음의 예배입니다. 4. 하나님께 속한 자의 예배입니다.